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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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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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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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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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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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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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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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흔들리는 재한조선족 정체성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야, 저 봐, 신천지 때문에 또 하루 사이 확진자가 100명이 넘어 나왔대. 아이 이상하다. 중국처럼 말 안 들으면 확 족쳐버리면 될 것을 한국정부는 왜 저리 무능하냐?” “엄마, 한국은 민주주의국가라서 인권 때문에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어요.” “야, 야, 인권이고 뭐고 이 비상시국에 비상조치를 취해야지. 정부가 저렇게 물렁해서야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쩐다냐?” “잘 대처해 나가겠지 뭐, 엄마가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이구, 답답해서 어디 보겠니! 이 긴장한 사태에 여당인지, 야당인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매일 쌈박질이나 하구, 참 기가 막혀. 내일부터 뉴스 안 볼란다.” “엄마, 이게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본래 이렇게 시끄러운 법이예요.”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모녀의 대화 내용이다. 다시는 뉴스 안 본다고 선포한 엄마는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TV를 켠다. 예전 같으면 매일 아침 기상하기 바쁘게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요즘에는 매일 뉴스를 틀어놓는다. 뉴스 안 본다던 엄마를 딸이 놀려대면 ‘그래도 돌아가는 형세는 알아야지’ 하면서 코로나19에 관심이 크다. 사태가 사태인 것만큼 전 인류가 관심 갖는 코로나19에 엄마가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한국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딸이 뭐라 하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한국이 영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재한조선족은 머리 한쪽에는 현재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고국 한국이 자리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고 자라고 사회생활 해오던 고향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국과 중국이 천평(天平) 양쪽에 올라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의 무게가 커지면 다른 한쪽의 무게가 작아지고 때로는 양쪽의 무게가 비슷해질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개는 한쪽의 무게가 더 커질 때가 많다. 그것이 한국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이 될 수도 있다. 딸은 올해 30대 중반이고 엄마는 60대 중반이다. 딸은 중국연변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유학 왔고 현재 한국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다. 엄마는 중국 연변 시가지에서 태어났고 모택동 지시에 따라 시골에 가서 집체호 생활 경험이 있다. 딸이 사춘기에 들어설 쯤부터 엄마가 우리 땐 집체호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예선전대를 조직해 노래와 춤으로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에 대한 추억을 귀가 따갑도록 들려주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그때 그 시절 노래를 아주 즐겁게 부르면서 흥이 나면 춤 솜씨까지 뽐낸다. 엄마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전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던 엄마가 요즘에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난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엄마의 심경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엄마는 중국연변에서 직장 다니다가 구조조정에 의해 실직당하고 한국에 왔다. 엄마가 한국 올 때는 1990년대 말이다. 남한에 연고가 없어 수속이 어려워 가짜 공무초청장을 들고 왔다. 처음부터 불법신분으로 살아가느라 육체적인 고생보다 마음을 졸이며 정신적으로 고통이 더 심했다. 각박한 자본주의 한국은 엄마를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에 찾아온 한핏줄로 대하지 않았다. 앞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유학 왔던 조선족 젊은이들이 겪었던 조선족정체성 문제를 엄마도 몸소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빚지고 왔기 때문에 오로지 돈을 벌 일념으로 정체성 따위는 뒤로 하고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 그 당시 재한조선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 말기 실시된 방문취업비자(H-2)에 의해 불법체류가 합법화 되었다. 엄마도 중국에서 어릴 때 떼어두고 왔던 딸애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많이 쌓였던 섭섭함도 점차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이냐? 10여 년 전 한국인들이 재한조선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이었다. 나아준 엄마의 편이냐? 키워준 엄마의 편을 들 거냐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여느 조선족들처럼 처음엔 무조건 중국 편이었다. 단일민족, 단일국가로 살아온 한국인들의 머리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 알았지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섰고 조선족은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짱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07년 방문취업비자 실시와 그 이듬해인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재한조선족은 한국사회로부터 차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차별하는 원인이 처음에는 양반과 상놈(常奴) 문화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여성의 남편인 한국인 배우자가 째지게 가난해도 아내를 욕할 때면 ‘거지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은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양반, 조선족을 못 사는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거지(상놈) 취급하는 행태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데 있어서 진보보다 보수진영이 더 심하다. 우리는 흔히 한국보수를 친일파, 있는 자, 가진 자 등등으로 낙인찍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멋진 비유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만원을 태운 버스가 다음 정류소에서 손님이 더 오를 경우 자리를 내주면서 ‘함께 가야지’ 하고 나선 사람이 진보이고 ‘아이고 비좁아 죽겠는대 고만 태우고 빨랑 갑시다.’라고 불평을 부리는 사람은 보수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바로 서로 차별 없이 골고루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다. 즉 내가 불편하더라도 손님을 태우고 함께 가려는 사람은 진보이다. 반면에 다른 손님이 더 오르면 내가 차지했던 공간을 침해당하고 따라서 나는 그만큼 불편해지기 때문에 양보를 거절하는 사람은 보수이다. 남과 북의 관계를 말하자면 진보는 북한을 돕자는 원칙이고 보수는 퍼준다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퍼준다는 것은 나의 몫을 북한에 빼앗긴다는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유해 말하자면 전반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총량이 100이고 이 전부를 한국사람, 즉 내국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이나 조선족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점차 이들 소수 집단이 10~30% 가져간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되어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미워하게 되고 따라서 어떻게 하나 밀어내려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긴 하나 대선 때 이회창 보수당 후보가 불법체류를 1%미만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얼마 전에 보수당 오너인 황교안 대표가 “세금을 안 내는 외국인에게 같은 임금을 줄 수 없이 응당 차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는 늘 이렇게 외국인을 차별한다. 보수가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한국뿐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리더를 자부하는 미국은 보수당이 집권하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난민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민사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보수는 외국인이나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가 없다고 한다. 보수도 문제이지만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차별금지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차별해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지만 민원이 제기되면 권고조치를 내릴 뿐 법적 해결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이 시정하면 좋고 듣지 않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외국인이나 조선족 차별을 법적으로 막을 장치가 없다. 일례로 관영매체인 KBS가 1년 넘게 조선족을 비하하는 <황해>라는 개그프로를 방송해도 법적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당하는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그럴만한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였고 생활관습문화도 배여서 한국생활에 적응이 어렵다. 예를 들어 직장에 근무하다가 그만두겠으면 사직서를 내고 절차를 밟고 사직해야 하는데 무조건 아무 말 없이 이튿날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무언으로 알리니 사장의 입장에서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이외 쓰레기 처리, 무단횡단, 가래침을 아무데다 뱉기, 공공장소에서 떠들기 등 지금까지도 이런 공공질서의식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초기에 한국 언론들이 조선족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을 취재하고 그곳을 더럽게 다루어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대림동이나 가리봉동 혹은 조선족밀집지역 시장거리나 길 양쪽 늘어선 가게들에서 면식(面食)들이 덮는 장치가 없이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정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해바라기 씨를 살 때면 한 줌씩 맛보는데 그 껍질을 바닥에 지저분하게 던져버려 진짜 환경이 더럽기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늘 남이 우리를 비하한다고 불평만 부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한국인에게 비춰 보이면 좋을까 반성이 전혀 없다. 아무리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도 외국에서 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10여 년을 살다보면 한국사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전반 사회가 투명성이 높고,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 서비스가 좋고, 치안이 좋고, 기후가 좋아 사람살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정치가 시끄럽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한국생활에 두루 만족하면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는데 요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런 의식이 도망 가버렸다. 이런 변화가 생긴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한국이 중국과의 대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 일부 언론이 재한조선족을 더럽게 매도한 불상사도 있고 또한 총선을 앞두고 조선족을 매도하는 실체가 없는 유령인 ‘조선족게이트’니 ‘차이나게이트’니 황당무계한 일이 지난 3월 1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이슈가 되어 조선족을 또 한 번 울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코로나 사태 초기 만약 대리동이나 가리봉 및 중국인 밀집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면 차별과 혐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보수의 공격으로부터 막말로 ‘개박산’을 맞을 뻔했는데 다행히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지구촌에서 최고 베스트셀러(<사피엔스>란 책이 무려 1천만 부나 팔렸음)를 자랑하는 유발 하라리는 지난 3월 20일 파이낸셜타임즈에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제하의 칼럼을 기고해서 또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첫째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강화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중국과 이스라엘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였던데 비해 한국, 대만(중국 대북), 싱가포르 등은 시민적 역량강화를 발동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과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조치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여 전체 국민이 통일행동을 취하도록 만들고 이를 어기면 강력한 형사적 처벌을 내린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몇 사람 모여 마작을 놀아도, 음식점에 모여식사를 해도 형사적 처벌을 안겼다. 하다못해 사사로이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도 처벌을 안겼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수백, 수천이 되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예배활동을 해도 형사적인 처벌이 없다. 만약 한국은 일부 교회가 아니었다면 진짜 청정지역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례를 목격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이 무능하게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강력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정부의 코로나19 ‘물렁한 대응’에 대해 조선족들이 아무리 못 마땅하게 여겨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잘 대응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다. 선진국이라고 자랑해오던 유럽나라들이 한국 배우기에 나섰고 세계 최강인 미국도 한국에 진단카드 제공을 요청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줄곧 배우기만 했던 독일이 요즘 한국한테서 배우는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이라면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떠는 일본도 요즘에는 한국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76일간 환자 추적·관리한 유일한 나라라고 빌 게이츠도 엄지로 칭찬했다. 한국이 뭘 잘해서 일약 ‘세계적인 스승’이 되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가? 선진적인 건강의료보험제도, 선진적인 방역시스템, 정보의 투명성에 따른 관과 민의 정보의 공유, 시민의 협력정신 등 요소들이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것을 유발 하라리는 ‘시민적 역량강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이 잘했다고 하지만 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좋다고 하지만 전시와 같은 비상시국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중국의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에 비해 효율성이 어림없이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중국이 이런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그 큰 땅덩어리에 그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식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는 중국실제에 부합하는 비상시국 대응에는 ’딱‘이다.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제기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상시에도 테러방지 위해 국민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그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사용해서 중국과 같이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중국과 이스라엘처럼 코로나19 대응에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다른 나라에도 100% 다 맞는다든지, 혹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도 모두 배울 모델이라는 주장은 적합하지 않다. 나라마다 각기 제 나름의 실제가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체제나 시스템을 함께 똑 같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의 시대에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아닌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을 선택할 것을 호소한다. 나름의 일리가 있겠으나 이 호소도 천편일률적이고 지구촌의 어디서든 맞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한국국민 삶에 더 유리하거나 보탬이 된다면 마땅히 유발 하라리의 선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두 번째 선택, 즉 협소한 민족주의보다 글로벌 연대 강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정말 십분 맞는 주장이다. 글로벌 리더를 자칭하던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기적인 국수주의체제로 변화하고 있어 국제리더를 포기한 상태에 처해 있다. 미국 때문에 현재 글로벌 연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는 새롭게 글로벌 연대와 협력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는 공멸할 수도 있다. 한편 과거 아세아는 구미의 민주주의에 대해 맹신해온 것은 아닌지, 이 기회를 빌려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등식화로 인식했던 아세아의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초기 중국과 한국을 비웃고 때리고 공격하고 마치 자기네는 영원한 청정지역인양 거들먹거리다가 확진자가 30만이 넘어가는 거대 역풍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꽃인 아메리카가 이게 웬 말인가? 미국은 건강의료보험이 엉망이어서 정부가 검사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400달러 되는 돈을 서민들이 벅차 검사를 외면하고 있어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고, 방역시스템도 엉망이어서 진단카드조차 한국에 손을 내미는 신세이고, 마스크는 범죄자나 심한 결핵을 앓는 전염병 환자나 끼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어 전염이 더욱 창궐해졌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미국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것을 보면 과거 우리가 미국 하면 모든 것이 선진적일 것이라고 너무 맹신했다는 생각이 강열하게 느껴진다. 그럼 미국의 본가인 영국은? 그들과 거의 같은 종족인 백인 국가들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나라는 어떨까? 이들 나라들도 미국 처지와 별로 나은 바가 없이 도진개진이다. 이탈리아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형사 발동)를 취하고 있다. 심각한 사태 앞에서는 장사가 따로 없다.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 때문에 이탈리아는 전체주의 감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일본도 수도 동경을 봉쇄하느니 마느니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 총을 쏴도 좋다는 어명을 내렸다. 역시 전체주의 감시체제가 최후의 처방이자 유일한 처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던 지구상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나라들 및 일본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한국이 가장 돋보이는 스타로 떠올라 갑자기 외교가 다망해졌다. 요즘 대한민국은 갑자기 지구촌의 ‘공자’가 되어 한국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국민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본 적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심원(深遠)하고 심오한 이치와는 거리가 멀게 한국과 중국 단순한 비교에 물젖어 있다. 요즘 엄마의 위챗이나 카카오톡방에는 온통 ‘인민전쟁 승리’ ‘봐라 대국은 대국이다’ ‘중국이 얼마나 통 큰 나라인가!’ ‘영웅의 도시 우한!’ ‘조국을 빛낸 우한 지원 영웅적인 의료일군들!’ 등등의 중국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중국에서 성인이 되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조선족은 중국 찬양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천평 한쪽에 중국 찬양이 무게를 너무 눌러 다른 한쪽의 천평 그릇의 한국비하(비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마땅함)가 허망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날까? 인간은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또 독립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에 받은 교육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령 성인이 된 후라도 강력한 이념과 사상교육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 재한조선족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중국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전체주의적인 일원화 교육을 받았던 영향이 다시 작동되어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집체호 시절 불렀던 노래와 추었던 춤은 대개 이념과 사상이 짙은 ‘문예선전’이었다. 요즘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생각을 ‘우리 엄마는 집체호 시절로 돌아갔어요’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은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상대를 맞아 새롭게 생활하고 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대한 연민은 당연한 일이다. 친정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또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편 새로운 대상을 만나 살면서 친정 부모의 장점만 생각하고 상대의 환경에 적응할 노력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만 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피곤할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괴로울까! 이슬람 국가가 싫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지닌 열혈 전도사라면 모를까, 절이 싫다면서 계속 버티는 중의 행위는 결국 자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 부르고, 강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에 굳이 치우칠 필요가 없더라도 천평 양쪽에 한국과 중국의 무게가 비슷하게 올려놓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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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9
  • [김혁 칼럼] 열반(涅槃)의 황학루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온통 무한에 쏠려 있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바이러스 병독에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그 바이러스의 병명은 “코로나” 혹은 “무한 폐염”이라고도 부른다.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을 위한 비원과 성원이 담겨진 포스터들에는 무한의 절경이자 징표인 황학루가 자주 등장한다. 천하절경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의 왕 손권이 초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에는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있어 “초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례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당대와 송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옛 선인은 누른 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余黄鹤楼。/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黄鹤一去不复返/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云千载空悠悠/흰 구름은 천년 동안 한가히 떠도네 시성이라 일컫는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시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떤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의 바람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손님이 오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닌게 아니라 주인장이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리백, 백거이,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고,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다. 그 기라성 같은 문인문사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조선족 화가이자 혁명가인 한락연도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십여년 만에 류학을 갔던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당시 외국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이 시기 “총회”에서 발행하는 “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고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는 이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라는유화도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거폭의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루각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황학루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고도(古都)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도 력력히 서려 있다. 1938년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창립식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창립식에 특별히 중공의 대표들이 참석해,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무한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고성을 지르는 순간이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즉각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이 광경이 그후 중국문학사에서 문호의 반렬에 오른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였던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무한, 태항산에서의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한시나 고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루각은 흔히 세월과 력사의 견증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간주되여 있다. 세상사의 뜬 구름과 전란의 초연을 지켜 본 황학루는 또 한번 세기의 증언자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초천극목(楚天极目)”.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호매로운 성구의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는 황학루, 그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세월의 행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황학루는 고사와 희망을 우리에게 전언해 준다. 이제 검은 구름은 걷히고 더욱 명징(明澄)해진 하늘아래 학은 다시 돌아 올것이며, 다시 돌아 온 학은 열반을 거친 루각우에서 너울거리며 새로운 전설을 춤사위에 담아 이야기 해 줄 것이다. 필자/김 혁(재중동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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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9
  • 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 훈 이 남에게 맡기고 한국가서 거의 십년세월을 지우고 오니 옛집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버렸는지 맘놓고 발들여 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 되였다. 남편과 둘이서 어렵던 세월에 오순도순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꿈도 많았던 내 보금자리, 비록 초라하게 붉은 기와를 얹은 옛스런 단층 벽돌집이지만 늘 윤기가 돌던 내집! 쇠줄로 엮은 넓고 예쁜 초롱에 닭, 오리,게사니 키워서 고기먹고 알먹고 담장을 의지해서 벽돌로 아담한 개집을 지어 네눈박이 귀여운 “보초군” 살게하고 얼마 안되는 둘의 월급을 쪼개가면서 다들 부러워하게 총명했던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던 재미, 구석구석 먼지 티끌이 쌓일세라 쓸고 닦으면서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알뜰한 내 살림! 복숭아,사과, 오얏나무가 사이좋게 둘러서 있던 앞뜰 우물터, 과일꽃 향기와 록음이 무지 은혜롭던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주렁진 과일나무 밑으로 이웃집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어서 넉넉한 내 인심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들고 흐뭇해했던 기억들… 갖가지 풋남새들이 흐드러지게 자라서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맛있게 먹던 뒤뜰 채소밭…..아!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서 난 미칠것만 같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처럼 알뜰했던 내 보금자리 살림집을 게으름뱅이 어떤 부부가 들어와 살면서 십년세월 아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일나무는 다 죽어 버리고 숱한 닭오리 게 사니를 키웠던 예쁜 쇠줄 초롱마저 쇠붙이라고 다 팔아먹은건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성스런 우물터에다는 더러운 널판자를 깔고 닭을 치고 있어서 우물터가 아예 닭똥터가 되었고 집안 구석구석 때와 먼지에 찌들어서 내가 살았던 깔끔했고 윤기돌던 흔적이란 찾아볼수도 없으리만치 돼지우리도 그런 돼지우리가 없다. 아!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더러울수가 있을까리해가 안된다. 너무도 화가 나서 몇 날 며칠을 새벽 세시쯤 시작해서 해가 떴다지고 달이 뜨고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 않을때까지 닦아내고 쓸어내고 정리하고 가담가담 잔소리도 해가면서 애쓴 보람에 원상 복구를 어느 정도 시켰다. 물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집이고 이미 고향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으니 우리가 거기에 다시 살 가망은 거의 없지만 내 사랑 내 꿈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 다섯식구가 지지고 볶고 진한 정을 나누면서 긴 세월을 같이했던 알뜰한 옛 보금자리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까 아기자기 살갑던 우리가족의 정마저 엉성하니 변해가는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였다. 예로부터 메토끼 잡으러 가면 집토끼가 잃어진다 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국가서 돈 번다고 살림을 팽개치고 설쳐대는 사이 나는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 같다. 지금은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다 흩어져 버린 우리집 식구들, 십년 리별에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만나면 오히려 서로가 서먹해진 이상한 느낌! 다시 한데 모여 오순도순 화기애애하게 살던 그 옛날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낄까? 되돌릴래야 되돌릴수 없이 된 지금에야 그 옛날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으니 이보다 통분한 일이 다시 없는데 돈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건강까지 잃은점 또한 더더구나 통분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한국가기전에 그처럼 짱짱했던 내 몸이다, 기껏해서 어쩌다 걸리군 하던 경한 감기가 제일 무서운 병이였고 웬간히 무거운 물건은 겁없이 다루던 나, 지금은 껍질만 남았다. 열근쯤되는 물건도 아예 깔려 죽을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등신이 되었고 엄중한 풍습성관절염에 심한 골다공증과 빈혈에 저혈압에 영양부족에…그리고 나 스스로는 별로 못 느끼는건데 언니들의 말을 빈다면 난 또 심한 강박증 증세까지 보인다는가? 그새 그렇게 그냥 나는 사람이 아닌 돈버는 기계로만 산 것이였다. 귀국후 일년 반 동안을 북경 청도 흑룡강의 여러지역과 여기 연변지구까지 많이 돌아다니면서 새삼스레 느낀건데 우리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신 나게 한가하게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있는것 같다.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넓은 공터나 이름모를 어느 광장이나 운동장같은 그런 곳엔 아침저녁으로 늘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신체 단련을 하고 그렇게 시름없이 신 나게 노는 사람들 천지다. 거기에 비해 크고 작은 공원에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작은 휴식터에 간단한 체육시설이나 기구들이 널려있는 한국이지만 누구나 먹고살기 바쁜 한국인들이라 그런 곳에서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그네타고 있는 모습들을 난 본적이 없다. 그렇게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생활리듬에 물 젖은 탓이였던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였을 것을 하루라도 놀게 되면 큰 죄라도 짓고 있는듯이 난 늘 불안했던것 같다. 그래서 거의 십년 세월 여관의 청소아줌마로 일했던 내가 휴식한 날짜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영 아파서 도저히 일할수가 없는 그런 날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저녁부터 다시 새벽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머리를 들 수 있는정도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수 있는 그런 정도면 다시 일을하고…. 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년이나 되였으니 내 몸이 쇠덩인들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은행에 저금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서 몸이 썩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삼월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서 화장실도벽을 밞으면서 기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금산은 산을 쌓아 놓은들 내가 걸음도 못걷는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전전긍긍을 하면서 미루어 왔던 귀국을 갑자기 결심하게 된 나였다. 이제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집에가고 싶었다. 아프고 보니 그처럼 목숨 같던 돈이 원쑤같았다. 그립던 내 식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국에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의 귀국은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고 귀국과 함께 열심히 벌어 모았다고 여겼던 “큰돈”도 실감이 나지 않게 여기저기 반년도 되기전에 다 날아나 버렸다. 결국 출국전이나 똑같이 난 또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돈이란 돌게 생긴 물건이라서 아무리 벌어도 손에 남아 있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누구의 명언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100%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리 될줄 내가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왜 그 긴 세월 제몸을 혹사하며 기를 써 왔을까? 실로 후회막급이다. 그렇게 내딴엔 대단히 적시적이고 명지한 결심이고 행동이였다고 여겼던 나의 귀국,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심히 느끼건대 지금 남아 있지도 않고 이미 다 없어져 버린 돈을 다 끌어모아 처넣어도, 아니 그보다 백배 더 되는 돈을 처넣는대도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나한테서 영영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소중했던 내 건강이여!!!! 돈에 미쳐서 그리 허망하게 잃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깝고 아픈 내것들이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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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8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천만이 넘어 사는 도시 서울의 삶은 여러모로 답답했는데 올해의 봄은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설을 쇠고 나면 새해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2월 초부터 모든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다. 나의 주업은 신문발행이고 ‘부업(副業)’으로서 강연 다니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다른 기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발제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표를 맡은 ‘多가치포럼’은 2020년 첫 행사로 본래 ‘3.8 여성의 날’을 맞아 조선족, 새터민, 고려인,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외 ‘부업’이 또 있다. 서울시청을 비롯해 여러 관공서 회의에 참석하고 법무부회의도 참석한다. 가끔 작품 심사, 언어발표 심사, 기관 직원 채용 심사도 맡아본다. 법무부 제1기 이민자 맨토단 멘토로 합격되어 본래 2월 27일 법무부 장관 위촉장을 받고 사회통합프로그램과 조기적응프로그램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4월 22일 회의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실하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할지 말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름에 한 번씩 나가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독서모임도 취소되고 있어 어디도 나갈 곳이 없다. 설 쇠고 나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두 달 넘게 아무 메모도 없이 깨끗하다. ‘일 년 계획은 봄에 달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사회가 온통 분주하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의 달력도 왕년 같으면 한주 평균 두 개 정도 ‘행사’가 메모 되었었는데 올해는 전혀 메모가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은 ‘부업(副業)’이고 나의 ‘부업(副業)’은 곧 나의 ‘부업(富業)’이다. ‘부업(副業)’이 없으니 ‘부업(富業)’도 따라서 사라졌다. 주머니가 늘어야 되는데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두 달 넘어가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슬슬 폐인이 되는 느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마치 중이 종치듯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이더냐? 단테는 <신곡>에서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고 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지옥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방에 3박4일쯤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부담 없이 한가한 며칠을 보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왕년 같으면 이때쯤이면 거의 주말마다 지방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을 터인데 올해는 관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괜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내성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싶어 지난주에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인 완도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 관광지들은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고 일본처럼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아 구경할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떠나는 김에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먼 곳 중에 부산, 포항, 경주 등 경상도 지역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전라도 중에 찾다보니 가장 먼 곳이 완도였다. 여수도 멀기는 하지만 수년 전 ‘여수엑스포’ 때 가보았기 때문에 완도를 택했다. 완도에서 1박, 목포에서 1박, 땅끝 마을 해남에서 1박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완도는 서울에서 440킬로미터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면 330킬로쯤 직진이어서 운전하기 편하다. 목포에 거의 도착할 지점에서 해남으로 빠져나가는 국도를 타고 에돌아 100킬로쯤 더 간다. 가는 날 장날이라고 날씨를 잘 선택한 탓인지, 타고난 운이 좋은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제법 훌륭한 봄날이었다. 도중에 개나리도 피고 목련도 피고 버들가지들이 뾰족뾰족 싹을 내미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200킬로쯤 달린 지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벌판을 만나 가슴이 확 뚫린 느낌이었다. 경상도 쪽에 여러 번 운전하고 다녀 봐도 김제 벌처럼 넓은 벌을 보지 못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 넓은 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강원도에 가면 가는 도중에 산이 너무 많아 터널을 수없이 만난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면 터널이 별로 없다. 나는 터널이 2킬로 넘으면 공포증이 생겨나 운전에 지장이 있다. 전라도에 터널이 매우 적고 있다 해도 길이가 짧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 440킬로 먼 길이지만 운전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완도 목적지 앞두고 30킬로 지점에서 방역검사가 한 차례 있었다. 일행이 네 사람 모두 정상 체온이어서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완도타워였다. 오후 2시경이었다. 기분 좋게 갔건만 정작 도착해서 기분이 이상해났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지 않는가. 타워 올라가는 길에 한 사람도 왕래하는 길손이 없다. 타워 앞에 올라가니 관광객이란 우리 일행뿐이었다. 타워 정상에 올라가면 전체 완도풍경이 한눈에 안겨올 것 같은데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갔던 김에 샤터를 눌러 기념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마 다녀왔다는 흔적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더 구경할 멋이 없어 시간도 매우 단축되어 발길을 장보고 기념관으로 돌렸다. 장보고 기념관도 굳게 닫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때 한반도 완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로 일본에로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휘날린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자던 기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대충 말 타고 꽃구경, 변두리를 돌다가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떠났다.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번에는 완도수목원으로 가기로 했다. 설마 수목원은 닫지 않았겠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갔건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어 몹시 썰렁했다. 바닷가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서성이다가 저녁이나 일찍 먹기로 했다. 보는 재미가 없으면 먹는 재미라도 즐겨야지. 완도읍에 전복거리가 있다.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전복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국에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더분하고 푼더분해 보이는 매너 좋은 주인의 인사말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큰 음식점이 썰렁했다. 단체모임 손님 20명 있어도 워낙 큰 장소라 기분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본래 음식은 기다려서 먹더라도 사람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시국에 문전성시는 한 물 건너간 얘기가 아닌가. 저녁 메뉴는 전복집이라 전복풀코스 요리였다. 일인당 5만원, 좀 비싸기는 하지만 ‘싼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고 좋은 물건은 절대 싸지 않다.’는 중국속담이 있듯이 음식가치가 그만큼 풍부했다. 작년부터 터득한 것인데 지방에 관광 가면 호텔에 묵지 않고 한옥단지에 묵는 것이 나름대로 좋았다. 작년 8월 중순 고열 때 정선 한옥마을에 묵었는데 앞에는 계곡이고 뒤에는 산이어서 경치가 좋을뿐더러 너무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추워서 잠잘 때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있다. 피서를 제대로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해진한옥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는 완도 바다가 눈에 안겨오고 뒤에는 역시 산이다. 한옥은 여럿이 가면 잠자기도 편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밖에서 바비큐도 해서 먹을 수 있고 불고기도 해 먹을 수 있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튿날 아침 청해진포구 촬영지를 가보기로 했다. 역시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가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하고 포기하는 행위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고 설마 설마하면서 찾아갔는데 우리 일행의 성의를 알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곳마저 닫혀 있었으면 진짜 이번 완도여행은 추억을 남길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관광은 6대 요소로 이뤄진다. 중국식대로 말하자면 먹는 것(吃)이 첫 자리이고 잠자는 것(住), 이동하는 것(行), 관광지 구경하는 것(遊), 토산품(기념품)을 구매하는 것(購), 오락 구경하는 것(娛)의 순서이다. 이 6대 요소 중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 귀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전복을 먹었으니 괜찮은 편이고, 경치 놓은 한옥에서 잠을 잤으니 역시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은 말짱 꽝이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다른 지방에 가도 거기서 그것이기 때문에 손바닥 만한 한국 내에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관광지 구경이다. 어느 지역이든 어디를 가던 똑 같은 음식과 똑 같은 숙소는 흔하지만 똑 같은 관광지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는 관광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관광지(청해진포구 촬영지 제외하고)가 모두 닫혀 있어 관광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이었다. 목포에 가려다가 그곳도 역시 관광지가 모두 닫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도망가 버렸다. 해남도 마찬가지.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을 억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3박4일로 잡은 여행이 1박 만에 끝나고 이튿날 청해진포구 촬영지에서 직접 가리봉을 찍고 돌아와 버렸다. 완도는 3월 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왕년 같으면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올해는 숙소도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나면 어김없이 기온이 따뜻해지고 봄이 온다. 들에는 뭇꽃들이 만발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이 곳 완도도 틀림없이 자연은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왔는데 봄이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이 있다. 완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연에 맞춰 인간사회에도 봄이 와서 북적대야 하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적막감에 휩싸여 있어 봄은 봄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수년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미국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1년 지은 <침묵의 봄(2011년 김은령 역 에코리브르 출간)>이다. 동양인들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대충 꽃, 아지랑이, 제비 등등이다. 미국인들은 봄에 대해 동양인에 비해 다른 문화적인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곧 새의 지저귐이라고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새들이 기가 차게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였는데 어느 해인가. 새들이 도시 거리에 죽음으로 나타나고 쥐들도 죽어서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해부터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으니 봄은 침묵했다. 저자는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새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인류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함에 따라 다수의 생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북미 지역에서만 참새가 35억 마리 죽었으니 봄을 알리는 지저귐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침묵의 봄’으로 표현한다면 이번 봄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활동이 사라진 것도 역시 ‘침묵의 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때문에 봄이 오면 봄 같지 않은 봄, 즉 ‘침묵의 봄’이 또 올까 두렵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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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1
  • [허성운 칼럼] 화룡과 고래
    ●허성운(칼럼니스트)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 연안 화룡일대 산골짜기는 과거 선인들 삶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1860년대 함경도지역에 들이닥친 끔찍한 재해와 역병은 마침내 수많은 함경도 사람들이 국경을 박차고 두만강을 넘어 눈 덮인 산악지대로 스며들어 왔다. 이들은 접근이 힘든 산골짜기와 데걱지에서 숨어살면서 따뜻한 벌판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산악 민족 대부분 그러하듯이 타자를 적대적으로 여겨 골짜기 입구까지 막아가며 철저하게 폐쇄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이들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어둠속에 묻혀있다. 거기에 도로 발달이 더디고 왕래가 많지 않았던 그 시기 두만강 유역 화전민의 거주지와 수치는 애초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며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선인들의 그 고단한 삶의 흔적은 화룡 땅 산골짜기마다 고스란히 묻혀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산골짜기를 뜻하여 고래라는 말이 있다. 파밭고래 불붙이고래 삼밭고래 싸리밭고래 봇밭고래 감자고래 누베고래 빼래밭고래 등이다. 이런 고래에는 어구지, 여불대기, 막치기, 진고래 독고래와 같은 다양한 낱말들이 흔하게 써왔다. 해와 달을 거듭하면서 이런 크고 작은 고래에서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뻗어 나와 혈관처럼 화룡 땅 곳곳에 스며들며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광복이 되면서 조 보리 메밀 감자가 자라는 산골찌기로부터 벼가 자라는 수전벌판으로 그리고 다시 농촌에서 시가지로 사람들이 이동하는 세월동안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 숨겨진 피눈물로 얼룩진 지명들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날에 와서 두만강 유역 옛 화룡지역 중국어 지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도구 삼도구 육도구 등 수자 나열식으로 지명을 명명한데 반해 조선어 지명은 마치 큰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처럼 하나의 골짜기에서 펼쳐나간 곁 고래들을 빠짐없이 고유어로 지명을 붙여왔다. 홀몸으로 화룡일대를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지팡살이를 하면서 보리밭데기 석마돌어귀 개치기 등 토박이 땅이름으로 지칭하였는데 나중에 이런 지명이 한자를 음차해서 표기된다. 이를테면 골짜기 막치기 뜻을 지닌 개치기를 개척리開拓里으로 적은 것들이다. 오늘날 세간에 알려진 것은 화룡 지명이 달라자 화룡욕에서 기원되었고 만주어 호로holo에서 유래되었다는 게 통설로 되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만큼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지만 사실 이런 해석은 정확한 풀이가 될 수 없다. 만주어 호로holo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함경도방언 고래와 일맥상통된다. 하나의 언어밑층에서 파생되어 고래와 호로holo로 나뉘었지만 산골짜기라는 뜻에는 그 맥락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두만강 지역이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우리말과 만주어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화룡지명은 역사가 깊은 지명이다. 실제로 사책에서도 고라이령古羅耳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만주어 호로holo는 골짜기와 거짓말 밭고랑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거짓말은 표준어 홀리다로 나타나고 함경도 방언에서 후랄친다 홀리붓기로 파생되어 있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구라친다로 변이되어 있다. 함경도방언 고래는 구들고래 술고래와 같은 낱말을 낳았다. 화룡和龍 지명은 함경도 방언 고래와 만주어 호로holo 소리를 바탕으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언뜻 보면 화和와 룡龍 두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문화 냄새가 진하게 풍겨 꺼림칙하다. 시초에 한자지명 火狐狸 火龍으로 새겨왔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화룡和龍으로 표기가 굳어졌다. 여기에서 화和자는 단순히 야마토 시대를 지칭하는 차원을 넘어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와후쿠(和服), 와시(和紙)처럼 와和자는 일본이 고유전통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지명은 한번 불리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바꾸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이 살다간 흔적으로서 지명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만 오랜 세월 속에서 이처럼 타자에 의하여 제멋대로 찢어지고 구겨지고 비틀어지여 오늘까지도 반듯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봄이 오면 선인들의 피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는 연분홍 천지꽃이 어김없이 떨기떨기 피여 난다. 골짜기마다에는 극한으로 연소되어 살다간 함경도 사람들의 뜨거운 삶을 닮아 천지꽃이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오늘도 산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산새들 피타는 울음소리는 천지꽃을 붙들고 화룡지명에 맺힌 한 많은 이야기를 애타게 하소연하고 있다. 필자/ 허성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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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9
  • [허성운 칼럼] 아바이와 커라바이
    ● 허성운(칼럼니스트) 지금까지 많은 방언학자들은 표준어 할아버지에 대응되는 함경도방언을아바이로만 거론하여 왔다. 함경도에서의 아바이(abai)는 부모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에 있는 남자들을 이르는 말에 반해 부모의 아버지에만 한정된 호칭인 커라바이(khabai)라는 토박이말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바이는 역사가 깊은 단어이다.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의미하나 커라바이 맏아바이 아즈바이 오라바이 등 친족어 계열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연장자 의미가 내포되어 경상북도와 평안도 일부에서 아버지를 아바이로 부르는 호칭과도 일맥상통된다. 아바이(abai)이 방언은 만주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아바카(abka) 그리고 북방언어계통에서 신성한 사람 하느님을 뜻하는 안파견 아바칸과 하나의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실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인명으로도 불리어왔다. 고유어의 화석 같은 존재인 아바이 단어는 생물유기체와도 같은 진화를 거듭하며 함경도 방언에서 커라바이 제주도 방언에서 할아방 강원도와 경상도방언에서 할배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과 흉노 중앙아세아에서 지도자를 지칭할 때에는 한 (han) 또는 칸(khan)으로 부르며 “ㅎ”발음과 “ㅋ” 발음이 상호전환 되는 규칙을 감안해 보면 사실 함경도방언 커라바이와 타지방의 할아방 할배 등 방언들은 쌍둥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여러 줄기로 노출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예전에 늘 쓰고 들어왔던 “커라바이”라는 말은 오늘날에 와서 “할아버지”라는 표준어에 밀리여 아주 제한된 세대에서 사용되고 있어 이제는 영어 일어 러시아어를 술술 배워내는 우리 아래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선인들이 써왔던 이런 모어가 울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는 외래어로 전락되고 있다. 연변과 함경도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넓은 땅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뼛속깊이 뿌리내린 함경도방언은 조상들이 살고 간 역사의 흔적으로서 마치 앙금처럼 숱한 역사가 누적된 우리문화유산이나 이제 이런 말들은 바야흐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방언학자들은 연변과 함경도지역에서 남편을 나그네라고 부르는 언어현상을 마치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외딴 섬나라 미개인의 언어로 풀이하고 있지만 그 어원을 깊이 따지고 보면 중세 몽골어에서는 남편 혹은 친구 의미를 가진 너헤nehers라는 어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함경도 방언 올찌세미를 올케의 그릇된 표현으로 섣불리 해석하고 있지만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올케는 단수 형태를 지니고 올찌세미는 복수 형태를 지닌다. 함경도의 안까이는 표준어 아내라는 말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 단어이다. 여러 쪽으로 갈라진 구리거울이 하나로 이어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옛날이야기처럼 지역마다 스며있는 방언가치를 깊이 발굴하고 동질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만이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 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언어의 가시밭길을 더듬어보면 근대에 들어와서 허다한 문명은 남에서 북으로 들어왔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강력한 북방문명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거쳐 끊임없이 남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쉬운 개성이 있는 방언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방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말을 마음속에 새길 때 장기간 밀폐된 언어의 창고에서 우리 방언도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연변과 함경도 방언은 우리 과거 역사를 풀어내는 블랙박스이며 또 미래를 헤쳐 나가는 내비게이션이기도하다. 필자/허성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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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6
  • 조선족을 도구화하는 한국정쟁,그만하라!
    ●박광성 한국역사를 보면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이 여러 당파로 나뉘어 권력쟁탈을 위한 정치싸움에 골몰하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외적을 앞에 두고 내부 떡 싸움을 하다가 다 같이 망한 셈이다. 일제에 나라를 뺏았기고 타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그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멀다 하게 새로운 당파가 생기고 서로 헤게모니 싸움만 하다가 결국 결국 대국들에 의하여 광복되었으며 나라가 분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렇듯 역사를 보면 당쟁과 내부분열은 한국의 망국의 병페였다. 오늘날의 한국은 반드시 이를 역사의 거울로 삼아 얼굴을 자주 비춰보고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그러한 망령이 또다시 얼른거린다. 세계사적인 또 한번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고 그것이 한반도에 여러모로 큰 도전을 가져다 주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역사시기에 온 국민이 좌, 우로 나뉘어 다수 국민에게 별로 실익도 없는 논쟁에 젖먹던 힘까지 빼고 있다. 이번 코로나 19사태만 봐도 그렇다. 집안에 불이 붙었으니 원인을 막론하고 일단 불부터 꺼야 한다. 그러나 국민을 이끌고 불끄는 일에 집중해야 할 정치권이 그보다 정치싸움에 더 골몰하는 듯하다. 그것도 엉뚱하게 이 마당에 친미와 친중의 논쟁으로까지 번져 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 하다. 아전투구의 싸움이 되다보니 급기야 어느 극우 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의 모든 여론을 조작”한다는 어느 가짜 조선족의 양심선언이 이어졌고 언론에서 이를 “차이나 게이트, 조선족 게이트”란 이름을 부쳐 대서특필하는 상황까지 번졌다. 이를 더는 방치할 수 없어 결국 청와대까지 나서서 국가별 인터넷 접속 숫치까지 밝혀가며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사이트에 올린 소위 조선족의 양심선언을 보면, 문맥이나 표현방식, 사고에 있어 분명히 어느 정치에 열중하는 한국인에 위하여 조작된 것이다. 현재 도시화로 세계 각국에 유동 중인 조선족이 무슨 정신으로 한국여론을 좌지우지 하며,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한국정치에 열중하겠는가? 매일 세계 선진국타령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국에서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재외동포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부정적인 인식은 “계급편견”에서 유래한 일면이 많았다. 돈 벌려고 온 노동자들이니 그 설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 양상이 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미중간에 마찰이 늘면서 한국 내에서 줄타기 고민이 시작되었고,그것이 이데올로기 영역까지 확대되면서 보수집단이 친미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이를 위하여 중국을 견제하기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성하면서 조선족을 그 희생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자연발생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이용되는 일면이 있다. 고국에 희망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면 꼭 자신이 당한다. 어느 나라에 자기의 명운을 걸기보다 인류공동체에 스스로만이 공헌할 수 있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평등과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세계 10위권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나라답게 이주역사가 100여년 넘는 해외동포사회를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면서 품격 없는 정치에 의하여 고국이 다시 풍파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필자/칼럼니스트 박광성 (중앙민족대학 사회학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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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4
  • [허성운 칼럼] 국시장과 후지동
    연필을 뜻하는 함경도 옛말은 “가름다시”인데 국내외 방언학자들은 러시아어에서 들어온 외래어로 섣불리 못박아 놓고 있다. 허나 그 어원을 따지고 보면 북방언어계통인 몽골어와 돌궐어에서 검은 돌이라는 의미로 풀이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가름은 검다 의 의미를 지닌 가라말이라는 가라 음과 뜻이 일맥상통되며 다시는 표준어 돌과 달리 함경도 사투리 돌잭이라는 음과 뜻이 근접된다. 근대에 들어서서 러시아연해주와 연변일대로 진출한 선인들의 탈출 노정을 추적하여 보면 황야 길에 검은 돌을 쌓아올린 국시장이 도로표지처럼 등장한다. 이런 국시장은 거개가 평지의 세질어부름 (함경도 방언 삼거리)과 산 데걱기(함경방언 산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평지와 산마루사이를 이어놓는 고래를 (함경도 방언 골짜기) 국시장골로 불러왔다. 북방언어계통에서는 ‘ㅎ’음과 ‘ㅋ’ 음이 상호전환 된다. 왕을 지칭할 때 한 (han)을 칸(khan)이라고도 부른다. 연변과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 혹은 할배를 “커라배”라고 부르듯이 국시장골은 어음변화를 거쳐 한자 지명 표기로 후동厚洞 후지동厚之洞으로 마을 지명들이 굳어졌다. 삼굿구이는 예로부터 두만강 일대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삼 껍질을 벗기려고 구덩이를 파고 돌을 달구어 삼을 찌는 일을 말한다. 삼굿구이는 단순한 노동행사가 아니라 김과 연기를 피워 하늘에 메시지를 보내고 신과 소통하여 가물과 장마를 피하며 초목이 푸르고 가축이 늘어나는 자연생태 선순환을 기원하는 민속풍속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와서 삼을 가공하여 진정제효과가 강한 마약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환각상태에서 복술과 무당들이 푸닥이며 구명하고 굿을 올리는 것을 단순한 미신 행위의 잣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자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삼굿구이에서 까맣게 구운 돌들을 선별하여 국시장에 쌓아 올린 돌탑은 선인들이 탈출 길에 쌓아올린 독특한 역사풍경이다. 돌 쌓는 풍습은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인들의 국시장 돌탑은 하늘과 감응하는 까만 삼굿구이 돌로 선별하여 해묵은 가둑나무(함경도방언 참나무일종) 옆에 수북하게 쌓아놓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이 내린 운수라는 뜻으로 몽골어에서 kut 만주어에서 kesi라 적고 있다. 만주어에서 kesi은 우리말의 굿과 그 뜻과 음이 유사하며 몽골어에서 kut은 우리말의 가둑나무의 가둑 음과 근접되어 하늘과 감응하는 매개체로서 가둑나무는 하늘에서 굿이 내려오는 성스러운 곳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함경도 사투리 후투산 소리하다는 굿에서 운수가 붙는 좋은 징조가 있다는 말이다. 200년 전 선인들이 함경도대탈출은 유례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1867년 5월 길림장군 부명아는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와 연추를 돌아보고 함경도에서 탈출해온 1000여명이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만주인 러시아인 조선인 옷차림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각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데려다가 물어보니 모두가 토박이 함경도 말을 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청나라 봉금시기로부터 이어진 선인들의 이런 대탈출 역사는 일제시기의 집단이주와 확연히 구별되는 역사이다. 문둥이병 기아 살육 수탈 온갖 끔찍한 재난 속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운명을 박차고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거칠게 끓어지였다가 다시 이어지며 러시아와 연변 땅까지 뚫고 들어온다. 그 암울한 시대 만약 국경이란 거미줄에 목이 매여 온갖 가난의 실타래를 감고 그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면 선인들의 위대한 대탈출역사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치발복역한 양자 양녀로 시늉만하는 벙어리로 지울군으로 지팡살이군으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마침내 위대한 탈출 역사를 촉발시킨다.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지역 그 울울창창한 원시림을 뚫고 나가는 탈출 길은 말 그대로 저승길이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수천만 번 끝내는 기어가는 몸의 형태는 이미 스러지고 없다.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추운겨울 머리 위엔 피눈물같이 마른 나뭇잎만이 뚝뚝 떨어진다. 육신이 닳고 닳아 뼈가 부서진 손으로 마지막 간절함을 빌어 국시장 돌탑에 까만 돌을 얹혀놓는 그 찰나에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의 빛이 내려오고 해와 달 전설처럼 구원의 동아줄이 드리워지고 아라비얀나이트 그 행운의 바위돌문이 열린 것이다. 오늘도 천년역사가 바윗돌로 굳어져 눈 뜨고 앉아서 세상을 굽어본다. 그 위대한 침묵위에 석불처럼 조용히 앉아 잃어버린 국시돌 전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어본다. 타자에 의하여 굳게 닫힌 선인들의 위대한 탈출역사의 빗장을 벗기고 그 진실 된 역사를 열어놓아야 만이 우리의 과거사는 더 많은 미래 세대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드넓은 역사문화의 장으로 거듭 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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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외몽골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게 된 내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약한 나라한테는 외교가 없다.” 이는 많은 외교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이 소련과의 담판에서 수세에 몰릴 때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상 외교적 분쟁에서 많은 약 소 국가들은 강대국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기 마련이었다. ▲사진 : 인터넷 1945 년 2 월,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었다. 당시 세계 강국들인 미국, 소련과 영국 등은 흑해 북부에 있는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일련의 해당 전쟁 후의 질서 및 동맹국의 이익 분배에 관련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중 <일본에 대한 미, 소, 영 3국의 협정(간칭 얄타 협정)>은 당시 동맹국인 중국의 동의도 없이 체결되어 중국의 권리를 크게 침해했다. 얄타 회의에서 극동지구 문제를 토의할 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기하였다. 첫째, 외몽골의 현 상태를 유지한다. 둘째, 중동철도(중국 동북의 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셋째, 소련이 대련 및 그 부근 해역에 불 동항(不冻港)을 건설한다. 당시의 외몽골은 실제상 이미 소련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민국과 과거 청조의 관리들은 이미 축출되어 중국 본토로 돌아갔으므로 스탈린의 현 상태 유지란 기실 세계열강들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속심이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기타 세계열강들에게 이 일을 중국의 장개석한테 알리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로 하여 후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장개석이 파견한 중화민국의 외교대표 송자문을 만났을 때 “만약 출병하여 대일 작전을 한다면 미국은 오직 <얄타협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자 송자문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동맹군 열강들은 이른바 <얄타협정>의 이익 획 분은 세계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 반파시스트 진영을 위한 것이라면서 중국의 이익은 염두에도 없었으며 송자문한테는 아무런 태도 표시도 않았다. 그 시기, <얄타협정>의 대부분 내용은 엄격한 비밀에 붙여졌으며 송자문 역시 귀국할 때까지 절반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귀국 후 송자문이 장개석한테 외몽골의 독립 문제를 언급하자 장개석은 크게 놀랐다. 중국은 세계 반파시스트 진영의 일원이었지만 중국의 이익은커녕 손해만 늘어나게 됐던 것이었다. 미국의 허위적인 얼굴에 대해 장개석은 깊이 알 수 있었다. “미국인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스탈린과의 담판이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한 장개석은 송자문을 단장으로 한 중국정부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외몽골 문제를 갖고 소련정부와 담판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담판은 근본 상 불평등의 원칙에서 진행된 담판이었다. 스탈린을 위수로 하는 소련대표단은 대일 작전을 하는 대가로 장개석으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송자문과 장경국(蒋经国)을 비롯한 중화민국 대표단은 상대를 깔보는 소련의 그 오만한 태도와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사진 : 인터넷 한편 장경국은 장개석의 친필 신을 갖고 <비 정식대표>의 신분으로 스탈린을 배알, 외몽골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측면적으로 스탈린의 설복하려고 했다. 장경국이 찾아가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아주 친절했다. 그러자 장경국은 열정적으로 스탈린을 높이 쳐올리면서 반파시스트 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는 스탈린 동지의 영명한 영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나서 중국 또한 현재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결전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파시스트의 멸망은 이미 시간적 문제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이어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장경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얄타협정>에서 외몽골을 독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면 조국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중국정부의 원칙에 위배되며 만약 민국정부가 승인한다면 중국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몽골문제가 언급되자 스탈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탈린은 대뜸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한 말의 뜻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당신들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들을 도와 일본을 내쫓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들한테 힘이 있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면 나 또한 이러한 요구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스탈린은 장경국 등을 물러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 저었다. 그 뒤 중국대표단 단장인 송자문은 소련대표단과의 담판 내용을 장개석한테 회보한 다음 장개석의 지시에 의해 외몽골 문제를 해결할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할 수는 있게 한다. 둘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외몽골에서 고도로 되는 자치를 실시할 수 있으며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허락한다. 셋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으며 정치와 외교에서 자주와 자치를 실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삼민주의> 원칙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소련인 영국의 정치성질과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양보는 근근히 중국 측의 입장일 뿐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스탈린은 참을성이 없어졌으며 장경국한테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공공연히 소련이 외몽골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개석은 이러한 담판 결과에 대해 진작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장경국이 소련에서 유학했고 또한 소련 여자를 아내로 맞았기에 그 연분으로 스탈린이 장경국의 안면을 좀 봐줄 것이란 요행을 바랐을 뿐이었다. 결국 장개석은 마지막 카드까지 포기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어쩔 수 없다. 일본을 내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약하기에 조성된 악과이다. 약한 나라에는 외교가 없기 마련이다.” 1945년 7월 7일, 장개석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 송자문한테 한통의 <굴욕>의 전보문을 날렸다. 외몽골의 문제에서 중소간의 쟁점은 무엇인가를 잘 찾아봐야 한다. 중소간의 공동이익과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을 격파한다는 선제 조건에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 바란다. 1945년 7월 9일, 제4차 중소담판에서 중국대표단은 소련대표단의 거듭되는 압력으로 부득불 소련 측이 주장하는 조건에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이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 데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일찍 이렇게 밝힌 바가 있었다. “소련이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단지 정치상에서의 수요와 군사상에서의 우려여서만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은 시베리아 철도의 복지이다. 앞으로 중국이 강대해진 다음 외몽골로 출병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해 버리면 소련은 전략적으로 매우 위험해지게 된다.” 당시 소련이 이렇게 우려한 것은 민국정부가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하였기에 향 후 강대해지면 외몽골을 통해 어떤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였다. 다른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중국의 만주에 출병한 것은 기실 민국의 요청보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장개석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약했기에 외교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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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6
  •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
    편집자의 말: 최근 펑황망의 군사사이트는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란 글을 발표했다. 글은 라오산전투 당시 중국군과 베트남군이 투입된 군부대와 장비 등을 서술하면서 중국군이 베트남군을 얼마 소멸하고 파괴한 베트남군의 장비와 진지 등을 수치로 나열하면서도 중국군이 본 손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라오산전투는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점 찍었다. 한편 베트남 매체에서도 라오산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중국군을 얼마 소멸했다고 하였지만 역시 저들의 손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어느 쪽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가? 명지한 독자라면 객관적인 분석으로 읽고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중국군 사진이다. 1984년부터 1989년 사이 5년간의 중국-베트남 국경전투 라오산과 저양산(老山、者阴山)동안 양측은 좁은 국부전장에 많은 수의 군과 다양한 무기들을 투입, 길고 치열한 경쟁은 전쟁 역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중국군의 관점에서, 곤명군구, 남경군구, 제남군구, 난주군구, 북경군구 및 성도군구에는 6 개의 야전군/집단군(14군, 11군, 1군, 67군, 47군과 27군) 1개의 강력사(37사), 변방부대 (운남 성 군구 부대) 및 포병, 공병, 기술병, 정찰병 등 5개 병종의 군대와 공군 항공병, 대공 미사일 부대 그리고 변경민병, 민공으로 참가인수구 도합 35명에 달했고 각종 포 8200문, 탱크 30여대, 4만 여대의 차량, 비행기 출동차수 2900여대였다. 이렇게 작전규모는 신 중국 건립 후 1950년과 1979년에 이어 세 번째로 방대한 규모였다. 전투 중 중국군의 각 병종의 부대들은 협동작전을 진행, 240 만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보병을 지원하면서 도합 3만 6000여명의 베트남군을 소멸하였다. 이중 죽은 베트남군의 수는 1만 5000여명, 부상당한 베트남군의 수는 2만 여명, 포로된 베트남군의 수는 202명었다. 그리고 베트남군의 포 1000여문, 200대 이상의 군용차량, 4대의 탱크 및 많은 장비와 요새, 화력망, 지휘소, 창고 등을 파괴하였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베트남군 사진이다. 한편 베트남 육군과 관련하여 보면 선후로 라오산 전투에 참가한 보병들로는, 보병 313사, 314사, 316사, 356사, 312사, 325사, 31사, 3사의 2연대, 322사의 567연대, 328사단의 2연대, 568연대가 포함된다. 그리고 포병 168대대, 36대대, 397대대, 특공 821 및 198연대, 하선성 독립 247연대, 산라성 독립 754연대 등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많은 기술 장비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베트남측은 저들의 손실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 의문이 있다. 즉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가이다. 라오산 전투는 두 산 사이로 주로 양측의 대립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화력을 구축하고 목표를 파괴하는 종합적인 방식으로 전장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므로 통계결과에 특정적인 추정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통계를 만들 때 위치확인을 기초로 하고 기술정찰을 통해 적의 정보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삼으며 동시에 1선 군부대가 보고한 결과의 무게를 측정하게 된다. 또한 예하면 공격지점에 출격하면서 베트남군의 화력지점과 숨어있던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3명의 중기관총 화력과 2명이 경기관총 화력으로 계산되었으며 3-5명이란 추측에 따라 보고되었다. 그리고 작전 중 적 섬멸인수가 전장의 육안검사에 따라 보고되기도 했다. 전쟁 후 베트남의 한 정보에 따르면, 허장성(河江省) 북부 국경전쟁을 위해 수건된 능원에는 2500명 이상 사상자의 자료가 모아졌으며 이는 추적할 수 없는 많은 다른 실종자로 간주되지 않다. 또한 베트남 육군 옛 군인들의 회고록은 외상성 손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반영했다. 수만 명의 베트남 사상자 수치가 신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5년 이상 지속된 이 아열대 산악과 정글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잔혹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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