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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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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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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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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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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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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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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견문 시리즈 (3) 2년 730여일, 선원생활의 그 나날들
    ■ 김철균 한국사람들은배를 타는 사람들을 두고 거의 한결같이 “배놈”이라고 부른다. 육지의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호화여객선이든작업선이든 여하튼 배를 1년 간이라도 타본 사람이들은 자기들이 그 무슨 으시댈만한 “배님”이 아니라아주 천한 “배놈”이란걸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놈의세계도 다층차인 것만은 사실이다. 마구루배라는 “참치선”, “채낚이선”과 “트롤선” 등 작업선을 타는 선원들의 노동강도나 환경조건을보면 하늘아래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나 싶게 그들의 생활은 힘들고 지겹고 짜증난다. 그러나 산뜻하게정복을 차려입고 각 부서에 따라 자기의 직책만 수행하는 유람선이나 상선의 근무원들을 놓고 보면 누구나 다 부러워할 정도로 턱이 높고 신사다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돈에 얽매여 부모처자를 떠나서 생활해야만 하는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바다의 짠물과 해풍에 푹 절어서 육지에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기구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작업선의 잡부들이나 여객선의 1등 항해사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럼 “배놈”의 세계란 과연 어떠한 것일가? “태풍호”에 있던 나날 우리가 제일먼저 승선한 선박은 한국 선일해운주식회사의 타카뽀트라고 부르는 견인선이었다.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서 구소련선박 “프리오카츄샤”호에 편승하여 포클랜드군도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91년 3월 30일 새벽녘이었다. 그러니깐우리가 3월 18일에 연길을 떠났으니 꼭 13일만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갑자기 소련배의 엔징이 툭 꺼지더니 미구하여 갑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난리가났는나 하여 급기야 갑판으로 뛰쳐 나갔더니 소련배는 이미 파도가 잔잔한 어떤 해협에 들어와 있었고 수십척을 헤아리는 대중형 선박들이 앵카(닻)을 내리우고는 사처에 정박해 있었다. 이 때 누군가 “포클랜드에 다 왔다!”하고 소리질렀다. 순간 나의 가슴은 뭉클해났다. “드디어 올 곳으로 왔으니 2년이란 고역이 곧바로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착잡해났다. 그 때 수많은큰 선박들이 정박해있는 가운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다른 배와 자주 접선하는 작은 배 한척이 보이었는데 소련배에 함께 올랐던 한국선원들의말에 의하면 그 배는 1000톤도 될가 말가하다고 했다. 헌데 그 보잘것 없는 배에 우리가 오를 줄이야 뉘알았으랴. 그 배의 네임(이름)이 바로 “태풍호”였다. 그배는 위낙 부두에서 수만톤씩이나 되는 큰 선박들을 밀어주는데 쓰이게 만들어졌는데 한국 선일해운에서는 그 배를 개작하여 큰 선박들이 실어오는 물, 기름과 부식 그리고 탁송품같은 것을 받아서는 다른 어선에 공급하는데 써먹었다.그런대로 돈벌이는 꽤나 잘 된다고 했다. “배놈”의생활이 고되다더니 그다지도 고될 줄은 우리는 “태풍호”에 승선해서야 절감했다. 그 배의 시스템은 하루 24시간 줄곧 스템바이(대기상태)였는데일단 접선신호가 있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 나가야 하고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전임선장 강××가 있을 때는 배접선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 없으니 (접선시 선수와 선미에 7~8명이면 충분했는데 그 때 태풍호에는 중국선원과 한국선원 도합 20명도넘었음) A,B조로 나뉘여 6시간씩 교대하여 작업하라고 했기에그닥 고되지는 않았다. 헌데 후임 선장 김××가 부임되어 오면서부터 배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무작정그 것을 다시 고쳐 다 함께 대기상태에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접선작업을 할라치면 무리지어 나갔지만그저 서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반면에 한시간도 시름놓고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골치거리는 연이어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먼저 목욕하기가 힘든 그 것이었다. “태풍호”에는 선장방에 딸린 욕실외 욕실이라고는 하나뿐이었는데 20여명이 작업하고 들어오면 욕실앞은 줄을 서야 했다. 거기에 한국선원들이먼저 목욕을 하고 나면 또 접선신호가 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갑판장은 우리가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다면서밥을 먹다가도 수절을 팽개치었고 우리가 들어있는 침실에도 냄새가 난다면서 눈알을 굴려댔다. 우리라고왜 매일 목욕하고 옷을 세탁해 입기가 싫겠는가. 헌데 환경이 도무지 그 것을 허락지 않는데는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거기에 목욕을 하지 않으면 중국되놈, 돼지같은놈들, 하다가도 또한 물을 많이 쓴다고 자주 욕실에 자물통을 잠궈놓는 것도 갑판장이었다. 하여 우리와 갑판장사이에는 이런 사소한 일로 하여 자주 언쟁이 벌어졌다. 어느날 배에서는 작업이 뜸한 틈을 타서 술파티가 있었다. 술이 몇순배돌아 모두들 얼근히 되자 우리 연변선원들 중에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양일선씨가 갑판장과 걸고 드는 것이었다. “당신들은일본사람들한테서 과학적 관리와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는 것부터 배웠다구요.” “너, 이 자식 뭘보고 하는 소리야?” “그래 50년전에 일본 쪽바리들이 당신들을 대하던 식으로 지금 당신들이 우릴 그렇게 천대하는 것이 아닌가요?!” “너 이놈, 뭐 어쩌고 어째? 어디라고 감히 말대꾸질이냐?” 하며 갑판장이 양일선씨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던 찰나, 갑자기 배접선신호가울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밤 자정이 퍽 지난 뒤 갑자기 울리는 비상벨소리에 우리는 또 접선하는가 해서 뎃기(갑판)로 뛰쳐 나왔다. 허나 접선은 아니고 갑판의 희미한 등불아래에는 갑판장이노기등등해 서있었다. “지난 밤술 처먹은 놈들 몽땅 나왔!” 이에 우리들태반이 모두 술을 마신지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는 멋을 모르고 나온 한국선원 박영재씨도 끼어들었다. “야 이 놈, 너도 중국 되놈이냐? 어서 침실로 들어가지 못할까?” 이어 갑판장은 양일선씨를 불러 내고는 한바탕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야, 너 이 개새끼야! 예가 어딘줄 알고 불평 불만이야? 여기가 너희들 중국인줄 아느냐? 한국선박에서 한국사람의 술 처먹고왜 한국사람과 술주정 부리냐 말이야?” 이렇게 한동안일장훈계를 하고 난 갑판장은 우리 모두한테 두시간동안 제자리에 서있게 하는 벌을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어이없는 일인가?! 설사 양일선씨가 한 말이 예의가 없고 과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일선씨혼자서 당해야 할 일이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 모두가 이런 기합을 당해야 하다니. 남극이 바라보이는포클랜드는 우리 연변과는 달리 해마다 이 곳의 봄일 때면 그곳은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겨울의 영하 20도를 오르 내리는 맵짠 날씨에 그것도 모두가 침대에서 겉옷만 입고 나온 몸으로 두시간동안이나기합을 당할라니 우리는 모두 동태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선원 김대학씨는 어선에 비하면 그러한 벌은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어선에서는 중국선원들이 꾀를 부리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영하 30도 되는 어창에 한두시간씩 가두어 둔다고 하니까. 그 일이 있은후부터우리는 쩍하면 그와 비슷한 벌을 받군 하였다. 갑판장 먼저 밥술을 들어도 그렇고 그한테 “님”자를 붙이지않아도 그랬으며 한국사람을 조선사람이라 불러도 그랬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곪으면 터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소련선박에서어선으로부터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게 되었는데 적사일군이 모자라 우리가 거기에 가서 돈벌이 삼아 작업하게 되었다. 헌데소련배에는 침실이 모자라 부득불 통로바닥에서 자야 한다기에 우리는 덮는 모포와 침대에 까는 해면자리를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짐을 싸들고 소련선박으로 건너가려 할 때 술에 얼근히 취한 갑판장이 그것을 보더니 노발대발하는것이었다. “야, 이놈 개새끼들아! 좋은 자기의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왜 허락도 없이그걸 함부로 갖고 가는거야? 당장 방에 갔다두고 꺼져라.” 우리는 억이막혔다. 본선에서도 자기가 깔고 덮고 하던 것인데 그런 것마저 허락받아야 한단 말인가? 허나 빌붙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허락없이 가져 가는 건 잘못 되었지만 소련배에 가서 어떻게 맨봉당에서 자겠느냐, 좀 봐달라 하고 사정하였다. 특히 그 때 나는 고질이었던 치질이도졌기에 더구나 찬 곳에서 잘 수가 없었다. 그랬건만 갑판장은 막무가내였다. 참는다고 봐줄 갑판장이 아니었다. 또한 잘못도 없이 계속 굽어들수도 없었다. 나중에 꺾어지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시비는 캐고 봐야 했다. 나는 튕길듯이 후닥닥 일어나서는 선장방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뭐돈에 미쳐서 가는 줄 압니까?! 선박에서 배치하니 가며 또한 그 벌어오는 돈도 우리만이 가지는 것이아니고 전체 선원들이 똑같이 나누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최저한도로 잠자리 조건만은 보장해야 할 것이아닙니까? 그래 이것도 같은 동포요, 피줄이요 하며 너스레를떨던 한국사람들의 양심입니까?” 이렇게 내가이치에 맞게 따지고 들자 선장도 뜻밖인 모양이었다. “보숭, 보숭(갑판장), 방송을 듣는 즉시 선장방에 올라와 보이소.” 헌데 선장의호출을 받고 올라온 갑판장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사코 나눕는 것이었다. “김군, 어찌된 영문이야?” 선장은 나를무섭게 쏘아 보았다. 이 때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기관장이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일어나며 나를두둔해 주는 것이었다. “보숭, 당신 나살이나 처먹었다는게 이렇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어? 당신그러는걸 나도 봤단 말이야. 그래 이 교포친구가 터무니없이 당신을 헐뜯는다고 생각해? 당신 어쩜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여.” 기관장의 그 말 한마디에시비는 대번에 갈라졌다. 선장은 진짜 노한 것 같았다. “회사본부에서는교포선원이라 해서 절대 차별시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어. 그런 회사정신이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엉망으로 되고 있단 말이야.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솔선수범하이소. 알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선장앞에서는쩔쩔매여 급신거리는 갑판장이었다. 기관장, “태풍호”같은 분위기가 험악한 선박에도 좋은 사람은 있었다. 그는이전에도 우리와 가끔씩 팔씨름도 하고 우스개도 곧 잘 했다. 특히 우리의 봉급이 25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자 회사에서 너무한다, 너희들이 진짜욕본다, 너희들이 영국배나 스페인배로 도망가라. 거긴 일도힘들지 않고 급여도 더 많은가 하면 인간사이의 차별도 심하지 않다. 한국사람들의 본질을 몰라서 한국선박에다 올랐느냐. 그것이 바로 잘못됐다며 늘 우리한테 깨우쳐주군 했다. 나는그 말이 어쩐지 나쁘게는 들리지는 아니했다. 좋은 사람은 기관장 한분만이 아니였다. 남몰래 사과 한알이라도 우리들 손에 쥐여주는 주방장 김진해씨, 위험한일에는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가 나서는 나어린 제1갑판원 설복진씨 또한 소주 한병이라도 생기면 언제나나부터 찾군 하던 뚱보총각 박영재군, 참 마음씨만은 비단같은 친구였지. 기관장한테서들을라니 갑판장 역시 그닥 독한 양반은 아니라 했다. 듣는바에 의하면 한국선박은 사관선원과 부원선원으로나누는데 해양대학같은 전업을 졸업한 선원은 사관에 속하고 그런 학력이 없이 배를 탄 선원은 부원에 속했다. 그렇다면갑판장과 조기장, 주방장은 부원선원중에서 경력이 제일 긴 선원들로 그 직에 종사하는바 나이는 많지만 (선장보다도 나많은 이들이 많음) 급별과 봉급은 사관의 3항사나 3기사와 같기에 이런 이들의 불평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쩍하면 부하들과 역정을 내군 했는데 “태풍호” 갑판장도 그런 범주에 속했다. 또한 갑판장이 우리 중국선원들과 더욱 호통을 치는데는 그럴만한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것인즉 갑판장의부친은 6.25 당시 전라도 어느 경찰서의 경찰관이었는데 국군과 연합하여 남로당 빨치산을 토벌할시 그들의기습을 당하는 가운데서 빨치산의 날창에 찍혀 죽었다고 한다. 하여 갑판장은 어릴 적부터 모친한테서 반공선전을들을대로 들은지라 공산당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한을 우리한테서풀어서야 될말인가. 하여 갑판장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나는 나대로 그한테 굽어들지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장이나 기관장을 찾아가 시비를 캐군 하여 도리어 그가 골탕을 먹게 하군했다. 물론 한 인간을 고자질한다는 건 그다지 광채롭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약자가 살고 버티려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겨룸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헌데 선일해운에서두번째로 큰 선박이라는 “코리안스타(KORAN STAR”호가 포클랜드해상에 들어오자 늘 대바른 소리를잘하던 내가 선참으로 그 배에 추천받아 승선할줄이야 뉘 알았으랴. “코리안스타”호와 그 사람들 “태풍호”에서배척받고 추방당해 다른 배로 전선한줄로만 알았던 것인데 그 “코리안스타”호가 그토록 멋지고 그 곳의 사람들 또한 그다지도 친절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하였다. 그럼 갑판장의눈밖에 난 내가 어찌하여 제일 먼저 팔리여 그 멋진 선박에 승선하게 되였을까? 알고 보니 누가 어느배에 팔려 승선하는가는 근본 “태풍호”의 갑판장한테는 권리가 없었다. 갑판장이 다 뭔데 그런 권리까지다 있담. 순간 우리 일행중의 어떤 이들이 좋은 배에 팔리려고 갑판장한테 코밑치성을 하던 일들이 생각나(한 친구는 나의 웅담분까지 훔쳐서 갑판장한테 알랑방구를 먹였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상은 이러이러했다. 이 때 “태풍호”와“코리안스타”호가 자주 접선하면서 물건을 주고 받는 사이와 우리가 “코리안스타”호에 가서 전재(转载)작업을 하는 동안에“코리안스타”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몰래 우리 일행의 일거일동을 지켜봤는데 진작 누구를 받고 쓰는가 하는 의논까지 있은 모양이었다. 하다면 신장 162센치미터에 불과하고 체중도 55킬로그람 남짓한 내가 어떻게 그들의 눈에 들었을까? 듣는바에 의하면그때 “코리안스타”호에는 싸롱뽀이라고 일컫는 선원자리가 모자랐는데 직책은 주방장의 일을 거들어주는 외에도 선장,기관장의 방청소, 세탁 등을 맡아하는 것이었다. 하기에팔힘이 세고 우람진 사람보다 예의 바르고 깨끗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적중했는데 거기에 내가 선정됐던 것이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배도 현대화한 신조선이었거니와 우선 그 곳의 사람들이 맘에 들었으며 특히 선장이 더욱 좋았다. 한번은 선장인 정유식씨와나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여태껏 우리는공산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눈도 퉁방울처럼 생기고 웃을줄도 모르며 싸움질만 일삼는 도깨비같이 생겼다고 여겨왔거든. 헌데 자네들을 보니까 군들도 역시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어. 참.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무섭단 말이야.” “하긴 그렀습니다. 저희들도 이전에는 썩고 병든 남조선이요. 미제국주의가 살판치고 거지들이득실거리는 곳이란 선전을 줄곧 받아 왔거든요. 그러다 최근에야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랬었는가? 그럼 피차일반이었구만. 허허허…” 후에 내가정유식선장한테 “청년생활”, “천지(연변문학 전신)” 등 연변의 간행물에 실린 작품들과 한국 “선데이서울”에 발표된 “우리는 백두산에서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수필을 보여 주었더니 그 때로부터 그는 나를 다른 눈길로 봐주었으며 늘 나한테 관심조로 이렇게 말해주군 했다. “어때 할만해? 힘들고 억울하지? 힘들고 억울하면 진급해야 돼. 우리도 다 자네들처럼 힘들고 억울한 가운데서 크며 일해 오늘의 선장, 기관장으로된거야.” 한편 선장의말에 의하면 부원선원 중에서 예하면 갑판장과 기관장은 갑판원, 기관원으로부터 조타수와 조기원을 거쳐그 직에까지 이르려면 보통 10년 이상 배를 타야 하지만 싸롱뽀이는 잘만 하면 바로 주방장으로(필자는 배타서 6개월만에 주방장으로 됐음) 진급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에 나는 더욱 최선을 다해 근무했는바 그것은결코 선장한테 알랑방구나 먹이려는 아첨은 아니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벌써 분위기가 “태풍호”와는 판판 달랐다. 우선 스켓줄부터 “태풍호”는 주로 남미주의포클랜드 해상에서 맴도는 작은 배였지만 “코리안스타”호는 비정기선이었고 본회사의 간판선박으로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그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배였기에 알짜 자질높은 선원들만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 기관장으로부터 말단선원에 이르기까지 매일 수없이 만나도 “안녕하십니까?”, “수고들 해요”하는 인사말이 정답게 오갔으며 선원들 모두가 그 누구의 지시가 없어도 자기가 맡은 부서와 직책에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선박의 기풍이었다. 한편 선박의입출항시의 일체 작업은 군대규율에 못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장이 직접조타실에서 지휘하군 했는데 선장이 “우현 10도” 혹은 “좌현 20도”하면 제1조타수가 그것을 복창하며 키를 돌렸고 선수(船着)와 선미(船尾)의 선원들도기계를 잡은 이, 바줄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공이 명확했다. 그러다가선장이 일단 “선수, 기계를 돌려 바줄을 감앗!” 하거나“선미, 바줄감기 스톱!”하면 선원들도 그것을 복창하며 긴장하게일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정도 흐르고 엄한 규율도 있는 선박다운 선박의 시스템이었는바 모든 것은 휴식이휴식답지 않고 작업이 작업같지 않은 “태풍”호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참, 같은 회사의 선박을 사이에 이런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다니. 그래서“배놈”인 선원들마저 송출시면 회사나 선박을 되게 고른다고 했다. 그외 생활시스템도사람한테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실마다 선원 한명씩 들어있게 되여 있고 단독 샤와실이 갖춰졌는가하면 사무용테이블, 전화, 스피카, 벽시계 등 시설에 이불도 여름용과 겨울용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에어콘까지 달리어 날씨변화에 따라 더운 공기와찬공기를 엇바꿔 보내 주었으며 비디오관람실도 사관과 부원이 따로따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더 좋은것은 “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었다. 내가 혹간 직책에 따라 고급사관(선장, 기관장, 1항사,1기사 및 통신장)들의 빨래를 하거나 그들의 방을 청소해 줄라치면그들은 매달 두세번씩 10달러 정도의 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깡통맥주나 콜라같은것을몇개씩 안겨 주고야 시름을 놓군 했다. 또한 외출시 택시값은 물론 술값은 언제나 그들이 돌아가며 부담했고혹간 우리가 값을 치를라치면 그들은 매우 언잖아하면서 “자네들이 여기서 남긴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잖아? 남겨갖고 돌아채 아파트 장만한 뒤 장사라도 하면서 잘 살아보라구, 하지만우린 이 돈을 남겨 한국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아니야. 건 그렇다치고 우리가 어떻게 급여가 적은 교포들한테이런 것까지 다 부담시키겠어?!”라고 하며 기어코 제지시키군 했다. 또한선장인 정유식씨는 다른 선박이나 선식회사 및 대리점의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나를 소개하며 “이 친구는 연변에서 알아주는 소설가라구요. 이 친구가 배를 타는건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계를 넓히기 위해서래요”라고 극구 춰주는 것이었다. 그럴적이면한낱 애숭이문학도인 나는 무척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그 말이 그토록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특히 1991년 9월 3일 저녁은나의 “배놈”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저녁이기도 했다. 그날이 바로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39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이전에는 그저 예사롭게 보내던 자치주생일이 그날따라웬일인지 자꾸만 뜻깊어 보이고 떠나왔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그래서 끝내 참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정유식 선장한테 여쭈자 그는 대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반색했다. “우리 한민족동포들이 중국에서까지 민족자치를 실시하며 산다니 참 장하다. 자네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해외에서까지기념하려 하니 선장인 내가 어찌 보고만 있겠어?!” 그러고는 통신장이덕수씨한테 즉시 선원들을 모여놓고 술파티를 열라고 했다. 그날밤, 우리는 선장, 기관장, 통신장등 사람들이 부어주는 위스키를 돌아가며 받아마시고는 밤새껏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참, 어둠이 깔린 수평선우로 흰 물갈기를 날리며 미그러져 가는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 바로 그 일망무제한 바다와 외적선박에서 자치주생일을 쇤는 우리들, 우리가저가락장단을 두드려 대며 연변노래를 부르자 한국선원들은 연변에도 진짜 좋은 노래들이 많다면서 서로 배워달라는것이였다. 하여 우리가 “고향생각”, “동동타령” 등 노래를 그들한테 배워줄수밖에 없었다. 헌데 한수도 아니고 여러수를 어떻게 배워준담? 결국나는 팩시종이에 오선보를 긋고는 거기에 악보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등학교시절에 음악공부를 좀 했다는 1항사 김형훈씨는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그저 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나는 또 내친 김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선원 한명을 순식간에 속사해내여 나의 그림그리는 장끼도 펴보이어 그들 모두의 인기를 모으기도했다. 다른 한편“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 거의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녀자를 억수로 밝히는데는 다른 선박의 선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싶었다. 1991년 5월, “코리안스타”호가 포클랜드해상을 떠날 때 선원들한테는 모두특수작업비(전재비)가1800딸라씩 지급되었는데 이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면 그 돈주머니를 풀어놓을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배가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여 수속 절차를 밟자 선원들은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샤와를 마치고는 정해둔세뇨리따(아가씨)한테 “입항신고”하러 간다며 앞다투어 외출길에나섰다. 그도 그럴것이야명주를 뿌려놓은듯 황홀한 몬테비데오의 잠들수 없는 밤, 거리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고 간드러진 음악이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도처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거리를 누비는 각종 피부를 가진 “배놈”들을 볼 수 있었다. 유흥업으로놓고 말하면 우루과이도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이름난 곳이라 할수 있는 바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선원들이 그 황홀한 세계를 지척에 두고배에서 외롭게 보낼리 만무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그것이 노하여 저울대처럼 되는 판에. 배가 부두에정박해있는 사이, 그런 날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저녁, 본선의 한국선원 노주태씨가 나체쇼를 벌리는 위스키바에서 로시오라는 본지아가씨(몬테비데오에선 섹시하기로 이름난 창녀임)와 흥이 도도하게 술을 마시고있는데갑자기 웬 거친 손이 나타나 아가씨를 잡아일으켰다. 엉겁결에 쳐다보니 대만선원이었다. 이에 노주태씨 역시 술을 얼근히 잘된지라 네가 뭔데 하며 걸고 들었다. 이렇게 서로밀고 닥치고 하는 통에 그 안에 있던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이 다 모여들면서 삽시에 두 파벌로 갈라졌다. 당장무리싸움이 벌어질 그 일촉일발의 시각에 마침 본선의 연변선원인 이용석씨가 조해사업에 나섰다. 알고 본즉그 로시오란 아가씨를 잡아일으킨 대만선원은 포클랜드해상에서 근무하는 채낚이(오징어낚시선)선의 선장이었는데 입항하든 안하든 그 아가씨한테 매달 미화 1000달러씩주기로 하고는 일잔 입항해서 찾아만 오면 그 아가씨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한테 “봉사”해야 한다는 “계약”까지 맺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용석씨는 본선에도 중국선원 몇명 잘 되는데 중국사람들끼리 요만한 오해 때문에 싸우기까지는 할 수는없지 않느냐고 해석해서야 대만선원들도 그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물러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를대만선장한테 양도하는 걸로 일단은 아퀴를 짓고 참 창녀 한명 때문에 무리싸움을 할번하다니 사내대장부로서의 제일 큰 수치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신장 이덕수씨가 정해둔 파트너를제쳐놓고 다른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하마트면 두 아가씨가 맞붙어 싸우게 할번 한 일, 2기사서춘철씨가 아가씨와 함께 호텔침대에까지 올랐지만 술을 억수로 마신데서 일을 성사하지도 못한 채 잠에 곯아떨어진데서 그 아가씨가 온밤 뜬눈으로 새게한 어처구니 없는 일, 하긴 고되고 짜증난 바다생활일에 곁에 녀자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를 몽땅 줄 수있기에 “배놈”들이 여자를 찾게 된다는 건 남자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선원들의말마따나 좆빠지게 번돈을 며칠 사이에 몽땅 창녀들한테 처넣는다는건 한국선원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빠지면 웬간한 기업도 삼킨다는 그 구멍이 어떤 구멍인데… 또한 남미의아가씨건 동남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아가씨건 모두가 한국선원이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결코 한국선원들이 멎져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돈을 잘 쓰니 창녀들의 사냥물로 되었을뿐이다. 또 다른 한편한국선원들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똘똘 뭉쳐 합심이 되는데는 확실히 타국선원들보다 못했다. 싸움이벌어져도 그랬다. 무리싸움만 붙으면 한국사람들중에는 눈치를 보며 살살 피해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그 실례로 작업선과 화물선이 많이 정박하는 몬테비데오에서는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 사이에 충돌이 자주 생겼는데그럴 적마다 한국선원들의 수는 싸움이 지속됨에 따라 줄어드는 반면 대만선원들의 수는 괴상한 휘파람소리만 나면 항구구역의 골목골목에서 뛰쳐나와 점점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선원들도 자기들이 남과 1대 1로 붙으면 그 누구도 남한테 지지 않지만 일단 10대 10일 경우면 틀림없이 패한다고 승인했다. 1대 1과 10대 10의 정반대되는결과, 얼마나 묘한 비유이며 얼마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카나리아립퍼”호는 노가다배? 내가 선원으로근무하면서 제일 마지막 반년가량 탄 배는 역시 선원해운의 “카나리라립퍼(KANALIA LiPo)”호였다. 1992년 10월 23일, “코리안스타”호가네델란드 로톨담항구에서 소련인들한테 팔리자 우리는 2년이란 선박근무계약기한이 차지 않았기에 비행기로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약 40일간 늘어지게 놀다가 그해 12월 12일에 소련선박에 편승, 대서양을 항행하다가 아프리카해상에서 본회사의 “카나리아립퍼”호에 전선(转船)근무하게 됐다. 그 배의 주요한스켓줄은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를 오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 배에 승선하고보니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만든지 30년도 넘는다는 배는 외곽부터 원체 고물같아서 “똥배”란 말을 들을만 한데다 선원들 역시 꾀죄죄한 모양이 마치모두들 마약중독자(실제로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복용자선원도 몇명 있었음)같은 상을 하고 있었다. 하긴 듣는바에 의하면 회사에서도 아프리카부근에서 근무하는 선박에는 선장으로부터 선원에 이르기까지 정선하지 않고 되는대로 보낸다고 말했다. 사람이란악렬한 환경에서 살다 좋은 환경으로 전환되면 몰라도 좋은 환결 즉 “코리안스타”호에서 근무하다가 “카나리아립퍼”호로 바꾸니 기분이 좋을리 만무했다. 한편 선원들모두가 게을렀다. 배가 일단 아프리카 나라들에 입항하여 기름을 받을 때면 편안하기를 기름양과 질을 체크하는당직외 모두가 처박혀 자기가 일쑤였는데 밤낮으로 연속 잠이 올리가 없었다. 그러니 선원들 모두가 먹고마실 궁리만 하였다. 얼마나 좋은 배인가! 하지만 당시의주방장인 나한테는 그것이 도리어 고역으로 되였다. 선원들은 먹고마시며 놀다가 자고 한참 실컷 잔 뒤또 먹고 마시고 해서 좋았겠으나 나만은 그 음식들을 만들어 차려주고 설거지하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다. 그외아프리카란 동네는 선박으로 올라오는 부식품들이 깨끗이 포장되지 못한 건 물론 종자탓인지 모두 개량종이 아니고 토종이어서 예하면 마늘은 쥐잇빨 같았고배추 역시 시래기같은데다 흙모래가 많아 그것을 다듬노라면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 무슨파티까지 많으니 어찌 짜증나지 않겠는가. 특히 배가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이나 위스키포항 및 베네트항 같은곳에 입항할 때면 본선 선원들과 깜둥이 아가씨까지 합쳐 보통 30~40명씩 한곳에 어울려 처먹군 했는데매일밤 개나 칠면조같은 것을 잡아놓고 술파티를 벌이기에 하루 네끼씩 음식을 만들리가 일쑤였으며 나는 늘 잠이 모자라군 했다. 그 지긋지긋한 먹고 마시는 배기풍, 선원들의 부식비를 아껴 올라온부식량에 따라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해야만 하는 내가 그것을 좀 제지시키려 해도 선장부터 그토록 먹고 마시기에 악돌이고서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선장이야기가나왔으니 말이지 그와 함께 근무하는 사이에 그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트들이 많기도 했다. 선박이 일단아프리카로 들어가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중국에서는 흔해빠진 두부라 할 수 있었다. 하여 배가한국선식점이 많은 라스팔마스에 입항해야 두부란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한번은 라스팔마스에서 본선이 두부딱 한박스(두부란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기에)만 올렸는데선장이 지시하기를 그것을 매일 아침 한모씩 썰어 된장국에 넣으라는 것이었다. 참, 나도 필경은 인간인지라 두부가 긴장할수록 왜 고향서 모두부를 덮혀놓고 배갈을 마시던 생각이 그토록 나던지? 그래서 하루는 야밤중에 몰래 모두부 두모를 덮혀놓고는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금방 위스키병을 터쳤는데 문득 선장이 문을 노크(선장은밤중에 속이 촐촐할적마다 주방장인 나를 찾았음)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니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더니 두부를 본 선장은 대뜸 눈알부터 굴리였다. “너, 이 자식들 하긴 잘한다. 선장도 먹지 못하는 두부를 너희들이 처먹어?! 왜 시말서라도 쓰고 싶어그래, 이 놈팽이들!” 하지만 말을그렇게 해도 선장 역시 군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찮아도 진작 선장님을모실 타산이었습니다”, “선장님, 술 한잔 드십시요”하고알랑방구를 먹였더니 그것을 마다할 선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공짜라면 양재물이라도 마실 양반이 그 귀한두부안주를 물리칠손가. 선장은 연해연방 “그 두부 참 맛좋네. 자, 캪틴(선장)앞이라 주저말고어서 드이소”라고 하며 우리가 아까와서 조금씩 뜯어먹는 두부를 숟가락으로 뭉텅뭉텅 떠서는 자기 입에 처넣는 것이었다. 두부 두모는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러자 선장은 또 두부를 덮혀오라고호령했다. “주방장, 아까와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내 이 캪틴이 두부 좀 먹는 걸로 어느간이 큰 놈이 감히 말해.” 선장을 놓고말할라치면 종래로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담배를 피우면 “그 담배한가치 주이소”라고 했다가 상대가 담배곽을 넘기면 “뭐, 한가치면 되는데” 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그것을그채로 호주머니에 넣고가기가 일쑤였다. 아마 1993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본선은 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떠돌아다니다가금방 라스팔마스로 선수를 돌렸는데 당시 선내상황은 부식은 물론 술과 담배마저 거덜이 날 지경이었고 밥은 나이제리아에서 올린 밭벼쌀(알량미)로 겨우 지어먹으며 항행했다.헌데 방정맞게도 항행도중 기관실의 발전기가 고장났는데 좀처럼 수리되지 않았다. 선내는 밤마다까막나라였고 선원들은 선수와 선미에 우등불을 지펴 타선의 항행에 신호를 보내었으며 밥조차 프로팬가스로 겨우 지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담배는 진작 꽁초까지 주어서 피우는 신세였다. 헌데 파도세찬 포클랜드바다같으면 진작 배가 파도에 뒤집혀질 상황에 처했음에도 공짜를 좋아하는 선장의 악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하루는 내가 선원들을 골려줄 심산으로 빈 “말보로”표 담배곽을 반팔샤쯔의 웃호주머니에 넣고 갑판으로나갔더니 선원들이 욱하고 몰려들어 한가치씩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이 선손을 써서 갑채로 그것을채갔다. 헌데 맹랑하기로 그것은 빈갑이었다. 그통에 나는선장한테서 볼기짝 한매를 얼얼해나게 얻어맞았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담배가 있는 곽이든 빈곽이든 넣고 다니는건 나의 자유이고 또한 내가 뭐 선장한테 그걸 주자고나 했던가. 하지만 육지와 동떨어진 해상에서 그것도 선장이면 왕이고 법보다 주먹과 계급이 중요한 곳에 선장이 돼지라면 돼지이고선장이 죽으라면 죽는 흉내를 내야 하며 선장의 한마디면 내일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강제귀국을 당하는 판에 억울한대로 참아야 했다. 억울한대로참고 열심히 돈벌이하다가 만기되어 귀국한 다음 내노라 하며 활개치면서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특히 나한테는하마터면 강제귀국을 당할 침통한 교훈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약 한달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아프리카 해상에서 떠돌던 본선이 남미쪽에서 온 “사랑”호와접선했다. 그 때 나는 그 배에 친구인 최용식씨가 있기에 그한테로 건너가서 함께 술잔을 나누게 됐다. 그 때 나는 “카나리아핍퍼”호가 어떤 배란것을 알려주고 나서 주방장인 나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어떤 배든 주방장끼리서로 바꾸어 갖고 근무환경을 좀 개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글쎄 그 후에 모든것을 고해바칠줄이야. 그런데서 나는 본선 선원들의 흉을 봤다는 이유로 기관장과 조기장을 비롯한한국선원들한테서 실컷 얻어맞고도 주방의 국자로 조기장을 때려 얼굴에 흉터를 만들어놓은데서 선장의 제의하에 강제귀국처분을 받게 됐다. 후에 알고 보니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그 주방장자리와 주방장이 매달 더 받는 수당금 100달러가 탐나서 중국선원끼리 금이 가는 그 따위 짓을 했던 것이다. 괘씸한녀석, 하지만 그따위 강제귀국결정에 순순히 두손을 들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은사건의 전부를 써서 보관한 뒤 그날 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까지도 주방창고의 열쇠가나의 손에 있었던만큼 남몰래 사전에 숱한 라면과 빵과 과일 및 음료수따위를 침대밑에 감춰둔 뒤 그랬으니 단식은 무슨 말라빠진 단식, 그러자 과연 바빠난 것은 선장이었다.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여 나를강제하선 시키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텐데 내가 단식에 들어 갔으니 인명사고라도 나면 도리어 강제소환될건 선장(회사준칙에 의하면 일단 선박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사고원인을 밝힌 뒤면 선장의 책임범위내의 사고라면 선장의 강제소환은 물론 몇년간의 본회사 선장자격을취소함)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에 그 이튿날부터 갓 주방장으로진급한 녀석이 선장의 령을 받고 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밥만은 먹어달라고 끼니마다 나의 침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허나 거기에 넘어갈 나인가. 너 이 놈들 나를 알기를 뭘로 아는건고? 나는 방문을 기어코 열어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통신장, 그 다음에는 1항사…그러다가끝내 선장이 내 방문앞에 다가섰던 것이다. “여보게 김군, 이런 일에 생명까지 내걸 필요는 없잖아. 우리도 교포들이 강제귀국을당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다 잘 알고 있어요. 김군이나 나이 캡틴이나 모두 문화인이니까 이번 일을 없었던 걸로 치고 다시 손잡고 잘해 봅시다.” 선장까지 이렇게나오니 더는 버틸 필요가 없었다. 후에 알고 보니 회사의 압력도 있었거니와 갓 진급한 주방장 녀석의밥하는 솜씨가 영 말이 아니어서 선원들이 늘 제때에 식사하지 못했는가 하면 선밥 혹은 죽밥을 먹어 불평이 많았기에 선장도 부득불 이 중국교포선원한테두손을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소위단식이란 허울밑에 밀렸던 잠까지 실컷 자면서도 끝내 “승리”하여 다시 주방장자리를 되찾은 나였건만 그런 방법은 계속 취할 것이 못된다는 걸 나는잘 알고 있었다. 선장 역시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니 악이 나면 나중엔 무슨 짓인들 다 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화제는 다시 돌아와 그렇게 해상에서 하루하루를 표류하던 중의 어느 날 본선은 근처로 항행하는 러시아 선박(그 때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 구조신호를 보낸 뒤 그들과 접선해서는약간의 부식을 보충받게 되었다. 접선작업이 끝나 부식을 넘겨받은 뒤 미구하여 모두들 한쉼 쉬려는데 불현듯러시아선박의 선교에는 선글라스를 낀 한 어여쁜 금발머리아가씨가 나타났다. 치마바람을 날리며 배전에 기대선그 모습, 툭 튀어 나올듯한 가슴과 둥근 히프, 첫눈에 벌써매우 성감이 짙은 여인임이 확연했다. 아, 사막의 오아시스런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아가씨었더냐,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힘든젊고 아름다운 백인아가씨, 그러자 그 미끼를 놓칠 선장 강아무깨가 아니었다. 선장이 미화 100달러짜리 한장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도 대뜸 반응을보이며 건너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헌데 전기가 없는 본선인지라 크레인(기중기)을 돌릴수 없었고 러시아 선박에서도 곯려 주느라고 그러는지그 때만은 도와주지 않았다. 선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빼빼 마른 사내였는데 여러 선원들이 극구 말리는데도불구하고 배와 배틀 연결하는 바줄에 매달렸다. 하건만 에익, 세상에어디에 이런 망신이다 있담, 글쎄 술과 여자를 되게 밝히는 선장한테 팔다리힘만은 없었던지 그는 인차첨범하고 바다물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본선의 선원들은 구명대를 던져준다 줄사다리를 드리워 준다하며 선내가 들썽하게 법석댔지만 러시아선원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손벽을 쳐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곁에 카메라까지 들고 나온 이까지 다 있었다. 선박에서의선장은 일개 사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선박의 형상이고 존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은 선박의 아버지라는설도 있다. 헌데 선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선장이 그러할진대 그 배의 분위기를 구태어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리고 선원들 거개가 여자를 좋아하듯이 말이다. 선장도 필경육욕을 가진 사내인만큼 그 예외일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박들에서는 선장이 직접 여자들 찾아헤매는실례가 극히 적었다. 예하면 1991년 6월말 내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 때 아가씨 60여명이배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3층에 있는 자기의 침실에서 근본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1항사가 이쁜 여자 한명을 물색해서 보내니 선장 역시 모르는척하며그날밤을 즐겼던 것이다. 하다면 선장이란 그만한 무게가 있어야 할텐데 “카나리아립퍼”호의 선장한테서는도무지 그런 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들이 배에 오르면 자기가 나서서 이쁜 여자를 골라 챙긴다거나아가씨와 관계할 때 쓴 콤돔을 아무곳에나 나뒹굴게 한다거나 지어는 빵과 커피를 가져다 달라는 아가씨의 심부름을 자기가 직접 한다거나 하는 행위를보면 저 사람 머리가 돌아도 크게 돌고 있다는 느낌부터 들군 했다. 특히 본선의 발전기가 고장나 기관장과그 부하들이 플래시(전지불)를 켜들고 밤낮으로 땀을 흘리며일하는 그 비상시기에 그랬으니 선장으로는 크게 실망가는 인간임에 분명했다. 글쎄 지나치게 나쁜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었으나 여하튼 선장감은 아니었다. “배놈”생활의 그제날을 추억하며 배를 여러번타보노라면 참 육지에서는 도무지 믿기 힘든 희한한 일도 많이 겪게 되고 따라서 배울 것도 많으며 또한 회사별로,선박별로 제각각 자기 선박으로서의 특점이 따로 있었다. “태풍호”을 타고 보면 일이 힘든반면에 돈벌이가 좋았고 “코리안스타”호를 타고 보면 돈벌이는 그닥지 않지만 일이 신사스럽고 세계 각지를 메주밟듯 주름잡기에 안계를 넓힐 수 있었으며“카나리아립퍼”호는 돈벌이나 구경할거나 다 그닥잖지만 먹고마시고 오입질하기는 천하제일이라 할만치 좋은 배였다. 작업선 즉우리가 말하는 어선일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선이란 일단 출항만 하면 보통 반년 이상씩 부두로 입항하지않는 것이 특징이고 생활 또한 고되기가 말이 아니란다. 어선을 타는 “배놈”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손바닥에 썩살이 배겨 곰의 발처럼 두꺼워 주먹마저 쥘수 없게 된 것은 노상 그물을 당기는 작업만 하는데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작업의 힘든 정도를말한다면 그물을 당기느라 기운을 쓸적마다 뒤가 풀리어 방구가 절주있게 뿡뿡 하고 나온다 했다. 또한마구로배(참치선)에 승선한 선원들은 맞아대기를 하루 세끼밥먹듯 하는데 그것은 단지 선원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작업시간에 조는 선원들로 하여금 전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도그럴 것이 어떤 경우엔 2~3일씩 눈한번 붙히지 못하고 연속작업을들이대니 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외 침실안에 다락을 매고 한 침실에 10여명씩 처넣는 거주환경과 남새맛을 보려 해도 어쩌다 물고기를 받으러 오는 냉동운반선들이 날라줘야 가능한 식사조건 및 세상과 동떨어져사는외로운 생활,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어선을 타려 하는지? 알고보니어선을 타는 사람들의 속궁리 역시 따로 있었다. 우선 먼바다에 나가 오래있으면 여자가 없기에 돈쓸 곳이없어 돈이 모아지고(기실 일이 너무 고되기에 여자생각이 날리가 없고 그들의 제일 큰 소원은 잠이라도한번 싫컷 자보는 것임), 다음으로 한국선원들을 놓고 보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경우엔 기본급여외에도많은 조합금(상여금)이란것이 붙는데 그 액수가 흔히 급여를초과하거나 그것의 몇배 될 때가 많기에 1~2년만 배를 타서 돈을 모으면 수수한 아파트 한채는 장만할수 있다 하니까 말이다. 헌데 중국선원들한테는 기본급여만 있고 조합금이 일절 없다고 하니 어쩐지 그것이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 것마저 없으니 중국선원들은 늘 물고기가 적게 잡히기를 바랐으며혹간 많이 잡히면 몰래 도로 그것을 바다에 처넣는다고 했다. 왜 그러질 않겠는가. 고기가 많이잡혀 보았자 한국선원들한테만이 좋을 뿐이지 그것을 정선하고 포장하고 냉동하면서 이득없이 고생만 죽게 하니 말이다.그러니 중국선원들이 몸을 아끼고 말썽을 부린다는 책망만을 하지 말고 그네들한테도 일정한 조합금제도를 실시하는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처사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돈을 벌려는 중국선원들의 이익에는 물론 물고기를 많이 잡아 작업효율을 올리려는회사리익과도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 돈 때문에 인간등급을매기는 제도,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독종이 인간이고 인간사회를 속세라고 하는 걸가? 총적으로 보아유람선을 타든 화물선이나 어선을 타든간에 그 승선한 선원의 흥취와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마치 육지에서의탄광일이 위험하고 힘들어서 돈버는 재미에 일하는 탄부도 그렇고 나처럼 풋돈벌이도 되지 않는 글쟁이는 그 명예와 애착 때문에 머리를 쓰고 글을 만드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육지의그 어떤 작업보다 “배놈”의 직업은 불쌍한 것이다. 하긴 옛날 한국이 못살 때는 “배놈”들도 그야말로멋진 마도로스답게 “배님”처럼 떠받들렸고 시집오려는 처녀들이 줄을 쳤다고 했으나 지금은 영 딴 세상으로 되었다.그 “배님”이 언제부터 “배놈”으로 됐는지는 알바 없으나 목하 한국에서는 선원이라 하면 “배놈, 배놈”하며시집오자는 여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여 한국선원들한테는 장가 못간 남자들이 수두룩했는데 어떤 이들은아예 장가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장가들어 봤자 여자는 인차 도망갈 것이고 설사 도망가지않더라도 시름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배놈”한테 시집오려는 여자가 있더라도 그 여자들의 자질과차원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내가 승선했던 선박들에도 장가 못간 선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거개가 30대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들은 귀국할 때마다 임시여자를 데리고 몇달씩 동거하다가는 돈잎이떨어지면 또 다시 배타러 나오는데 그렇다고 배타기를 포기하고 육지에 발을 붙이려 해도 장기간의 “배놈”생활에 육지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에 도무지적응할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사업을 벌려도 용두사미처럼 실패하기가 일쑤이고 많은 회사들에서도 “배놈”은쌍놈이라는 눈치를 보이며 잘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선박을 비롯한 많은 선박들마다 다시는배타지 않겠다고 맹세를 30번도 더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배를 30년도 더 탔다는 해석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억울한 일이다. 아무리 “배놈”이라지만 마누라도 없이 육지를 떠나 한평생 바다생활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배놈”은 불쌍하다. 우리 모두가밥먹을 때 농민형제들을 잊지 말듯이 물고기를 맛볼 때마다 일망무제한 바다에서 신고하는 “배놈”형제들을 다문 한번이라도 머리속에 떠올렸으면 하는마음과 기대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1
  • 오묘한 세계 대백과(4)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자고로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가설을제기했었다. 그 중 영향력이 비교적 큰 것이 성운설(星云说)과 재변설(灾变说) 등이다. 성운설은 전반 태양계의 물질은 모두 동일한 원시성운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성운의 중심부분이 태양으로 형성됐고성운의 외곽부분이 행성으로 형성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다음 재변설은 태양이 먼저 형성되고 후에 항성하나가 태양의 신변을 스쳐지나면서 태양의 일부분을 뜯어 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이 곧 태양이받은 조력의 작용으로 표면으로부터 뿜어 나온 강한 기류가 생겼는데 그 기류가 응고된 후 행성으로 형성됐다는것이다. 목전 태양계의 탄생에 관해 다른 부획설(浮获说)도 있다. 태양이어느 한 시기에 기체먼지로 쌓인 성운을 지날 때 성운중의 물질로 태양을 태우면서 도는 성운판을 만들었으며 이 것이 점차 각개 항성과 기타의 위성들을만들었다고도 한다. 태양의 빛과 열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류를 놓고 말하면 찬란한 태양이 의심할 바 없이 전반 우주에서가장 중요한 천체에 속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태양의 질량은 약1989×1030킬로그람로서 지구의 33만여배에 달한다. 태양의 물질은 수소(71% 점함)와 헬리움(26% 점함) 등경원소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경원소를 업신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극도로 높은 높은 태양중심의 온도와 압력의 조건에서 격열한 핵취변반응(核聚变反应)을 진행하면서 대량의 빛과 열을 복사해 낸다. 태양은 이러한 빛과열을 산생하기 위해 초당 약 400만톤의 물질을 소모하지만 이는 전반 태양질량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작고도 미약한것이다. 빛과 열을 발산하는 외 태양은 또 평균 초당350킬로메터에 달하는 속도로 전기를 담고 있는 미립류(微粒流)를 내뿜는데 이를 태양풍이라고 한다. 태양에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은? 태양의 직경은 달에 비해 약 400배 가량 크며 태양과 우리의 거리 또한 우리와 달과의 거리보다 400배가멀다. 이는 기묘한 교합으로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에서 보는 태양과 달의 크기가 비슷해 보이게 한다. 이리하여 지구에서 일식현상이 나타날 때면 달은 완전히 태양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태양의 빛아래 숨겨져 있던 태양의 대기층(일명: 일면)이 이 때면 그 것의 “노산의 진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일면현상은 태양의 검은 원의 주기발생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제일 마지막 시기의 일면현상은 떨기 떨기의 “깃털”처럼 태양의 양극에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일식현상을제대로 볼 수 있다면 태양에서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을 볼수가 있을것이다. 2006년 미국의 연구일군들은 계산기모형 하나를 만들어놓고 전례없는정확도로 일주일간 태양에서 나타나는 일면의 활동정황을 예측, 그뒤 어느 한차례의 일식중 실제로 관측했던결과가 계산기모형으로 예측했던 결과와 매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성과는 태양풍을 예측하는것과태양 그 자체를 가일층 인식함에 있어서 모두 크나큰 도움이 될것으로 분석되고있답니다.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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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9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4) 버킹엄궁전
    버킹엄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변 함의: 영국왕실의 최고상징임 18세기 초, 영국의 버킹엄공작은 템즈강변에 한채의 관저를 지었는데 후에 조지 3세가 버킹엄 공작한테서 이 관저를 사서 안해한테 선물, 그 때로부터 이 관저는 “여왕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1825년, 조지 4세가 이 왕궁을 개작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버킹엄궁전은 황실가족이 사는 관저로 되었다. 그리고 제일 첫 사람으로 이 궁전에 들어간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현재 버킹엄궁전은 의연히 영국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이는 영국왕실이 최고 상징으로 되고 있다. 주체건축물 버킹엄궁전은 “口”자형으로 된 3층 건물로서 주체궁전은 동쪽방향으로 마주 앉았다. 왕궁의 서쪽 측면은 정면 궁전으로 그 중 가장 큰 “황실무도청”은 1850년에 건설된 것이며 전문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수건한 것으로 무도청 내에는 대형 수정등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어좌실(御座室)내에는 당년에 국왕이 쓰던 어좌가 보존돼 있으며 사방 둘레에는 15세기 장미전쟁 때의 장면이 그려져있다. 다음 궁내 음악실의 꼭대기는 정원형으로 돼있는데 상아와 황금 장식으로 조성되었다. 버킹엄궁전의 부대건물로는 황실화랑(皇家画廊), 황가마구간과 화원으로 건설돼 있다. 그 중 화랑과 마구간은 이미 대외에 개방돼 있다. 버킹엄궁전의 광장 버킹엄궁전 정문앞의 광장중심에는 천사의 형상으로 조각된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또한 영국레알위병대가 보초교체를 하던장소로서 매년 4 – 9월, 레알위병대는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12시 30분 사이에 보초교체의식을 한다. 그 외의 달에는 2일에 한번씩 하는데 매번 교체의식을 할 때면 군악과 구령소리속에서 머리에 멋진 모자를쓰고 몸에는 붉은 상의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영국레알위병대가 각종 대렬표현을 하게 되는데 황실분위기가 아주 농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9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7 )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나온 우리는 군용트럭에 앉아 무석시구역을 빠져나와서는 서쪽을 바라고 그냥 달리기만 했다. 달리는 중도에서 학생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지만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만약 복건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기차에 올라야 하겠건만 트럭에 앉은대로 계속 달리는데다 서쪽을 향해 달리니 뭐가뭔지 도무지 추측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인솔하는 군관이 알려주는것도 아니였다. 이것도 군사비밀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뒤 드디여 우리가 탄 군용트럭은 약 반나절 달리던 끝에 남경에 당도, 하지만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시외곽도로를 한참 달리더니 장강부두가에 가서 멈춰서는것이였다. 장강부두에서 우리는 트럭에서 내린 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륜선에 올랐다. 륜선에 오르게 된것은 당시 장강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우리가 배에 다 승선하자 륜선은 고동을 길게 뽑더니 북을 향해 선수를 향하는것이였다. (드디여 갈곳으로 가는구나.) 나는 이번에야 제딴에는 어디로 간다는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 북이라면 분명 중조변경지구로 가는것이 틀림없는것 같았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간다면 분명 조선정세가 복잡해진것이라 판단했다. 이전에도 조선전쟁이 터지자 하남성에서 농업생산을 지원하던 진갱의 제13병퇀이 정주로부터 압록강연안에 집결되지 않았던가! …… 나는 배란간을 부여잡고 배전을 철썩철썩 갈기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결국 조선으로 가는구나. 내가 태여났던 고국에 나가 싸우게 됐고 또한 싸우고 또 싸우다가 내가 태를 묻었던 조선땅에서 희생될수도 있으며 고국에서 이내 인생을 마감할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군인으로 돼갖고 가렬처절한 전쟁터에 한번 나가보는것도 어찌보면 영광스러운 일인것 같았다. 하긴 부모한테 효도 한번 크게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좀 아쉽고 미안한 구석도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터에서 군인답게 살다가 군인답게 희생되는것 역시 인생이라면 괜찮은 인생인것 같았다. 얼마뒤 륜선이 장강북안에 가닿게 되였고 륜선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군용트럭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한참 달리다가 어느 한 자그마한 진의 기차역에서 북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한편 기차에 올라 북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줄곧 문화교관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로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3대규률과 8항주의”, “공산당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다네” 등 혁명가요였다. 당년에 압록강을 뛰여넘던 지원군용사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가? 혁명가요를 씩씩하게 부르는 우리는 진짜 전선으로 향하는 대오와도 같았다. 헌데 2일후 우리가 탄 기차는 북경 풍태역에서 멈춰섰고 우리가 그곳에서 내리게 될줄이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오리무중에 빠졌다. 아무래도 조선으로 갈것 같다던 나의 판단이 틀렸던것이다. 그리고 많은 전사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인솔자 군관한테 물었으나 그 군관은 그저 시무룩히 웃으며 자기도 북경까지 따라온다는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고 했다. 북경 풍태역에서 장군별을 단 군관이 우리를 마중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다시 올라탔다. 그뒤 우리가 탄 트럭은 시내안이 아닌 교외쪽으로 향하더니 약 한시간뒤 장평현에 있는 북경공정병학원이란 간판이 달린 어느 한 건물의 대문앞에서 멈춰서는것이였다.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한줄로 서서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대문안에서는 숱한 군인들이 모였고 그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우리를 환영하는것이였다. 그리고 건물벽에는 “신입생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랑카트까지 걸려 있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광경에 나는 머리가 어정쩡해나면서 한동안 뭐가 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였지만 당시 중앙군위에서는 문화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을 복건에 보내 땅굴을 파고 또치까를 구축하는 등 전쟁준비에 투입시켰으나 순자를 포함한 녀학생들은 상해군의대학에 보냈고 또 우리 소수민족 학생들은 북경공정병학원에 보내 계속 공부를 할수 있게 했던것이였다. 2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 즉 의젓한 대학생이 되였던것이다.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도록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당시는 국내외 정세가 진짜 복잡한 상황이였다.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매일같이 “대륙수복”을 웨쳐대면서 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했고 중쏘관계 또한 그닥 여의치 않았으며 조선반도에서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한 시기였다. 하지만 중앙군위에서는 우리 무석문화학교내의 소수민족학생들만은 별도로 전쟁준비 일선에 내보내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할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우리 나라 소수민족정책의 우월성을 감지할수 있었다. 한편 내가 행복해질수록 산굴을 파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전쟁준비 제1선에서 고생하고 있을 순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더군다나 그녀와의 일체 련락이 두절되니 더욱 시름을 놓을수가 없었다. 하긴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인 그녀의 부친이 어련히 알아서 딸한테 관심을 돌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어찌 장담하랴. 얼마전에도 우리 문화학교 학생들이 사처로 이동된다는것에 대해 왕륙생정위는 깜깜부지였지 않았던가?! 나는 마치도 순자한테 큰죄를 진듯한 생각이 자꾸 갈들었다. 내가 그녀를 고생스러운 곳으로 직접 보낸것 아니였지만, 또한 군사명령이라 어쩔수 없는것이였지만 그래도 어쩐지 내가 순자를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보낸것 같은 자책감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함께 무석의 문화학교로부터 동행한 만족전우한테 그 고민을 털어놓았다. “쑈쪼, 나 지금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단 말이야. 사실 나 우리 한반의 왕순자란 녀자애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아니, 그건 이미 공개된 비밀이 아니야. 새삼스럽게 그걸 왜 끄집어내?” 쑈쪼는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건 그런데 나 지금 순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의 집주소도 적어두지 못했다구.” “저런, 이 친구야! 꼼꼼하기로 소문난 자네가 그런 실수를 범하다니?! 그래 아직 그녀와 편지거래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휴ㅡ 다 내잘못이야…” “아니 아니야. 그걸 어떻게 되여 자네의 잘못이라고 하겠나! 다 그 삶아 튀해버릴 장개석이 ‘대륙수복’이요 뭐요 하며 지랄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왜 문화학교에서 여기로 왔겠고 또 자네과 순자가 갈라지게 됐겠나. 하긴 여기로 온 우리는 아주 행운스럽다만…” 장개석?! 쑈쪼의 말에 나는 큰 힌트를 받았다. 그랬다. 모두 장개석 때문이란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는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한 분노로 이발을 갈았다. 장개석, 너 이놈 우리의 사랑에까지 방애작용을 하는구나!!! 그때로부터 순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해 일장저주를 퍼붓군 하였다. 동시에 나는 이미 20살을 넘긴 청년이라 셈이 들대로 들었기에 지식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순자를 만나면 꼭 어깨에 별이 많은 군관이 되여 나타나리라 결심하고는 머리를 싸동이고 공부에 열중했다. 그만큼그때까지만도 나는 순자와의 재상봉이 이루어지리라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3 북경공정병학원에서 내가 배치받은 학부는 기계및건축설계학부였다. 이 전업은 말그대로 기계와 건축 등을 설계하는것을 배우는 전업이였는데 그중 건축설계에는 전쟁준비에 필수적인 갱도와 또치까 및 방공호 등 학과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참, 같은 문화학교시절의 동창들이 갱도를 파고 나는 그런 갱도를 설계하는것을 배우다니… 운명의 대비란 그야말로 묘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나의 제대로 된 학력은 룡정에서 초중에 다닌것이 전부였다. 하긴 부대에 간 뒤 나름대로 글공부에집념하면서 몇년간 자습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계적인 공부가 아니였고 문화학교에 다녔으나 그것은 2년도 안되였다. 그러니 순 시험을 쳐 대학에 간다는건 거의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북경공정병학원같은 학부에 입학한다는것은 더욱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것들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주어진 운명을 기꺼히 받아들이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여기서 보충해서 말하고 싶은것은 다들 이성에 빠지면 공부에 집념할수 없고 성적도 하강된다고 하지만 나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순자가 생각날 때마다 공부를 잘해 그녀의 의젓한 남편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군 했으며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나한테 있어서 도리여 동력이 되게 했다. 그러던중 내가 입학해 약 한달이나 됐을가 할 때의 어느날 갑자기 북경대학의 지도일군들이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왔다. 나라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러 왔다는것이였다. 력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중국의 린국으로서 중국의 어느 조대를 막론하고 조선과의 관계에 대해 중시를 돌렸던것이다. 특히 해방후 중조 두 나라는 모두 사회주의와 무산계급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여러 명목의 우호협력관계를 맺어왔는바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조선어와 조선의 력사에 대해 능통한 인재가 대량 수요됐던것이다.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이 그 무슨 국무원의 소개장이라도 갖고왔는지 우리 학교지도부에서는 그분들을 깎듯이 대했고 그들이 찾아온 사연에 대해 알아보고는 이에 적극 호응하는것이였다. 학교지도부에서는 인차 전 교내에 있는 조선족학생들에게 통지해서는 학교인사처로 가도록 했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는 나 그리고 흑룡강성이 고향인 량희원과 리종률 이렇게 도합 3명이였는데 이 3명 모두 학교인사처에 가서 면접시험을 보게 됐다. 그날 우리 3명이 학교인사처에 들어서자 북경대학에서 파견돼온 일군들은 우리 셋을 아래우로 까근하게 뜯어보는것이였다. 그러더니 그중 한분이 나한테 먼저 말을 건네는것이였다. “저기 저 키가 큰 동무, 여기와 앉소.” 내가 그분이 가르키는 걸상에 앉자 그분은 재차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였다. “이름이 뭐요?” “허길성입니다.” “고향은?” “길림성 룡정입니다.” “오, 그럼 연변에서 왔구만. 조선족들이 많은 지방에서 왔다면 조선어기초가 어느 정도 있겠구만…” “예, 저도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분은 기타의 량희원과 리종률한테도 똑같게 묻더니 수첩에 적는것이였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그제야 우리 학교로 찾아온 목적을 밝히였다. “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외교부문에서 근무할 조선족인재들이 몹시 수요되고있는 상황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조선족인재들을 선택해서는 한동안 북경대학에 데려가 학습하게 하고는 나중에 외교부와 국방부 등 부서에 인재들을 수송하게 되오. 어떻소? 북경대학에 가서 공부한 뒤 외교관이라도 될 생각들이 없소?” 이에 우리 셋은 서로 번갈아 쳐다보기만 할뿐 쉽게 대답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지명했다. “그럼 저기 저 아까 이름이 뭐랬더라? 오 그렇지 허길성동무라 했지. 허동무가 한번 시원하게 속심말을 한번 해보오.” “글쎄 고맙습니다만 너무 급작스레 들이닥친 일이라 저한테 생각해볼 시간을 좀 줄수 없겠습니까?” 나외 기타 2명의 조선족학생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좋소. 오히려 쉽게 대답하는것이 경거망동하는거지. 그럼 우리 2일간의 시간을 주겠소. 생각이 있는 학생은 다시 인사처로 찾아와 신청하면 되오.” 숙소로 돌아온 뒤 나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외교관이 된다? 유혹이 없는건 아니였다. 헌데 모순되는건 군복을 벗기 싫은것이였다. 그리고 이제 조선어를 더 전공하는건 어이없는 일인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배운 조선어실력으로도 문장쓰기나 통역같은데는 막힘이 없을것 같았다. 또한 현재 나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술을 배우는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드디여 나는 아주 큰 결단을 내리고 북경대학에 가지 않고 본교에 계속 남기로 했다. 그러니 학교인사처로 찾아갈 필요조차 없게 됐다.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북경대학 지도일군들도 포기하리라 여겼던것이다. 그런데 그 3일후 북경대학의 그 지도일군이 나의 숙소까지 찾아올줄이야. “허길성동무,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소? 우리는 허동무가 제일 선참으로 달려올줄 알았는데…” “미안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인사처로 찾아가지 않아도 될것 같아서…” “아니 허길성동무, 이런 기회는 자주 생기는것이 아니란 말이요.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오.” “글쎄 저는 그냥 이 학교가 좋고 지금 배우고있는 전업을 계속 잘 배우고 싶을뿐입니다.” “이 동무가 이거 고집이 세구만. 허허 할수 없지.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본인이 싫다면야 어쩔수 없지…” 그 지도일군은 어딘가 아쉬운지 입을 쩝쩝 다시는것이였다. 그뒤 나는 북경대학 지도일군들의 말을 듣지 않은것에대해 아주 잘한 일로 간주하면서 여전히 본 전업을 배우는데 정력을 쏟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순자의 소식을 기다렸다. 4 우리가 북경공정병학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63년의 8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중앙군위로부터 우리 학교에 새로운 명령(북경공정병학원은 기타 대학교와는 달라 상급의 지시는 군사명령식으로 집행됨)이 떨어졌다. 그 명령인즉 오는 10월 1일 중화공화국 창건일을 경축하면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대형검열식이 있게 되는데 우리 북경공정병학원이 검열대렬에 선택됐다는것이였다. 이 명령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몹시 흥분되였다. 이전에 영화를 통해 우리 중국의 천안문광장에서의 열병식을 보아왔고 또 쏘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거행되는 열병식도 가끔씩 보았었기에 나도 언젠가 한번은 그런 열병식에 참가해 봤으면 하는 마음도 없았다. 선배들에 따르면 기실 북경공정병학원은 건국이래 해마다 천안문광장에서 있게 되는 열병식 혹은 검열식에 참가, 교관들과 선배학생들은 이미 경험이 있었기에 그닥 흥분하지 않았지만 우리 신입생들은 그저 신기하고 궁금하기만 했다. 처음에 나는 우리가 참가하게 될 검열식을 열병식으로 여겼었다. 선배들에 따르면 열병식과 검열식은 성질상에서 근본 달랐다. 열병식은 각종 신식무기를 과시하는 한편 열병대오도 전신무장한체 검열을 받는것이고 검열식은 그냥 군복이 아닌 다른 단체복장을 하고는 표어같은것을 메거나 들고서 행진하는것이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1949년의 공화국창건날부터 1959년 10월 1일까지 해마다 열병식을 해오다가 1960년부터는 각종 국내사정에 의해 잠시 열병식을 중단한터였다. …… 중앙군위의 명령이 떨어지자 학교에서는 즉각 검열식에참가할 훈련에 돌입, 오전에만 수업에 참가하고 오후시간은 전문 이 훈련에만 정진했다. 훈련은 내가 사전에 상상했던것과는 엄청 다르게 힘들고도 고되였다. 쨍쨍 내리쬐는 8월의 해볕아래에서 정복을 입고 행진훈련을 하는 강도에 대하여 그 훈련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근본 알수 없을것이다. 특히 정보행진을 30분 이상씩 훈련하노라면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뒤잔등이 흠뻑 절기가 일쑤였으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씻자고 보면 소금기가 하얗게 돋아있군 하였다. 훈련개시 며칠후부터 우리는 발에 물집이 생겼고 어떤 학생들은 코피를 흘리기도 했으며 훈련이 지속됨에 따라 모진 더위에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전사와 아예 병원으로 실려가는 학생들까지 속출했다. 특히 우리 신입생들이 더 애를 먹었다. 웃학년의 선배들은 이미 경험이 있는지라 제법 요령이 있어서 인차 힘든 고비를 넘었지만 우리 애숭이들은 여러번 번복해도 늘 교관한테 훈계만 당했으며 한가지 훈련을 여러날씩 번복해 할 때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견지했으며 쓰러지고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끝끝내는 모든 훈련관을 하나하나 넘기는데 성공했다. 훈련이란 신체가 건장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소화해내리라고 여겼다가는 큰 오산이였다. 즉 사회청년들은 신체가 아무리 건장하다고 해도 그 훈련강도를 이겨내지 못할수도 있었으나 북경공정병학원의 학생들은 아무리 허약한 체질의학생도 모두 그 훈련을 이겨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한테 그만큼 높은 사상경계, 의악성과 그리고 인간자질이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나는 그번 훈련에서 충분히 감지할수가 있었다. …… 드디여 1963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광장은 국경 14주년을 경축하는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방방곡곡에서 각양각색의 채색기가 날렸으며 그 어디를 보나 꽃바다를 이루었다. 그날 우리는 아침 5시에 북경공정병학원에서 출발하여 6시가 되자 천안문광장의 지정지점에 도착해 대기하게 되였다.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고정된 지점에서 몇시간씩 서있는다는것도 고되기는 훈련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그날 우리가 서있는 북경 장안가의 곳곳에 림시이동변소가 있어 학생들이 볼일을 보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오전 9시 30분이 되자 전체 횡렬종대(方队)는 변소출입도 금지되였고 줄을 맞춘대로 움직일수 없게 되였다. 이어서 여러개 진으로 구성된 횡렬종대로 군수장들이 몇차례씩 와서 점검하였으며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조직규률성을 강조하였다. 드디여 오전 10시가 되자 1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의 취주악속에 검열이 시작되였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 나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품었다 우린 하나의 필승불패의 대오 … … 전반 천안문광장 상공에 울려퍼지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의 주악에 맞춰 우리의 검열대오는 차례대로 행진하기시작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횡렬종대는 제일 앞에 “모주석 만만세”란 대형표어판을 메고 나아갔는데 그속에는 나도 포함되였다. 키가 1.75메터 이상의 군인들로 그 표어판을 메게 하다보니 내가 선택됐던것이다… 우리의 횡렬종대는 천안문성루가 정면으로 보이는 광장중심에 이르자 발을 높게 들며 정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눈결로 얼핏 천안문성루를 올려다보자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동지들의 모습이 보이였다. 모택동주석, 류소기주석, 주덕총사령과 주은래총리…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지도동지들은 검열을 받는 우리를 향해 손을 저어 사의를 표하는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의 가슴은 격동으로 차넘쳤다. 한낱 변방지구의 이름없는 농민의 자식이였던 내가 오늘 의젓한 해방군전사가 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다 받다니 꿈만 같았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국만세!”, “공산당만세!” 그리고 “모주석만세!” 등 구호를 웨치며 보무당당히 행진하면서 천안문앞을 지났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검열을 받았던것이다. 그날밤 학교숙소로 돌아온 후 나는 온밤 흥분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수십일에 달하는 훈련피로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낮에 있었던 그 순간 순간들이 자주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르면서 가슴은 흥분으로 들먹이군 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 그날의 모든것을 일기로 적었고 편지로 집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1963년 10월 1일, 그날의 검열식 ㅡ 그 이전에도 1949년부터 묵경 천안문광장에서는 해마다 열병식 혹은 검열식이 있었지만 나는 조선족군인이 그 대오속에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조선족군인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북경 천안문광장에서의 검열식에 참가해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맘먹었다. …… 북경에서의 3년간 학교생활, 그 3년사이 나한테는 추억거리도 많이 남았다. 그 3년 사이 나는 한낱 애숭이군인으로부터 보다 성숙된 중견군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두번 천안문광장(1963년과 1964년)에서 모주석과 중앙수장들의 검열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학습면에서는 반급에서 항상 우수생으로 그 립지를 굳혔으며 집단활동에서도 늘 학생들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이 강한 혁명군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기도 했다. (연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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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9
  • 취미생활 그리고 사는 재미
    ■ 김철균 사람의 취미생활이란 처음부터 재미가 있어 목적성이 있게 하는 것이 아주 적겠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든다. 특히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생각이다. 올해 내 나이 막 세면 58살이 된다. 이렇다면 나이가 많을까? 하긴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적을 것이고 적은사람에 비하면 많을 것이고 그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한가지 분명 밝힐 것은 나이가 이 정도에 이르게 됨에 따라 동년배들에 비해 나이만큼 나의 취미생활도 몇가지 더 된다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고추장 맛보기”라고나 할까? 나의 취미생활을 보면 “풍부하다”고 하기까지엔 미치기 어려울 것이나 여하튼 여러 가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선 사내로 생겨서 앞치마를 두르기 좋아한다. 여인들 처럼 주방일을 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할 때가 많으며 또 하다 보니 재간도 어느 정도 늘기도 했다. 다음 나는 동관악기 트럼베트(小號)도 어느 정도 불 줄 안다. 단독으로 불 줄 알고 제대로 연주할 수있는 곡이 수십 가지가 되니 불 줄 안다고 해도 될 것이며 또 “콩나물”을 잔뜩 그린 악보를 볼 줄 아니 남한테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나이 50살을 넘기면서 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 즉 페물로 공예품(일명 : 소제작)이란 것을 만드는 취미까지 갖게 되였다. 왜서인가구? 모두가 그렇게 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외 나는 어릴적 부터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었으며 또 나 자신이 기자이고 작가이니 글쓰는 취미가 있다는 것은 두말이면 잔소리 아닐까? 아니 기자는 나의 직업이니 싫어도 해야 하는 “밥줄”이니 거기에 뭐 취미고 뭐고 이름 붙일 것이 못된다. 이러고 보니 아마 일반인들한테 있는 취미생활 중 머리깎는 재간과 자동차를 모는 재간외엔 모르는 것이 별반 없는 것 같다. 참,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몰 줄은 알았어야 하는 건데… …… 내가 이렇듯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 진짜 머리가 좋고 손재간도 있는줄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렇고 또 반면으로 말하면 내가 남이 하는 노릇이면 다해보고 싶어하는 이른바 “다욕한 인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둘 다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취미생활 중 글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외에는 그 거개가 생활의 환경에 의해 그렇고 그렇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트럼베트를 배우게 된 데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일찍 소학교시절에 나는 학교예술클럽에서 무용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초중에 올라와서도 자연히 학교예술단체의 무용대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소학교시절까지만도 키가 썩썩 잘 크기만 하던 내가 초중부터는 유전요소 때문에서인지 키가 그냥 고 모양새였다. 초중 2학년이 되자 무용대의 여자애들보다도 주먹 하나는 더 작은 키가 됐다. 그러니더는 무용대에서 더는 춤을 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술대에서 나갈 수 없어 차례진 것이 그래도 배우기쉽다는 동관악기인 트럼베트(초중 2학년이 되어 바이올린이나 손풍금같은 악기를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음)였다. 하지만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손가락질을 하며 욕할 정도로 요란스레 트럼베트를 불어대면서 연습했기에 얼마 안 있어 선전대 악기조의 2번 트럼베트 리스트로 될 수 있었다. 다음 요리만들기 취미 역시 다음과 같은 에피소트가 있었다. 그것은 1991년 당시 내가 선원이 되어 한국선박에 승선했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원래 갑판부 말단부원이었는데 어느날 주방에서 싸롱뽀이로 근무하던 이상 친구(역시 중국선원임)가 “나이가 많아 갖고 주방에서 심부름같은 일을 도무지못하겠노라”고 한사코 나눕자 선장은 키가 작고 나이도 그닥 많지 않은 나한테 싸롱뽀이직을 마구 떠맡기는 것이었다.당시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갑판부 작업은 시간은 짧았지만 체력적 요구가 몹시 높았기에 나처럼 왜소한 체질에는 맞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다면 짜증 나고 시간도 지루하지만 그래도 나같은 놈이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주방근무인 것 같았다. 한편 나는 질긴 놈이었다. 좋게 말하면 뭐나 한다고 하면 최선을 다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일가 나는 싸롱뽀이직 6개월만에 귀국한 한국주방장 후임으로 주방장직에 진급했고 기타 중국선원들보다 보너스 100달러 더 받는 선원이 됐다. 그랬다. 우리 선박에서는 주방장, 갑판장 그리고 조기장 이 3명은 동급이었다. 그 외 나의 취미생활을 말하자면 그림 그리기, 퀴즈문제만들기와 그 것을 풀기, 또한 바구니 엮기와 물고기 그물 뜨기 등으로 여러 가지이지만 그 것을 구구히 다 소개할 수가 없다. 단, 내 나이 50살이 넘어 배운 취미 페물로 공예품 만들기는 꼭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42살에 늦동이 딸을 봤다. 아들인 큰 애와 15살 차이니까 늦동이라도 한참은 늦동인 셈이다. 그러니 그 딸이 소학교에 붙게 되니 내 나이가 50살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 붙으니 학교에서는 매 학기마다 애들한테 소제작이란 것을 만들어 오라고 강요해댔다. 그런데 이걸 애들이 만든다구?! 천만에다. 다 학부모들이 만들어 갖고 학교에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처음에나는 딸애가 그것을 만들도록 여러모로 유도했다. 하지만 딸애는 공부는 매우 잘했으나 그런 것을 만드는데는 아주 둔재였다. 매 학기마다 그 것을 바치지 못해 선생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었었다. 나이 들어서 본 딸, 나는 딸애가 선생님 한테서 꾸지람을 듣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래서 그런 소제작을 잘한다는 학부모한테 만들어 달라고 몇번 청들었다가번마다 거절당하자 나한테는 일종 오기가 생겼다. 바로 내가 직접 만들어 본다는 것, 그렇게 무작정 마음먹고 달라붙자 못할 것도 없었다. 아니, 내가 정성들여 만들어 바치니 딸애가 내놓은 소제작 “민속촌의 물레방아”가 뭐 동북 3성 소제작 콩크르에서 3등상을 받았다나?… 현재 그 딸애는 초중 3학년, 이제와서 내가 딸애한테 더는 그런 소제작을 만들어 “제공”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씩 무료하거나 TV를 볼 때면 그런 것을 만든다. 만들어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들한테나 기타 교류가 잦은 지도일군들한테 선물로 주기도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은 다른 그 어떤 예물을 받기보다 더 좋아한다. 또한 이렇게 머리도 쉬울 겸 TV시청을하면서 이런 공예품을 만들다 보면 골초였던 내가 담배를 적게 피우게 된다. 아니, 그 것을 만들 때면 거의 금연시간으로 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만들면서 머리를 쓰면 치매에 적게 걸린다나? 여하튼 건강에도 좋고 무료함도 달래고 특히 적은 원가(비행기 하나 제작하는데 5위안도 들지 않음)로 남한테 선물해 큰 보람을 느끼니 어찌보면 일거삼득인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나한테 이렇듯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지만 내가 A급으로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리 만들기에서도 그렇고, 악기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한 그림 그리기와 공예품 만들기 등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내가 어느 것을 내놓고 수준급이라고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재미를 붙이다 보면 내가 만든 것이 아무리 하찮아도 보람이 있게 되며 또한 그 것이 국가급상 같은 것을 받은 것보다 더 기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총적으로 뭘 바라고 하는 취미생활이 아니니까 그냥 들놀이에 가서는 트럼베트를 불고, 회식장소에 가서는 사시미나 소고기 꽃등심 불고기나 만들어 선보이고, 또 적적할 때에는 TV를 보면서 공예품이나 말들고 하는 걸로 만족이다. 그렇다. 그냥 재미이니까. 또한 취미생활이니까. 필자가 만든 부분적 공예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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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8
  • “배놈”의 세계
    ■ 김철균 1992년 3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에서 승선할 때는 5명, 1994년 9월,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서 하선할시엔 3명… 한명의 친구를 진눈까비 흩날리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바다에 수장하고 또 한명의 친구를 태평양의 군도 - 싸이판의 유치장에 남긴채 환고향하는 학송이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1 부산항구, 제2부두 무역선이 오고 가는 배길 따라 원양송출선 “프리오이워니오”호가 고동을 뽑으며 부두에 닿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부산, 꿈결에도 안기고 싶던 조상의 산천이다. 그 시각 중국 조선족선원인 학송이는 이름할 수 없는 정감세계에 사로 잡혔다. 고향인 경남 울산에도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 땅을 밟는다는 행운이랄까? 그의 눈시울은 어느 덧 축축히 젖어 들었다. 학송이 외 기타 조선족선원들은 고국이고 뭐고 그닥 흥미가 없어했다. 흉터많은 얼굴에 항상 성난 표정인 “안도망치” - 덕수, 담배를 꼬나물면 한숨만 내쉬는 정택이와 용철이 그리고 총각인 봉남이, 그중 학송이와 함께 외출하고 싶어하는 친구는 용철이였는데 목적은 집에서 갖고 온 우황청심환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입항절차가 완료되고 모두들 샤와까지 마치자 1항사로부터 중국선원들만 식당홀에 모이라는 통지가 방송됐다. 1항사의 통지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교포친구들, 미안하군요. 회사본부로부터 교포선원들을 상육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아마 아르헨티나 탈출사건 때문에 이런 조치가 내려진 모양입니다.” 아르헨티나 탈출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중국선원 4명을 고용해쓰는 기름탕크선 한척이 아르헨티나의 어느한 부두에 입항, 그 이튿날 저녁 그 배의 중국선원들은 악덕 한국선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돈도 더 벌기 위해 선박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헌데 머리가 그토록 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글쎄 탈출한다는 친구들이 그까짓 옷과 비누와 라면따위를 놓은 보따리를 둘처메고 항구정문을 빠져 나왔으니 의심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처는 야간 택시기사들과 연락하니 인차 드러났다. 결국 그들은 멀리도 가지 못한 채 어느 한 창녀촌에서 덜미를 잡혔다. 그런 전례가 있은 즉 회사에서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중국선원들이 상육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육금지에 애석해하는 선원은 2명, 한명은 고국정에 울고 있는 학송이었고 다른 한명은 우황청심환을 팔지 못해 속이 탄 용철이었다. 2 “자넨 인격도 없는 인간인가? 왜 그까짓 한국옷 때문에 치사하게 놀아! 그들이 싸구려옷들을 주면서 우릴 거지취급한단 말이야. 정신차려 이 친구야.” “자네는 너무 자존심이 강해. 약하면 굽어들기 마련 아니야? 약소민족한테는 외교도 없다고 했어.” 한국옷을 놓고 바다에 처넣으러느니 못그러겠다느니 싱갱이질하는 학송이와 용철이, 그 광경을 차마 그냥 볼 수 없어 그 옷가지들을 확 나꿔채여 바다에 날려 보내는 덕수, 학송이한테는 말대꾸도 하고 제법 성낼줄도 알지만 덕수앞에서는 찍소리 한번 못하는 용철이다. 아니, 덕수란 이 “안도망치”앞에서는 감판장 김만길마저도 은근히 두러워 하는 편이었다. 포클랜드해상에서 전재작업을 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창에서 뒤가 나오도록 긴장히 일하는데 덕수가 진짜 뒤를 보겠다고 간청했다. 이에 반신반의하면서 응낙하지 않는 갑판장. “아이구, 갑판장님, 진짜 참을 수 없수다. 정 안되면 여기서 바지를 벗게 되겠는걸요.” “그래 이 새끼야, 꾀부리는게 아니면 네 엉뎅이 한번 구경하자꾸나.” 그러자 덕수가 정말 바지를 벗더니 똥 한무더기나 내 갈길줄리야. 순간 역한 구린내가 공기가 희박한 어창안에서 지독하게 풍겼다. 괄시당했다고 느낀 갑판장은 성이 나서 길길이 뛰였다. 거기에 동조하여 덕수한테 물매를 들이대는 한국선원들, “미욱하기로 돼지같다”느니, “인간성없는 빨갱이”라느니 하며 별의별 욕설이 다 튀여 나왔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덕수가 아니었다. 그가 물매속을 헤치고 고기박스더미위로 뛰쳐올라 갔을 때는 이미 옷도리를 팽개친 뒤였다. “이 쥐불알같은 남조선 새끼들아, 내몸의 칼자리만 봐라. 언제 네깐놈들을 무서워한 나였더냐! 다 함께 덤벼들어봐라, 너 갑판장 네놈부터 내 손에 죽어봐라!” 덕수가 쇠갈구리 하나를 주어들고 생사결단하니 뒤걸음치는 건 오히려 갑판장과 한국선원들이었다. “저 놈 완전히 미치고 돌아 버렸어. 관두자, 똥이 무서워 피한다더냐, 더러워 피하는거지.”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갑판장이 덕수를 대하는 품이 어딘가 달라졌다. 덕수가 좀 아프다고나 하면 “응, 그래? 오전에 약 먹고 푹 쉬렴” 하기가 일쑤였고 술처먹고 근무해도 머리를 돌리며 모르는체 하기만 했다. 덕수가 이렇게 무법분자인가 하면 용철이는 그 정반대였다. 그는 말그대로 돈이라면 인격도 없는 인간이었다. 예하면 자기보다 손 아래인 한국선원들의 구두를 닦거나 빨래를 하여 풋돈벌이를 하는것이었다. 3 “배놈”으로 생겨 오입 한번 못해보면 평생후회라는 말은 선원들의 입에 오래전부터 굳어진 말이다. 그러건 말건 학송이는 승선한지 1년이 다 되도록 창녀촌출입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성이 싫어났고 풍류세계와 담을 쌓은건 결코 아니었다. 네델란드 항구도시 로톨담, 지구촌의 수많은 항구에 가닿았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 학송이가 로톨담에 입항한 그날 저녁 선참으로 외출하자고 했다. 그 것도 유럽미녀들만 있다는 “해상천국”이란 창녀촌에 가서 몸이나 풀자고 했다. 학송이한테서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학송이와 동행한 사람은 용철이와 덕수였다. 그날 밤, 그들을 실은 택시는 항구주변을 요리조리 돈 뒤 다시 바닷가로 뻗은 방파제길로 몇분간 달리더니 바다가운데의 한 호화로운 건물앞에서 멈춰섰다. “하와이유, 굳나인(인사말).” 계단앞에서 싸롱뽀이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3층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그들이 좌석에 둘러앉자 레지 한명이 메뉴안내서를 가져왔고 뒤따라 마담이 창녀들의 사진이 박힌 스크랩을 갖다 보이며 영어로 뭐라고 씨부렁댔다. 사달은 여기서 생겼다. 나름대로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흥정하는 용철이. “아임 차이나맨 스몰머니 원 한드레딸라 오케이?(중국인 돼서 돈이 적으니 100달러면 되는가?)” 엉터리 영어구사였으나 마담은 알아듣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차이나맨? 노, 노, 스몰머니 노터치 우먼!(중국인?돈이 적으면 아가씰 못다쳐!)” 마담은 가차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옆에서 웃고 떠들며 비꼬는 양코배기들과 일본인들… 그날 밤 선박으로 돌아온 학송이는 정신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다. … 돌아 보면 그다지도 먼길도 아닌데/ 저 멀리 솟는 해는 날보고 웃네/ 취한 김에 껄걸 웃지만 웃는 눈에 맺힌 눈물은/ 아 뜨거운 눈물 사나이의 눈물… 아, 돈! 그 돈이 그다지도 중하다더냐?… 이튿날 저녁 학송이는 홀로 택시를 타고 “해상천국”으로 향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은 뒤 미구하여 각양각색의 피부를 가진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 속에는 본선의 한국사관 몇명도 끼어 있었다. 이 때라 생각한 학송이는 마담을 불러 제일 몸값 높은 아가씨를 자기 옆에 앉게 했다. 두시간쯤 흐른 뒤, 아가씨의 팔을 끼고 다시 나이트클럽 공개홀에 나타난 학송이의 모습, 한국인들은 물론 내노라던 일본인들마저 눈알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아가씨의 몸값은 2000딸라, 한국인 항해사의 한달 급여와 맞먹는 어마어마란 액수였다. 4 그들 일행이 “프리오이워니오”호에 승선하여 세상이 좁다하게 주름잡아 온지도 어언간 1년 6개월, 그 사이 조선족선원 거개가 정도부동하게 “중국똥포”란 딱지를 뜯을만큼 근사한 한국인으로 닮아갔는데 말씨부터 중국교포의 말씨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중국에서 대학과정을 마친 학송이는 물론 정택이, 봉남이 그리고 “안도망치”덕수까지도 제법 선박생활에 잘 적응했다. 하지만 해와 달이 바뀌도록 고약한 습관을 고치지 못한 인간은 용철이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거나 한턱 술 사야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거나, 그외 1년 넘도록 고향서 갖고온 엽초를 피운다거나 하는 걸 보면 같은 중국선원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깊은 밤, 갈매기도 지친듯 사라졌고 사위를 둘러봐도 어둠이 깔린 바다. 이 시각 “프리오이워니오”호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파도를 헤가르며 포클랜드군도를 바라고 배길을 재촉했다. 바로 이 때 웬 검은 몸뚱이 하나가 갑판에 나타나더니 살금살금 기름저장고 입구쪽으로 다가갔다. 용철이었다. 약 20분간 스파나로 싱갱이질한 끝에 뚜겅을 열어제친 그는 다시 한번 사위를 둘러보고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 기름저장고는 새기름을 넣기 위해 낮에 반나마 청리하다가 그만 둔 것이었다. 기름저장고 청리작업이란 공기가 희박한데다 기름 자체의 독성이 강하기에 일반적으로 선박에서는 방독면을 쓰고서야 이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각 남몰래 기여드는 용철이한테 방독면이 있을지 만무했다. 낮에 작업할 때 한국인 3기사 김형모씨가 부주의로 손목시계를 기름깡치속에 떨어뜨렸는데 용철이는 그것이 탐나서였다. 이탈리아 로마제품인 그 시계는 순금이라 했다. 금시계란 말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용철이는 미처 모든걸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7시경, 짙은 안개속을 헤치며 배가 계속 항행하는 가운데 갑판으로 조깅을 나갔던 기관장이 급기야 소리치며 식당에 들어섰다. “밤새 누군가 기름저장고 뚜껑을 열었어.” 선원들이 웬일이냐고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가보니 열어 제친 뚜껑우에는 스파나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선원 3명이 방독면을 쓰고 그 안에 들어가 이미 숨져 굳어버린 용철이를 찾아낸 것은 그 때로부터 10여분 후였다. 용철이의 두손에는 손목시계와 그 때까지 켜진채로인 플랫시(손전등)가 쥐여져 있었다. “쯧쯧, 그까짓 시계가 얼마나 욕심이 났으면… 가난이 원쑤야.” 선장과 기관장 지어는 3기사마저 죽은 이의 소행을 너그럽게 용서해 줬으나 학송이한테는 그 말이 매를 들이대는 것보다 더 옹이 막히는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값없는 죽음을 당했지만 선내에서는 고인과 그 가정을 위해 의연금을 모았고 장례까지 치러 주기로 했다. 장례식을 하던 날, 흐리터분한 하늘에서는 진눈까비가 지궂게 흩날렸다. 항행을 멈춘 선박이 한바다에 정박한 가운데 장례식은 기독교신자인 선장의 설교로부터 시작됐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 불쌍한 인간을 끝까지 구하지 못한 죄많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나이다. 너그럽고 자애로운 하나님께서 부디 자선을 베푸시여 가는 이는 눈을 감게 하고 살아 남은 우리들은 죄를 피하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장례식은 별다른 절차없이 간단히 진행되었다. 선장으로부터 술을 붓고 절을 한 뒤 크레인을 리용해 고인을 수장하기로 되어 있었다. 죽을 때까지 돈과 재물을 탐내다가 숨진 현대의 “수전노” - 용철이, 카톤박스안에 포장된 그의 시신이 크레인에 의해 하늘 반공중에 떴을 때 브릿치에서는 세번 고동을 울려 애도를 표했다. 가련한 목숨, 가도 이렇게 가다니… 평소엔 그토록 괘씸한 용철이었으나 무정한 현실앞에서는 학송이도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인의 시신이 “철렁”하고 바다에 던져지자 그 것은 인차 파도속에 휘말려 들었다. 그 것이 다시 물우에 나타났을 때는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되어 이리저리 표류했다. 그것도 잠간뿐, 미구하여 그 것이 끝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든 것은 언제 그랬냐 싶게 원상태로 돌아왔고 선박은 다시 항행을 계속했다. 5 용철이가 죽은 뒤 겨우 심리균형을 찾고 안정됐던 덕수의 야성이 되살아 날 줄이야. 그 역시 용철이를 곱게 본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덕 한국선원들이 용철이의 행위를 거론하면서 어진 정택이와 봉남이를 기시할 때면 가차없이 주먹맛을 보이군 했다. 이런 반상적 행위는 설사 그가 한국선원이라 해도 강제귀국범주에 속했겠으나 웬일인지 선내에서는 그한테 아무런 징계도 주지 않았다. 아마 오래잖아 근무만기가 되는데다 특히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선상에서 징계위원회라는 것도 그를 건드리기 싫어 내버려둔 모양이었다. 지중해와 수에즈운하 그리고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에 들어선 “프리오이워니오”호는 그 시각 싸이판을 바라고 항행하고 있었다. 싸이판, 일본군 점령지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학도병으로 말아 먹었고, 그 뒤엔 동맹군의 승리로 미국땅이 된 군도이다. 입항하던 날 저녁, 중국선원 4명은 집단적으로 외출길에 올랐다. 이제 싸이판을 떠나 다음 항구에 들어가면 근무만기가 될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야자수 우거지고 해풍이 가볍게 얼굴을 희롱하는 싸이판의 야경은 황홀했다. 에이젠트가 그들한테 알선해준 곳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모 디스코바였다. 깊은 밤이 아니어서인지 바홀안은 퍼그나 조용한 편이었다. 한국인 2남 2녀가 다정하게 소곤대고 있는외 필리핀선원 몇명이 들어오더니 한쪽 구석을 차지했다. 바의 댄서아가씨들은 일색으로 한국말에 영어가 짭뽕인 동양인아가씨들이었다. 오래간만에 상종하게 될 동질감을 느끼는 아가씨들이다. 일찍 한국이 가난하던 20여년전 일본선박에서 근무하던 반도의 마도로스들은 기시와 천대를 받을 때마다 섬나라 계집들을 정복하는 것으로 그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다. 하다면 오늘 학송이네도 반도계집들의 배를 타보는 것으로 지겹고 짜증나는 “배놈”생활에 종지부 찍는 것이 목적이었다. 학송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총각인 봉남이가 담도 크게 제일 이쁜 것들로 4명 골라잡고 끌고 왔다. 사내들한테 안기다 싶이 몸을 밀착시킨 여인들. “아저씨들 참 멋져요. 이 아저씬(덕수) 꼭 마치 야쿠자같아도 진짜 사내다와요.” “임잔 숫총각인가베? 이것보지 이 누님이 오늘밤 사내로 만들어줄가베. 마이프런드 사랑해.” 세계를 메주밟듯 해온 “배놈”들보다도 한술씩 더 떳다. 술을 붓고 떠드는 혼탁한 무드속에 화제는 또다시 덕수한테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덕수의 배가 크고 히프와 가슴도 커서 탐난다느니 하며 찧고 까불어댔다. 이에 흥이 나서 제딴에 우쭐대는 덕수. “나 말이야, 못살고 가난한 중국서 왔지만 세상서 제일 멋진 마도로스란 말이야.” 그 말에 아가씨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됐다, “쳇, 똥포들이구만. 그러게 어딘가 표가 난다 했지. 우리 이걸로 끝내는게 좋잖어? 얘들아, 자 일어들 나자.” 이렇게 자리를 뜨던 중 한 아가씨가 엉겁결에 “참, 썅디메이야”라고 지껄이였다. “썅디메이(想得美)”란 한마디에 학송이는 문득 짚이는바 있었다. “이 계집년들아, 흉내를 낼터면 근사해야지. 썅디메이가 다 뭐야? 네 년들이야말로 진짜 중국똥포년들이구나.” “뭐야?” 죄꼬만 눈에 살기를 내뿜는 덕수, 싸이판이란 이 낯선 땅에서 같은 조선족년들한테서까지 “똥포”취급을 받다니 “펑”하는 맥주병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아가씨의 머리에서 선지피가 콸콸 쏟아졌다. 이지를 잃고 칼날처럼 예리한 깨진 맥주병을 계속 휘둘어대는 덕수, 한국인 남자 둘이 말리려다가 둘다 덕수의 발길에 채이어 저만치 뿌리워 나가 뒹굴었다. 홀안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다. 학송이는 어떡하나 덕수를 구슬려 피하려 했으나 녀석이 어찌나 기운이 센지 도무지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느 결에 경보를 울리며 들이닥친 경찰차,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덕수는 흑인경찰 2명이나 때려눕혔다. 그날 밤 그들 4명은 모두 경찰들한테 연행됐다. 2일 후 학송이,봉남이와 정택이는 풀려 나왔으나 덕수만은 예외였다. 맥주병에 얻어터진 아가씨가 출혈이 심해 병원에서 숨진데다 녀석이 경찰까지 때려 눕혔으니 옥살이를 면치 못하게 됐다. 배가 출항하던 날 덕수는 2명의 경찰한테 이끌려 부두까지 왔다. 죄수복에 수쇄까지 찼건만 겉으로는 여전히 개잡은 포수마냥 우쭐대는 덕수. “학송형,나 한놈의 옥살이로 우리의 본때를 보여 줬으니 그래도 통쾌해 하하하…” 그러면서도 눈확을 적시는 억대우같은 사내의 눈물, 그 역시 참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닻줄을 거두어 들인 “프리오이워니오”호가 육지와 떨어지는 순간 덕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땅바닥에 꿇어 앉으면서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함께 가자. 왜 나 혼자를 두고 너희들만 가는거냐?! 엉엉… 이 괘씸한 녀석들아!…” 완전히 실성한 덕수, 그한테 무슨 위안을 해줘야 할지 학송이는 도무지 적절한 말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두가 멀어지고 덕수의 모습이 하나의 점으로 가물거리다가 점차 사라지자 학송이는 재차 용철이를 보낼 때의 그 이상야릇한 감정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 × × 1992년 3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에서 승선할 때는 5명, 1994년 9월,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에서 하선할시엔 3명… 한 친구를 진눈까비 흩날리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바다에 수장하고 또 한 친구를 태평양의 군도 - 싸이판의 유치장에 남긴채 환고향하는 학송이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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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8
  • 심양총영사관 대련출장소 문제점
    중국 심양총영사관 대련출장소 민원업무처리방법, 민원인들 ‘고개 갸웃’ [동포투데이] 법무부의 외국국적 동포정책제도 개선으로 지난 4월1일부터, 현재 만 55세 이상 60세 미만인 동포, 미성년자, 제조업 등 근무가족 등에게 제한적으로 발급되던 단기사증이 만 60세 미만인 외국국적동포에 대해 3년간 유효한 단기방문(C-3, 90일) 복수사증으로 확대 시행 됐다. 따라서 그동안 비자취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국동포들이 비자신청을 하기위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해당 각 영사관으로 몰리며( 정책 공지이후 부터 이미 여행사들이 돈을 받고 모집한 인원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민원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폭주하는 신청인으로 중국 주재 대한민국 심양총영사관(총영사 조백상)은 ‘3년 복수사증’을 지금 접수하면 올해 10월쯤에나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영사관들도 빨라야 7월에나 비자를 받을 수 있다니 입장이 같기는 마찬가지다. 영사업무도 업무이지만 많은 어려운 사정들을 갖고 있는 동포들은 여간 번거롭고 불편한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 대련출장소(총영사 백범흠)의 사증과 관련한 민원업무처리 방식이 잘못됐다는 민원이 있어 비자신청 동포들의 어려움을 가중 시키고 있다. 대련출장소는 인력부족으로 하루에 지정여행사 3곳에 20명씩밖에 접수를 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다음주부터 지정여행사 3곳을통해 30명씩 비자를 접수하라는고 통지를 내린상태라고 전했다. 출장소에 직접접수나 예약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조건 지정여행사를 통해 접수하라는 안내를 하고 있어 민원인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지정여행사와 그 아래 인원모집 하청여행사들이 비자를 빨리 빼준다는 조건으로 적게는 3000위안에서 10,000위안을 넘게 받고 있다는것이다.실제로 여행사들의 말을 믿고 그들이 요구한 금액을 지불한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법무부의 세부적인 정책이 공지된 직후부터 여행사들이 일정금액을 받고 이미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기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다. 대련출장소는 대련뿐만이 아니라 관할 이외 지역까지 접수를 받고 있으며, 대련내에 여행사 3곳을 지정하여 각 여행사마다 하루 20~30명씩 접수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일반 비 지정여행사들까지 현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물을 통하여 순서와 상관없이 빠른 시일 내에 비자를 발급받게 해줄 수 있다는 말들로 현혹하고 있는 등, 빨리 비자를 발급받고 싶어 하는 동포들의 금전적 요구로 경제적 부담을 가중 시키고 있다. 대련출장소는 “부족한 인력으로 시행초기 폭주하는 민원을 감당하기 어려워 모든 민원인이 만족할 수 있는 업무를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지정여행사도 불러 주의사항을 주지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며, “시행초기라 몰리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업무가 안정되면서 해결될 일이다.”라며 "혹시 정책이 바뀌지 않을까 불안해서 일시 몰리는 현상이니 시간을 가지고 접수를 해주었으면 한다" 라는 문제 해결하고는 거리가 먼 대답뿐이였다. 정책 시행 초기의 혼란은 어느 정도 이해는 하나, 빠르고 공정한 업무로 오해를 불식시키고 민원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이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의 입장이다.정책이 공지된 이후부터 일정금액을 받고 이미 많은 인원을 모집해 놓았기 때문에 정책발표를 듣고 접수하는 사람들은 접수할 기회가 전혀 없는 상황을 영사관측은 알아야 한다. 또한 대련출장소는 인력부족을 말하지 말고, 업무 범위를 관할 지역으로 국한 시켜 업무의 충실도를 높이고, 지정여행사의 영업행위의 감독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의 영사로서 각종 비리의혹과 지정여행사와의 검은연결고리 의혹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이다. 재외공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정직,성실,공정,친절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국가와 국민들에게 불명예스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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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6
  • 지하철타고 베이징 봄꽃 나들이 가세요
    올해 봄기온이 갑작스레 오르면서 대부분의 봄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개화를 했다. 어제 4월 3일, 베이징시 공원관리센터는 시민들이 지하철을 이용한 봄꽃 나들이 노선을 공지했다. 지하철 접근 가능 공원 ▷ 1호선 :1. 옥연담공원- 군사박물관 역 玉渊潭公园(军事博物馆站)2. 중산공원 - 천안문서역 中山公园(天安门西站) ▷ 4호선3. 이화원 - 북궁문 역 颐和园(北宫门站)4. 자죽원공원 - 국가도서관 역 紫竹院公园(国家图书馆站)5. 동물원 - 동물원 역 北京动物园(动物园站)6. 도연정공원 - 도연정 역 陶然亭公园(陶然亭站) ▷ 5호선 7. 천단공원 - 천단동문 역 天坛公园(天坛东门站) ▷ 6호선 8.자죽원공원 - 백석교 남역 紫竹院公园(白石桥南站)9.동물원 - 백석교남 역 北京动物园(白石桥南站)10. 북해공원 - 북해북역 北海公园(北海北站)11. 경산공원 - 북해북역 景山公园(北海北站) ▷ 9호선12. 옥연담공원 - 백퇴자 역이나 군사박물관 역 玉渊潭公园(白堆子站、军事博物馆站)13. 자죽원공원 - 국가도서관 역 紫竹院公园(国家图书馆站) 14. 동물원 - 국가도서관 역 北京动物园(国家图书馆站) ▷ 14호선15. 중국원림박물관 - 원박원역 中国园林博物馆(园博园站) 봄꽃 감상지 12곳 1. 베이징식물원 과학보급관 서북축 - 복사꽃2. 옥연담공원 서북부 - 벚꽃3. 천단공원 북문 바깥서쪽편 - 살구꽃4. 이화원 장랑복도 - 매화5. 북해공원 서안 - 해당화6. 베이징동물원 - 살구꽃7. 경산공원 만춘정 주변 - 산복사꽃8. 향산공원 - 산복사꽃과 산살구꽃9. 중산공원 남단문 - 복사꽃10. 도연정공원 동남산 - 복사꽃11. 자죽원공원 호수가 - 복사꽃12. 원림박물관 - 배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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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6
  • 해외견문 시리즈(2) 쿠바에서의 20일
    ■ 김철균 일전 중앙CCTV를 통해 중남미의 쿠바를 소개하는 뉴스를 시청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쿠바도 이제는 대외로 개방하고 있으며 미국을 포함한 서방나라들에서 각종 제재를 취소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의 뇌리에는 한국상선 “코리안스타(KOREAN STAR)”호를 타고 쿠바의 항구도시 산타아고데쿠바(圣地亚哥)에 입항해 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91년 9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때 중남미의 알루바도섬(阿鲁巴岛)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선이 그리스(希腊) 나비니아 대리점으로부터 쿠바에 가서 밀감 3000톤을 적재하라는 팩스를 받은 것은 9월18일 오후였다. 그러자 뒤따라 선내방송은 쿠바 입항시의 유의할 점과 선원마다 갖고 있는 일체의 소지품과 달러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신고할데 관한 지시를 하달했다. 그만큼 그 때까지도 꾸바입항절차가 까다로왔던 모양이었다. 까다로운 입항절차 한편 쿠바에 대한 주변국가의 감시와 봉쇄도 강화되는 실정, 그날 밤 본선이 쿠바를 향해 닻을 올리고 3 ~ 4시간쯤 향행했을 무렵 갑자기 선박상공에서 헬리꼽터의 동음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더니 선박기관실의 엔징이 문뜩 멈춰서는 것이었다. 이어서 미국경찰의 헬리꼽터 한대가 거센 선풍을 일으키며 뎃기(갑판)에 내려 앉더니 전신무장한 경찰 5명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내리자 바람으로 선원마다 침실의 문을 열게 하고는 측정의기로 한바퀴 검사하였으며 나중에는 기관실과 냉동창고까지 낱낱이 수색하고야 손을 뗐다. 듣는 말에 의하면 미국경찰의 이런 검사는 명목이 마약밀매를 사출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쿠바에 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뜻도 포함된다고 했다. 하긴 남의 나라로 입항하는 선박까지 수색하는 걸 보면 미국은 경찰마저 세계패권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코리안스타”호가 산따아고데꾸바항에 입항한 것은 이튿날 점심무렵이었다. 아니나다를가 쿠바의 세관경찰 역시 지나치게 까근할 정도로 우리들의 신분을 남김없이 확인하고는 일체 소지품과 돈까지 체크하였는데 그 것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엄한 입항절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때 본선에는 무협지를 비롯한 많은 한국 도서와 잡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인쇄물까지도 차봉하고는 출항 후에야 개봉할 수 있게 했다. 중국산 자전거천국 그날 저녁 우리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외출했다. 우리가 항구입구에서 외출등녹을 하고 밖에 나서자 곧바로 시내로 통하는 공공버스가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세관경찰들과는 달리 버스의 승객들은 우리한테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우리들속에 나를 포함한 몇몇 중국선원이 있음을 알자 “닌호우?(您好)”하고 중국말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자리를 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것은 우리가 버스표를 떼려고 달러를 내밀자 승무원은 한사코 받지 않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 같으면 외국인들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상투적 수단이겠는데 그들은 왜 그러는지? 후에 볼라니 승객들은 모두 작은 카드 하나만 보이고 내렸는데 우리에게 그런 카드가 없고 하니 그대로 내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스페인어로 (쿠바는 스레인어가 통용됨)술마실 곳이 어디인가를 물은 뒤 버스가 제일 호화로운 섭외호텔인 하와호텔에 도착하자 그 곳에서 곧바로 내렸다. 아무리 봉페정책을 실행한 쿠바였지만 하와호텔만은 디스코바, 커피점, 슈퍼마켓, 전자유희청 등 있을 것이 다 있어 이른바 “자본주의 세계”였으며 이를 이용하는 이들 또한 거개가 외국인들이었고 국내손님은 특수카드에 의해서만 출입이 허용됐다. 우리는 그 곳에서 거의 세시간이나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곳의 양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값도 싸고 또한 가짜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땅콩과 건포도로 안주해서 마시는 술맛은 각별히 좋은듯 했다. 밤 10시가 좀 지나자 우리는 소풍하러 밖으로 나왔다. 중국같으면 그 시간에는 행인이 적으련만 열대국가인 그 곳은 그 때가 제일 흥성할 때였다. 특히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그 곳도 중국처럼 자전거행렬이 물결쳤는데 자세히 볼라니 그 자전거의 절반 이상이 우리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영구(永久)”, “비둘기(飞鸽)”, “봉황(凤凰)” 등 명표들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과 쿠바사이도 무역래왕이 잦음을 알 수 있었다. 후에 볼라니 본선선원들이 하와호텔 슈퍼마켓에서 산 침대카바와 운동화 등도 모두 중국제품임이 확인되자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쿠바의 자전거타기열은 경제위기로 석유가 긴장하여 많은 기동차들이 뛰지 못하자 일기 시작했고 자전거수입 파트너도 중국으로 됐다고 한다. 한편 우리가 호텔을 나와 얼마 안되어 불현듯 본선의 제3기관 조리수인 박치국씨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저 담장밑에 아가씨들이 줄쳐 앉아 있어요”라고 흥분되어 부르짖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 쪽으로 쓸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가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미계의 세뇨리따(아가씨) 5~6명이 얌전히 앉아서 뭔가 기다리는 듯 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그토록 이쁠수가 없었다. 선원들은 대뜸 아가씨들한테 달라붙어 찧고 박고 했다. 여자를 되게 밝히는 한국의 “배놈”들, 어쩔 수 없었다. 헌데 이튿날 오전에 들을라니 그들 모두가 단속 때문에 호텔행을 하지 못하고 바다가나 길가의 잔디밭속에서 뒹글었다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값이 싸고 순진해서 좋았어”, “여기선 에이즈는 근심할 필요가 없어”라고들 하는 것이었다. 밀감 상역작업은 9월 20일부터 시작됐다. 헌데 수송시설이 낙후하여 차량속에 마차까지 동원되다 보니 작업효율이 빠를리 만무했다. 그런즉 작업양 체크만 하는 본선 선원들도 팔자가 늘어져 교대로 낮잠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저녁엔 뭘하랴. 또 외출해야지. 술 처먹고. 아가씨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그날 저녁 우리는 길도 익숙하기에 버스를 타지 않고 구경삼아 걷기로 했다. 그래서 전날에 스쳐지났던 거리풍경들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듣는바에 따르면 쿠바는 물산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다. 지하에는 철, 동, 아연 등이 풍부하여 중공업발전에 유리했고 지상은 커피, 사탕수수, 여송연, 코카인 등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산지이다. 헌데 이렇듯 경제발전의 우세를 갖고 있는 나라였으나 수백년에 달하는 스페인사람들의 통지와 그 후에 있는 전쟁의 세례 또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여서도 오래동안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때의 쿠바현실은 그닥 낙관할 바가 못되었다. 하긴 구소련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만도 구소련의 보호밑에 그닥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대외무역의 80% 이상이 구소련을 상대로 했다니까. 하지만 냉전이 결속된 후 구소련의 세계적 패권이 약화되면서 쿠바경제도 위기를 겪게 되였는바 이를 두고 한국인들은 사회주의국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허나 사회주의국가라고 낙후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실시하는 우리 중국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가. 한편 거리를 도보로 걸으면서 느낀 인상을 적어 본다면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의 양켠에 일떠선 건물들은 대부분 지난 세기 60~70년대에 지은듯 했는데 그 때는 중국에 비해 꽤 번영한듯 했고 거리의 도처에 쿠바수령 카스트로의 초상화가 있어 중국의 문화혁명시기를 방불케 했으며 달리는 차량도 적지만 택시는 더욱 적어 대부분 등불을 달고 깜찍하게 만든 마차가 택시대용으로 쓰이었다. 그외 빵점이나 야채가게마다 늘어선 행열과 어린이들이 맨 붉은넥타이를 볼 때마다 우리의 1970년대를 더욱 떠올리게 했다. 손님을 따뜻이 대하는 쿠바인 하와호텔밖은 그 전날보다 확연히 달랐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어디로부터 모여들었는지 수많은 아가씨들이 향해 눈을 깜빡여 보였는데 여하튼 그 곳의 미녀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한편 아가씨를 전문 소개하는 거간군이 나타 났는가 하면 이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출동했다. 보아하니 “배놈”들의 외출은 거리구경이나 답사도 아닌 아가씨사냥에 불과했고 그 아가씨들 역시 여자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한국선원들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쿠바사회의 한측면일뿐 외국인들을 위해 성실하게 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산따아고데쿠바항에 입항해 있던 중 10월 3일(음력 8월 26일)은 바로 나의 생일이었다. 그날밤 따라 바깥날씨가 하도 청신했기에 우리는 호텔밖 잔디밭에서 나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내가 호텔에서 산 “JB”표 위스키 네병과 배에서 갖고간 말린 오징어 따위의 안주를 내놓고 한순배 돌렸는데 불현듯 멋진 옷차림을 한 단체가 다가와 공연요청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우리가 일제히 좋다고 박수를 쳐주자 그들은 곧바로 야외공연을 시작했다.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바이올린독주, 벨칸토창법의 여중음독창 그리고 스페인군무 비슷한 남녀쌍쌍의 민속춤…거기에서 알만한 음악은 녀중음가수의 “모스크바교외의 밤”뿐이었지만 음악이란 국경이 없다고 해외에 가있는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흥분시켰다. 특히 여중음가수의 매력은 이성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이 미적매력으로 우리가 감화되게 했다. 그날 본선의 정유식 선장이 그들한테 수고비로 200달러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딱 잘라 100달러만 받고 영수증까지 남겼는데 그것 또한 인상 깊었다. 그밖에 우리가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기간 구소련선박 네척과 중국선박 두척, 그리고 조선의 선박 한척이 선후로 입항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구소련배는 목재와 기름을 하역하는 잡화선과 기름배였고 중국배 두척은 다 목화를 하역하는 컨터이너선이었으며 조선배는 시멘트를 하역하는 밀봉선이었다. 이로 보아 그 때까지도 쿠바의 대 무역국가가 몹시 제한되어 있는듯 했다. ※ ※ ※ 사람은 모든 것이 지난 뒤에야 이전의 유치함과 아둔했던 것을 깨닫는 법이다. 마치 우리가 30년전 강냉이죽을 먹으면서도 제일 잘 산다고 으시대던 것처럼 20여년전의 쿠바 현실도 마찬가지었다. 저로동효율에 단조로운 인민의 물질문화생활, 세계가 점점 하나의 지구촌으로 둥글어 가고 있다. 하다면 쿠바 역시 자본주의국가를 포함한 모든 나라들을 상대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모든 시장까지 풀어 놓아야 한다고 느껴진다. 나의 일생에서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된 쿠바와 그 곳의 후더운 사람들, 후에 다시 가볼 수나 있을는지?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6
  • [수기] 인생스케치
    ■ 이진숙 새의 족속들을 보면 거개가 수컷이 암컷보다 더 멋지게 생겼다 한다. 붉은 볏을 머리에 이고 갈구리발에 머리를 잔득 쳐들고 멋지게 휘여진 꼬리를 흔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걷는 수탉의 도고한 모습은 실로 오만한 왕자를 방불케 한다. “문, 무, 용, 인, 신(文,武,勇,仁,信)” 5덕을 갖췄다는 수탉은 12띠 중에서 유일하게 날수 있는 동물이다. 라이벌과 맞서 용감하게 싸워 “용덕”이라는데 닭띠생인 내가 라이벌로 보였는지 어릴 때에 죽도록 혼난 적이 있다. 지금도 장거리나 농촌 마을에 갔다가 덩치가 큰 수탉을 보면 속이 한줌만 해서 슬그머니 피한다. 대약진으로 한창 들끓던 그 연대- 바로 1958년에 나는 초중에 붙었다. 학교들마다 근공검학이랍시고 별의별 일들을 다 했다. 우리 학급에서는 100여마리가 잘되는 오리와 닭을 키웠다. 수탉 한마리가 적어도 10여마리의 암탉을 거느린다더니 그 닭무리속에 얼마 안되는 수탉들이지만 우리 간담을 서늘케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 우리는 둘씩 한개조가 되어 번갈아 당번을 했다. 우리의 임무는 아침 일찍 밥도 먹지 못한채 닭과 오리를 밖으로 내몰고 우리청소를 한 다음 배추따위를 짓쪼아 물에 퍼지운 두병(콩찌꺼기)에 섞어 아침식사를 시키는 것, 그리고 업간체조시간, 점심시간, 하학후에 시간을 맞춰 모이를 주고 나중에 닭과 오리를 잠자리에 몰아넣으면 당번 끝이다. 어느 당번날 아침, 나는 대야에 모이를 담아들고 허리를 굽혀 좁고 기다란 나무구유에다 손으로 모이를 쭉 널어놓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드는 순간, 글쎄 수탉이란 놈이 새노랗고 똥그란 눈을 부릅뜨고 나의 팔을 탁 쫏는 것이었다. “어구-엄마” 나는 숨이 떨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긴박한 순간에 여자애들은 왜 남자애들과 달리 하나같이 엄마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이대야를 내 동댕이치고 요리조리 수탉을 피했다. 웬걸 , 그 놈은 한사코 따라와 길길이 뛰면서 되는대로 나를 쪼아 놓았다. 키가 작은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안에서 뱅뱅 돌아쳤다. 그럴수록 사납게 달려드는 수탉이다. 끝내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안에서 청소하던 당번애가 달려나와 나무꼬쟁이를 휘둘러서야 짐승과 사람전쟁은 끝났다. 지금 같으면 혈압이 터졌을거다. 제길할, 내가 닭이라고 착각했나 봐, 사람도 하루에 한번씩은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더니 요 놈의 수탉도 정신상태가 빵점인 모양이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는 나무꼬챙이를 들고 “복수”에 나섰다. 이게 뭐냐? 이번엔 딴놈 이 등 뒤에서 “꼬-꼬-꼬”하면서 야단을 부린다. 와-정말 개판이다. 그날 저녁 나는 자면서도 소리치고 놀라고 식은 땀을 흘리고 했다. 정말이지 닭우리에 “새 친구”가 오면 밤새 쪼아서 피투성이로 만든다는 그 “닭의 텃세”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혹시 덩치가 큰 수탉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런데 늙으막에 또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오후, 외손자를 데리고 함께 교문을 나섰다. 금방 골목길에 꺾어 들었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수탉 한마리가 우쭐우쭐 걸어오고 있었다. 옛날 나를 혼내던 그 수탉과 아주 흡사한 놈이다.(에구,북경에두 수탉이 활개치며 다니다니…) 나는 한 손에 손자의 책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애 손목을 잡고 다짜고짜 뛰었다. “얘, 닭이 너를 문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손자 놈은 나를 쳐다 보더니 “닭이 어떻게 물어, 쫏겠지”라며 비양댄다. 사실 난 그때 “쫏는다”는 말을 한어로 할줄 몰랐기 때문이다. 해마다 딸집에 가서 몇 달씩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번번이 발음이 틀리고 음조가 틀려 수없이 애하테 몰렸는데 오늘 또 당한 셈이다. (후-쬐꼬만 애한테까지 늘 훈시받다니…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긴 한족사위와 대화를 잘 나눌 수 없는 것이 내게는 큰 고민이고 스트레스다. 밥상에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도 반벙어리상을 해야 했고 사위와 말을 건네기도 조심스럽다. 한족말을 잘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되는 순감이 많다. 내게는 큰 후회였다. 정말이지 한어말로 제생각도 쨩 소리나게 표달못하니 이보다 더한 바보가 어디에 있을소냐?! 누군가 인생은 후회의 누적이라 했다. 틀리고 후회하고 하지 않아 후회하고… 먼저 미련하게 처사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크고 작은 모든것, 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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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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