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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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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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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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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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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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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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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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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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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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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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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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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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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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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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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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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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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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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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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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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 (5)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외지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흔히 “자비부담 부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최근 한 환자가 무한병원에 입원한 후 근근히 비의료보험 목록내에 있는 항생소로 치료를 받은 결과 자비부담이 7000여위안에 달했다. 요해에 따르면 이런 약을 사용할 때 의사들은 이런 약이 의료보험목록에 들지 않은다는 것을 환자한테 알려주지 않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 부문으로부터 관리압력을 비교적 크게 받는 병원일 수록 이런 “현금환자”를 통해 병원재정의 평형을 잡고 있으며 유명한 병원일수록 주요 환자의 내원이 전국 각지에서 오는“현금환자”로 되고 있다. 일개의 병원이라 할 때 의료 도덕상 마땅히 환자한테 어떤 약은 의료보험 결재범위에 속하고 어떤 약은 자비부담인가를 알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을 보면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고 있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거나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있으며 특히 외지에서 온“현금환자”에 한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정책상의 결재범위와 실제상의 결재상황 현재 중국은 기본상 사람마다 의료보험에 참가하고 있다. 이는 역사상의 거대한 진보이다. 하지만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병을 보이는 것이 자기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 결재비율상에서 자비부담 비율이 너무 높은 것이 가장 큰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2014년 모 성에서 한 3등 갑급병원의 집계에 따르면 농촌합작의료보험에 참가한 환자의 자비치료 비율은 57.93%, 도시진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36.48%었으며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24.54었였다. 이로 보아 기층의 환자일 수록 자비치료 비율이 높았고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 역시 정책상에서 규정한 결재비율보다 훨씬 낮았다. 그리고 병원등급이 높을 수록 결재받는 비율이 낮았으며 이는 외지치료에서의“원칙”으로 되고 있었다. 호북성의 경우 농촌의료합작 보험에 든 농민들을 사례로 든다면 향진 병원에서 치료할 때 800위안 이하면 그 전부의 치료비를 결재 받을 수 있으나 800위안 이상이면 85%를 결재받을 수 있었으며 만약 외지치료로 성급 의료기구에서 치료를 받으면 그 결재비율이 근근히 45~50%에 불과했다. 한편 등급이 높은 병원일수록 약물사용량은 상대적으로 적고 여러 가지 검사환절이 많으며 이 중 어떤 환절에 들어서는 결재받지 못할 부분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외지의 환자일 수록 부동한 지역의 정책 및 의료비용상의 차이로 환자의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많았다. 동일한 수술 현저한 가격차이 동일한 수술이지만 어떤 병원은 수술비가 4만위안이 들지만 어떤 병원은 1만위안이 들고 수술 후 어떤 병원에서는 도뇨관과 인류관(导尿和引流管)를 사용하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하는 병원들마다 그 가격대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이 적게 들게 하면서도 환자의 동통이 적게 하는가 하면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은 비용대로 받아내면서도 환자가 동통으로 몸부림치게 한다. 병원의 치료비는 탄성이 강한바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의료부문들에서 병종에 따라 가격대를 정해 고액의 비용에 한해서는 환자가 그 전부를 부담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환자로 하여금 돈을 적게 쓰고도 이상적인 치료효과를 보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현행의 약품구입체계를 두고 새로운 약품종이 나올 때마다 가격농단이 생겨 약값 인하에 불리하게 되기에 의료보험기구와 의료기구 및 의약회사가 공동으로 개혁을 진행하여 병보이기 힘든 상황 및 병원치료비가 높은 현상에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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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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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 (33)
- 호수위로 기차가 달린다? 이런 희한한 현상을 볼까? 이는 확실히 존재하는 일이다. 중국 청해성에는 한 찰한염호가 있다. 이곳은 일찍 한 수역이 넓은 함수호었다. 후에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많은 물이 증기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고 호면이 갈수록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염호로 변한 것이다. 이 염호의 표면에는 두꺼운 소금층이 있다. 마치 겨울의 호수에 얼음이 언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 소금층은 얼음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30-50cm 두께의 소금층은 평방미터터당 1600kg의 무게를 받아낼 수 있는바 완전히 자동차와 기차가 누르는 무게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청장도로의 31킬로미터의 구간이 바로 이 찰한염호위에 수건되었고 심지어 32킬로메터의 철도 역시 이 찰한염호위에 부설되어 있다. 가령 자동차와 기차가 이 찰한염호위로 오가는 정경을 보게 되면 아마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찰한염호우의 도로로면 혹은 철도가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에 따르면 도로로면 혹은 철도 옆의 소금층에 구멍을 뚫고 호수물이 흘러나와 부단히 파손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데 수분이 증발하면 나머지 소금이 파손된 부분을 고르롭게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재료를 절약하고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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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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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2)
- 바빌론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라크, 지점: 바그다드 동남부의의: 바비론문화의 상징임 바빌론유적(巴比伦古城)은 세계 저명한 옛성유적과 인류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약 기원전 1800년과 기원전 600년 사이에 수건, 바빌론과 신바빌론 등 두개의 강한 왕국이 선후로 수건에 참여하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인들이 바빌론성을 점령하면서 이 성은 점차 그제날의 휘황을 잃어갔다. 후에 바빌론성이 사막화가 되면서 도시주민들은 분분히 떠나갔고 사막에는 그제날 휘황했던 바빌론성만이 남았다가 사막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난 20세기 초엽에 이 “명주”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공중화원 바빌론의 공중화원은 “현원(悬怨)”으로도 불리며 고대 세계 7대 건축기적 중의 하나이다. 기재에 따르면 이 공중화원은 신바빌론국왕 네자르 (尼撒) 2세가 그의 왕기를 위해 수건한 것이다. 전반 건물은 높이가 25메터로 제형고지의 지세에 근거하여 한층한층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층의 계단마다 모두 작은 화원으로 돼있다. 그리고 화원과 화원 사이에는 작은 집까지 있다. 전반 화원은 공중에 걸려있는듯 하다고 하여 이 화원의 이름을 “공중화원”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통천탑 통천탑은 전설이 아니라 바빌론성에 진짜 존재했던 것으로서 바빌론성의 또 다른 하나의 건축기적이다. 통천탑은 일찍 손상이 된 적이 있었으나 신바빌론왕국이 건립된 후 국왕 네브카드네자르 신(新) 바빌로니아왕 2세가 영을 내려 다시 통천탑을 재건하게 하였다. 재건된 이 통천탑은 습지에 세워졌으며 도합 7층으로 아주 신비한 장소였다. 전한는데 따르면 이 방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벽돌만 해도 5800만장이 들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당년의 통천탑의 웅위롭고 장려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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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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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0)
- ■ 김철균 4 열차는 네시간 달려서야 서서히 돈화역에 멈춰섰다. 연길에서 열차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돈화에서 내릴 때 역시 순자네 내외간은 그 무거운 짐짝들을 등 뒤에 지고 손에 들고 하면서 맨 나중에야 열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순자는 열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문영이부터 찾았다. 그런데 문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온다던 것이 오지 않으니 오늘도 아마 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마중 나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순자는 저도 몰래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때 문영이와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시댁의 5촌 조카 창범이가 달려오면서 “아저씨, 아지미 오는 길에 고생이 많았겠소”하며 반겨주었다. 순자는 “문영이가 나오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사위를 둘러 보았다. 순간 개찰구 배자 옆에 흰 꽃무늬가 돋친 죠세트 적삼을 입고 하얀 머리수건을 쓴 처녀가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옷을 본 순자는 그가 곧바로 문영이란 것을 알아 보았다. 그 죠세트 적삼은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에 출장갔다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사다준 것을 문영이한테 준 것으로 문영이는 그 때까지도 그 적삼을 시체옷으로 나들이를 할 때마다 입군 하였다. 문영이가 마중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열차에서 손님들이 거의 다 내리도록 순자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되어 머리를 수그리고 흐느끼는 모양이었다. “문영아ㅡ” 문영이를 알아본 순자는 다급하게 달려갔다. “어머니, 마마ㅡ” 귀에 익은 부름소리에 정신이 든 문영이는 개찰구로 빠져 나오며 목이 빠지도록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왜 인제야 오세요? 전 어머니가 그리워 줄을 번 했어요.” 문영이는 순자를 끌어 안고 울다가는 다시 보고 또 보다가는 다시 끌어 안고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순자의 의복 앞 섶을 눈물로 흠뻑 적시었다. 전날부터 기다리다가 혹시 오늘도 오지 못하는 줄 알고 실망하여 울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눈물부터 앞섰던 것이다. …… 미구하여 문영의 거처에 도착한 순자는 문영의 결혼준비 상황부터 점검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짐작대로 문영이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 재료래야 달걀 10여 알에 달랑 시금치 한단뿐이었고 의복이래야 이전에 순자가 문영이한테 선물로 주었던 몇견지었으며 이불 또한 위생학교 기숙사 시절부터 덮어오던 색이 바랜 이불뿐이었다. 신랑켠에서 첫 날 옷, 옷장과 기타 가정기물들을 지참물로 도맡아 해온다는 한족들의 전통풍속이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신랑측 부모들은 워낙 살림이 풍족하지 못한 형편에 한해에 자식 셋이나 결혼시키다 보니 신부의 첫 날 옷 한견지밖에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문영이의 해석이었다. 순자는 억이 막혔다. 자기네 내외마저 가지 않았더면 어쩌라 싶었다. 순자는 나들이 옷을 벗어 내치고는 다른 것으로 바꿔입었다. 우선 시장부터 다녀 와야 했다. 시장 또한 영감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래도 돈화시내의 지리엔 영감이 순자보다 더 밝았기 때문이었다. “허허, 여태껏 짐군을 시키더니 이번엔 짐군에 길 안내까지 시키는구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웃음이 나오우?” “그럼 웃지 않구 울라우?!” 영감의 익살에 순자 역시 그만 웃고 말았다. 그랬다. 힘들고 답답할 때는 그래도 영감이 뒤심도 되고 버팀목도 돼주니 순자는 그만큼 힘이 생기기도 했다. 5 이튿날은 문영의 잔치날이었다. 전날 긴 노정에 지친데다 문영의 잔치근심으로 온밤 잠을 설치다 보니 순자는 몹시 피곤했다. 눈에 핏발이 서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늦장을 부리면 그만큼 잔치가 어수선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자 바람으로 팔소매를 거둬 올렸다. 한동안 지지고 볶고 하니 그래도 신랑의 첫날상과 둘러리로 올 손님들의 상에 올릴 음식 몇가지는 마련이 되었다. 미구하여 신랑과 신랑측 둘러리들이 도착했다. 순자는 검소하지만 신랑의 첫 날 상을 정성들여 차렸다. 드디어 첫 날 상에 마주 앉은 신랑은 웬간히 놀라하는 모습이었다. 문영이와 약속하기는 첫 날 상을 아예 차리지 않거나 그저 차리는 흉내만 내기로 했던 것이 생각 밖으로 음식가지수가 늘어 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 술 드세요.” 신랑은 술을 부어서는 먼 길에서 오신 조선족 장인과 장모한테부터 권했다. “아니 신랑이 상을 받소 아니면 우리가 상을 받소?” 순자는 한 옆으로 돌아 앉으며 거절했다. “어머니가 문영이를 도와 나서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문영이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가 없다면 전 누구한테 장가를 듭니까? 그러기에 이 잔은 장인 어른과 장모님부터 받아야 한답니다.” 이렇게 말을 주고 받다 보니 푸짐한 음식 한점 없는 잔치었으나 웃음만은 차고 넘쳤다. 순자 역시 문영이가 드디어 결혼까지 하는구나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이윽고 혼례용 소형버스는 신랑 신부와 순자네 내외까지 싣고 문영네가 새 살림을 차릴 거처로 떠났다. 친정부모가 결혼하는 딸을 따라가는 법은 조선족은 물론 한족들의 풍속습관에도 없지만 문영이의 경우만은 특수하여 그런 풍속습관 같은 것은 아예 타파하기로 했다. 새집이라고 도착해 보니 신방이래야 한달에 37위안씩 세를 내고 드는 허술하고 비좁은 방이었다. 신부인 문영이는 자기가 가지고온 짐들을 풀기 시작했다. 쌀함박이며, 사발, 접시, 숟가락, 국자 등이 나오다가 다음으로 보따리를 푸니 양말과 기타 식료품들이 온돌에 쏟아져 나오면서 쌓이었다. 이불과 요를 궤짝우에 올려놓으니 그제야 방안은 광채를 띄우면서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많은 물건을…” “아니다. 이 엄마 역시 남들처럼 너한테 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구나.” “어머니,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갖고 온 물건은 남들이 해주는 몇만위안 아니 수십만위안의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성이 깃든 것이예요. 어머니 전 대 만족이고 더 이상 남들이 부러울 것이 없답니다.” 문영이는 자기네 생활 구석구석을 낱낱히 헤아려 보고 정성을 다한 순자의 소행에 다시 한번 목에 메였다. 그 날 점심, 신랑신부의 단위에서는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 공동으로 돈화시내의 어느 한 식당을 선택하여 그들의 혼례식을 치러 주었다. 결혼식 장소로 가보니 양쪽 단위의 손님외 가족으로는 진짜 사람이 적었다. 신랑 켠에서는 그래도 10여명 잘되게 친척들이 왔으나 신부 측에서는 문영이의 먼 벌수가 되는 숙부 1명과 순자네 내외뿐이었다. 진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역시 많은 절차를 취소하다 보니 매우 간단하였다. 결혼식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신부측 가족대표가 발언할 차례가 되었다. 결혼 사회자가 “이번에는 신부측 가정대표의 말씀이 있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자는 문영의 숙부벌이 되는 손님을 건너다 보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영이가 다가 오더니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세요”라고 하며 순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순자는 아니 아니 하며 주저하다가 결국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상에 마주 앉은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하지만 첫 날 신부옷을 입고 곱게 앉아있는 문영이를 보는 순간 순자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여러 분 바쁘시겠는데 이렇게 찾아와 문영이에 혼사를 축하 해주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측 단위에서 일부러 이런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니 더욱 감사하며 신부의 친정 어머니인 저로서는 부끄러운 나머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오늘 저의 딸 문영이의 결혼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는 한편 딱 한마디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문영아, 너희들은 맡은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이 분들의 관심에 보답해 드리고 또 앞으로 화목하게 살면서 시 부모를 잘 모시고 형제 간에 사이 좋게 지내거라. 너 화목하지 않고 부부간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 어머니의 얼굴을 더럽히는 걸로 알고 있거라…” 한 쪽에서 용환 령감의 5촌조카 창범이가 한어로 통역하여 순자의 의사를 전달하자 장내는 일시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문영이 시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좋아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좌석이 흥성거리자 신랑의 학교 교장 선생님이 순자네 쪽으로 찾아와 술을 따르며 말을 물었다. “아니, 어머니는 딸이 없어서 한족처녀를 딸로 삼았습니까?” “아닙니다. 나한테 딸이 셋이나 있습니다.” “아니, 그럼 후일 신세를 보자고 그랬습니까? 이 집엔 돈도 없고 지도자 직위에 있는 친척도 없는데요…” “어머니가 딸을 키울 때 그 무슨 보답을 바라고 키우겠습니까? 어머니란 딸을 키워 사회에 떳떳이 나서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다만 친 어머니가 없는 문영이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장은 너무도 감동되어 연신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냈다. “대단합니다. 대단합니다. 세상에 이런 조선족 어머니가 있다니 정말 우수한 어머니입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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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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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 출산 먼저 개방해야 (1)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중국의 신화사는 “떠메지 못할 유감,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이란 글을 발표해 계획생육분야에서 둘째 출산허락사업을 더한층 밀고 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둘째의 출산에 대해 전면 개방하는 것은 근근히 시간적 문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것이 고령부부로 놓고 말하면 정책이 늦게 출범할 수록 생육기회가 묘연해지기만 한다. 이를 두고 광동의 전국인대 대표 하우림은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도 생육고조가 올 수 없다”면서 먼저 30세 이상의 여성한테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어떤 여성은 연령이 많아 이제 더 늦으면 생육을 할 수 없기에 평생의 유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복동생 있어 둘째 낳을 수 없어 올해 36세가 되는 아군은 5살되는 여자애의 엄마로서 둘째를 낳고 싶지만 조건이 부합되지 않았다. 원래 그녀한테는 아버지가 같고 엄마가 다른 이복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여동생이라 하지만 그는 종래로 본적이 없었다. “저의 부모의 결혼생활기간에는 오직 자식이란 저밖에 없었어요. 후에 부모가 이혼했고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살면서 더는 생육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서 상대방이 아이가 없자 저의 이붓동생을 낳았던 것이었지요. 이는 3명의 부모가 모두 계획생육정책의 조건에 부합되는 상황에서 낳은 자녀들이었어요. 하지만 현재의 둘째출산 정책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둘째를 생육하는 것을 허락자지 않거든요.” 현재 아군으로 놓고 말하면 유일한 희망은 둘째출산정책이 전면 개방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표”조차 없는 상황이다. 국가위생계획생육위의 뜻은 아직도 몇년간을 기다리면서 단독 두번째 자녀 정책의 효과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면 아군 세대의 여성은 이제 4년만 지나도 40살이 된다. 그러면 임신성공율은 물론 건강한 어린애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근심이 된다. 39명 학자 연명으로 정책조정 호소 기실 올해초에 있은 중국의 “양회”의 개막전야에 전국 21개소의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 39명 인구학자들이 연명으로 “둘째자녀 출산정책을 전면 개방하고 공민의 생육제한을 취소하자” 건의서를 작성해 해당 부문에 교부하였다. 건의서는 “단독 두자녀 정책의 실행 1년을 돌이켜 보면 둘째자녀 출산신청을 한 부부가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정책 역시 생육율 상승에 극히 제한을 주고 있다”고 썼다. 건의서는 또한 생육제한을 취소하면 가능하게 나타날 출생인구의 증가는 생육정책을 개변한 성과이지 모험이 아니라고 지적, 현재 새로 증가되는 인구수는 외동자녀 가정이 적어지는 것으로 가정이나 사회에 모두 좋은 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많은 부부들의 냉담한 반응은 향후 한동안 중국인구의 급증현장이 절대 없을 것이란 것을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이 건의서를 작성을 발기한 중국인민대학 인구 및 발전 연구센터의 고보창 교수는 목전 인구의 폭증기는 이미 지나가기 시작,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를 금자탑으로 중국인구는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 이하의 인구군이 대폭도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로 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0~ 14세의 인구가 2.2억명으로 근근히 전국인구의 16.6%를 차지하는 바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시기에 비해 6.29%가 하강되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의 소년인구가 이전의 4분의 1에서 이젠 6분의 1로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주 엄중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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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 출산 먼저 개방해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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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3)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외국에서는 주차장이 일종 산업으로 부상해 주차장을 건설하는 것은 돈을 버는 장사에 못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내에서는 투자를 해도 그만큼 비율의 수입을 창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주차장 건설은 흥성할 수가 없게 되고 있다. 2006년 광주시에서는 단기간의 건설계획(2006-2010년)에 관한 중대사항을 시인대에서 심의, 2010년까지 해마다 5개씩, 25개의 공공주차장을 더 건설하여 전 시내에 도합 5290개의 주차자리를 더 늘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2006년에 5개 곳을 선정한 후 그 이듬해부터 더는 공공주차장의 지점과 건설에 대한 해당 정보가 없었으며 그 5개의 공공주차장 역시 건설한다고 선정만 해놓고 아직까지 착공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차장을 건설하자면 원가가 많이 들고 수익효과가 낮기에 주차장건설에 적극성이 없는 것이다. 새로 건설되는 주차장이 없으니 주차의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북경시 인대대표이며 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곽계부의 지적이다. 지난 정월 초닷새날, 이 날은 북경시민 반선생한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 날 그는 자가용을 몰고 동4환의 한 상가를 찾아 물건을 사려하다가 상가가 있는 거리 입구에서 차가 막혀 한 시간 이상 기다려서야 겨우 물건을 살 수가 있었다. 이에 “그 상가를 다시 찾아가도 자가용을 몰 것인가?” 라는 물음에 반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차를 몰고 가는 것이 낫다”면서 물건을 사면 주차비를 감면받을 수 있다고 했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 주임 곽계부에 따르면 현재 북경시의 많은 시민들은 집문만 나서면 크고 작은 일에도 자가용을 몰고 가는 습관이 있는바 중요한 원인은 그래도 자가용을 몰고 나가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조사데이터에 따르면 2005년 북경시 시민들의 73%가 자가용을 몰고 나가도 주차비를 물지 않았고 2010년에는 무료주차 비율이 86%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도시들의 상황을 보면 상가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상가거나 식당의 주인이 마음이 고와서라기보다는 고객을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아울러 이런 상가의 물건과 식당의 료리는 보편적으로 값이 바싸기 마련이었다. 주차를 무료로 하는가 아니면 수금해야 하는가? 이를 놓고 절대 대부분 사람들이 무료주차를 희망한다. 하지만 조사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무료주차는 존재하지 않았거니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주차수금료가 비싸면 돈이 많은 사람한테만 편리를 주게 된다면서 질의를 표한다. 이는 일정 정도에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돈많은 사람은 5성급 호텔에서 식사하고 돈이 적은 사람은 길가의 음식점에서 식사하며, 돈 많은 사람은 별장에서 살고 돈이 적은 사람은 셋집에서 산다”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주차문제 역시 절대적 공정이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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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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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중국에서 외지에서의 진료비결재에 대한 문제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호북성에서는 이미 전 성내적으로 외지진료비 결재가 실행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전국적으로도 점차 해결하고 있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외지진료에 대한 결재란 바로 B지역의 환자가 A지역에서 진료를 받은 뒤 그 지역에서 결재를 받는 것을 가르킨다. 이는 전자화를 통해 진료비가 결재되는 것으로 여러 방면으로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역마다에 따르는 정책차이와 가격의 차이가 존재하는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다. 북경사람인 장전진은 사업관계로 외지에 체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그는 외지에 있는 사업지에서 2차례에 달하는 수술을 하면서 도합 4.6만위안의 자기의 돈을 먼저 쓰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체류지의 의료보험부문으로부터 근근히 1.8만위안만 결제받게 되었다. 이는 지불된 치료비의 40%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달통되지 않았다. 정맥주사, 대소변 화험 등 일련의 가장 기본적인 의료비용이 결제범위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는 북경시 사회보험국을 통해 북경시의 진료검사비가 전국에서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요해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많은 지역들에서 진료비수금표준을 조정, 북경시가 가장 낮은 편이었다. 때문에 외지의 진료수금비가 북경보다 높은 현상이 산생, 적어서는 수십위안의 차이가 나고 많게는 수백위안에 달하기도 한다. 당시 장전진이 외지에서 10여 일 간 입원해 있으면서 2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6장의 결제명세서가 나왔다. 당시 그의 결제명세서를 보면 보편적으로 자비부담 부분이 북경의 표준을 크게 초과하고 있었다. 이 외 이런 외지에서의 의료보험은 치료지역과 의료보험 참가지역의 목록범위가 일치하지 못한 폐단이 존재한다. 즉 의료보험지역에서 결제목록에 넣은 약이 치료지역에서는 결제목록에 들어가지 못하는 폐단으로서 많은 약들이 자비목록에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다음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당지인과 외지인에 대한 의료부문의 정책이다. 예하면 병을 보일 때 당지인은 먼저 의료보험카드를 내놓으면 치료가 가능하나 외지의 환자는 당지의 의료보험 카드가 없기에 먼저 자기의 돈을 지불하고 치료를 받은 뒤 나중에 결제받도록 되어 있다. 병원들에서는 이런 환자를 “현금환자”라고 부른다. 현재 의료보험부문들에서는 대부분 병원에 대한 의료보험 비용액의 정액관리를 하는 동시에 자비비율에 대한 제한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외지의 의료보험인원 및 공비의료인원은 병원의 의료보험정액지표를 점하지 않기에 흔히 외지 의료기구들의 “환영”을 가장 받고 있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런 외지환자들의 자비치료비율이 크게 높기 때문이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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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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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2)
- ■김철균 이틑날 필자는 아들과 함께 서울시 금천구 시흥대로 147-1에 있는 동포투데이 신문사 사무실을 찾았다. 아들과 동행한 것은 서울의 교통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GK희망공동체 허을진 이사장님과 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님이 반겨 맞아 주었다. 우리는 1년이 넘도록 교류하면서 사진을 통해 상대방의 얼굴을 익숙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릎을 마주해 보기는 진짜 처음이었다. 두 분은 친절하고도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특히 GK 허을진 이사장은 10여년 전부터 중국조선족 대모임인 GK희망공동체를 운영해 왔고 현재는 동포투데이 대표이며 아내인 정경화 여사와 함께 이 인터넷신문의 편집과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 중 언론방면에서는 기틀을 잡아가는 신문/간행물이라는 느낌이었다. 현재 (사) GK희망공동체는 수 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허을진 이사장이 정경화 여사와 함께 운영하는 동포투데이는 2011년 10월 2일 준비판을 낸 뒤 10월 24일 정식으로 개통된 종합성 뉴스 사이트로서 재외동포, 국제뉴스와 동북아 정세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율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네트워크 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인터넷 언론사였다. 동포투데이는 한국 현지와 중국 등지에 특파기구를 두고 운영되고 있었으며 자체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언론사이기도 했다. 이 날 필자와 허을진 이사장 내외는 우리 한인언론인들의 사명을 두고 많은 교류를 가지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장소라 술이 없을 수 없었고 애주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무척 술을 즐기는 필자가 어느 정도 더 마시기 마련이었다. 동포투데이 사무실에서 나온 필자는 아들과 함께 재차 아들이 운영하는 사무실로 갔다. 아들한테 급히 처리할 사항이 있어서였다. 헌데 필자가 문제었던 것이다. 아들은 사무실을 떠나면서 자기가 올 때까지 잠이나 자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헌데 한잠을 자고 나자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아들도 방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은지라 아들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디에 문의하려 해도 이 날(27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빌딩 10층내의 사무실들은 모두 문이 잠겨져 있었다. 한편 여느 젊은 이들과는 다르게 바삐 보내는 아들한테 이 아버지로서 짐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아들은 밤 8시경에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감옥생활”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도리어 사과했다. 뒤이어 나와 아들은 택시에 앉아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한 양고기꼬치영업집으로 갔다. 아들의 집이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휴대폰으로 4~5명의 친구들을 더 불러들였다. 이 중 3명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었으며 모두 아들의 수하에서 업무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필자한테 “아버님, 아버님” 하며 깍듯이 대했다. 한국 젊은이들의 예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 날 아들은 휴대폰 한 대를 얻어와 필자한테 주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생기자 필자는 “자유의 몸”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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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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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1)
- ■ 김철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고개를 넘어간다 … 이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세계적인 명곡이다, 또한 사상과 이념을 떠나 8000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2015년 4월 25일, 필자를 싣고 중국 연길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z352 항공편은 요녕반도의 대련쪽까지 날다가 다시 기수를 황해(서해)로 돌리었다. 필자가 한국행을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 마도로스로 한국 선일해운의 송출선을 타고 선후로 부산, 울산, 인천에 상륙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중의 하나였던 한국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번의 한국방문은 20여년만에 다시 찾게 된 코리아이기도 했다. 한국속의 조선족 인천공항에서 내리자 공항의 규모에 재차 놀랐다. 공항규모가 무지무지 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끗했으며 공항직원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동행을 했던 연변일보 논설부 박정일 부장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공항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오는 동안 화창한 봄속에서 약동하는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라 보는지라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63빌딩을 볼 수 있었고 이어 한국 KBS방송국의 본관건물, 서울역 및 서울시청 등 낯익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명동이었다. 명동에서 내리자 박정일씨의 4촌형이란 분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명동은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특히 아까 명동에서 내릴 때 많은 중국인 여행객들이 내리었고 명동 골목에 들어서니 사처로부터 귀에 익은 중국말들이 들이었다. 화장품 가게를 찾는 사람들과 “싸구려¨를 부르는 목소리 중 자주 중국말들이 들리어 인상적이었다. 이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박정일씨의 4촌 형이 운영하는 부대찌개집 “송탄¨이었다. 한국의 연예인인 강호동씨가 추천한다는 식당이었으며 명동에서도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송탄¨에 들어서자 몇개의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보이었는데 박정일씨의 4촌 형에 따르면 이 날은 일요일이기에 손님이 적으며 평소에는 손님들이 꽉 찬다는 것이었다. 또한 줄을 서서 남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부대찌개집 “송탄¨에서 한참 있을라니 서울에서 생활한다는 박정일씨의 친구 4명이 선후로 들이닥치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고향분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참 뒤 서울에서 사업하는 나의 아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나의 아들은 서울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있었고 며느리는 화장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박정일씨의 친구들은 나의 아들을 반겨맞아 주었다. …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서로 갈라지었다. 박정일씨는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다른 곳 으로 향했고 나는 아들과 함께 아들이 차린 사무실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아들이 차린 사무실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는 삼신빌딩 10층에 있는 10호였다. 그러니 1010호인 셈이었다. 아들한테 절로 감탄이 갔다. 나의 아들은 올해 33살이다. 사실 아들은 공부를 많이 못했었다. 17살에 사회를 나와 를 나와 여러번 사고를 쳐 나로 하여금 무척 속을 썩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살 좌우부터 셈이 들자 더는 나로 하여금 속타게 하는 일이 없었다. 절강 의오에서 힘든 한국회사생활을 견디어 냈으며 몇년 전부터 한국에 진출해서는 스스로자아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아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몰래 자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아들은 첫시작에 불과했다. 명동에서 생활하는 박정일씨의 4촌 형을 비롯해 한국에는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이 많았다. 특히 서울에는 성공한 조선족들이 많다고 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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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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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시들의 공동난제 주차의 어려움(2)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북경시 5환구역의 모 소구역에 살고 있는 진모는 지난 음력설 전야에 소구역 개발상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다. 즉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데 필요한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동차 주차자리값 15만원을 낸지 3개월이 지나서였다.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가 사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진모는 큰 고민을 하였다. 기실 그가 이 소구역에 입주한 뒤 5년이 되는 기간 이 소구역에 있는 지하주차장은 임대를 주었지 팔지는 않았었다. 그 임대비는 연간 3120위안으로 매달 260위안씩 내면 되었다. 하지만 주차자리를 사면 50년간 이 주차자리가 자신의 것으로 되는 한편 거기에 매달 물업비 120위안에 370위안의 관리비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소구역의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를 길옆에 세울지언정 지하주차장 자리를 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모는 자동차 주차자리가 있으면 많이 편리한데다 또한 50년간의 재산권증을 가지기에 이를 악물고 이 주차자리 하나를 샀다. 한편 자동차 주차자리의 재산권증을 놓고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정주시 주차장관리센터의 부주임 장손에 따르면 정주시 많은 소구역에서도 자동자 주차자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업주는 1차적으로 많은 돈을 바치고 있다. 하지만 영수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면 앞으로 분규가 생겨 해결하려고 해도 의거가 없으며 주차장 자리를 산 시민들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소구역의 자동차 주차자리권은 도대체 누구한테 속하는 것인가? 물권법 제74조에는 건축구역내에 있는 자동차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우선 입주자의 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다면 건축구역내의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당사인 입주자들과 협의한 후 판매 혹은 임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입주자들 공유로 된 길 혹은 기타 장소에 자동차 주차자리를 만든다면 이는 입주자들의 공유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종목에는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다. 현재 이로 인한 분규가 거의 모든 소구역마다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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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시들의 공동난제 주차의 어려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