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엄마의 눈물강

김애보 작사

안계린 작곡

김지협 노래

고생속에 설음많아 눈물많던 우리 엄마

오두막집 가난기워 다섯남매 키우시며

땀과 함께 쏟은 눈물 강이 되여 흘렀네

아 눈물강 엄마의 눈물강

나의 인생쪽배 띄워준

사랑의 사랑의 강이여

고생끝에 락이라 근심걱정 사라지고

만년세월 살기좋아 웃음열매 주렁진데

눈물많은 우리 엄마 옛말하며 우십니다

아 눈물강 엄마의 눈물강

나의 인생쪽배 저어갈

은혜로운 은혜로운 강이여


노래 뒤이야기

                     (수필)                               

                                       엄마의 눈물강

                                                   
                                                     김 광 룡

 

나의 엄마는 눈물도 많으시다. 내가 책이나 영화에서 보아온 강인하고 눈물이 없는 영웅어머니들의 형상과는 다른 겁도 많고 동정심도 많고 눈물도 많은 그런 엄마시다.

 

 나의 엄마는 17세에 우리 김씨가문에 시집오셨다. 아버지형제는 6형제였는데 아버지는 항렬에서 셋째였다. 맏큰아버지가 일찍 목재판에서 일하다 돌아가셨기에 둘째큰아버지네 식구로부터 막내삼촌네 식구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대가정이였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마을에서 서쪽 골안으로 한식경 들어가면 도끼봉이 장승처럼 버티고 섰고 마을동구엔 구수하가 느러지게 흐른다. 나의 엄마는 원래 목단강시내에서 괜찮게 사는 구두쟁이집의 귀한 딸로서 글도 읽으셨다. 지금도 돈계산같은 웬만한 수자계산은 일본말로 구구셈을 하시는데 나보다도 더 빠르다. 그런데 어떻게 연줄이 닿아서 나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농사일을 할줄 몰라 울었고 시집살이가 버거워 울었으며 물동이 일줄을 몰라 울음동이도 웬만히 쏟은것이 아니였다 한다.

대가정에서 시부모, 시아주버님, 동서들, 시동생들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살면서 웃음도 많았고 울음도 많았으며 옛말거리도 많이 남기셨단다. 지금은 배부른 저녁식사후에 듣는 구수한 옛말로 되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느 손주를 더 귀여워하여 몰래 감추었던 엿가락을 남모르게 주었다는둥, 또 어느 손주를 더 업어주어 동서끼리 시샘을 내게 했다는둥 하여간 식구가 많았으니 별의별 이야기들이 무지 많다.


후에 우리 집은 세간나서 이집저집 이사하며 살았는데 내가 태여난 집은 너무나 볼품없는 오두막집이였다. 나는 오남매에서 우로 형님 두분, 누님 두분아래 제일 막내이다. 엄마는 나를 낳고 우셨단다. 기뻐서 우셨는지 아니면 가난한 살림에 나를 키울 일이 막연해서 우셨는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날부터 내 인생의 쪽배를 엄마의 눈물에 띄웠던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엄마의 애간장을 무던히도 태웠었다. 두살때 나는 크게 앓은적이 있었다. 인사불성이 되여 숨이 간들간들한 나를 눕혀놓고 엄마는 돈이 없어 병원에는 못가고 밤낮 울기만 하셨단다. 그러다가 결심을 내리고 나를 둘쳐업고 먼 곳에 사는 천주교회의 의원한테로 헐금씨금 달려가 돈이 없지만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살려줍시사 울면서 사정하셨단다. 엄마의 눈물에 하느님도 감동되였는지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때 뜸을 떴던 허물이 지금도 내 배꼽우에 큼직하게 남아있다.


내가 네살을 잡았을 때 머리가 심하게 헐었댔는데 낮에는 장난에 빠져 그런대로 엄마가 손질해주신 돼지똥집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벌거벗고 달아다녔지만 밤이 되여 좁은 오두막집구들에 누우면 머리에서 고름이 줄줄 흘렀다.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지금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엄마는 며칠밤 주무시지 못하고 우셨단다.

 

 후에 조선바람이 일자 아버지는 조선으로 건너갔고 돌아와서는 문화혁명바람에 밤낮 투쟁맞다보니 엄마 혼자서 우리 남매들을 키우시며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른다. 그때 학교에서 한창 공부를 잘하던 맏형님이 16세 나이에 부득불 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뒤를 이어 둘째형님도 엄마를 도와 농사일에 나섰다. 온 나라가 기아에 허덕이던 세월, 엄마의 손을 잡고 산골에 사는 맘씨고운 엄마의 친구집에 밥 얻어먹으러 다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밥그릇에 숟가락을 대면 그대로 와르르 쏟아지는 깔깔한 조밥을 볼이 미여지게 먹어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우셨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연길로 가려면 60전을 내고 뻐스를 탈수 있었지만 나는 그런 호사를 누릴수 없었다. 다섯살때의 일이다. 하루는 맏형님이 동네에서 자전거를 빌려 나를 자전거의 앞가름대에 달랑 앉히고 연길의 친척집으로 떠났던것이다. 형님이 자전거페달을 밟으면서 나에게 핸들을 꼭 붙잡으라 연신 당부했지만 좁고 단단한 쇠가름대에 오래동안 걸터앉았노라니 여린 엉뎅이가 몹시 배겨났고 핸들을 꼭 잡은 손은 맥이 풀렸다. 게다가 까댁까댁 졸기까지 하다가 심한 내리막을 달릴 때 그만 자전거에서 떨어지면서 왼쪽발목이 자전거바퀴에 끼워 나는 둬장길이는 거꾸로 달려 끌려갔다. 비록 고마운분들의 덕분에 제때에 치료를 받았지만 오래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방바닥을 기여다녔다. 엄마는 자식을 뻐스에도 태우지 못하는 당신자신을 저주하며 그렇게 애통하게 우셨다.

 

 밤이 되면 두 누님과 나 그리고 엄마는 한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덩이들이 허옇게 뜨면서 냄새를 풍기는 방안에서 나와 손우의 누나가 엄마의 량켠에 누워 서로 엄마의 젖몸을 빼앗겠다고 싸우면 엄마는 누런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가리키면서 우리와 글찾기를 하셨다. 그러다간 왜서인지 또 눈물을 흘리시군 했다.


우리 집 옆에는 작은 강이 있었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늘 그 강에서 빨래를 하였고 내또래의 조무래기들이 물장난을 쳤다. 어느 한번 이웃집 아줌마가 빨래를 하다가 불시에 강물에 엎어지자 엄마는 울음부터 터치시며 그 아줌마를 물에서 간신히 건져 집에 업어다 눕히고는 가슴을 문질러주면서 아줌마가 눈을 뜰 때까지 우시였다.


내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대학생을 둔 가정이 없었는지라 우리 집에서는 사흘동안 잔치를 벌렸다. 동네분들을 모시고 친척친우들을 청하고… 엄마는 우시였다. 웃으시며 우시였다. 그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월급으로 엄마한테 양털세타를 사드렸을 때도 엄마는 웃으며 우시였다. 밝게 우시였다. 그때 흘리던 엄마의 눈물이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몇해전의 겨울, 나는 몸건강이 좋지 못하여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고향에 계시는 엄마는 며칠후에야 내가 병들어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락루하시다가 그만 쓰러지시였다. 뇌출혈이였다. 며칠후 먼저 퇴원한 내가 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줄곧 혼미상태에 계시던 엄마는 내 부름소리에 깨여났다. 나를 알아본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셨다. 엄마가 퇴원하던 날, 내가 엄마를 안아서 차에 모시자 엄마는 나에게 젖을 먹였던 값을 받았다면서 우시였다. 순간, 나도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 이런것이 엄마의 사랑인가. 당신은 자식때문에 손이 발이 되도록 고생하셨고 속에 재가 앉도록 애태웠어도 못난 자식 어쩌다 한번 사람의 흉내를 낸것이 그렇게도 고마운지, 실로 부끄러웠다…


나의 엄마는 참 눈물도 많으시다. 기쁘나 슬프나 먼저 눈물부터 흘리신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과정에 암초도 많았다. 매번 내 생명의 쪽배가 암초에 부딪쳐 가라앉으려 할 때면 엄마는 눈물로 내 생명의 쪽배를 다시 띄워주셨다. 80고령을 넘어선 엄마는 이렇게 평생 눈물에 사셨고 얼굴엔 온통 강줄기이다. 이젠 나도 뒤늦게나마 엄마께서 행복의 눈물을 흘리시게끔 엄마의 여생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그리고 엄마의 눈물강에서 더 힘있게 인생의 노를 저으리라.

엄마, 어머님, 부디장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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