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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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춘절, 글로벌 영향력 과시… 전 세계에 ‘레드 선풍’
    [동포투데이] 수 천년 간 전해온 중화민족의 중요한 명절로서 춘절은 중국인들 마음 속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몇년 간, 춘절은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졌고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떤 나라는 춘절을 법정 공휴일로 정했고, 어떤 나라는 춘절기간에 다양한 경축 활동을 벌이고 있고, 심지어 많은 나라의 정계 요인들도 춘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끼어들고’ 있다… 춘절은 어떻게 전 세계에서 ‘레드 선풍’을 일으켰을가? 그들에게도 춘절 연휴가 있다—여러 국가에서 춘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 춘절 연휴는 더이상 중국인만의 ‘복지’가 아니다. 갈수록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중국의 음력 춘절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음력 춘절을 지내고 법정 공휴일이 있는 나라는 베트남, 한국,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 나라다. ▲ 2015년, 춘절 전의 인도네시아 차이나 타운에 경사스러운 명절 분위가 흘러넘쳤다.[촬영/ 구스훙(顧時宏)] 아시아 국가 외에, 미국의 적지 않은 시와 주에서도 중국의 춘절을 자기 지역의 법정 공휴일로 정했다. 현재, 글로벌 근 20개 국가와 지역에서 중국의 춘절을 전 지역 혹은 관내 일부 도시의 법정 공휴일로 정했다. 중국의 춘절은 갈수록 글로벌화 되면서 전 세계가 함께 경축하는 명절로 되었다. 그들은 춘절을 이렇게 보낸다—춘절을 글로벌 초대형 축제로 만들어 춘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족 모임, 친지 방문과 새해 인사, 묘회(廟會, 사원의 임시 시장) 구경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춘절을 점차 초대형 축제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모를 것이다. ▲ 2017년, 태국 방콕의 차이나 타운에 짙은 춘절 분위기가 흘러넘치고 있다. [촬영/ 신화사 기자 리망망(李芒茫)] 2017년 중국 춘절 때, 영국 수도 런던에서 아시아 이외 지역에서의 가장 큰 춘절 축제가 벌어졌다. 용춤, 사자춤과 꽃차 퍼레이드로 구성된 축제 대오가 수많은 사람들의 관람과 갈채를 받으며 트라팔가 광장에서 출발해 차이나 타운으로 이동했다. 2017년 춘절까지,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이미 연속 17년 중국의 춘절을 위해 경관등을 켰고 시드니오페라하우스도 연속 5년 중국 신년 점등 행사를 거행했다… 중국의 춘절은 이미 글로벌의 성대한 명절로 되었다. 춘절 연휴기간의 해외여행이 열기를 띄게 되면서 많은 국가에서는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중국 관광객이 집에 있는 듯한 따스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 곳곳에 춘절과 관련된 캐릭터로 장식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원문 출처: 신화망(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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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북측 공연부터 KPOP콘서트까지 강릉라이브사이트 인산인해
    ▲ 사진=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설 연휴 첫날을 맞은 15일 강릉라이브사이트에서는 북측 공연단의 깜짝 공연이 펼쳐졌다. 라이브사이트를 찾은 5천여명의 관중들은 북측 응원단의 취주악단 공연을 함께 관람하며 ‘신비롭고 새롭다’, ‘생각보다 표정도 밝고 즐거워 보였다’ 등 다양한 의견들을 표현했다. 강릉올림픽파크에 위치한 라이브사이트에서는 이와 같이 북측 공연단의 깜짝 공연부터 락밴드, 비보이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까지 대회기간 내내 펼쳐질 뿐만 아니라 주요경기 생중계와 함께 단체 응원이 이루어지는 올림픽파크의 핫플레이스로 자리잡고 있다.설 연휴 셋째 날인 17일은 20시부터 라이브사이트 2회차 KPOP콘서트가 개최되는 날로 BAP, 노브레인, 장미여관, 백지영, 구구단, 아리아리걸스 등 국내 최정상급 가수의 출연으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K-POP출연진 라인업이 발표된 15일 강릉라이브사이트 현장에서는 다수의 관람객 사이에서 관람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는 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편, 17일은 프리스타일을 시작으로 피겨남자, 컬링, 아이스하키, 쇼트트랙 등 다수의 태극전사의 출전이 예정되어 있는 날로 단체응원전이 계획되어 있다. 조직위 관계자는 KPOP콘서트를 비롯한 라이브사이트의 공연은 경기티켓 소지자와 올림픽파크 입장권 소지자(2,000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설 연휴를 맞아 더욱 다채로운 문화콘텐츠가 준비되어 있으니 관람객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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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中 인기배우 류샤오칭(刘晓庆), 76세 남편과의 결혼생활 공개
    ▲ 사진= 류샤오칭(刘晓庆)웨이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동안으로 유명한 인기배우 류샤오칭(刘晓庆· 63)으로 말하면 지난 세기 80~90년대 대륙 연예계에서 하나의 조류를 이끌어 온 ‘별’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릇 경력, 연기 및 미모 등을 보아도 장즈이(章子怡), 판빙빙(范冰冰)과 양미(杨幂) 그 모두가 류쇼칭의 뒤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다. 일전 홍콩 봉황망(凤凰网)은 최근 류샤오칭의 결혼생활을 잠시 조명, 올해 76세 되는 그의 새 남편 왕쇼위(王晓玉)를 공개했다. 왕쇼위는 30여년 전부터 집착스레 류샤오칭한테 애정공세를 보내오던 부호남성이었으며 사진에 보이는 그는 76세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고도 건강한 모습이다. 한편 류샤오칭은 남편 왕쇼위와 함께 찍은 사진액자를 보이면서 “팬들의 요구에 의해 모든 것을 공개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행복한 심경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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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기태영·김병철·김지석, 설 맞이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사진 제공 : 제이스타즈엔터테인먼트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2018 무술년 새해, 제이스타즈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설 맞이 새해 인사를 건넸다. 15일 제이스타즈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배우들의 각양각색 개성이 담긴 사진과 함께 훈훈함이 묻어나는 친필 새해 인사를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기태영, 김병철, 김지석, 박민정, 박훈, 안세호, 이무생, 이진희, 이현진, 허준호, 고수정 등 11인의 소속 배우들이 직접 적은 정성스러운 메시지가 담겨있다. 김지석과 박훈, 안세호, 이진희는 "건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며 무엇보다도 팬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다정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이어 허준호, 박민정, 이현진은 새해 행운을 언급했다. 특히 박민정은 "올해는 모든 일 술술술"이라는 멘트로 보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냈다. 이밖에 기태영, 김병철, 이무생, 고수정 등이 친필 인사말로 팬들의 행복을 빌었다. 개성만점 팔색조 매력을 지닌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포진해있는 제이스타즈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의 2018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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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中 젊은 남녀 100차의 ‘모의결혼’ 끝에 진짜 부부로
    ▲ 사진= 봉황망(凤凰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4일 봉황망(凤凰网)에 따르면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100번의 <모의결혼(婚礼表演)> 끝에 진짜 부부로 되어 사람들한테서 미담으로 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삼두진(三都镇) 구성 어민촌(九姓渔村)에서 100차의 <수상모의결혼>을 한 끝에 지난해 말 진짜 부부로 됐고 현재 아내는 임신 중이며 새해 우리의 가장 큰 기다림은 귀여운 2세의 탄생이라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젊은이는 항저우시 건덕 삼두진 정부의 일군 쑨호우챵(孙浩强)으로 비록 사업경력은 길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한테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아내 천후이펀(陈慧芬) 사이의 로맨틱한 애정사 때문이었다. 아내 천후이펀과의 만남에 대해 소개하면서 쑨호우챵은 의미심장한 웃음부터 지었다. “저는 2013년 9월부터 삼두진 정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어요. 출근하여 며칠 후 진에서는 저더러 삼두 어민촌에 가서 <수상 모의결혼식>에 참가해 신랑 역을 맡아 하라는 것이었어요. 처음에 전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하며 이상해 했으나 후에 진에서 관광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주말마다 젊은 직원들을 보내 <임시배역>을 맡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때 워낙 신랑역을 맡은 사람이 있었으나 그 날 그가 몸이 아파 제가 대신 가게 되었는데 아마 연분이었던가 봐요. 만약 그 날 제가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부부의 오늘이 없었을 거랍니다.” 이 날, 쑨호우챵은 30분간 <모의신랑>역을 소화해냈고 처음으로 천후이펀이란 여성도 알게 됐다. 그 다음 주, 쑨호우챵이 진정부에 출근하여 근무할 때 불현 듯 앞으로부터 한 여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는데 몹시 낯이 익었다. 그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서 만나 본적이 있는 같군요.” 이에 그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렇게 그들 둘은 같은 진정부에 출근하는 <동료>였다. …그 뒤 그들 두 남녀는 계속 <수상 모의결혼>에 출연, 또 거의 매 주말마다 만나군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쑨호우창이 <가짜 일 진짜로 하자(假戏真做)>며 천후이펀한테 프로포즈했고 이에 그녀 역시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거부의사는 없었다. 그 때가 그들이 <모의결혼>에 30번째로 출연하던 날이었다. 이렇게 매 주말마다 <신랑신부>로 되군 하던 이들은 <모의결혼> 100차가 된 뒤엔 진짜결혼식을 올리자고 약속, 마침 2017년 9월이 되자 그들의 <모의결혼> 100차가 되었고 그 시간은 정확히 4년이었다. 그렇게 되어 2017년의 마지막 주말 정식으로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는 더 이상 <모의결혼>이 아닌 진짜 결혼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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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환구시보, 中 무기수출 세계가 주목
    ▲ 사지= 인타넷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16일, 중국의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环球时报)>는 <중국산 무기 세계가 주목>이란 글을 발표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되고 있는 중국산 무기에 대해 조명했다. 글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 사우디아라비아 특사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둥펑-3(东风-3)> 미사일을 보고 구입의향을 표시, 가격은 중국이 정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은 미사일에 있던 원 핵탄두를 철거한 뒤 다시 상규적인 탄두를 장착해서는 최종 35억 달러의 가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수출계약을 맺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 미사일을 구입한 후, 전반 중동이 이 미사일의 사정권 범위 내에 들었다. 이어서 <환구시보>는 “그 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선진적인 <둥펑 21>(东风-21)형 미사일, PLZ-45형 155밀리 자행유탄포와 <무지개 -4>형 무인 정찰공격기 등 무기 및 중국이 파키스탄에 위탁하여 제조한 <홍전 -8(红箭-8)형 반탱크 미사일> 등 무기를 구입했다”라고 하면서 석유 비축량과 생산량이 세계 톱 자리를 차지하는 <석유왕국>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이윤이 돈독한 군사무기시장으로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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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中 대륙 뜨겁게 달군 4대 여인의 합영사진
    [동포투데이] 시나(新浪)망에 따르면 섣달그믐날인 15일, 한 장의 보기 드문 사진이 중국의 많은 사이트들을 도배해 전반 대륙의 눈길을 끌었다. 산시 사범대학(陕西师范大学)의 한 여학생은 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사진설명으로 “오른쪽으로부터 20살인 나, 42세인 어머니, 65세인 외할머니, 89세인 증조 외할머니”라고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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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中 가출녀 23년 만에 가족과 상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4일, 동방망(东方网)에 따르면 최근 23년 전 연인을 따라 가출했던 우훙(吴红)이라는 여인이 경찰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와 집사람들과 상봉하여 화제로 되고 있다. 1995년, 상하이시 칭푸구(青浦区) 잉중(盈中)향의 주민 우워이(吴伟)가 딸이 주택내에 들어 있는 세입자(租客) 남성과 함께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신고, 경찰은 즉시 조사에 들어갔으나 당시의 기술수준의 제한으로 큰 진전이 없었다. 이를 두고 경찰은 유괴 범죄일 가능성은 아닌 것으로 판단해 우훙으로 하여금 잠시 실종인구로 등록했다. 한편, 가출한 우훙은 함께 도망한 남친(우씨집의 세입자)과 함께 안후이 우후 우워이현(安徽芜湖无为县)에서 실제상 가정을 이루었으며 이듬해 딸을 출산했다. 당시 우훙은 자기의 신분증명을 할 수 없었기에 결혼등록을 할 수 없었고 직업도 찾지 못했으며 경제 내원이란 남자가 밖에 나가 품팔이를 하여 번 수입뿐이었다. 그러던 중 2008년 우훙은 재차 자식 한명을 출산, 그 뒤 2011년 가정에 보관했던 돈을 도둑 맞혔고 이로 인해 우훙의 동거은 정신이상에 걸리면서 노동능력까지 상실하여 가뜩이나 어렵던 가정생활에 설상가상이었다. 2016년 안후이 당지 경찰은 인구보편조사를 진행하던 중 우훙의 신분이 모호한 것을 발견, 경찰이 추궁 끝에 우훙은 자기는 상하이 잉중향 사람이며 부친의 성명은 우워이라는 것을 실토했다. 이 정보는 인차 상하이시 칭푸구 샹화교(香花桥) 파출소에 전달됐고 파출소 일군은 우훙이 가능하게 우워이의 실종된 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뒤이어 경찰은 각각 상하이와 안후이로부터 우훙과 오워이의 생물 샘풀을 수집해 비교 검사,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자 상하이 경찰은 안후이 경찰과의 소통 중 안후이 경찰이 수집한 생물 샘플은 수집해서부터 화험하기까지 교통이 불편한 등 원인으로 4개월이란 시일이 걸렸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첫 측검 결과가 정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그 뒤 상하이 경찰은 직접 안후이에 가서 우훙의 생물 샘플을 수집, 빠른 시일 내에 상하이시 공안국 기술검사실에 기탁하여 검사하게 하였다. 검사결과 우훙은 진짜 우워이의 실종된 딸임이 밝혀졌다. 한편, 딸 우훙이 실종되자 그녀의 부모는 신문에 <사람찾는 광고>를 여러 차례 게재하면서 딸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었고 딸 우훙 또한 가출 후 부모의 질책이 무서워 줄곧 연계하지 않았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당지 생활에 적응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얼마 전, 경찰의 도움으로 23년 만에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온 우훙은 그 동안 갖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부모한테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스럽다고 털어놓았다. 보도에 따르면 우훙이 부모와 상봉하기 얼마 전 그녀의 동거남은 전간작업 중 한차례의 사고로 사망, 이는 그녀로 하여금 더욱 부모와의 상봉을 재촉하게 했으며 상하이 공안 또한 이미 실종으로 동결했던 우훙의 호적을 회복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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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시대가 무색해진 상해탄의 절색미인- 엄인미(严仁美)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7년, 그의 나이 102세를 맞으며 사람들 앞에서 선보인 옛 상해의 절색미인이었던 엄인미(严仁美) 여사는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로 세월이 무색케 하였다. 비록 흰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잘 정리된 엄인미의 머리칼을 보고 모발분야의 연구일군들은 분분히 그녀한테 머리칼 보호비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엄인미 여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여러분들의 질문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어릴 때 저는 머리에 모발 몇 대 자라지 않아 늘 중머리를 하고 있은 <못난 새끼 오리>였답니다…….” … 엄인미의 인생을 밝히자면 그에 앞서 그 조상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엄인미의 증조부 엄소방(严筱舫)은 이홍장(李鸿章)의 참모로서 상해에서 중국의 첫 은행인 중국호시은행(中国互市银行)을 세웠고 제1임 총재로 되었으며 또 상해 총상회(上海总商会) 및 호번관 사영기업(浩繁官)을 창립, 녕파방(宁波帮)으로부터 <개산의 창시자(开山祖师)>로도 불렸다. 그리고 엄인미의 조부 엄자균(严子均)은 환전실무를 취급하는 금융업자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상해 성황묘(城隍庙)의 물화루금점(物华楼金店)과 남경로에서 유명한 아홉째 장주장(老九章绸庄) 모두가 엄자균의 하청업체였다. 한편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严智多)는 당시 절강성 호주(湖州)지구의 4대 재벌거물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유용(刘镛)의 손녀 유승의(刘承毅)를 부인으로 맞이, 첫 출산한 아이가 바로 엄인미었다. 헌데 임신 8개월만에 고고성을 울린 엄인미는 머리에 머리카락 몇대 없었다. 이는 엄지다 부부한테 큰 실망을 주었다. 반대로 엄인미의 조부는 아주 개화된 사람으로 아기의 이름을 <엄인미>라고 지었으며 아기가 자라면서 그 이름처럼 점점 아름답게 숙성하기를 희망했다. 그 뒤 엄인미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빡빡 깎으면 모발이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딸한테 실험, 2살이 될 때까지 엄인미는 무려 7차례에 거쳐 <아기여승(婴儿女僧)>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후에 병원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한 친척이 엄인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 수차에 거쳐 치료하면서 비로서 효과를 보게 되었으며 귀국할 때의 엄인미는 새까만 모발로 뒤덮이었다. 6살부터 엄인미는 조모를 따라다니면서 생활, 7살이 되자 계모의 고모가 교장으로 있는 계수여자학교(启秀女校)에 입학하면서 학업의 첫 발자국을 뗐고 10살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섯째 고모가 임직하고 있는 중서여자중학(中西女中)에 학적을 옮겼다. 당시 중서여자중학교는 명망 높은 귀족서당이었는데 엄인미가 다니는 학급에 도합 9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이 중 엄인미를 포함한 8명 여학생이 가장 절친한 사이었다. 그 때, 엄인미 외 7명의 자매 역시 모두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명문가정의 규수들로서 이들 중에는 국민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있는 장수용(张寿镛)의 딸 장함분(张涵芬), 중국 서약업의 선구자 황초구(黄楚九)의 딸 황혜보(黄惠宝), 중국 주 프랑스 대사의 딸 당민정(唐民贞), 복건의 거상 임씨 가문의 규수 임앵(林樱) 등이었다. 엄인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기가 그녀한테 있어서 가장 천진난만했으며 즐겁고도 유쾌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엄씨 일가에는 한 규수가 봉건식 결혼에 반항해 타지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은 이 일가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엄인미의 부친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여자애들의 반항심은 공부를 하면서 현시대 물정을 너무 많이 알아서이고 이런 여자애들을 잘 단속하려면 공부를 적당히 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 때 엄인미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에 엄인미는 공부를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한테 맞섰고, 이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딸이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아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이어 기적이 생겼다. 아버지의 뜻밖으로 엄인미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은 건 물론이고 전 학급의 1등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제 중학교만 졸업하면 공부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 이유인즉 이미 딸의 결혼상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1929년 엄인미의 여섯째 고모가 결혼, 고모가 결혼한 마씨 가정은 상업에 종사하는 아주 부유한 가정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 고모의 출가와 더불어 마씨 가정에서는 인편을 통해 또 다른 기별을 보내왔다. 즉 마씨 가정에서는 엄인미까지 며느리감으로 점찍고 있으며 그 어떤 요구도 다 들어 줄테니 재삼 혼약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씨 가정으로 놓고 말하면 첫째, 당시의 엄인미가 천하절색이었고 둘째는 당시 마씨의 부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상황으로 엄인미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액막이(冲喜)>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는 마씨 가정의 외부배경만 보고 흔쾌히 그 혼인을 허락했으며 엄인미가 불복하자 그 때부터 딸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는 서당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엄인미는 단식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강요에 대항, 단식이 지속됨에 따라 영양실조가 왔으며 나중에는 폐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그 뒤 사태의 위태로움을 느낀 엄인미의 외조부는 급히 외손녀를 항주로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작심했다. 엄인미의 외조부를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외손녀를 애지중지하던 어른이었다. 그는 외손녀의 병 치료를 위해 좋다는 약을 다 구해왔고 용하다는 명의는 다 청해오기도 했으며 거처 옥상에 유리방(玻璃房) 하나를 가설하여 엄인미로 하여금 경상적으로 햇볕 쪼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외조부의 정성이 지극해서일까? 과연 약 1년 뒤 엄인미의 병세는 근본적으로 호전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부친과의 마라톤식 타협 끝에 양보와 주견을 병행한 협약을 맺었다. 즉 결혼은 할 수 있으나 공부는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 상해 홍구클럽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긴 엄인미의 사진(제일 가운데 여인이 엄인미임) 엄인미가 결혼한 뒤 과연 마씨네 마님의 병세가 나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엄인미는 임신했고 더 이상 서당으로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마씨 가정에서는 한 영국인 목사를 청해 집에서 엄인미한테 영어와 사회교제 등을 배우주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당으로 다닐 수 없는 엄인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 시기 그래도 엄인미의 지인으로 돼 준 것은 <조씨네 넷째 딸>로 불리는 남편의 형수였다. 그녀는 늘 엄인미와 함께 상해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동반해주었다. 둘은 비록 동서 사이었지만 친자매마냥 아주 자별했으며 그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 역시 멋지고도 고급스런 무개차로서 한 대는 <조씨네 넷째 딸>이 운전했고 다른 한 대는 엄인미가 운전했다. 이렇듯 결혼 뒤 엄인미는 <조씨네 넷째 딸>한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했지만 기타의 여건은 여전히 많은 실망을 가져왔다. 마씨네 가문은 비록 부유하였지만 전형적인 봉건식의 가정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에 눈을 뜬 엄씨네 가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 부부 또한 한명은 봉건전통가정의 <나으리>였다면 다른 한명은 발랄하고도 개방적인 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유와 관념도 제각각이었고 음식습관마저도 도무지 융합될 수 없었다. 엄인미의 낭군 마령랑(马令郎)은 비교적 소탈하게 생겼지만 성격상 봉건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개인생활상 여자들과의 관계가 난잡했으며 그의 주위에는 생활습성이 나쁜 친구들이 늘 붙어다녔다. 그러한 그의 생활습성은 엄인미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드러났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엄인미가 주장하는 신문화 및 개방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엄인미는 결연히 신랑 마령랑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이 역시 그 때의 시대로서는 흔치 않게 봉건적 혼인에 대한 현대여성의 대담한 도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 엄인미는 송애령(宋霭龄)의 큰 딸 공녕의(孔令仪)와 각별히 가깝게 지낸다. 명문가족끼리는 세세대대로 교제한다고 공녕의가 비록 엄인미보다 한 살 어렸지만 두 자매는 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공녕의는 엄인미의 불행한 혼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더러 자주 공씨네 집에 와서 놀도록 하였으며 또한 공씨네 윤선(轮船)에 승선해 홍콩 등지에 가서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선에서 엄인미는 서양요리사한테서 제빵 기술을 습득,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여사한테도 드렸는데 송미령 여사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평소 엄인미는 송애령 여사한테 <부인> 하고 깎듯이 불렀지만 그럴 때마다 옹애령 여사는“너도 녕의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는 송애령 여사가 엄인미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뿐만 아니라 엄씨 가문과 공씨 가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기도 했다. 또한 송씨 가문과 공씨 가문 모두가 엄인미의 이혼결심을 지지했으며 그녀가 다시 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고무 격려했다. 태평양전쟁 전야, 엄인미의 수양어머니 성관이(盛关颐)가 상해를 떠나게 되어 신강화원 15번지(新康花园15号)의 주택이 비어있게 되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성관이는 엄인미가 이 주택에 기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부들을 청해 이 주택을 새롭게 수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계지내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였다. 아울러 엄인미가 들려고 했던 신강화원 15번지의 이 주택 역시 일본관원들이 사무실로 쓰려고 노리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이 주택을 보러왔던 일본인 야마모토는 엄인미의 미모를 보고는 더욱 끈질기게 <주택임대>를 명목으로 치근덕거렸으며 그날부터 매일 이 주택으로 들락거렸다. 이에 엄인미는 재삼 주택을 임대해주지 않는다고 밀막아 버렸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 친일주구 한명은 엄인미를 찾아와 “야먀모토는 관직이 높은데다 미혼이기에 그와 결혼하면 낭패될 것이 없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그 뒤 엄인미는 화를 피하려고 더 이상 신강화원 15번지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친정을 찾아와 치근덕거렸다. 이어 엄인미가 숙부의 집에 가 피신해 있자 야마모토는 또 숙부 집 주위에 감시망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엄인미는 다시 몰래 작은 고모가 출가해 있는 주씨 가정에서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엄인미가 주씨 가문에 숨어있던 그 나날, 주씨 가문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숨 죽이며 긴장해하던 나날들이었다. 한편, 송애령의 딸 공녕의는 엄인미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엄인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떠날 날자가 다가오자 뜻밖으로 엄인미의 원 시가인 마씨 가정에서는 그녀가 자식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게 했고 엄인미 역시 아들애와 떨어지기 싫었다. 결국 엄인미는 계속 상해에 남기로 했다. 일본인 야마모토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상황에서 상해에 홀로 남아 있는다는 것 역시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이러자 엄인미의 가까운 친척들은 상론한 끝에 유일한 방법은 하루 속히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 엄인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과연 엄인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신랑감이 나타났다. 바로 엄씨 가문과 세세대대로 가깝게 지내왔으며 역시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씨 가문의 공자- 이조민(李祖敏)이었다. 광화대학 경제학부(光华大学经济科)를 나온 이조민은 학식이 연박하고도 본분을 잘 지키었으며 대중성냥공장(大中火柴厂)의 보스이자 미혼의 몸이기도 했다. 혼례식 날, 만일의 경우 일본인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 염려되어 이씨 가문에서는 1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혼례도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그 일례로 엄인미의 결혼사진 중 신랑와 신부가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마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오늘까지 엄인미가 가장 유감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혼 뒤, 엄인미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극진히 상대를 사랑했으며 일본인들도 더 이상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엄인미는 애국운동에 적극 가담, 나라건설을 위해 자신이 솔선적으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공상업계의 모금계획도 적극 추진했다. 그러면서 이런 애국운동중 공상계의 유념의(刘念义), 영의인(荣毅仁), 성가년(盛康年) 등 거물들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하와이에 가서 당시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장학량과 조일획(조우쓰 쇼제-赵四小姐)를 탐방했는가 하면 또 워싱턴에 가서 채문치 장군(蔡文治将军)을 만나뵙기도 했다. 미국방문시 엄인미는 그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만나 뵐 계획을 하였으나 송미령이 대륙에서 온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송미령은 공녕의한테 부탁하여 엄인미한테 고급옷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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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유래상식] 중국 전통명절 춘절의 세시 풍속
    [동포투데이] 4천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춘절은 중국의 최대의 전통명절이다. 중국 민간의 전통적인 춘절은 음력 12월 23일 또는 24일에 부뚜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부터 시작해 정월 대보름까지 약 한달간 지속된다. 중국의 춘절은 명절기간이 길 뿐만아니라 설 풍속 또한 아주 다양하다. 부뚜막 신이나 조상에게 제를 지내고 집안 청소를 하거나 집안을 새롭게 장식하고, 주련을 붙이고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새우고 폭죽을 터뜨리고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고 설 세배를 하러 다니고…그야말로 짙은 민족적 특색을 지닌 세시풍속이 아주 많다. 중국인들은 음력 12월 23일 아니면 24일날을 '소년'(小年)이라고 부르는데 이날부터 설 모드에 들어간다. 새해를 맞아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주련을 붙이며 설 맞이 음식과 일용품들을 부지런히 장만한다. 그믐날 저녁이면 온 가족이 단란히 모여앉아 '年夜飯', 제야음식을 먹으며 가족 오락도 하고 설맞이 야회도 시청하며 또 0시를 기다려 밖에 나가 폭죽을 터뜨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새해 첫날에는 친지나 친구 집으로 설 새배를 간다. 일찍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설 세배의 풍속은 당나라와 송나라에 이르러 아주 성행했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지금은 직접 찾아가 새해 인사를 나누는 설 세배 외에도 전화나 문자로 설 인사를 하는 경우가 날로 보편화되고 있다. 설이면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두둑한 세뱃돈을 받는다. 또 중국 북방의 민간에서는 정월 초이튿날이면 재물신에게 제를 지내는 풍속을 이어가고 있고 남방에서는 정월 초닷새에 재물 신을 맞이해 새로운 한 해의 재운을 기원한다. 춘절의 옛 풍속을 본다면 크고 작은 가게들이 정월 초하루날부터 휴업하다 초 닷새에 다시 개업한다. 이는 재물신이 왕림하는 정월 초 닷새에 개장하면 한 해 동안 재운이 왕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정월 초엿새부터 정월 보름까지 전통적인 세시풍속 행사가 아주 많다. 오늘 까지도 중국인들은 정월 대보름 원소절까지 쇠어야 설명절이 진정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원소절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은 등롱을 내거는 것이다.원소절의 등롱구경은 당나라 때에 아주 성행해 전민적인 페스티벌로 됐다. 당현종 시기에는 장안성에 5만여개의 등롱이 내걸리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20칸, 약 450미터 높이의 거대 등루가 세워져 가관이였다고 한다. 원소절에는 일가족의 단란한 모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여러가지 소를 넣어 둥글게 빚은 찹쌀음식인'원소'를 먹는 풍습이 있다. 이 풍습은 송나라 때부터 유행되었다. 섣달 '소년'에서 시작해 정월 대보름 원소절까지, 중국인들의 춘절은 그야말로 명절 인구 대이동을 불러일으킬만큼 즐겁고 성대한 최대의 명절이다. (중국국제방송 번역/편집:주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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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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