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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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고속 둥팅호 대교 준공돼 통차
    ▲ 사진=신화통신사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신화통신에 따르면 1일, 항저우(杭州)와 루이리(瑞丽)를 잇는 항-루이 고속 둥팅(洞庭)호 대교가 전면 마무리가 되어 정식으로 통차를 하게 됐다. 이 대교는 주 대교의 길이가 1480미터로 강형 및 기둥으로 된 현수교(钢桁加劲梁悬索桥) 중국에서는 가장 긴 다리이며 세계적으로도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이 다리의 통차로 항주에서 호남성으로 통하는 전반 교통라인이 관통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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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1
  • 北 예술단 ‘삼지연관현악단’ 공연 입장권, 2일부터 인터파크 통해 응모
    [동포투테이]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 이하 문체부)와 통일부(장관 조명균), 서울시(시장 박원순)는 2월 8일 강릉아트센터와 2월 11일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개최될 북측 예술단 ‘삼지연관현악단’ 특별공연 관람을 희망하는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 응모 및 추첨을 통해 총 1,060명을 초청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위해 2018년 2월 2일(금) 낮 12시부터 3일(토) 낮 12시까지 24시간 동안 인터파크티켓(ticket.interpark.com) 또는 모바일(웹·앱 mticket.interpark.com)을 통해 온라인 응모를 진행하고, 연령대별 무작위 추첨을 통해 당첨된 530명에게 공연관람 티켓 2매씩을 제공할 예정이다. 응모를 위해서는 회원가입을 해야한다. 응모가 끝난 후 공개적인 무작위 추첨을 통해 강릉·서울 공연관람 티켓 당첨자를 선정한다. 당첨자 명단은 2월 6일(화) 오전 인터파크티켓 사이트 내에 공지할 예정이며, 응모 시 기재한 본인의 전화번**도 당첨 안내 문자가 발송될 예정이다. 2월 8일(목) 강릉아트센터 공연, 2월 11일(일) 서울 국립중앙극장 공연 중 한 곳만 신청이 가능하며 중복 신청 시 추첨에서 제외된다. 당첨자는 공연 당일 해당 극장 매표소에서 공연 시작 1시간 30분 전부터 공연관람 티켓을 수령할 수 있으며, 공연 당일 본인 확인을 위해 당첨자 본인의 신분증(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외국인등록증 등)을 반드시 지참하고 극장을 방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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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1
  • 연변부덕, 덴마크 국가대표 공격수 라세 바이브 영입 추진
    [동포투데이] 현재 연변부덕은 공격선에 실력이 막강한 "득점 기계" 영입이 시급하다. 영국 언론 스카이 스포츠는 연변부덕이 잉글랜드 2부리그 브렌트포드 FC 공격수, 덴마크 국가대표팀 선수인 라세 바이브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덴마크 국가대표 공격수 라세 바이브(Lasse Vibe) 올해 30살인 라세 바이브 신장이 181센치메터이고 체중이 73킬로그람이며 중앙공격수이다. 2015년에 스위스 1부리그의 IFK예테보리팀에서 브렌트포드 FC로 이적한후 97경기에서 37골을 냈다. IFK예테보리팀 시절, 라세 바이브는 2014시즌 스위스 1부리그 득점왕을 거머쥐면서 팀의 리그우승에 크게 한몫하였다. 2014시즌 라세 바이브는 26경기에서 23골을 기록했다. 지난해 광저우 헝다, 베이징 궈안, 톈진타이다 등 구단들이 라세 바이브 영입에 의향을 보인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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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중국축구협회 2018년 갑급리그 참가클럽 발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시나넷에 따르면 1월 31일, 중국축구협회는 2018년 중국축구 갑급 리그에 참가할 16개 클럽 명단을 공개하면서 <중국축구협회 프로리그 참가클럽 조건 및 심사법> 그리고 <중국축구협회 프로리그 클럽가입 실행세칙>의 규정에 의해 올해 신청한 모든 클럽에 대한 심사결과 16개 클럽이 중국축구 갑급리그에 참가할 요구조건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심사에 통과된 클럽은 다음과 같다. 연변부덕축구클럽 주식유한회사 요녕축구클럽 주식유한회사 석가장영창축구클럽 유한회사 청도황해축구클럽 유한회사 무한줘르직업축구클럽 유한회사 심천시축구클럽 유한회사 상해신흠축구클럽 유한회사 북경공고축구클럽 유한회사 절강녹성축구클럽 유한회사 내몽골중우축구클럽 유한회사 신강천산설표축구클럽 유한회사 매주객가축구클럽 유한회사 절강의등 축구발전 유한회사 대련초월축구클럽 유한회사 흑룡강화산명천축구클럽 유한회사 매주시 매현구 철한축구클럽 유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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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中 개국대전에 참가한 장개석 직계의 유일한 장령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4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날 북평에서는 신 정협개최 준비간담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곧 있을 개국대전(开国大典)에 어떤 인사들이 참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모택동이 발언할 차례가 되자 그는 곧바로 회의에 참가한 전 국민혁명군 장령 진명인(陈明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신 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개국대전도 있게 되는데 여기에 각 분야의 대표인사들이 다 있지만 유독 장개석 직계의 장령이 없구려. 오늘 이 간담회에 진명인이 참가했는데 진명인 장군이 참가하면 보다 대표성이 전면적이 될 수 있 수다.” 그도 그럴 것이 진명인은 원 장개석 직계의 유명한 장령으로 그 얼마 전 장사에서 부대를 이끌고 기의해 중국인민해방군 장령으로 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군인이었다. 1903년 호남성 리릉현 홍원향 홍원충(醴陵县洪源乡洪源冲)에서 태어난 진명인은 1924년에 정잠(程潜)이 손중산의 위탁을 받고 세운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다가 후일 교장인 정잠의 소개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후일 정잠과 장개석 모두 진명인의 행각을 두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진명인의 전임 교장이던 정잠은 자기가 인맥을 통해 알선해준 학생이 국민혁명군 중장(中将)까지 되었는가 하면 자기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기의할 줄을 몰랐으며 후임 교장이던 장개석 또한 자기가 알심들어 육성해낸 진명인이 후 날 자기를 배반하고 기의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편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 시절 용모가 준수하고 기민/영활했으며 학습 및 훈련 성적이 돌출하여 늘 교관들의 애대를 받았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한 진명인은 학교에 남아 학교 교도퇀의 견습 패장(见习排长)으로 되었다. 그 때인즉 동강에 둥지를 틀고 있던 군벌 진형명(陈炯明)이 광주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정보를 입수한 손중산은 광동의 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동정(东征)을 결심, 진형명의 반란을 평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이었다. 동정에서 있은 많은 전투에서 진명인은 한 개 패를 인솔하여 동관성(东莞城)내로 돌입, 적군 한 개 영의 무기를 노획하여 대공을 세웠으며 당시 퇀장인 유요신(刘尧宸)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는줄 알았는데 진명인이 나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라고 진명인을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진명인은 파격적으로 교도퇀 3련 연장으로 승급하였다. 한편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으로 원기를 크게 상실한 진형명은 원군이 도착하자 동정군이 광주에서 회사(回师)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재차 동강에서 반란을 계획, 손중산 역시 재차 동정을 결정했다. 이번의 제2차 동정군은 장개석이 총지휘를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부 주임을 담당했으며 부대는 1925년 10월 초 광주에서 출발해 중순에 혜주(惠州)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혜주성은 진형명의 부하인 양곤여(杨坤如)가 방어사령으로 있었다. 양곤여는 월군(粤军-광동군벌) 중의 저명한 맹장이었다. 게다가 혜주는 산세가 험준하고 3면에 물로 둘러 있어 방어하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운 천연적인 요새였다. 전투는 자못 치열하였다. 10월 13일 밤, 공격을 지휘하던 퇀장 유요신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오르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당장에서 사망되자 당시 결사대 대장이었던 진명인은 퇀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부르짖었다. “퇀장! 나 꼭 당신을 위해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이어서 진명인은 벌떡 일어나며 옆에 있는 부 연장한테 “우리 둘 중 누가 살아서 혜주성을 공략하면 죽은 전우의 부모처자를 돌봐 드리기로 하기오.” 말을 마친 진명인은 연대를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자신이 맡고 다른 한 갈래는 부 연장이 맡도록 하고는 재차 공격에 돌입했다. 이 때 <쿵 쿵 쿵> 하는 포 소리가 울리더니 성벽 한 곳이 무너지면서 성벽 위에 있던 월군의 기관총이 <벙어리>리로 되었다. 그러자 진명인은 기발을 추켜들고 무너진 성벽내로 돌입, 초연이 자욱한 가운데 적탄을 무릎 쓰고 성벽위에 올라 기발을 꽂았다. 아군의 기발이 성벽위에서 날리는 것을 본 동정군 사병들은 사기가 올라 <돌격!>을 외치면서 성내를 향해 맹공격을 들이 댔고 성벽에 의지해 수비하던 월군 사병들은 동정군의 기발을 보자 뿔뿔히 총을 벌리고 흩어지면서 도망쳤다. 혜주성은 함락되었다. 그 때까지 쌍안경으로 전투현장을 낱낱이 지켜보던 장개석은 “동정군 기발을 추켜들고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군인은 누구요?” “바로 교장님의 학생 진명인입니다!” 장개석 신변의 황포군관학교 교관 이명호(李明灏)가 힘 있게 대답했다. “음, 공을 세웠수다. 이번 전투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했수다.” 장개석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3일 후 혜주성 함락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장개석은 군 나팔수더러 진명인한테 경의를 표한다는 뜻으로 나팔을 세 번 불게 하고 직접 “진명인을 향해 차렷!”하고 명령하였다. 또한 진명인을 3영 영장으로 제발한다고 당장에서 선포하기도 했다. (후일 주은래 역시 혜주에서 총을 들고 진명인한테 차렷 자세를 취하면서 경례했다고 회고했다.) 혜주성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진명인은 북벌(北伐)중 장개석의 목숨까지 구해준 적이 있었다. ▲ 모택동과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진명인(陈明仁) 1926년 6월, 북벌군이 남창에 거의 닿았을 때 중도에서 적의 매복권에 들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과 백숭희 모두 지방군벌 손전방(孙传芳)이 설치한 첩첩포위망에 들었는데 정세는 대단히 위험했다. 이 때 바로 진명인이 나섰다. 진명인의 3영은 모두 결사대가 되어 혈로를 개척해 나갔으며 포위를 돌파하여 장개석과 백숭희를 구한 건 물론 손전방 군벌의 퇀장 한명을 생포하기도 했다. 군사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 진명인은 재차 장개석의 환심을 샀다. 그 때 진명인한테 감동된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의논한 후 한 국민당 요원의 딸을 진명인한테 소개시켜 주었으나 진명인은 그들의 성의에 사의를 표시,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사방여(谢芳茹)한테 한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 뒤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의 대령(上校)에서 국민혁명군 제10사 28려 56퇀의 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0년엔 28려의 여장, 1933년엔 국민혁명군 제10사의 중장 사장으로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장개석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과 가장 완강하게 싸운 국민당 군 장병이라면 진명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바 사평에서 동북인민해방군 임표부대와 싸운 전투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였다. 바로 1947년 6월, 동북인민해방군과 싸운 이른바 <사평보위전>에서 진명인은 사평시내의 5분의 3까지 잃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하여 장개석으로부터 청천백일훈장(青天白日勋章)을 받아 안았으며 국민당 군 제7병퇀 사령으로 되기도 했다. 후일 그 사평전투를 두고 장개석은 진명인을 <황포 1기 중 한 폭의 기발(黄埔一期的一面旗帜)>이라고 치하했고 1949년 9월 진명인을 만난 자리에서 “싸움에선 임표마저 한 수 꺾이는 진명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렇듯 장개석과 국민당을 위해 그 한 몸 불살랐던 진명인이었지만 부패무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실망 및 중공지하당의 설득으로 드디어 큰 결심을 내렸으며 자신의 옛 교장 정잠과 더불어 1949년 8월 4일, 국민당군 장병 7만 7000여명을 거느리고 장사기의(长沙起义)에 성공, 호남성의 이 성도를 평화적으로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진명인은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21병퇀 사령, 호남성 임시정부 주석, 호남성 군구 부 사령원, 인민해방군 제55군 군장 등 직에 역임했으며 1955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상장직함을 수여 받았다. 국민당군 장령으로부터 인민해방군 장령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군인으로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아온 진명인 장군은 1974년 5월 21일 북경에서 그 비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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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해피투게더3' 정소영-이태성, ‘황금빛 내 인생’ 비하인드 大 방출!
    ▲ 사진제공 : KBS 2TV '해피투게더3'[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해피투게더3’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팀이 출격한다. 시청자들의 든든한 사랑을 받고 있는 목요일 밤의 터줏대감 KBS 2TV ‘해피투게더3’(이하 ‘해투3’)의 2월 1일 방송은 김승우-고수희-정소영-이태성이 출연하는 ‘해투동-황금빛 미친 존재감 특집’과 ‘전설의 조동아리-내 노래를 불러줘:엔딩가수 특집 2탄’으로 꾸며진다. 특히 1부 ‘해투동’ 코너에는 매주 시청률 신화를 쓰고 있는 국민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정소영-이태성이 동반 출연해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정소영-이태성은 시청률 40%를 가진 자들답게 자신만만한 입담을 뽐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먼저 이태성은 드라마 인기의 비화를 공개했는데 특히 인기의 순기능이 아닌 깨알 같은 역기능을 털어놔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이태성은 “사우나에 가면 민망할 때가 있다”고 말문을 연 뒤 “탕에 누가 앉아 계신데 제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 않냐. 눈이 마주치고 ‘어?’라고 하다가 시선이 아래로 간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그는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도 놀란다’고 덧붙였고 이에 남자 출연진들이 일제히 야유를 터뜨려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정소영은 ‘원조 국민첫사랑’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정소영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첫사랑으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고, 현재 ‘황금빛 내 인생’에서는 강남구(최귀화 분)의 첫사랑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정소영은 “요즘 국민 첫사랑 하면 수지 씨 아니냐”며 겸손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이내 “저는 40대의 첫사랑으로 각인시키려고 한다”며 타겟층을 세분화해 폭소를 유발했다. 그런가 하면 두 사람은 ‘황금빛 내 인생’의 촬영장 뒷이야기들을 전해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태성은 ‘2017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배우 천호진과의 일화를 공개했다. 그는 “천호진 선생님께서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혼자만 안 가시더라. 왜 식사를 안 하시냐고 여쭤보니까 ‘배부르면 집중이 깨질까 봐 안 먹는다’고 하시더라”며 천호진의 진중함과 연기열정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 현장 모두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는 후문이다. 이날 정소영-이태성은 천호진의 일화를 비롯해 대중들이 궁금해하는 ‘황금빛 내 인생’ 촬영 현장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는 전언. 이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만큼이나 재미있는 정소영-이태성의 ‘황금빛 예능 활약’에 기대감이 수직 상승한다. 함께하면 더 행복한 목요일 밤 KBS 2TV ‘해피투게더3’는 오는 2월 1일(목) 밤 11시 10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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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세계청년리더총연맹, "검찰 내 성범죄 강력 규탄한다" 성명 발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세계청년리더총연맹(WFPL, 총재 이산하, www.wfple.org, 이하 세계연맹)은 대한민국 검찰 조직내부에서 여성 검사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 성폭행 등 성범죄가 자행되었다는 사실과 진실이 강압적으로 묻혔다는 현직 여성검사의 폭로에 대해서 "검찰 내 성범죄 강력 규탄한다'는 성명을 31일 발표했다. 세계연맹은 이날 성명에서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는 지난 26일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실명까지 내건 채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옆 자리에 동석했던 당시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가 허리를 감싸고 엉덩이를 쓰다듬었다"며, "실제 검찰 내에서 어느 여성 검사의 성폭행 사건도 발생했다"고 밝힌 내용에 주목했다. 세계연맹은 이어 "서 검사는 2010년 사건이 발생한 당시 소속 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는 선에서 사건을 정리하려 했지만 가해자로부터 아무런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며 "오히려 2014년 사무감사에서 갑작스레 검찰총장의 경고를 받았고, 2015년에는 15년차 검사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힘든 통영지청으로의 발령이 떨어져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고 말했다. 세계연맹은 특히 "권력기관 등을 포함한 공직사회의 기강이 바로잡힐 때 사회적약자인 여성들의 피해 또한 줄어들 수 있다"면서 "국민의 안전, 특히 사회적약자인 여성과 직결된 성범죄 문제는 여야 정치권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세계청년리더총연맹이 밝힌 "검찰내 성범죄 강력 규탄한다" 성명 전문이다. 제목: 검찰내 성범죄 강력 규탄한다 최근 현직 여성검사가 검찰 내부에서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 서지현 검사는 지난 26일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실명까지 내건 채 “2010년 한 장례식장에서 옆 자리에 동석했던 당시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가 허리를 감싸고 엉덩이를 쓰다듬었다"고 밝혔다. 또한 서 검사는 실제 검찰 내에서 어느 여성 검사의 성폭행 사건도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서 검사는 2010년 사건이 발생한 당시 소속 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는 선에서 사건을 정리하려 했지만 가해자로부터 아무런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오히려 2014년 사무감사에서 갑작스레 검찰총장의 경고를 받았고, 2015년에는 15년차 검사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힘든 통영지청으로의 발령이 떨어져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서검사가 피해를 입은 지 8년이 지났지만 폭로할 용기를 낸 데는 “미투 운동이 세상에 큰 경종이 되는 것을 보면서 검찰 내부 개혁을 이루는 작은 발걸음이라도 됐으면 하는 소망으로 힘겹게 글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서 검사는 성추행 사실을 당시 최 법무부 검찰국장이 앞장서 덮었다고 밝혔다. 그는 “검사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주변에서도 “그들이 너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며 만류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전근대적인 검찰 내 상명하복 기류가 인권을 짓밟는데 이용되었지만 동료들마저 쉬쉬 하는데 동조했던 것이다. 지난해 8월 서울서부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후배 여성검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면직 처분됐다. 2015년 서울북부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회식 자리에서 후배 여검사를 껴안았다가 징계를 받았고, 2014년에는 목포지청 검사가 동료 여검사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등 성추행해 물의를 빚었다. 또 2011년에는 검사들이 현장 실무교육 중이던 여성 사법연수생을 성추행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아닌 동등한 검사로서,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함에도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류의 횡포는 여성을 약자로 거듭 끌어내리며 2차, 3차 피해를 입게 만든다. 검찰 내부 비판에 목소리를 높여온 임은정 검사는 괴물 잡겠다고 검사가 됐는데, 우리 검찰이 괴물이더라고 개탄한 바 있다. 정의를 구현하고 투명한 윤리의식을 갖춰야 할 대한민국 검찰 조직 내부에서 여성 검사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 성폭행 등 성범죄가 자행되었다는 사실과 진실이 강압적으로 묻혔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권력기관 등을 포함한 공직사회의 기강이 바로잡힐 때 사회적약자인 여성들의 피해 또한 줄어들 수 있다. 국민의 안전, 특히 사회적약자인 여성과 직결된 성범죄 문제는 여야 정치권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야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더 이상 국가기관 등에서 이러한 범죄들이 재발할 수 없도록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등을 포함한 견제 장치를 조속히 마련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는 이번 사건에서 밝혀진 검찰 내 성추행 사건과 성폭행 사건을 철저히 재 조사하고 앞으로는 이러한 성범죄가 더 이상 재발할 수 없도록 사건발생과 동시에 신속히 가해자를 업무에서 완전 배제시켜 피해자 우선의 '피해자안심환경조성' 등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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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새 중국의 첫 여성 외교대사- 정설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사람들은 조선인 작곡가로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 및 <팔로군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두 나라 군가를 창작한 <군가 창작의 아버지>인 정율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의 부인이며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인 정설송(丁雪松)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설송- 그녀는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중국의 진보적인 여성혁명가였는가 하면 예술가 및 외교가로 맹활약을 펼쳐왔으며 남편 정율성에 못지 않는 걸출한 여성명인이었다. 1918년 5월 27일, 정설송은 중국 사천성 파현(巴县-지금 중경시 파남구)에서 출생, 1924년 파현 목동진 복음당 소학(木洞镇福音堂小学)에 입학하였고 중경시 문덕여자중학(文德女中) 및 사천성 성립여자직업학교(四川省立女子职业学校) 등을 거치면서 당시 중국 상황으로는 흔치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1934년, 정설송은 중경시 평민은행에 취직하면서 열혈적인 애국여성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18세 문학소녀였던 정설송은 당시 간행물이었던 중경의 <상무일보(商务日报)> 등 신문에 <민족해방의 전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꿈도 거품뿐(在民族解放前什么美梦都会成为泡影)>, <개인의 일체 환상을 포기한다(抛弃个人的一切幻想)> 등 글을 발표,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장한 뜻을 지녔다. 그 뒤 1936년 7월 중경시 직업청년구국회가 설립되자 이사로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 중경시 부녀구국회가 설립되자 상무이사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하지만 당시 중경에서의 국민당통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정설송은 단연히 혁명의 성지- 연안을 선택, 성도와 서안을 거쳐 연안을 찾았으며 1938년 1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제3기 2대대 여성대 편입되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뒤 선후로 제4대대 여성대 대장, 제5대대 여성대 대장을 맡다가 그 해 11월 항일군정대학 여성대대가 설립되자 대대장을 맡기도 했다. 정설송은 연안을 찾은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도 지식과 재능이 돌출한 청년여성이었다. 이는 후일 그가 정치적으로 발전함에 있어서도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7월, 연안에서 중국여자대학이 고고성을 울리자 이 대학 고급연구반에 입학한 정설송은 학생회 부회장 및 학생클럽의 편집으로 활약, 얼마 뒤 중앙에서 여자대학의 학생 45명을 선발하여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 선거사업에 투입시키자 정설송은 수덕(绥德), 미지(米脂) 등 현에서 선거사업단 부단장으로 있다가 1941년엔 섬감녕변구 참의회 사업에도 몸담았었고 또 변구 부주석 이정명(李鼎铭)의 비서로도 있었다. 이 시기 정설송은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알게 된다. 그녀는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 연안까지 찾아온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해 깊이 동정하던 나머지 나중에는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승화된다. 그 뒤 연안에서 정풍운동이 시작되자 정율성은 <계급이색분자>, <일본간첩> 등 혐의로 여러 가지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정율성과 정설송 사이 커다란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율성의 드높은 혁명열정과 혁명투지에 감화되었던 정설송은 변함없이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1941년 12월, 연안의 막굴에서 결혼식을 치르기까지에 이른다. 정설송은 문학과 음악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연안에서의 다망한 혁명사업과 간고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문학과 음악 재능을 키우는데 정력을 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1943년 4월, 임신 8개월이었던 정설송은 산비탈에 굴러 떨어지면서 조산, 이로 인해 그녀는 젖이 없었다. 그러자 정설송은 이를 악물고 평소 남편 정율성이 그렇게도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어미산양을 사서 딸애한테 양젖을 공급하기로 결심을 굳히기까지 했으며 바이올린을 판 것을 기념하여 이들 부부는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郑小提)>라고 지었다고 한다. ▲ 정율성,정설송(丁雪松) 부부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선언(방송)과 더불어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와 조선의 광복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해 9월, 정율성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정설송은 그토록 중국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산 설고 물 선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에 도착한 정설송은 남편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하는 해주에 머물다가 1947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侨务委员会) 비서장, 북조선화교연합회 위원장, 주중 동북행정위원회 북조선상업대표단 대표 등 직에 종사했으며 새중국의 창립 전야에는 신화사 평양분사의 사장에 임명되기고 했다. 1950년 한반도에 <6.25>가 발발하자 그 해 9월, 정율성과 정설송 부부는 주은래와 김일성의 협상과 동의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남편 정율성은 중국국적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정설송은 새 중국 건설 및 외교사업을 위해 더욱 분망한 활동에 투신하였다. 1952년부터 중공중앙 국제활동 지도위원회 사무실 주임으로 중국여성대표단을 따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거행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회의에 참가하였고 1958년에는 중국 고위층여성대표단 일원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으며 1961년에는 허광평이 이끄는 중국 여성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평선되었고 1958년 국무원 외교사업사무실이 설치되자 비서실 조장으로 부임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남편을 능가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정설송한테 있어서도 일종의 재난이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정설송은 사업정지를 당하면서 심사를 받았고 1969년에는 국가 직속기관을 떠나 녕하의 평라(平罗)에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심신상으로도 많은 위축을 받았다. 1971년 사업에 복직되자 정설송은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비서장(후엔 부회장)을 맡게 되면서 외국에 나가 많은 활동을 펼치었으며 1975년에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6년 12월 7일, 남편 정율성이 뇌출혈로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정설송이었지만 사업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1979년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주 네덜란드 중국대사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자 더욱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면서 중국의 대외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여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와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984년 8월 네덜란드 및 덴마크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정설송은 제6기, 제7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되면서 각종 국가 대사에 참여, 전국정협위원, 중국대외우호협회 이사의 신분으로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6개국 등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외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94년 6월에 정식으로 이직하였다. 이직 후 정설송은 자신의 인생 회억록을 쓰는 등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996년 한국 국립국악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남편 정율성인 고향은 광주광역시를 찾아 남편의 고향집을 다녀오기도 했다. 새 중국의 첫 외교대사였던 정설송 여사는 201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 여사의 일생은 여성혁명가의 일생이었고 중국의 첫 여성외교대사의 일생이었다. 정설송의 이름은 영원히 중국 근대 여성발전사에 휘황한 한 폐지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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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새로운 “비주얼”- 홍색성지 옌안에 2천만무“林海” 탄생
    ▲ 사진=신화사(新華社)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옌안(延安)이라고 하면 중국혁명의 성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그제 날 이 곳은 중국 섬북의 황토고원으로 거의 <불모의 땅>으로 불리던 지방으로 아주 낙후하고 사람들의 눈길이 거의 닿지 않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의 건국 후에도 옌안은 여전히 그 낙후한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난 세기 60연대 지식청년들마저 그곳으로 하향하기가 대단히 꺼려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옌안은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마냥 늘어선 것은 물론 <번대 머리>었던 민둥산들이 푸른 단장을 하기 시작, 경제생활에서의 부유와 더불어 대자연의 개조 역시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되었다. 1월 30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1999년부터 옌안사람들은 <자력갱생, 간고분투(自力更生,艰苦奋斗)>의 정신으로 물이 부족하고 식수난도가 큰 악열한 자연조건에서도 누계로 2000여만무에 달하는 황무지를 녹지로 만들어 섬북지구의 녹색면적을 북으로 400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사진은 옌안시 우치현(吴起县)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녹색화가 된 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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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中 정저우 철도경찰, 특대 가짜 기차표 제조판매사건 해명
    ▲ 사진=중신망(中新網)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월 30일, 중신망(中新網)에 따르면 중국 정저우(郑州) 철도경찰은 최근 특대 가짜 기차표 제조 및 판매 사건을 적발/해명하고 5명의 범죄 혐의자를 체포했으며 비법 교역장부와 범죄활동에 이용된 컴퓨터, 인쇄기 5대 등을 압수하였다. 이 5명의 범죄혐의자들은 중국의 전통명절인 춘절(한국의 구정)을 앞두고 기차표가 긴장한 기회를 이용하여 대량의 가짜 기차표를 제조하고 판매, 체포되던 당 날 이들의 몸에는 1만 6000여장의 가짜 기차표가 있었으며 그 표면가격은 150여만 위안으로 밝혀졌다. 철도경찰은 춘절을 앞두고 여행객들은 정규적이고도 합법적인 창구를 통해 기차표를 구입하거나 중국철도부의 관방 사이트 12306번을 통해 기차표를 예약/구매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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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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