• 최종편집 2024-04-24(수)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전문이다.
 
1942년 저 유명한 “참회록”을 읊조리고는 현애탄을 넘은 윤동주의 일본류학시절의 첫번째 작품이다.
 
편편마다 훌륭해 “옥석”을 가리기 힘든 윤동주의 시 중에서 많이 읽히지 않은 시, 하지만 양띠해를 맞아 특별히 이 시를 뽑아 읊어 봤다.
 
시를 보면, 화자는 하루 종일 황혼이 짙어지도록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에서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인 “흰 그림자”는 즉 시인을 괴롭게 만든 수많은 고민이며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은 어두운 곳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상황을 은유하는듯 하다.
 
화자는 마음 깊숙이 이런 고민을 갈무리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 한다.
 
드디여 시인은 “하루종일 시들도록 귀”를 기울인 끝에 이제 어리석고 늦게나마 모든것을 깨닫고 오래 마음 깊은속에 괴로워하던 해결할수 없는 고민들을 하나, 둘 버리기 시작한다.
 
그 동안 연연하면서 사랑하기까지 했던 그 고민들을 돌려보낸 뒤에 “땅거미”를 옮길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의젓하게 풀을 뜯기시작하고있는것이다.
 
2015년 새해는 을미(乙未)년 양의 해다. 새로운 문턱을 넘는 섣달 그믐의 밤에 모두 밝은 꿈을 꾸었기를 바래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 꾼 꿈은 바로 양 꿈이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는데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자리가 요상해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할 것이라고 해몽했다.
 
한자의 “양(羊)”에서 뿔과 꼬리에 해당하는 획을 빼내면 “왕(王)”자만 남게 되니 곧 임금으로 등극할거라는 풀이였다.
 
이로서 양 꿈은 길몽, 양은 상서로움의 상징이 됐다.
 
여기서 상서로움의 상”상(祥)”자를 보면, 왼쪽의 보일“시(示)”자는 원래 “신(神)”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니 신이 양을 만나면서 상서로움을 뜻하는 “상(祥)”이 된것이다. 음(音)으로는 밝은 양(陽)과 같아 더욱 길상의 의미가 있다.
 
아홉 번 굽어진 양의 창자처럼 세상이 복잡해 살아가기 어렵다는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있다. 올해의 수호신 양이 어떤 기운을 몰고 올지는 아직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앞길이 아홉번 굽어진 길이 주어질지라도 양처럼 깊은 생각, 인내로 그 위기를 넘어야 할것이다.
 
그러할진대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양의 이미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빨리달리기에만 급급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계시를 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속에서도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윤동주님의 시를 다시 읊어 보는 을미년의 첫 아침이다.
 
을미년, 푸른 풀밭의 양떼처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김혁-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소설가, 언론인 /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연구생 수료.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연변작가협회 이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 "노아의 방주"로 등단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혁 칼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