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숙, 1915년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지금의 안도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어려서부터 집살림을 도와 산나물도 캐오고 땔나무도 해오면서 노동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남자들 못지않게 힘도 셌으며 성격도 남달리 쾌활하였다.
그가 15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 동만일대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제·반봉건투쟁은 노한 불길마냥 용정을 중심으로 온 동만을 휩쓸었다.
그 당시 중평촌에는 혁명자들이 세운 야학교가 있었다. 선생은 농민들에게 문화지식을 보급한다는 명의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자유해방을 쟁취할데 관해 선전하였다. 당시혁명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사람들 중에는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12~13세 가량의 소녀가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그는 매일 저녁마다 가장 일찍 야학교에 와 강의시간을 기다렸으며 강의가 시작되면 정신을 집중하여 들었다. 때로는 눈을 깜빡이면서 뭔가를 사색하기도 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아버지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전.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어느 하루 허성숙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 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 속에 은폐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봇대에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봇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놈들에게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
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
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
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