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중동 원유가 아시아로 나오는 길목에는 호르무즈 해협이 있다. 이란과 오만 사이의 좁은 바닷길이다. 중동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국제유가가 먼저 반응하는 곳도 여기다.
최근 이 익숙한 원유 지도에 또 하나의 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서쪽 홍해까지 이어지는 동서횡단 송유관이다.
사우디는 최근 이 송유관 가동을 재개하고 홍해 연안 얀부에서 원유 선적을 다시 시작했다. 지난 11일 드론 공격으로 멈춰선 뒤 약 보름 만이다.
29일 무역업계와 선박 추적 자료를 종합하면 얀부에서는 지난주부터 하루 약 200만 배럴의 원유가 선적되고 있다. 동서횡단 송유관을 타고 이동하는 물량도 하루 약 265만 배럴까지 올라왔다.
이 원유는 호르무즈를 지나지 않는다. 사우디 동부에서 파이프를 타고 국토를 가로질러 얀부로 이동한 뒤 유조선에 실린다. 페르시아만 쪽 수송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우디가 꺼낼 수 있는 우회 카드다.
송유관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달라진 것은 쓰임새다.
올해 중동 정세가 흔들리고 호르무즈 통항까지 불안해지면서 사우디는 한때 하루 약 400만 배럴의 원유를 이 길로 돌렸다. 평소 보조 수송로에 가까웠던 사막의 파이프가 국제 원유시장의 비상통로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 비상통로도 안전하지 않았다. 9월 드론 공격으로 송유관이 멈추면서 얀부 선적까지 차질을 빚었다. 바닷길이 위험하면 육상으로 돌리면 된다는 계산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최근 상황은 조금씩 풀리고 있다. 호르무즈를 지나는 원유 물량이 저점에서 회복되고 얀부와 아랍에미리트 푸자이라를 통한 우회 수출도 늘었다. 중동지역 원유 수출은 분쟁 이전의 약 80% 수준까지 회복된 것으로 추산된다.
아직 정상화까지는 거리가 있다. 사우디 동서횡단 송유관의 현재 수송량은 하루 약 265만 배럴로, 과거 약 550만 배럴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완전 복구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이 이 흐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숫자로 드러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 따르면 한국의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은 2025년 69.1%였다. 미국과 에콰도르 등으로 수입선을 넓히면서 올해 3월에는 64.8%까지 낮아졌지만, 여전히 원유 10배럴 가운데 6배럴 이상을 중동에서 들여오는 구조다.
미국산 원유 비중은 같은 기간 17.0%에서 21.8%로 높아졌다. 수입처를 넓히고 있지만 중동산 비중이 60%를 훌쩍 넘는 상황에서는 어디서 사느냐만큼 어떤 길로 들여오느냐도 중요하다.
산유국이 원유를 충분히 생산해도 수송로가 흔들리면 한국까지 오는 과정에서 비용이 늘어난다. 유조선이 우회하면 항해 기간이 길어지고 보험료와 운송비가 뛴다. 선박 확보 경쟁까지 붙으면 원유 가격과 별개의 부담이 생긴다.
중동 산유국들도 출구를 넓히고 있다. 사우디는 얀부를 활용하고 아랍에미리트는 호르무즈 바깥의 푸자이라로 원유를 빼낼 수 있다. 하나의 해협에 수출길을 맡겨두기에는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우회로까지 공격받았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사막을 건너 홍해로 가면 된다. 그렇다면 홍해로 이어지는 송유관마저 멈추면 어디로 갈까.
중동에서 수천㎞ 떨어진 한국에도 가볍지 않은 질문이다. 원유를 얼마나 확보했느냐만으로 에너지 안보를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그 원유가 한국까지 무사히 들어올 길이 있느냐.
중동의 최근 상황이 다시 꺼내놓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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