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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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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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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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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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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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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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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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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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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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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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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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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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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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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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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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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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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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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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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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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전남 완도군 청산도 팸투어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완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육지로서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차한 완도군에 도착한 것이다. 완도에 도착한 우리는 완도행 첫 코스로 완도 어귀에 있는 장보고기념관을 참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옛날 수병들을 거느리고 왜적들의 침입을 물리는 장보고 장군의 업적을 기리어 지은 것이었는데 당시에 쓰던 배를 복원하고 또 기타의 많은 문물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해상전을 복원한 대형 목각화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조각이 대형적이고도 섬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케 했다. 기념관 참관에 이어 우리 일행은 기념관 1층에 있는 행사장에서 완도군 신우철 군수로부터 완도군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소개를 청취하였다. 신우철 군수에 따르면 완도군의 천연적인 해양보물고로서 완도군 주위의 바다에는 질좋은 김, 미역 외 전복 등 해양자원이 아주 풍부한 바 앞으로 완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생태보존지역으로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언론인들한테 한국 전라남도 완도군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날 우리가 행장을 푼 곳은 완도의 관광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바닷가에 건축되었는데 바닷물이 늘 호텔남쪽벽을 철썩 철썩 치고 있는 환경이 좋은 호텔이었다. 헌데 나와 박정일씨가 투숙한 방은 306호실로 바닷쪽을 향한 방이 아니어서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 우리 일행은 완도군청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상에는 역시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로 풍성하게 올랐다. 또한 술은 완도에서 자체로 만들었다는 술도 연회석에 올랐는데 맛보니 좀 순한 편이었으나 우리 연변의 된장술이나 송이술 같은 맛이 좀 있는 것 같아 입에 맞았다. 이날 밤, 우리 세계한언의 회원 거의 모두가 앞에 나가 축배를 제의했고 그 제의 때마다 신우철 완도군수가 건배에 응했다. 꽤나 주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리 중국에는 “주량은 담량이고 담량은 생산량(酒量是胆量、胆量是产量)”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과학적 도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가끔씩 써먹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날 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나하게 마셨으며 나 역시 어떻게 호텔방에 올라와 쓰러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적 회원들은 밖에 나가 또 마셨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호텔옆에 붙은 해수사우나에 가 해수욕을 하였다. 해수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나오니 전날에 마신 술이 한결 깨는듯 했고 몸도 거뿐하였다. 이 날 우리 일행은 완도여객선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군 경내에 있는 청산도로 향했다. 이는 나를 놓고 말하면 20여년만에야 타보는 선박이었다. 다르다면 1993년 내가 탄 배는 냉동운반선이었고 오늘 내가 타는 배는 여객선이었으며 1993년의 나는 선원신분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자 나는 어쩐지 20여년전에 있은 선원생활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당시에는 배를 타는 것이 짜증나고 힘겹던 것이었지만 오늘날 배를 타는 것은 일종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런지 그 감회가 더욱 깊었다. 여객선의 항행시간은 50분가량, 그제날 내가 배를 타고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가로 지르는 것에 비하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도에 이르러 우리는 우선 청산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면적의 유채꽃밭을 구경했고 또 옛날 왜놈들과 싸울 때 쌓았다는 돌담도 둘러보았으며 순 돌로 지은 집과 쌓은 담장으로 구성된 마을도 돌아보았다. 이어 우리는 바닷가에 우뚝솟은 범바위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거기에서 나와 동포투데이 허을진 대표가 대오에서 떨어지다 보니 버스를 놓쳐 약속 지점까지 약 1시간 가량 도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바탕 꾸지람을 들을줄 알았었는데 생각밖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도보로라도 대오를 찾아온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인차 바닷가로 향했다. 전복사육장에 가서 체험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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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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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민간단체 차별화 지원 안될가?
- ■ 박정일(연변일보) 요즘 우리 주변을 두루 살펴보면 수많은 민간단체들의 활동 행사가 빈번하다. 언제 그렇게 많은 민간단체가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각양각색의 민간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나고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민간단체들의 활동행사를 보면 대부분이 자금난으로 허덕이고있다. 대부분 민간단체들은 회비를 이용하거나 기업가 혹은 일부 단위의 찬조금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활동행사는 왕왕 기획한대로 이루어지지않는 경우가 많아 많은 민간단체들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서 행사금을 구걸하고 있다. 얼마전 필자는 한국에 갔다가 지역 곳곳에서 펼쳐지는 민간단체행사를 본적이 있었는데 크고작은 행사 모두가 조직이 잘되고 내용도 풍부했다. 서울광장에서 본 지구촌 나눔 한마당 축제는 규모가 대단했다. 뿐만아니라 세계한인언론인단체행사도 그렇고 학생들의 다양한 행사도 그렇고 모두가 성공적으로 치뤄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다양한 행사들이 성공적으로 치뤄질수 있는 관건은 정부와 다양한 재단 그리고 기업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용이 좋은 행사는 정부에서 행사비용의 80% 이상을 후원한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사회각계의 다양한 단체들의 활동이 빈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뜻깊고 재미나는 행사가 빈번할수록 사회번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정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며 사회에 대한 대중들의 행복감이 푸풀어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민간단체의 활동이 빈번하면 빈번할수록 사회의 조화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대중들의 행복감도 농후해진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사회에 유익한 활동행사라면 국가에서도 적극 지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부의 자금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행복사회 조화사회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대중의 역할을 떠날수 없다. 발전성과를 축복하고 공유하며 사회적인 사랑과 우애를 노래하고 대중들의 기쁨을 도출해내는것은 오늘날 우리 당위와 정부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사회적책임이다. 현재 비록 민간단체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조직해나가고는 있지만 아무리 의미있는 행사라도 자금문제로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워하고있다. 때문에 정부는 능력한도내에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민간단체에 대해 차별화적인 지원을 선도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하루빨리 단결되고 조화롭고 행복한 연변을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현재 이미 일부 행사들이 가두를 통해 진행되고있지만 정부가 민간단체를 선별지원해 이들의 다양한 활동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뤄질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사업이다. 창조성있는 사업을 강조하는 마당에 이런 선도적인 시도를 우리가 먼저 해볼 필요가 있다. 발달한 국가들 처럼 정부지원자금 사용내역을 확실하게 따지고 부당한 사용에 대해 엄벌대처한다면 부정비리도 막을수 있다고 본다. 경성환경개선도 대중을 위한 민생사업이지만 민간단체의 다양한 행사지원도 중요한 민생사업이다. 경성환경의 개선으로 연변이 갈수록 살기 좋은 도시가 되고있는 마당에 대중들에게 웃음과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질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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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민간단체 차별화 지원 안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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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5)
- 일반적으로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 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험관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시험관영아”라고 부른다. 그럼 영아가 어떻게 시험관에서 태어 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들은 생육할 수 없는 여성의 체내에서 성숙한 난자를 배육시킨 다음 그것을 추출해 내어 일정한 온도와 배양액이 있는 유리그릇 안에 넣어 둔다. 그 뒤 수요되는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세포를 추출하여 이 유리그릇 안에 넣어 난자와 정자가 서로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게 한다. 이어서 의사들은 그 배양액을 부단히 바꾸어 주면서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분열 발육되게 한다. 그리고 그 수정란 발육이 많은 세포로 배태가 되면 의사는 그것을 다시 여성체내의 자궁안에 넣는다. 또 수개월간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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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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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 차빈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남아메리카, 소속국가 페루, 지점: 안카스성 함의: 마야문화의 발상지 하나임 차빈유적은 페루 안드스산맥 코르딜레라산의 동쪽비탈에 위치, 고대아메리카 마야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차빈문화의 흥성기는 기원전 150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 페루 안디스산의 고산협곡에서 발전해온 일종 문화이다. 차빈성내에는 종횡으로 교차된 긴 복도가 있다. 높고도 큰 난송묘(兰宋亩)와 태유(泰优) 피라미드가 있고 많은 석비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의 비탈과 광장주위에는 모두 돌건물이며 절반 가량이 야수모습의 장식물로서 각이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U”자형 신무덤 코르딜레라(科迪勒)산의 동쪽언덕에는 두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차빈유적중 가장 저명한 차빈 신무덤이 바로 이 두 강의 합수목 부근에 있으며 그것이 보존해 내려온 제일 오랜 제상건물은 바로 이 낡은 무덤이다. 낡은 무덤은 3개의 상호 연결된 토돈으로 “U”자형결구를 이루며 그 중 북부 토돈(土墩)의 높이는 14미터, 중부 토돈의 높이는 11미터, 남부 토돈의 높이는 16미메터이다. 그리고 낡은 무덤에는 성자들의 가장 존경을 받는 신석(朗松神石)이 있는데 높이가 4.53미터에 달하는 화강암거석이다. 특이한 조각 차빈의 석판조각은 차빈문화의 큰 특색이다. 차빈석판조각 중 가장 저명한 것은 신석(朗松神石)이다. 이 신석의 밑부분은 차빈신묘의 기지내에 묻혀 있으며 윗부분은 묘의 꼭대기에까지 달한다. 그리고 이 거석에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입을 벌이고 잇빨을 드러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숱한 뱀으로 엉켜져 있으나 손과 발은 도리어 사람의 모습과 같은 생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물은 천당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종 신기한 생물이라고 인정, 이는 가능하게 모종 아마존지구에서 발원된 종교숭배일가능성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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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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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 ■ 김철균 1991년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창립 39주년이 되는 해었다. 그 해의 8월 31일, 곧 다가오는 “9.3” 명절을 앞두고 연길시 당위와 연길시 정부에서는 연길시 노동자문화궁에서 전 시 범위로 된 민족단결 모범선진 표창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순자는 영광스럽게도 연길시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추천평의 되었다.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표창받고 상장을 받아 안았으며 민족단결 모범개인들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순자의 발언은 관중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중단되군 하였다. 주 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면서 한족이웃들을 도와준 이야기, 건축공사장에서 임신중절수술을 한 한족 임시공(비정규직)과 일을 바꾸어 한 이야기 그리고 문영이를 알게 되고 그 애를 돌봐 준 이야기와 삼복염천에 6명의 한족자식들한테 골무떡을 해먹일 때의 이야기 등 사적은 수많은 참가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으며 대회장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술렁이게 했다… 한편 대회에서는 또 모든 매스컴의 취재 초점으로 화제에 오를만한 한 젊은 여성도 나타나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아직 한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안은 채 좌우 관중석을 향해 곱게 인사를 하고는 자아소개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돈화시 화교풍습병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문영입니다. 그리고 아까 대회발언을 한 김순자 어머니의 한족양딸이기도 합니다.” 문영이가 자아소개를 하자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즘즘해지자 문영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조선족 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선물한다”면서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를 불렀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 같지요// 엄마 품에 안기면 행복 끝이 없어요… 주석대에 오른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고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참가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였다. 그리고는 무대에 나란히 선 그들 모녀한테 관중전체가 기립하여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랫시 불빛이 번쩍이었고 촬영기렌즈와 취재용 마이크가 이들 모녀한테 집중되었다. 바로 이 순간 순자는 문영이와 있었던 지나간 모든 사연들이 주마등처름 갈마들면서 가슴이 뭉클해 났다. …“북해상점”에 와서 우표와 편지봉투만 달랑 사던 문영이, 솜옷과 감기약을 사갔을 때 “마마(어머니)”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며 목에 매달리던 문영이, 냉면 한 그릇을 사준다고 할 때 그렇게도 천진란만하게 기뻐하던 문영이와 아들 내외가 사온 옷과 신을 주었을 때 그렇게도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던 문영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돈화역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며 눈물을 펑펑 쏟던 문영이,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들 심붕곤이가 외 할머니를 닮았다며 그렇게도 기뻐하던 문영이…… 인생의 보람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 또한 과연 무엇이더냐?! 바로 이 순간 순자는 인생의 보람이란 돈낟가리에 올라 있는 것도, 남들이 다 우러러 보는 명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바로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한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구해주고 밀어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순자의 사회적 직위라면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 보도원과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이 전부었다. 또한 정식직업도 없었고 당원도 아니었다. 한 시기 연길시 신흥가두의 많은 주임들은 김순자를 당원인줄로 착각하고 친절하게 “당원 할머니”라고 불러 주었다. 당원이 아닌 “당원할머니!”ㅡ 모두가 순자를 이렇게 친절하게 불러줄 때 이는 우리 모두가 사색하고 심사숙고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를 비롯한 어려운 학생과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가정에서의 갈등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문영이를 양딸로 삼고 그 애한테 온갖 사랑을 몰부을 때 자녀들한테서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자는 “사람은 남한테 베푸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는 철리로 가정구성원들을 교육하여 그들 모두가 남을 즐겨돕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때문에 순자의 자식들은 한결같이 문영이를 친 동생처럼 대했고 그한테 대사가 있을 때마다 마치 자기의 일처럼 간주하고 발벗고 나서 주기도 했다. 모두가 순자한테서 이른바 “세뇌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적절한 것 같다. 그 날 대회가 끝난 뒤 순자는 대회주최 측에서 차리는 연회도 마다하고 문영이와 함께 조용히 노동자문화궁에서 빠져 나왔다. 연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필경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비행기처럼 너무 높이 둥둥 띄우는 것도 그닥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만은 어쩐지 독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문영아, 오늘 너와 나 냉면 한그릇씩 사먹지 않을래?” “아이고요, 어머니도 참 또 한그릇만 달랑 사놓고 저만 먹게 할려구요.” 문영이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그러지 않아도 전 오늘 냉면 100그릇을 살 용의가 있어요”라고 하며 동을 달았다. 순자와 문영이가 큰 길쪽으로 나오니 거기에는 용환영감을 비롯한 모든 자식과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총출동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가족일동은 연길복무청사에 들어가 특실을 도맡고 가족파티를 열었다. 용환영감과 나란히 앉은 순자는 술잔을 들어 영감의 술잔에 마주치며 “건배”를 불렀다. 환갑을 쇤 후에는 평소에도 영감과 함께 가끔씩 한잔씩 하는 순자였다. 순자가 영감과 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부르자 가족일동이 모두 일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장수를 위하여”를 웨치며 잔을 굽냈다. 술을 몇잔 마시고 어느 정도 흥분된 순자는 저도 몰래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가지 쓸어안고 휘파람을 불어서 이 가슴을 전할소냐/ 이슬비 소리없이 느껴우는 한많은 // 봄밤이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웁니다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되어 표창받고 대회발언까지 한 날인데 왜 우시는걸까? 순간 이를 보는 문영이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고 자식들도 어머니가 이런 장소에서 이렇듯 애환에 담긴 흘러간 옛노래를 부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태껏 이런 노래를 불러보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다. 한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키우고 거기에 또 남들까지 도우면서 낙천적으로 살아오던 어머니,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그 애환에 대해 자식들도 다는 알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그래도 오직 남편인 김용환 영감뿐이었다. 4 순자와 문영이 사이의 모녀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순자는 문영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며 또 명절기간에 서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선물이나 주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처사를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타이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하게 꾸중하기도 했다. 이는 문영이가 결혼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그 만큼 순자는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밖에서 일처사를 잘하도록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여기에 들어서 순자는 아들보다 딸들에 대해 더 엄하게 굴었다. 왜냐하면 딸이 시집간 후 시부모와의 관계, 시누이 및 시동생들과의 관계 등을 잘 처리해야 양쪽 사돈 사이가 더욱 화목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뜻이 잘맞고 생활수양이 높은 남녀라 해도 일단 결혼하여 생활하다 보면 이러 저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때로는 네탈 내탈하며 다툴 때도 있기 마련이다. 문영이네도 마찬가지었다. 두 사람 모두가 거의 빈손으로 결혼하다 보니 이러 저러한 생활고초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서 돈이 아무리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하지만 돈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아무리 시댁식구나 처가식구가 반갑다고 해도 부부와 자식 이렇게 단촐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 면에 들어 문영이네는 원체 생활기초가 박약한데다 시댁식구들의 출입이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특히 시부모가 장기환자였는데 노인들은 왜서인지 그 몇명의 자식 중 문영의 남편인 심엽군한테 주로 의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시부모가 교원인 남편한테 주로 의거하는데 대해 문영이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문영의 가정 역시 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시부모의 생활비 혹은 병치료비 같은건 부부가 돈을 절약하여 얼마씩 보내드리는건 마땅한 일이나 집이 작다 보니 잠자리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특히 병치료 때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분 모두가 와서 며칠씩 체류할 때면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군 했다. 거기에 결혼 후 문영이 또한 웬일인지 몸에 이탈 저탈 생기면서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문영이는 가끔씩 순자앞에서 그런 고충에 대하여 털어놓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너, 시부모를 외면하면 안된다”, “사람이 나이 들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 이럴 때 자식이 돌봐 드리지 않으면 누가 돌봐 드리겠느냐?!”, “노인한테 효도하는 면에서는 부모가 자식한테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일깨워 주군 했다. 모든 것은 큰 딸 영순이를 교육할 때와 다름이 없이 엄격하고도 조리성이 있었다. 몇 년 전 문영의 아들이 커서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었다. 그때도 문영이네 집은 30여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들 붕곤이가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 시부모가 병치료 때문에 와있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대학교시험준비를 하려면 독방이 있어야겠는데 시부모가 오면 그방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니 잠자리, 식사 등 많은 면에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시아버지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러자 문영이는 가끔씩 남편과 바가지를 긁었으며 나중에는 부부 사이의 종종 말다툼도 생겼다. 물론 문영이는 혹시 연길에 와도 순자 어머니한테 부부 사이에 다투었다는데 대해서만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순자는 수심에 잠겨있는 문영이의 얼굴모습을 통해 꼭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고 단정했다. 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영이한테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같아서는 자기 자신이 직접 돈화에 가서 문영이네 가정에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때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날 순자는 자기 대신 큰 딸 영순이와 둘째 딸 영옥이를 돈화로 보내기로 하였다. 문영이네 가정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돈화에 도착한 영순이와 영옥이가 문영이한테 전화로 연락하면서 언니네가 돈화로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문영이는 집으로 오지 말고 밖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집에 꼭 무슨 불쾌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순자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영순이와 영옥이는 어느 한 작은 음식점에서 문영이를 만났다. “너, 가정에 꼭 심상치 않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왜 우리더러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거냐?” 영순이가 캐여묻자 문영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떤 날에는 기분이 말째여서 집에도 들어가지 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에 영순이는 몹시 화가 동했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 정말 내 동생 답지 않구나.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야지. 집에 들어가 남편과 상론하여 좋게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해야지 이게 뭐냐?!” “언니, 언니레를 실망시켜 죄송하지만 전 어쩔 수가 없어요. 시아버지의 병은 몹시 좋지 않은 병으로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주는 그런 병이예요. 그리고 그보다 더 답답한건 애가 대학시험준비를 하는데 공부할 자리마저 없거든요.” “하지만 너 바꿔놓고 생각해 보아라. 만약 연길에 있는 어머니가 그런 병에 걸려 너희들 집에 가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머닌 다르죠. 어머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머니를 마다하겠어요?” “쯧쯧 이것봐라. 그러니 네가 속이 짧다는거란다. 그럼 이전에 너의 시아버지도 네 남편한테 아주 잘해주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의 시아버진 남편한테는 아주 소중한 분이란다. 부모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다는 도리를 너 왜 모르는거냐?! 사람이 살다보면 힘들고 애가 탈 때가 어디 한두번이냐? 그렇다고 자기가 내키는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에 문영이는 별로 변명같은건 하지도 않았다. 언니 영순이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순의 타이름과 책망에 내심으로 설득된 것도 아니었다. 후에 문영이가 완전히 감화된 것은 역시 순자의 행동에서였다. 언젠가 문영이는 귀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순자는 그 소식을 듣자 바람으로 많은 영양제품을 사갖고 돈화로 찾아가 내놓았는가 하면 극성스레 간호해 주었으며 돌아올 때는 몸을 춰세우라며 돈 1000원까지 내놓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앓을 때마다 그렇게 처사했다. 그 때 순자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었다. 연로한 몸임에도 자식의 건강에 신경쓰는 순자어머니를 바라보며 문영이는 자신한테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바꿔놓고 앞으로 아들 붕곤이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맞았을 때 그 색시가 자기를 홀대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뒤 공무로 연길에 왔다가 순자어머니를 찾아온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참회하였다. “어머니, 그 때 어머니가 다녀간 후 여러번 궁리해 보았는데 제가 진짜 생각이 짧았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뿐만 아니라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언제인가 일부러 연길로 찾아와서는 순자한테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한시기 저와 문영이가 찧고 박고 한건 문영이의 잘못만이 아니랍니다. 기실 제가 당시 시아버지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문영이의 심정을 이해해 주지 못했고 잘 달래 주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장모님 그 때의 일을 갖고 욕하려면 절 욕해 주십시오.” “자네 그만 두게나. 난 이미 다 알고 있다네. 기실 내 딸 문영이가 한시기 생각이 짧아서 옹졸하게 처사했으니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미안할 따름일세. 여자들이란 머리칼만 길지 궁냥이 짧으니 자네 많이 양해해주게나.” 이렇듯 항상 자기의 자식을 책망하는 순자였지 절대 남의 집 자식을 욕하거나 책망하는 순자의 성미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진정 문영이 친정어머니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그랬다. 다만 문영이를 낳아주지 않았을뿐이지 순자는 문영의 친정 어머니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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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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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 (1)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중국은 대국이다.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덩어리를 가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중국은 여행을 다닐만한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산수풍경을 가진 나라이다. 자연적으로 환경과 지형의 차이가 크며 결구상에서도 카르스트 지형(喀斯特地貌), 단하지형(丹霞地貌), 아단지형(雅丹地貌), 사막지형, 화산지형, 해안지형, 빙천지형, 황토지형 등 여러 가 지이다. 최근년 들어 이러한 지형은 날이 갈수록 여행부문과 여행객들의 중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예하면 산수가 아름다운 구이린(桂林)의 풍경도 독특하지만 막고굴이 자리잡고 있는 서부의 사막지대도 자아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어 관광객들을 흡인하고 있다. 본지는 오늘부터 여행특별기획으로 중국의 여러 여행지들을 소개, 여행, 관광과 고찰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중국 윈난의 석림 중국 윈난(云南)의 석림풍경구는 윈난성 쿤밍시 석림 이족자치현 경내에 위치, 해발 1500~1900미터 사이의 아열대지구에 속해 있으며 연 평균 기온은 16도이다. 석림 이족자치현은 쿤밍과 78킬로미터 상거해 있으며 겨울엔 엄한이 없고 여름에 혹서가 없으며 사계절 봄과 같은 날씨를 유지하고 있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열대 고원지대의 카르스트 지형을 갖고 있다. “천하 제일의 기관(天下第一奇观)”의 미명을 갖고 있는 석림박물관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중국 국가 중점풍경 명승구이며 중국 국가지질공원,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베이징의 고궁, 시안의 병마용과 구이린의 산수와 어깨 나란히 이름이 높은 곳이다. 석림의 면적은 약 350평방킬로미터로서 “조형지모 천연박물관(造型地貌天然博物馆)”으로 불리며 이미 유엔기구로부터 “세계지질공원” 및 “세계자연유산풍경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석림풍경구는 대소석림, 내고석림(乃古石林), 지운동(芝云洞), 장호(长湖), 대첩수 폭포, 월호, 기풍동 등 7개의 구역으로 이뤄지며 일반적으로 버스를 타고 대소석림에 도착해서는 다시 마차를 타고 기타 몇개의 풍경구들을 돌아볼 수 있으며 대소석림과 내고석림, 지운동과의 거리는 약 5킬로미터이고 대첩수폭포까지는 23킬로미터가 되며 제일 먼 장호까지도 근근히 25킬로미터의 거리이다. 석림풍경구로 가면 이족의 정취를 한몸에 느낄 수 있다. 유명한 “아스마(阿诗玛)”의전설,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족의 수놓이공예, 고풍스럽고도 신기한 “횃불절(火把节)”, 그리고 열정적인 “싸니가무(撒尼歌舞)” 등은 석림풍경구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인문경관을 이루고 있어 찾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 곳을 잊지 못하게 하는 추억을 남기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약 2억년 전, 석림풍경구가 있는 이 곳은 망망한 바다였으며 바다속에는 이렇듯 각종 조형을 가지고 있는 기암괴석들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지각구조의 운동으로 바다물이 밀려가면서 이런 기암괴석들이 지면에 드러나게 되었고 약 200만년 전부터 이런 돌들의 용해작용으로 서로 분리가 되기 시작했고 또 오랫동안의 세월과 더불어 오늘과 같은 이런 천태만상의 석림으로 되었다고 한다. 석림풍경구의 기암괴석들을 보면 어떤 것은 산봉우리에 있고 어떤 것은 평지에서 솟아오른 것이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우후죽순처럼 수풀을 이루는가 하면 어떤 것은 장벽처럼 둘러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돌이 모양은 윗 사진처럼 아주 괴상한 모양을 한 것도 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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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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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 동북의 항일연군, 홍군의 장정과 남방의 게릴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간고한 3대 전쟁”이었다. 이중 항일연군의 전쟁은 말 그대로 “간고한 전쟁중의 간고한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88 국제여단의 군기 불완전한 집계에 따르면 항일투쟁중 동북항일연군은 군급장령 39명이 희생되었고 2명이 실종되는 등으로 아주 참혹한 대가를 치르렀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 사이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원동지구로 전이, 소련 원동방면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로 되었다. 그리고 소련 원동군 사령원 알파나센크 대장으로부터 검열을 받을 때 이 항일연군 교도려는 소련원동홍군 제88독립여단(국제여단)란 소련군 번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부대가 바로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었다. 게릴라부대로부터 “특정병”으로 1940년, 동북항일연군은 점차 소련경내로 퇴각, 중소변경 소련경내의 삼림지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41년 3월 하순부터 제3로군의 이조린, 김책, 왕명귀, 제2로군의 왕효명, 강신태 등은 소부대를 인솔해 자주 동북경내로 진출하여 항일투쟁에 투입하군 하였다. 소련으로 퇴각한 항일연군은 소련홍군의 방조를 받기 시작, 소련변방군은 그들에게 담배, 소고기, 빵과 통졸임 등을 보내왔고 소련경내에서 충분히 휴식하여 원기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련의 휴식정돈을 거치게 한 후 소련홍군은 항일연군을 도와 숙영지를 만들어 주었고 항일연군 전사들 또한 열심히 일하고 조직규율성을 잘 지켜 소련홍군의 찬양을 받았다. 1941년 1월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우쑤리크(원 쌍성자)와 하바로프스키 부근의 남북 두 곳에 숙영, 소련홍군의 지도하에서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항일연군은 재차 동북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싸울 수 있기를 희망, 때문에 훈련임무는 몹시 번중했다. 매일 8시간에 달하는 실외훈련으로 그키타기, 체조, 사격, 무선전 날리기, 박격포, 기관총 쏘기 등이었고 여병들은 간호훈련을 하였으며 남녀 장병 모두가 러시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중 1942년 1월부터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정치학습, 60시간, 폭파훈련 70시간, 전술교육 80시간, 사격훈련 60시간, 스키훈련 60시간, 지형관찰 훈련 20시간, 실탄훈련 38시간, 내무훈련 80시간, 총검술 훈련 24시간으로 매일 군사훈련 7시간에 달하고 러시아어 배우기 3시간에 달했으며 그리고 기타 사업 2시간까지 합치면 매일 12시간 이상의 근무를 하군 했다. 중국려의 여낙하병 1942년 7월부터 소련홍군의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은 공중낙하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낙하산 펴기 등 기번자세로부터 비행기 모형식별과 45m 높이에서의 낙하 등으로부터 배우기 시작, 훈련을 시작하여 한달만에 실제 훈련에 들어갔으며 7월 26일에는 1000m 높이의 고공에서 직접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8월 2일까지 이들은 도합 8차에 달하는 실제 낙하훈련을 진행, 훈련밀도가 아주 컸다. 그리고 10월 18일부터는 왕옥환, 이계향, 송옥정 등 12명의 여병들도 낙하훈련에 참가, 2일후 이런 여병들도 1000m 고공에서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원동 88 독립여단은 보병영외 반탱크포영, 기관창영, 자동보총영, 포병영, 교통영, 정찰련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투쟁 견지 동북항일연군이 소련홍군 88 국제여단으로 된 뒤에도 이들의 대일작전은 멈춘적이 없었다. 1942년부터 국제여단은 도합 300여차 인원을 동북에 파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군중을 발동하였다. 이런 활동기간을 보면 길게는 1년, 짧게는 10여일씩 되었다. 이 중 적지 않은 전사들은 일본군 및 위만주국군한테 추격을 받다가 다시는 88 국제여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중 많은 전사들이 적들과 혈투를 벌이다가 작열한 최후를 마치었으며 변절자로 되었다는 기록은 단 한건도 없었다. 1945년 5월부터 소련홍군은 서방전선으로부터 대량 원동지구로 이동, 대량의 대포와 탱크 등이 모두 철길에 의거해 이동했다. 이에 따라 88 국제여단의 화식표준도 향상되었다. 검은 빵이 흰 빵으로 대체되었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식용유도 식탁에 올랐고 육식량도 많이 증가되었다. 이는 독일과 싸우던 제2선부대의 표준과 같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을 선포, 동북경내로 대거 진출하였다. 이러자 88 국제여단은 대일작전에서의 선견 및 향도 부대 역할을 하였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적어도 300명에 달하는 88 국제여단 장병들이 소련홍군의 통역, 향도 및 돌격대원으로 되었으며 어떤 전사들은 사전에 적후에 낙하하여 침투정찰을 하기도 했다. 88 국제여단 왕일지 중위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제여단은 대량의 정보를 소련군에 제공, 이중에는 일본군의 방어공사와 병력배치, 또한 병력 및 무기 규모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1946년 소련홍군 제88 독립여단은 그 번호가 취소되었고 이 부대의 장병들은 각각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여러 부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 조선인 장병들은 조선으로 나가 조선건국사업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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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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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5)
- ■ 김철균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2015춘계대회에 참가한 회원들이 전라남도 완도군 장보고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5월 30일, 일행은 2대의 버스에 나눠앉아 한국의 최남단에 있는 전라남도 완도군으로 향했다. 시간은 약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한반도의 중간지대에서 최남단까지의 노정을 5시간 30분에 달린다? 고속버스의 우월성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땅이 그만큼 작다는 것을 의미할까? 예를 들어 한반도의 전체와 중국의 전체를 비한다고 할 때 서울에서 완도까지는 중국의 양쯔강 남쪽 난징에서 광저우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면적과 거리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2004년 10월, 당시 연변축구팀이 전국을급리그 8강전에 참가할 때 우리는 버스에 앉아 북방의 연길에서 중국의 중심지대인 허난성 정저우까지 가게 되었는데 2박 3일이 걸렸었다. 한반도의 절반 땅 거리와 중국의 절반 땅 거리- 비교될 수가 없었다. 한편 고속버스에 앉아서 달리는 동안, 나는 며칠간의 서울생활을 잠시나마 정리해보았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문명하며 모두가 예의가 밝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고 다음의 인상은 무엇이나 엄청 비싸다고 여겼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사례로 나와 박정일 선생은 가끔씩 국도호텔 주변에 있는 작은 음식점을 찾아 아침(호텔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밥을 먹군 하였다. 순대국으로 인당 한화로 5000원, 중국의 인민폐로 말하면 55위안 정도로 연길에서 아침밥을 먹자고 해도 이 정도는 들어야 한다. 거기에 밑반찬이 맛있고도 깔끔했으며 식사후 커피 또한 무료로 제공되군 했다. 그리고 뼈다귀해장국은 인당 3000원, 결코 비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연길의 음식값이 비싸도 너무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 박정일 선생은 서울의 시장에서 옷 몇견지를 샀다고 하면서 연길 서시장의 옷들에 비해 싸다며 연길 서시상에서 한국옷을 가져다 몇배씩 비싸게 팔아 먹는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비싸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는건 아니었다. 바로 택시요금이었다. 기본금이3000위안으로 연길에 비해 많이 비쌌다. 서울지도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주로 택시를 많이 이용, 만원을 벗어날 때까가 허다했다. 하지만 서울의 면적과 연길의 면적을 비해볼 때 이해되기도 했다. 중국도 베이징이나 상하이로 가면 교통비가 엄청든다는 것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덨다. 다음 서울 종로구는 서울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종로 4가 큰길가의 골목들을 보면 길이 몹시 좁았다. 사람이 다니는데는 큰 불편이 없겠으나 가령 화재가 발생할 경우 소방차가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서울의 구석들을 돌아 보노라니 이전에 한국인들이 연길을 돌아보며 하는 말들이 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연길은 마치 한국의 60연대 초기를 방불케 해요.” “연길은 한국 어느 한 군수준에 미칠까?” … 헌데 서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피차일반이었다. 골목 양측의 건물들을 보면 해방전 용정거리나 연길 아래개방지 지역을 방불케 하는 곳들이 많았으며 가리봉동 시장은 화룡시 투도진 시장보다도 헐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면 장단점이 다 있다는 생각으로 그러한 것을 비꼬고는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날 버스에서 나는 사이판에서 언론사업을 하고 있다는 김홍균이라고 부르는 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분의 명함은 김홍균, 나의 이름은 김철균- 거기에 우리 둘은 모두 김해김씨어서 어딘가 통하는 것 같았다. 국적은 달라도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날 김홍균씨는 자기는 김해김씨 몇대 후손이고 김해김씨네가 몇개 파인데 자기는 어느 파에 속하며 등등에 대해 설명했지만 나는 김홍균씨의 앞에서 할 말이 궁금해졌다. 같은 김수로왕의 후손이고 김해김씨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실 우리가 몇대인 것은 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김홍균씨는 진나라시대부터의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겠다는 감이 들었다. 하긴 좀 자기가 박식하다는 것을 “자랑한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긴 중국 역사에 대한 그와 우리의 견해가 일정하게 다른 것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누군가 “완도에 거의 도착했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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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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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해 보는 한·중 양국 여객선 침몰 '대형참사'
- ■ 김철균 6월 5일 저녁 21시경(현지 시각), 중국 양즈강에 침몰되었던 호화여객선 “둥팡즈싱(东方之星) 호”가 물위로 인양되었다. 지난 1일에 침몰되어 꼭 닷새만에 수면위로 떠오른 셈이다. 순간, 조난당한 수많은 승선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또 남의 일 같지를 않지만 침몰 닷새만에 거대 여객선을 물위에 떠올려 놓고 수색작업을 벌이는 한편 사고경위를 조사하는 중국정부의 과단한 사고 뒤 조치에 탄복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약 1년 전인 지난해 4월 16일, 한국 진도 부근의 해상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참사를 머리속에 떠올리게 된다. 한국의 “세월호” 침몰사건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한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발생했다. 당시 “세월호”에는 도합 476명의 승선인원이 있었으며 여객선이 완전히 침몰된 날자는 4월 18일이었다.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된 뒤 오랫동안의 수색작업을 거쳐 나온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가 295명에 달하고 실종자가 9명이었다. 다음 중국의 “둥팡즈싱호” 배의 항행도중 강풍을 만나 거의 어떻게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번져졌으며 구조된 14명 외 기타의 모든 승선자가 조난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세월호”참사와 중국의 “둥팡즈싱호”의 참사ㅡ 둘 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대형참사이지만 사건경위와 사건 뒤의 정부측의 조치 등을 보면 다른 면이 많은 것 같다. 첫째, “세월호”는 연해지만 그래도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였고 “둥팡즈싱호”는 아무리 큰 강이었지만 그래도 강이지 바다는 아니었다. 둘째,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되기까지는 근 3일간의 시일이 걸렸고 “둥팡즈싱호”는 순식간에 번져지면서 침몰시간도 아주 빨랐다. 셋째, 지금까지의 분석에 따르면 “둥팡즈싱호” 참사는 순 사고라는 판단이 기본적으로 서고 있지만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의문점이 여러 가지로 뒤따르고 있고 많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그 점이다. 넷째, “둥팡즈싱호”는 침몰 닷새만에 물위로 인양되었지만 “세월호”는 사고발생 1년여가 지난 오늘까지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이상의 몇가지를 통해 분석해 보노라면 다같은 참사에 대한 한중 양국 정부측의 후속조치에도 의문점이 적지 않게 생긴다. 즉 중국측은 사고가 발생한 즉시로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지만 한국정부측의 사고발생 뒤 움직임은 많은 의문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된 시일이 4월 18일이라면 한국의 구조선박들과 헬기 등이 집중동원되어 구조에 진력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노라면 피해인명을 최저한도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나 그럼에도 295명의 피해자가 나왔다는 것은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바다이기에 육지보다 구조작업이 힘들고 늦어질 수는 있으나 그래도 한국정부측으로부터 구조행동에 동요하거나 늦장을 부렸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 한국정계에서는 “세월호”의 인양을 놓고 공방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월호”의 인양작업으로 말하면 해상에서의 작업이기에 중국 양쯔강에서 “둥팡즈싱”을 건져올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세월호”를 반드시 인양해야 하며 또한 인양된 “세월호”의 모습으로 국민들한테 진실을 밝혀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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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해 보는 한·중 양국 여객선 침몰 '대형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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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4)
-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는 “사자왕”, 창의력이 풍부한 “국왕과 작은 새”, 자극이 강한 탐험편 “괴물공사”… 꼬마 친구들, 이미 신기한 영화왕국에 취해버렸나요? 하다면 친구는 영화란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아는가요? 그럼 우리 함께 그 세계에로 들어가 봅시다. 영화란 조상화학과 광학 등 다문학과의 지식과 원리를 이용, 그 중 가장 중요한 원리는 “시각잔류”로서 모 영화화면이 소실된 후 사람들의 눈의 시망막에는 여전히 그 화면이 0.1-0.4초 좌우 남아있군 한다. 영화필름은 매초 24개 화면의 속도로 돌아가는데 일련의 정태적 화면은 시각잔류의 작용으로 일종 연속적인 시각인상을 조성한다. 이렇게 우리는 연속적인 영화화면을 볼 수 있다. 영화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입체영화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친구가 일단 특수 제작한 편광안경을 끼면 곧 입체영화 스크린의 모든 장면들이 매우 직관적이고도 진실감이 나게 하는바 예하면 모 일종의 물체가 친구를 향해 쾌속적으로 돌진해올 때 친구는 그 물체가 자기의 머리를 맹렬히 습격하는 감이 들면서 잠시 어쩔 바를 모를 수도 있을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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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