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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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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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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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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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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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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우리들의 고향은 어디인가?
    ■ (상지) 강효삼갈수 없는 곳은 고향이 아니다. 추억만 남은것도 고향이 아니다. 고향은 우리가 태줄을 묻고 살면서 고향의 흙에서 물에서 하늘에서 그 혜택을 받는것,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다 할수 있는 곳, 우리의 생명이 존중되고 우리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 우리 삶의 력사가 있고 우리 삶의 방식이 있고 우리 삶의 개성이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고향에서 꿈을 키워 고향에서 어른이 되여 부모님이 되여 고향의 땅을 다루면서 고향에서 가정을 뭇고 고향을 이어갈 아이들을 낳아 키웠다. 또한 고향에서 한 겨레들끼리 살면서 우리의 말과 글과 풍속과 습관을 자유롭게 행하며 조선족답게 살아왔으니 떠돌이후대인 나에게서 고향의 의미는 참으로 보귀한것이다. 고향이 있어 내가 이 땅에서 조선족으로 살수 있으니 고향이 있기에 우리의 말과 글이 있고 고향이 있기에 우리의 전통과 습관도 있으며 고향이 있기에 우리가 우리로 될수 있지 않았는가! 우리의 력사는 고향을 떠나 더욱 말할수 없으리. 우리 민족의 정착력사를, 우리의 삶을,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시작을… 이제 고향을 버림으로 하여 우리는 자칫 자신을 잃을수가 있다. 고향이 없이 산지사방 흩어져 살아봤기에 우리는 안다. 고향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귀중한가를! 한국 KBS “6시 내 고향”이란 프로에서 몇십년만에 고향을 찾아 향수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부럽다. 그들에겐 아무때고 고향이 있다. 아무리 고향을 떠나있지만 이미 혈친적으로 뿌리 내려진 고향이 있기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고향을 갈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고향이 있는가? 고향이라고 아무때고 찾으며 사랑할만한 그런 고향이 있느냐말이다.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있으니 추억은 있을것이다. 그렇다고 추억 그 자체가 고향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해도 인걸은 없는것처럼 고향이라 찾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고향”은 고향이 아니라 잠시 몸을 붙이고있던 역전이나 다를바 없기때문이다. 고향은 단지 먹고 입고 잠을 잤다는 의미만 아니다. 고향은 고향으로서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뿌리일것이다. 하지만 뿌리를 떠나 노상 떠도는 우리, 제꺽하면 고향을 버리고가는 우리에게서 어디 고향다운 고향이 있는가. 사랑을 줄 곳도 받을 곳도 없이 고향을 주머니에 넣고다니면서는 버리기가 쉽지 가지기가 어렵다. 그리고 애면글면 살다가도 쉽게 외면하고 그만 낡은 물건처럼 버려도 별 섭섭함이 없이 사는 리유는 우리들의 전통과 문화가 이곳에 심겨져있지 않다는것이다. 그만큼 한 민족에게서 문화와 전통은 귀중한것이다. 단지 그때그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았던 의미로밖에 남지 않은 고향, 추억은 있어도 사랑은 없고 아쉬움조차 없는 우리라면 이제 “고향”이란 말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있는것이 아닌가.인류에게서 가장 따뜻하고 친절한 의미는 고향이라 했다. 때문에 고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부르고싶고 가고싶은 고향은 어디인가? 고향의 길에서 "길"을 사고한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오불고불한데다 수레 한대 지나가면 비켜서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길, 게다가 좌우엔 엎친데 덮치기로 풀이 가득 기생해서 길인지 풀밭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고 웬만큼 비가 와도 길이 온통 엉망이 되여 힘꼴 쓰는 황소를 메워야 겨우 빈수레도 빠져나올수 있던 락후한 농촌의 길들이 새농촌건설붐에 힘입어 하나 또 하나 시대의 문명을 상징하는 세멘트포장길로 탈바꿈하고있다. 오랜 세월 조상들의 념원이 이제 현실이 되였으니 실로 격세지감이라 할가 한국땅에 오랜 세월 가있으면서 장기간 고향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들이 한번 와 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이제 현성에서 향과 진으로 통하는 길은 말할것 없고 향에서 촌, 촌에서 툰까지 통하는 길도 거의가 세멘트포장길로 변한것이다, 나는 이렇게 놀라웁게 변한 농촌의 길, 특히 조선족농촌 길을 볼적마다 우선 그 옛날 고생고생하며 이 길을 걷던 우리네 조상들을 생각한다.만일 그들이 살아서 오늘의 이 길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였을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반겼으련만 이제 그네들은 언녕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 헌데 더더욱 안타까운것은 그네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이런 길에서 향수를 누리지 못한다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런 길의 향수를 누리지 못한다는것이다. 그들인즉 바로 이제는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갔거나 아니면 장기간 한국에 가 로무에 종사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길은 멋지게 훤하게 잘 닦아졌는데 이 좋은 길을 걸으며 향수 느끼는 조선족촌민들의 모습은 거의 볼수 없어 때론 누구를 위하여 닦은 길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는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 옛날 낡은 길에서 빨리 탈출해나간 덕분에 언녕 이 길보다 더 넓고 좋은 길을 걸어다닐것이다. 그런것을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길에서 “길”을 련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길에서 “길”을 생각한다는것은 사람이 걷는 길만이 아닌 우리가 지나온 력사의 길을 뒤돌아보고싶다는것이다. 옛삶의 터전을 잃고 망향의 길 걸어 이 땅에 와서부터 우리네 족속들이 개척한 첫 정착의 길로부터 시작하여 갈래 많은 력사의 길, 곡절 많은 시대의 길을 우리는 얼마나 힘겹게 걸어왔던가. 해방을 맞아 난생 처음 제 땅이라 분배받은 그 기쁨의 길로부터 소위 공동부유의 넓은 길이라고 하여 틀린것도 무작정 고집하고 내몰았던 호조조, 합작화, 인민공사 복잡다단했던 길로부터 대채의 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런 길은 걷고걸어도 가난을 진정코 뿌리 뽑을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호도거리를 포함한 상품경제의 길을 걸으면서,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큰 길을 걸으면서야 가난하던 살림이 훨씬 펴이게 되였다. 길은 갈수록 넓어져 상품경제의 길이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통하면서 조선족은 출국로무의 길, 대도시진출의 길을 거쳐 어제날 가난할 때 감히 상상도 못하던 획기적인 치부의 길로 들어서게 되였다. 하여 더는 락후한 시골의 흙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더 좋은 길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의 이 길을 비우고 떠나버린것이다.하지만 보다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하여 더 좋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것을 잘못된 처사라고는 할수 없지만 새롭게 변한 길을 보면 볼수록 어제날 길이 없던 곳에 남먼저 길을 내고도 오늘 길이 이렇게 좋아졌는데도 이 길에서 향수하는 겨레들이 많지 않아 아쉽고 또 아쉽다. 출국로무와 도시의 그 좋은 길을 걸을 때는 걸을지라도 이 길에 돌아와 누군가가 계속 걸으면서 명실공히 이 길을 우리의 길로 유지해나갈수는 없는것인가? 그래서 더더욱 길을 보며 길을 사고하고싶다.지금껏 우리가 걸은 길을 보면 늘 시작은 먼저 또 열렬하지만 종당에 끝까지 닿지 못하고 곧잘 중도에 버리여 누구보다 길을 개척하고 건설하느라 고생하고도 자신은 길을 잃고 길을 찾아 맴돌이친다. 이것이 어쩌면 이 땅 우리 겨레의 “길”걷기가 아닌가? 하다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력사의 길인가? 길에서 “길”을 사고하면서 이제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것인가를 사고하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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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3-10-31
  • 조선족동포들이여, 자중하자 자애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 지키라>> 27일, 한국의 수도 서울의 심장지역 시청광장에서는 중국조선족동포와 로씨야를 포함한 구쏘련지역의 고려인동포 근 수천명이 참가한 집회가 거행되였다. 집회는 조직자측과 참가자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소란이 없이 질서있게 무난하게 펼쳐지였다. 행사뒤끝에는 자기쓰레기를 자기가 소지하고 행사장도 말끔하게 정리하는 성숙함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필자는 참가자들의 높은 법의식과 높은 자질에 감복이 갔다. 수천명이 참가하여 소란이 한점도 없었고 앉은 자리가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였다. 실상 중국조선족동포들과 구쏘련지역의 고려인동포들은 그 지역에 살면서도 도덕수준, 지식수양, 법의식이 높은것으로 제 민족가운데서 우수한 민족, 모법적인 군체로 전 사회적인 승인을 받고있는것은 사실이다.자고로 고 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하기에 집회의 자유, 시위행진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헌법으로 명시되여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자유, 절대적인 민주란 없다. 반드시 법과 제도의 범위안에서의 자유이고 민주인것이다.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국법을 무시하고 제 하고싶은대로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은 절대 용허치 않는다. 하기에 우리 동포들은 지구촌의 그 어디에 가던지 그 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우선적으로 준수하면서 법과 제도안에서 사업하고 생활하면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오늘날 중국조선족동포들과 구쏘련의 고려인동포들은 한국에 거주하면서 갈수록 많은 한국의 지성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주류사회의 동정과 관심과 배려를 받고있다. 이는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게 되는 현실이다.한국보도매체에 따르면 강지원 변호사, 김지하 시인 등 한국 각계 시민사회인사 63명은 24일 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는 고려인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자유롭게 왕래하고 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고려인·중국 동포는 1948년 제정된 '국적에 관한 조례'에 따라 한국 국민이 됐지만 정부는 로동시장을 보호한다며 동포 귀환을 제한해 왔다"면서 "결국 이들은 여권 위조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국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재외동포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고려인·중국 동포들도 재외동포로서의 자격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재외동포의 미성년 자녀에게도 양육과 교육의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갈수록 많은 본토국민들과 지성인들이 조선족동포들에게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있다. 이는 민심이고 대세의 추세에 순응하는것으로서 아주 훌륭한 흐름이라고 할수 있다.무시에도 구체적분석 요망 필자는 본칼럼시리즈의 첫번째 칼럼 에서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의 역할에 대하여 3개 방면으로 피력하였다. 중국동포들은 확실히 이처럼 중요한 존재로서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철 같은 현실이다.하다면 조선족동포들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왜 무시할가? 우리는 이 문제를 랭정하게 사고할것이 절실하게 수요된다. 무시한다면 반드시 무시하는 일방과 무시당하는 일방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무시하는 일방에 대하여 분석해 보자.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이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력사적인 원인과 국가사회제도로 인한 리념의 갈등 등으로 인한 같은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으로 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리해하지 못하는데서 인기되였다고 본다. 이들은 실상 협애한 민족적우월감에 푹 젖어서 중국조선족들의 력사와 그 참상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하등인취급을 한다. 실상 30년전까지만 하여도 한국의 실상이 우리보다 더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국민의식이나 사회질서를 포함한 사회 전반이 더 나았던것도 아니였다. 이는 한국의 지인들도 승인하는바이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내면서 사회경제발전과 더불어 선진국행렬에 들어서면서 점차 국민들의 의식도 근본적인 전변을 가져왔던것이다. 필경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과정이 수요되는것이다. 이러한데도 이 오늘의 존재가 타고난것처럼 조선족동포들에 대하여 그처럼 타박하고 무시하는것이다. 그리고 일시적인 감정으로 하여 무시행위가 나타나게 되는것도 홀시할수 없다. 이는 서로간의 래왕과 소통과 함께 있으면서 사업하고 생활하는 것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해결될것이다. 만사는 급하다고 하여 인츰 해결되는 것이 아니 다. 재삼재사 강조하건대 일정한 시간과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 과정을 앞당기고 빨리는것도 쌍방의 공동한 노력이 수요되지만 그래도 주로 무사당하는 일방의 주동적이고 열정적인 자태가 더욱 중요하다.조선족동포들은 무시하는 일방의 다른 한 부류는 무지와 몽매로 인하여 무턱대고 무시하거나 그렇찮으면 참다운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그런 쓰레기인간들이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무시하는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제 무시하는 일방을 상대로 얘기는 이만하면 족하다.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시당하는 일방 중국조선족동포들을 상대하여 담론해 보기로 하자.자고로 반성할줄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독일을 보라. 제2차세계대전당시 파시스트국가 히틀러의 독일은 유태민족과 동유럽국가들에 얼마만한 피해를 입혔던가? 그후 40년이 지났건만 당시 독일총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이웃나라 뽈스까를 찾아가 뽈스까국립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면서 통절하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당시 전쟁피해배상금을 피해국에서 서운함이 없이 지불하였다. 이런 대국다운 처사는 같은 2차세계대전당시 아세아국가들에 그처럼 엄청난 피해를 주고도 반성을 모르는 바다건너 그 나라와 얼마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가?! 비록 성질이 다르고 차이는 있지만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동포들도 자기를 직시하고 수시로 자기반성할것이 수요된다고 본다. 무시를 당하고있는 중국조선족의 경우 역시 자기를 몰라서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여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악덕업주에 의하여 분명하게 어이없이 불리익을 당하면서도 자기앞의 발명조차 못하는것이다. 타방으로는 무식한 인간, 악의적인 인간들에 의하여 무작정 당하는것이다.자기를 아는것, 자중자애의 선결조건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사업하자면 항상 자중하고 자애할것이 지극히 수요된다. 자중자애하자면 우선 자기를 잘 아는 것이 선차적이다. 공자는 일찍 고 하였다. 자기를 아는데는 자기민족의 빛나는 력사와 우수성을 잘 아는 것이 우선적이다. 자기민족의 력사를 잊으면 근본을 잃는다. 중국조선족으로서의 력사를 알아야 하고 조선반도에서의 우리 고국의 력사도 잘 알아야 한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어린애들이 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까지도 라고 물으면 고 하면서 중국력사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달달 외우듯이 말한다. 비애가 아닐수 없다. 그래서 언녕 20년전에 연변일보는 김철호기자의 특별기행 하는 주제로 한 개면, 1만여자에 달하는 편폭으로 2년간 100여편의 시리즈기사를 보도하였다. 글짓기콩클도 경상적으로 펼치고서 는 문장에 특등상을 주기도 하였다. 그후 인츰 조선족학교들에 우리 민족력사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은 이처럼 우리 민족 바로 알고 바로 알리기에 오늘날까지 열심히 노력하고있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될것이다. 이런 사업은 한국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여야 한다고 필자는 인정한다.조선족동포들이 자중자애하자면 동시에 우리 민족의 렬근성과 고질적인 약점도 치유하고 시정하고 극복할것이 필수적이다. 일전에 김정룡선생이 에 올린 칼럼 를 감명깊게 읽었다. 재한조선족동포사회를 잘 해부한 훌륭한 문장이라고 본다. 작자는 여기서 우리 동포들의 부족점과 고질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리 조선족동포들은 지성인들의 이런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시정하기에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언행을 명심하고 도처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여 자기행실을 바로하는 것은 결코남한테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실상 자신을 위하는것이다. ,우리는 이런 격언들을 항상 명기하고서 자기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줄로 안다.이는 대자연의 섭리이다. 하다면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진출한 우리 동포 선지선각자들, 사회의 지성인들은 매체를 통하여 특강을 통하여 혹은 이런저런 행사를 통하여 기회만 있다면 우리 동포들의 렬근성, 고질로 된 오점, 바르지 못한 행실들을 질타하고 훌륭한 본보기들은 충분히 긍정하고 널리 선전하면서 한국의 건강한 시민사회건설, 옳바른 사회기풍건설에 동참하고 일조해야 한것이다. 동포사회의 지성인들이 지난날 이렇게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고질병은 의연히 고쳐지지 않고 문제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공동한 사업이 어느만큼 간고하고 막중한가를 단적으로 시사해 준다.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존재와 역할을 주제로 한 시리즈칼럼, , , , 그리고 이번에 이렇게 4기에 거쳐 펴내였다. 상기칼럼 4편을 제가끔 뜯지 말고 하나로 통합하여 읽어 주시고 리해하여 주신다면 고맙겠다. 그리고 미흡함점이 많은것만큼 적시에 따끔한 비판과 조언을 부탁한다. 이미 많은 분들이 글을 올려 긍정도 해주고 혹은 비판도 하였고 혹은 가르침도 주었는데 몹시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악성댓글도 있고 듣기 거북한 욕설과 인격을 모독하고 혹독하게 폄하하는 언사도 있었는데 모두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기야 필경 당신의 잘못인데 그것으로 하여 내가 앙앙불락하면서 성질을 낸다면 오히려 나의 금싸락 같은 몸과 마음이 해를 입을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장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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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30
  • "노력하는 자 성공한다"
    2008년 1월, 나는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 혜택자의 한사람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짐을 푼 곳은 충북 어느 시골마을의 단칸방,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온 오빠가 자취하고 있는 월세방이였다. 추운 겨울내내 전기장판으로 버티고 있다는 방은 들어서자 냉기가 확 몰려왔다.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안에 발을 들이밀고 녹이면서 나는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어려움들이 내 앞에 닥쳐왔음을 느껴야 했다.이튿날, 첫 절차로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고 취업교육을 신청한 후 하루라도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인들의 말투나 억양, 생활습관 등을 살폈다. 그럭저럭 두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취업교육을 받게 되었다. 같이 한국에 온 많은 중국동포들과 어울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아 이래서 교육이 필요한거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다. 별로 번거롭기만 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돼 교육받으로 가기전 까지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는데 갈팡질팡하는 동포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성공한 이국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필요이상의 교육이였다. 그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먼가 자신심도 생겼다.교육이 끝난 이튿날 나는 곧바로 교차로 신문을 주어다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식당은 일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다던데 회사쪽으로 알아볼가? 아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알아보자,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비용을 줄여야 돈이 많이 남을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최대한 교통비 없이 다닐 수 있는 구역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외국인은 채용 안한다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행이도 면접오라는 곳이 하나 생겼다. 숨이 훌 나온다. 그래, 래일 좋은 인상을 남기는거야, 하나하나 물어가며 열심히 하는거야, 열심히 하느라면 되겠지. 설마 한국땅에 내가 발붙일 자리가 없으랴. 나는 스스로 화이팅을 부르며 잠자리에 들었다.이튿날,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약속된 식당에 도착했다. 손짜장면집이다. 중년의 첫인상에도 칼칼해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다. 인사가 끝나고 식당일은 해봤냐, 어데 사냐 등을 묻는다. 나는 솔직히 식당일은 못해봤고 중국에서 왔으며 사는건 걸어서 십분정도 거리밖에 안되는 곳이라고 털어놓았다. 잔뜩 긴장해서 단숨에 총알처럼 털어놓고나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이 넓어 청소가 힘들거라면서 이틀 일해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야호, 아무튼 면접은 합격되였다.첫 출근날, 나는 규정된 출근시간 십오분전에 도착했다. 열심히 해야지, 사모님이 나와서 밀걸레며 비자루를 꺼내주고 청소부터 하라고 한다. 이런 저런 지적을 받으며 겨우 청소를 끝내니 이번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라고 한다. 꾸중반, 핀잔반을 들으며 머리 들 새도 없이 겨우 청소를 끝내고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훌 나온다. 여태 나는 청소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바보였단말인가. 물 한모금 마시고 숨을 들이쉬는데 사모님이 메뉴판부터 익히고 홀 테이블 번호부터 장악하란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생소한 낱말들을 잔뜩 긴장해서 외우고 홀번호를 눈으로 헤아리는데 치익 하얀 승용차가 문앞에 정차하더니 남자손님 두분이 들어온다. 어쩔가. 어쩔가.“머해요? 메뉴판 가지고 물과 컵 들고 빨리 손님 맞이해야지.” 사모님이 냅따 소리지른다. 이미 내친 걸음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메뉴판을 옆구리에 끼고 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물병을 들고 손님앞에 다가갔다. 아, 그 떨림과 긴장감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아무튼 얼떨결에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전표에 적어 사모님한테 가져다가 보이니 장부에 먼저 적은 후 주방에 소리치면서 들여보내란다. 짜장면이면 짜장 하나 있어요 이렇게 말이다. 장부에 적고 개미소리만하게 짜장 하나에요...하니까 주방에서 면빼는 아저씨가 크게 소리쳐야지 그렇게 속삭이면 못들어요 한다. 어정쩡해 있는데 사모님이 빨리 반찬 챙겨가야지 머하냐고 한다. 부랴부랴 김치를 담으려니 김치를 어떻게 담으면 좋을지 또 망설여진다.말귀를 못알아들어서 혼나고 주문 잘못 받아와서 혼나고 음식을 다른 테이블로 가져가서 혼나고. 아무튼 온하루 혼났다. 일이 끝나고 퇴근 준비로 마무리를 하면서 나는 아무래도 온하루 혼나기만 했으니 이제 짤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님과 사모님이 머라고 의논하더니 사모님이 래일부터 계속 나오라고 한다. 식당일을 첨 해봐서 많이 서툴지만 열심히 하고 노력하려는 태도가 좋단다. 울다가 웃을 일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가볍던지, 드디어 한국에서 내가 일할 자리를 찾았다는 기쁨, 먼가 새로운 발자국을 비로소 내디뎠다는 뿌듯함이 몰려와 하루동안의 피로도 저 멀리 날려간듯 했고 하루동안 깨지고 혼난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나는 퉁퉁 부은 다리를 매만지면서도, 손님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내가 일할수 있게 된것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가고 배워가면서 내 집처럼 아낄수 있는건 아끼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가면서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손님들한테도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일부 손님들은 가면서 “연변아가씨가 참 착실하네요” 등의 칭찬도 해주군 했다. 걸음걸음 따라다니던 사모님 잔소리도 어느날 보니 뚝 끊긴게 아닌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머, 하면서 긍정도 보내주었다.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7개월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마음 편하게 내 집같은 식당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서 집에 보낸 돈도 적지 않다. 요즘 나는 먼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충실함에 행복해진다. 내가 노력한만큼 주어진다는 말,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한국에 오는 모든 동포 분들에게 해주고싶다. 그러면서 누구나 참되고 성공한 한국생활을 이룩해나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김경화◆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중국동포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27
  • 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나에게는 이모 한분이 계신다. 1934년생이시니 올해로 어느덧 79주세인 셈이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운명의 조화였던지? 이모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조카딸은 세살에 엄마를 잃었고 그때 이모와 갈라져서 왕청에서 연길로 떠나왔었다. 내가 다섯살나던 해 이모가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동안 연락도 없이 서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나를 둘처업고는 밖에 나가 웬지 모르게 하염없이울기만 하던 기억만이 어렴풋하다. 이모는 왕청역에서의 그 리별이 수십년 지난 오늘에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난다고 한다. 아빠품에 안긴 철없는 애기가 엄마 죽은줄도 모르고《엄마는?》하고 졸라대자《엄마는 갔다...》,《이모는?》,《이제 안녕! 해야지...》아빠의 말이다. 세 살난 나는 얼른 고사리 손으로 아빠입을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25세 젊은 청년 나이로 상처를 하였었고 그후 왕청교육국에서 연변한어사범학교로 전근하게 되어 어린것을 안고 길을 떠난 것이였다. 그때 중학에 다니고 있는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다. 조카딸과 형부를 눈물로 떠나보내고 이모는 몇날 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쉬기 힘들었단다. 반주임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 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마음속에 굳어 있던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더라는 것이다. 그 세월 사람들은 가슴속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렇게 밖에 풀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간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고 이모부는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큰딸 도순화가 큰 병으로 료녕성 안산의 <천산병원>에 입원하여 앓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잠시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종종 만나보시고 새 엄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얼마동안 계시다 간 후 우리들의 왕래는 다시 시작되였다. 그번에 이불장에서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갔을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옷감도 이불등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빌려 샀었고 15원짜리 트렁크 하나에 어록책과 하향하여 입던 검은 고리둥 옷 한벌을 넣고 시집갔었는데 이모가 그 사연까지 다 알았으면 더욱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끈끈한 정이 아닌가 싶다. 그후의 어느 가을날, 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 계동에 찾아가서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선화 련화 은화 등 동생들도 우리 집에 놀러 오군 하였다. 금년에 어쩌다 련화가 또다시 연락이 와서 내가 다시 찾아가게 되였고 오래동안 보지못한 이모와 동생들도 다시 만나고 한주간 잘 지내고 왔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다만 이모 다리가 너무 불편한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 정신도 맑으시고 옛 이야기들도 잘하시며 몸에 큰병은 없는듯 한데 무엇이 문제인지 온기있고 펀펀한 다리가 전혀 움직일 수 없단다. 다리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에 고장이 생긴 모양이다. 년세가 많으시니 수술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다.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선화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고 좋은 세상 만나서 좋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뿐이다. 이번 걸음에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지난세월 이야기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엮어 본다.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스므살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소학생이 였단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1928년생이니 이모와는 여섯 살이나 차이가 있었다. 워낙 늦게 섬이 들어 만날 애보다 못하다고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철부지 어린아이였다.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외할아버지는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투항하여 도망가면서 동북 할빈지역에 퍼트려 놓은 그 무시무시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얼마 오래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니 하나밖에 없는 누나인 우리엄마 손에서 살뜰히 병시중을 받았으나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한다.의지가지 할 곳 없는 이모는 엄마가 결혼하여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단다.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밭에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인 내가 얼마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이모가 딴 생각에 팔려 길을 잘못가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앞을 가르켰다는 것이다.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 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엄마와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방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또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어오면서 크게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산 것도 같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1947년말, 그때는 아직 중화인민공화국탄생 직전인지라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뒤따라 나선 엄마는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애기를 낳은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실을 짜서는 양발과 수갑을 손수떠서 해방군께 보내는 활동들을 하였단다.련속되는 전선지원 활동들로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느라 애기 젖도 바로 못 먹였다.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도 더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모는 너무도 기가막혀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깊은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60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이모는 그때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한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버지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보니 녀자들만 살다나니 땔나무를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현 부근에 있는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위탁하여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도 안된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것을 알고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한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먼저 먹는것이 아니라 얼른 짚어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큰아버지 입에 먼저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 항상《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 》하면서 수염이 가득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이뻐서 안고는 방을 한바퀴 돌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가 폐병에 걸린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그 병에 전염되여 1년도 못되게 앓다가 22세의 꽃다운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셨다. 그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분배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중등전업을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하나도 없었음으로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앉혔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언제 숫한 애들을 버리고 조카딸을 찾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이해할만도 한 일이다.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애들은 부모님들이 데리고 한반도에 있는 고향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부모님 고향땅의 주소를 알았었지만 남한길이 막혀 있었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으로 서로 찾지 못하고 있다가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는 두차례나 한국에 초청되여 시집식구와 남편의 자녀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목사로 일하는 시삼촌의 영향으로 이모는 다시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다 교회를 세곳이나 세우기도 했었다. 어찌나 헌신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했던지 이모는 한국측의 신용을 얻어서 몇년간 많은 경제적 후원도 받았고 점차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또 계동판에서는 이름있는 권사로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한평생《주》를 믿고《주》에 혼신을 바쳤으니 인제는 정녕《하느님》의 딸인듯 싶다. 이번에 내가 가기 전날 이모는 꿈속에서《천당》에 가 보았단다. 그렇게 눈부시고 찬란한《천국》이였고 많은 성도들이 이모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인생 로년에 더욱더 깊이깊이 믿고 있는 그 신앙, 우리 유물론자들과는 달리《저세상에 또 다른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고 있으니 어찌보면 이모한테는 유일한 정신적 의탁이요, 마음의 마지막 안신처인듯 싶다. 어릴때 갈라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교육가의 자식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잘 키워 왔으며 크게 근심없이 살고 있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을 놓을 것이다. 나도 인젠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나간 세월 모두가 이 세상에 태여난 모두에게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어릴때의 그 슬픔도 설음도, 커가면서의 그 억울함도 고달품도 모두가 한생의 잊혀가는 악몽이듯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이모와의 상봉 이야기》을 한단락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어린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가는 희노애락의 추억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 격전의 나날, 조국해방의 포소리속에서 이 세상에 태여 난 한 갸날픈 생명이 이 나라가 걸어온 60여년과 동반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을 다 견디여 냈으며 자신의 신근한 노력과 분투로 후회없는 한생을 살아 왔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세 살에 엄마 잃은 그 불쌍한 아이, 그 여리고 순진한 눈물의 소녀, 그 천진랑만한 장미꽃 청춘이 어느덧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다 지났고 이순(耳順)길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오직 지나온 인생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뜻깊은 삶에 최선을 다하며 제2의 인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강순화2013년 10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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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8
  •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해마다 시월이면 한차례의 이채로운 문학수업을 받는 기분이다. 수확의 계절인 이 달이면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TV, 인터넷, 핸드폰을 풀가동해놓고 그 소식을 기다리노라면 그야말로 월드컵시즌최강전의 결과를 기다리는것같은 마음이다.올해 후보로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유력했다. 문학도시절 부터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하고 읽을지경으로 그에 대한 광팬인 나 역시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지난해 중국 작가 막언에게 밀렸듯이 이번에도 그는 고배를 마셨다. 여섯번이나 노벨상후보에 추천되였던 그에 대해 평단은 “가장 비장한 후보”라는 수식까지 달아주었다. 우리말 언어권에서 모두가 기대하던 한국의 원로시인 고은 역시 락방했다. 우리시간으로 10일 저녁 7시경, 스웨덴 한림원은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카나다의 녀류작가 앨리스 먼로라고 선포했다.우리에게는 많이 생소한 작가, 중국에서도 그의 작품은 “떠남 (逃离)”이라는 단편소설집 한부가 달랑 소개 되였을뿐이다. 앨리스 먼로는 녀성으로서는 13번째, 카나다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북미권에서 수상자가 나온것은 1993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0년 만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 사상 처음으로 단편소설로 상을 거머쥐였다는 점이다.스웨덴 한림원은 “스토리텔링이 정교하다. 명료하고, 심리적인 리얼리즘을 담아냈다”고 시상 배경을 설명했다.“섬세한 관찰력과 빼여난 구성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한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 앨리스 먼로는 그동안 세계 주요 언론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체호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전문작가”, “북미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려왔다. 1931년 캐나다 토론토 서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녀는 1968년 단편소설집으로 등단, 이어 그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들의 춤”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70년대 미국의 정예 잡지 “뉴요커”에 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세계3대문학상인 맨 부커 국제상을 비롯, 유수의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 먼로는 그간 “왜 장편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아 왔다고한다. 하지만 그의 단편에 농축된 성찰과 감동은 웬만한 장편에 못지않았다.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의 엥룬트 종신 사무총장은 "그녀는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은 단편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택했고 그것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녀는 단 20 페이지 작품을 통해 보통 장편소설 한 편보다 훨씬 더 많은것을 말할수 있다. 그녀는 단편소설 하나에다 수십년간을 성공적으로 집어넣을수 있다"라고 극찬했다.앨리스 먼로는 수상 발표 직후 카나다 관방TV의 전화인터뷰에서 “단편이란게 단순히 장편을 쓰기 위해 끄적거리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앨리스의 단편집 "떠남" 금번의 노벨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창작성향이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크다.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작가이고 보면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그 창작초지를 잃거나 홀시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진들보다는 많은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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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6
  • "나는 중국 공민으로 살래요"
    인생 70고래희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건립된지도 아직 70년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고봐야 할가보다. 왜냐면 일부 몰상식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만 보면 턱을 높이 쳐들고제 나라 자랑에 중국에 대한 비판에 침방울 튕기면서 조선족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지어는 모욕적인 언행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며 그런 한국인들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체제를 떠나 사람들의 생각과 배워온 철학은 고쳐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듯 하다. 오래 살아온 환경이나 습관적으로 반복되던 곳이 정해진 한곳이란 자체가 페쇄된 사상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짚어 말하면 우물안의 개구리.15년동안 습관적으로 반복된 생활덕분에 나름대로 와닿는 점도 많다. 1994년8월1일, 나는 청도에서 인천행 배편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붙였다. 그때는 연수생으로 한국에 가는 첫 패의 중국동포라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7월 8일,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고중을 금방 졸업했던 나로선 그런 뉴스거리보다 어떡하면 만원호가 될 수 있을가란 생각만 할 때었다. 인천항에 막 도착했을때 어느 방송사기자가 나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대한민국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김일성주석의 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땐 너무 어려서였을가 아니면 대답 잘못하면 중국에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공포증때문이었는지 잔뜩 긴장해서 어…어 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걸로 기억한다. 며칠후 한 회사에 같이 일하게 된 한 친구가 엠비시 피디수첩에서 나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했던 방송사가 엠비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또 한국사람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에 대해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첨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군에서 살다가 중국에 왔고 본관이 의성김씨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한국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깊은 감정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연하게 한국에서 날아온 국어사전을 받고 한국사람들은 참 인정많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도 그런 부자동네에서 살고싶은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남조선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면 국어사전이 온다는 소문이 크게 돌 때라 나도 한번 큰 마음 먹고 편지를 썼는데 아니가 다를가 정말로 배달부 아저씨가 학교를 찾아와 국어사전이 들어있는 소포를 저한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에게 크게 혼났던 일도 생각난다. 담임선생님은 남조선과 서신거래하고 물건을 요구하면 남조선 간첩으로 비판 받을수도 있으니 방송도 듣지 말고 서신도 하지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당시는 중국과 한국이 아직 수교조차 하지 않은 적대적인 국가 사이라 방송만 들어도 파출소 호출을 받던 시기라는 것을 점점 크면서 알게 됐지만 어린 나로서는 방송을 듣고 서신거래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을 크게 원망도 했었다.한국땅에 첨 밟고 일한 곳은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세타제조 공장이었다. 중국동포 가운데선 우리가 처음이였지만 이미 먼저 필리핀 사람들이 와있었다. 우리의 기숙사는 정릉3동 714번지 올리막 길 작은 두개의 방으로 우리 중국동포 6명이 들었다. 환영식을 한다면서 회사의 한국인 상사들인 이사님. 김과장, 오대리, 김대리 등이 돈을 내서 부근의 중국반점에 전화해 탕수육, 짜장면, 군만두 등을 배달시켜 쪽파티를 열었던적이 있다. 그날 성욱이라는 한 친구가 고향 술공장에서 만든 70도짜리 백주를 상사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죽어도 살 수 없었던 귀중한 고향 술을 통크게 내놓은 것이다. 술 좋아하는 김과장님은 종이컵으로 두잔 연속 원샷했고 김대리는 마실듯 안 마실듯하고 오과장님은 술에 불이 붙는것을 보고 희한해 하면서 옆에서 원맨쇼를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김과장님은 나중에 어떠셨는가 물었더니 집에 가서 화장실에서 양말을 벗은 기억까지 나는데 깨여나보니 병원침상이었더란다. 남편이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한 부인이 큰병 난줄 알고 병원에 전화해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까지 갔다고 했다. 마실때는 잘 마시더만 독한 술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면은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사람임은 틀림 없었다.김과장님이 회사를 그만둔 후 오대리가 과장이 되였지만 그 분이 있었을 때가 더 좋았던것 같다. 오대리는 권위주의적이고 중국동포들에 편견까지 갖고 있어 나하고 크게 싸운적도 있다. 첨엔 작은 일로 티각태각 말다툼하다 점점 크게 번저져 서로멱살을 거머쥐고 당장이라도 주먹질 싸움으로 변질할 무렵 회사 임직원들이 뜯어 말리는 바람에 “참사”는 피면했다. 또 한번은 부사장님이 환영식을 한다면서 삼결살 회식을 조직한 적이 있다. 부사장님 젊은 시절 이북에서 월남하신 북조선출신이었다. 친구끼리 월남하여 간고창업끝에 세타공장으로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중국에가본적이 없는지라 상추며 삽결살을 가리키며 중국에는 있는가 중국에서는 자주 먹는가며 궁금해서 물어 보셨지만 우리 조선족들에겐 멸시와조롱으로 받아 들여져 기분은 여간 좋지 않았다.8월의 어느날 큰 비가 오는 날 나는 야간 근무라 기숙사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안에 물이 들어오는 꿈을 꾸다가 투당탕탕 울리는 혼잡스런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는데 정말로 방과 방사이 움푹하게 패인 연탄보일러를 때던 작은 복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폭우가 계속 쏟아지자 기숙사가 걱정돼 달려왔던 것이다. 길 옆집이라 빗물이 내려오는 족족 문턱 낮은 우리 기숙사안에 마구 흘러들었다. 우리는 화가 났다. 필리핀 사람들은 비도 안 들어오는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임시로 이런 방을 주다니. 임시로 연탄보일러를 쓰게 만든 방을 말이다. 차별대우에 우리는 집단 결근을 했다. 아니 파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랬더니 이틀후 이사님이 새우깡 등 먹을 것을 가득 사들고 우리 기숙사로 와서 우리가 왜 출근을 하지 않는가고 묻는것이였다. 이에 다른 친구들은 입을 꾹 닫아맨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와중에 내가 필리핀 사람들은 저렇게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빗물이 막 들어오는 방을 주는가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이사님이 방 하나 더 구해서 필리핀 사람에게 주고 우리에게 그 방을 주겠다며 어서 일을 시작하라고 다그쳤다. 우는 애 젖을 주고 우는 애에게 부모의 관심이 먼저 간다는 말이 맞긴 맞는것 같았다.그 공장에서 8개월간 일하면서 나는 계약대로 260달러에 달하는 월급을 받았다.그때 1달러에 720한화였으니깐 35만정도 받는셈이였다. 억지로 35만까지 월급을 올렸지만 월급 오른 좋은 기분은 더 이상 오래가지 못했다. 군입대를 피해 입사한 한국애가 있었는데 공장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애의 월급을 올려준다는 소문이 돌았기때문이다. 그 애가 입사할 때 월급이 50만원이 넘었는데 더 올려준다니 우리들의 심리가 평형을 이룰리가 없었다. 후에 수차례 사장님을 찾아가 월급 45만원으로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신 식비를 자부담해야 했다. 또 한두달 더 버텼지만 날이 갈수록 그 공장이 싫어졌고 어느날 짐을 꿍진채 야반도주하고 말았다.공장에서 나온 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용역잡부일을 다녔다. 그해는 바로 삼풍백화점이 물앉아 큰 인명사고를 낸 해였다. 용역일을 나갔는데 같이 일하는 한국인 동료가 얼굴이 굳어진채 나더러 지인들에게 한번 전화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혹시 삼풍백화점에 간 사람이 있나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그때는 한국에 온 고향 친척과 친구가 없어 전화해볼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족들을 관심하는 좋은 한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미 습관되었을지 모르는 권위주의때문에 우리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종종 싸울 때가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형틀목수 데모도 즉 보조일이라 기술자들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도 보수는 더 적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공구를 나와 나의 사춘형 둘이 다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가 가져야 할 공구도 무거운데 자기네 공구까지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는 임시로 아파트건설현장 근처에 지은 기숙소에들어오면서 내내 투덜거렸다. 이윽고 기숙소에 도착한 내가 문을 열면서《한국XXX들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리고 있다》며 욕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국인 기술자가 나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 대나무 빗자루를찾아들고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도 번개같이 바닥에 있던 나무막대기를 찾아들고 대항했다.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안돼 헐레벌떡 뛰어온 형틀목수 소장이 말려서야 싸움은 끝났다. 우리는 그날로 목수일을 그만두었다.그래서 시작한 일이 때밀이였다. 때밀이는 돈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을 때밀이하는 것이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안산 고잔동 사우나에서 때밀이일을 할때였다. 어느날 오십대중반의 남성이 때를 밀려고 때밀이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이상대로 머리 안마 잠간 하고 손의 때부터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님이 《XXX놈아, 네가 이게 때를 민다고 미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힘이 약하다며더 세게 밀라는 것이었다. 근데 그동안 별의별 모욕을 꾹 참아 견뎌왔던 나는 그날 속에 엉켜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그 손님의 피부가 상하도록 양쪽 옆구리쪽으로 더 많이 더 세게밀었다. 밀때에는 그 손님도 느끼지 못하다가 때밀이가 끝난후 샤워를하다가 통증을 느끼고 다짜고짜 목욕탕 출입문을 박차고 나와 나를 불러내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때 때밀이 총책임자가 그 손님을 막아 나서면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옆에서《늙었으면 똑바로 늙으세요. 때밀이가 아무리 천한 직업이라 해도 XXX놈이 뭐에요? 난 고의로 그랬어요, 어때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중에 사장님까지 나서서 사과를 해서야 일은 일단락했는데 나는 더이상 그곳에서 때밀이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간 곳이 서울 을지로4가에 있는 XX호텔이었다. 거기서 높은 월급 받으면서 반년간 때밀이하다가 한평생 때밀이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곳을 떠나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남성전문 사우나에서 안마사샵을 임대맡았다. 전세 맡은 사람 손에서 월세로 다시 임대맡았는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가 70만원이었다. 남성전문 사우나여서 그런지 동성연애자가 많고 돈을 더 주겠으니 딸딸이를 쳐달라는 변태적인 손님도 많았다. 딸딸이란 다른 사람 해주거나 혹은 스스로 하는 남자의 자위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손님들이 이러한 당치도 않은 요구를 제기할 때면 솔직이 해주고 돈 한푼이라도 더 벌고싶은 생각이 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사람 두사람 해주다나면 나까지도 동성연애자가 된다는 공포심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서비스업을 하려면 손님이 왕이고 손님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리쯤은 모르는게 아니지만 내가 동성연애자로 된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그래서 결국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샵을 내주고 말았다.나는 안마사의 길을 원했지만 한국에선 안마사가 시력장애인 독점직업으로서 정상인이 하면 불법이었다. 그래서 안마사란 말을 직접 쓰지못하고 수기사, 미용사, 경락사 등등으로 부른다. 안마사를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 직업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했다. 또한 시력장애인 인구가 2만여 명 정도밖에 안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합법적인 안마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안마사 자격증 소지자가 5천만 대한민국에서 2000명도 안된다고 한다. 이처럼 돈벌기 좋은 재간을 익힌 내가 그 재간을 그대로 썩이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지난 2008년 5월부터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발마사지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재입국비자 h-2-d 비자로는 불법 취업으로 간주 되면서 나는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일년반동안 운영을 해오다 난는 결국 2009년 12월9일 노동부 법무부 경찰의 단속으로 법무부로 연행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모든 자유를 잃고 감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죄라면 발안마와 전신안마를 해준 것밖에 없는데 며칠간 우리를 심사한 조사관은 나더러 벌금 800만원을 내라면서 내지 않으면 강제출국시킨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결국 강제출국을 선택했다. 강제출국자의 입국제한이3년이상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발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면서 든 자금이 공중분해되고 세무서에서 내준 사업자등록증이 폐지로 된 것도 모자라 아내와 같이 오일간 철창 생활까지 하다보니 동족끼리 이렇게까지 처벌하느냐에 더더욱 화가 나 중국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귀국길을 택했던 것이다.세무서에서 사업허가증까지 받은 발마사지업소가 법무부에 단속당하는 예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싶다.나는 당시800만원 벌금을 거부하면서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인줄 알았지만 오늘에야 추방당하는 불체자 중국공민인줄 알았습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가 한국인의 피와 같지만 법적으로는 중국인이다보니 한국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인었다면 벌금이 800만원이 아니라 백만밖에 안될 것이다.그리고 사전 예고도 없이 무단단속당하는 일도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 귀국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김황룡■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16
  • 어머니를 추억하여...
    어느덧 엄마가 우리곁을 떠난지도 2년이란 시간이 거의 흐르지만 불효자식인 이 막내 아들은 이제야 천국가신 어머님께 이 편지를 올립니다. 어머니는 10남매중 맏딸로 태여나시고 아래로 줄줄이 태여난 아홉 동생들을 위해 그토록 가고싶은 학교도 못 다니시며 동생들 뒤바라지 하면서 고생하셨죠. 어머니는 한해 건너 태여나는 동생들 업어 키우면서도 잠시라도 쉴틈이 있으시면 그 시간을 리용하여 조선어 공부와 수학 공부를 자습했었다죠? 그토록 배움에 불타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된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학교에 입학 시키셨다죠. 학교에 입학한어머니는 뛰여난 성적으로 전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었죠.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 시험에 합격되였지만 소아마비인 어머니는 그 당시 장애자들은 상급학교에서 받지않는다는 리유로 아쉽고 쓸쓸한 마음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남평진 방송소 방송원으로 취직하셨죠. 어머니는 남평에 조그마한 세집을 맡고 열심히 맡은바 사업을 하시면서 동생들 뒤바라지 하셨죠. 남의집 부모들은 자식들이 상급 학교에 붙지못해 한숨만 풀풀 쉬는데 원래부터 총명한 집안탓인지 엄마의 동생들은 시험을 치기만해도 척척 잘도 붙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그때 화룡현 고중에 다니던 큰외삼촌이 배고픔에 못이겨 다 헤진옷과 거의다 째진신을 신고 화룡으로부터 도보로 걸어서 남평의 엄마집으로 오자 너무나도 초라한 동생을 보신 어머니는 우선 큰삼촌을 배불리 먹여놓고 아껴 저축해 두었던 얼마안되는 로임과 그시기엔 젤로 값비싸고 고급 외투라는 니즈옷을 팔아 삼촌의 웃옷과 아래옷, 그리고 신까지 사 신겨놓고 멋지게 때벗이한 큰삼촌을 보시고 "어......내 큰동생 원래부터 이렇게 멋지나?" 하시면서 농담까지 하셨다면서요? 그시절 배고픔에 못이긴 삼촌들과 이모들은 방학만 되면 적은 로임타면서 사업하는 엄마한테 그래도 월급쟁이라고 자그마한 집에 오구작작 모여들면 어머니는 의젓하고도 이쁘게 성장해가는 삼촌들과 이모들를 위해 날마다 개학때까지 한가마의 이밥과 두부를 앗아서 방학동안 만포식 시키셨답니다. 고난의 대약진 시기가 오자 어머니는 그 시대의 승진으로 인한 야망으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며 늑대 잡았다면 호랑이 잡았다고 몇갑절 부풀려 방송 하라는 공사 간부들의 핍박에 못이겨 단연히 정든 일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촌 부녀주임 사업을 맡아하시다가 부지런하고 마음착한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고 다 찌그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에서 우리 4남매를낳아 키우면서 낮이면 어린시절 동생들을 위해 배워두었던 재봉기술로 온동네사람들의 옷을 도맡아싶이 재봉틀에 앉아 하시고 밤이면 새끼꼬는 기계로 아픈다리 통증을 참아가면서 열심이 돈을 벌어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엄마를 조롱하듯 그토록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생산대 목재 나르는 트랙터에 나무운반하다 그만 까막골 고개에서 차가 넘어지는 바람에 적재함의 나무우에 타셨던 아버지는 목재통에 머리깔려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남겨두고 44세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도 일찍히 이세상을 떠나셨죠. 청천벽력같은 이소식에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심장마비로 까무러 치셨다가 아버지를 잃고 슬피 우는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바라보시고 비장한 각오로, 가냘픈 여자의 혼자몸으로 우리 4남매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낮에는 소아마비의 지친 다리를 이끌면서 도거리맡은 수전과 한전을 다루시고 형님 누나들 공부뒤바라지 위하여 돼지치기와 닭치기도 하셨고 밤에는 새끼꼬는 기계와 재봉침과 씨름하며 우리들을 키우셨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생각납니다. 소학교시절 그때 전 학교 학생들 모두 줄뛰기줄을 갗췄는데 유독 누나만이 사지못했던일을, 줄뛰기 시합하는날, 줄뛰기 사달라고 칭얼거리는 누나에게 자신이 꼬던 새끼줄을 썩뚝 끊어 주시던 일을, 누나는 그때 그 새끼줄로 300여개를 뛰고 전교 일등을 했엇죠. 더뛸수도 있는것을 새끼줄이 닳아 끊어지는 바람에.... 끊어만 안졌었다면 더 뛸수도 있었겠죠. 누나의 그때 그 말에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형님 누나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제가소학교에 다니게되자 늘어만 가는 학잡비 때문에 어머니는 로과 두메산골로부터 머나먼 심양과 길림을 오가면서 장애자의 몸으로 보따리 장사, 약장사와 명태장사 하시면서 우리 뒤바라지 해주시며 열차칸에서 단돈 5전씩하는 얼음과자도 아까워 안사드셨죠? 그리고 뇌성마비로 태여난 저에게 항상 생활에관한 신심과 용기를 주시고 형님이 학교 필업하고 은행에 안배 받으니 화룡시가지에다 조그마한 상점도 꾸려 주시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 저에게 아글타글 모아두었던 주머니돈을 털어 전자풍금도 사주어 저더러 작곡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죠? 누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붙게되자 엄마는 누나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마른명태를 넘겨받아 심양시 해청시장에 갖다팔고 올때에는 옷을 되넘겨 가지고 화룡에다 팔아서 겨우 돈 마련하셨죠. 다른집에서는 자식들 대학에 붙었다면 새이불이요 새옷이요 하면서 요구되는건 다 사주지만 일찍 헴이든 누나는 원래 덮던 이불과 입던 옷을 깨끗이 빨고 헤진 옷과 양말은 저절로 바느실로 한뜸한뜸 깁는것을 보고 엄마는 누나몰래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죠. 어머니는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억센 남정들도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곰사양도 하셨고 .두부장사. 고기 장사도 하시면서 우리 형제들을 시집장가 보내시고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쩌다 제작품이 당선되면 어머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 못난 막내자랑도 하셨고 또 제가 장가 가서 두자식을 보게되자 고목에 핀 꽃이라면서 유난히 형님누나들의 자식보다도 제 자식들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느 생일집이나 군일집에 가셨다가도 맛좋은 음식들이 생기면 포장해 와서는 "네 형들은 단위 행사때나 동료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고급 료리는 흔하게 먹어보지만 무직업인 너희들부부 어디가서 먹어 보겠니? 그래서 내가 이런거 생기면 너희들 줄려고 가져오는거란다." 라고 하시면서 보잘것없는 이 막내자식을 형들보다 몇갑절 더 사랑해 주시고 관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하시면서 아들딸들 효성과 손자손녀들을 다 키워놓고 한창 복받을 나이에 어머니는 그만 암이란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항상 불구자로 태여나게한 저에게 미안하다 하시면서 형님누나들 엄마 보러 올때면 항상 이 못난 막내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죠. 어머니. 그 아프신 몸으로 식사때면 어머니 드시라고 마련한 색다른 료리들을 절로 짚어서 제 밥공기에 친히 담아주시고 제가 안해에게 주눅들가봐 애 엄마를 조용히불러 앞으로 내가 없어도 우리 부부 두자식 거느리고 앞으로 들이닥칠 어떠한 난관도 꿋꿋이 이겨내며 잘 살아라고 신신당부 하시던일. 어머니는 1년 4개월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효험을 보지못하시고 2012년 5월 4일 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어머니 유물을 정리하던날 침대밑에 몰래 치워두웠던 돈봉투를 꺼내보고 우리는 또 목메여오는 설음을 참지못하고 소리내여 천국가신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였습니다. 세상떠나는 날까지도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단돈 몇푼이라도 아껴 저에게 주려한 바보같지만 이세상 어느 어머니와도 비할수 없는 위대한 어머니. 양봉업을 하시다 벌떼들 습격을 받아 인사불성이 되셨던 어머니. 도거리 맡은 논밭에 농약을 치다가 농약 중독에 걸려 논밭에 까무러치셨던 불쌍한 우리 어머니. 과도의 피로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가도 자신이 쓰러지면 우리 네자식 굶주리고 공부못한다며 억센 의지로,오또기 정신으로 꿋꿋이 다시 일어나셨던 불쌍한 내 엄마. 한마디로 어머니는 구쏘련의 청년영웅 빠웰와도 더 강한분이시며 일본의 오신보다도 더 지혜롭고 총명한분이시고 중국의 장해적보다도 더 억세고 담대한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버지 없는 우리 형제들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주눅들가봐 밤낮으로 고된일에 지친 피곤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천사와도 같이 환한 미소 지으시며 우리를 대하시던 자애로운 우리 엄마, 남의집 부모들은 고생끝에 락을 보지만 한평생 이 못난 막내 자식위해 그토록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분명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굽어 보시겠죠? 정말로 진정 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면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락을 영원한 그곳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훈아의 홍시를 목메여 불러봅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난다눈이오면 눈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젖을세라 험한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 다음 생애란것이 있을가요? 정말 있다면 저는 다시 한번, 이번엔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여나서 이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효도 실컷 하면서 어머니와함께 살고 싶습니다 <장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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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4
  • "나에게도 꿈은 있다"
    행운이랄까 3년 전, 나는 제 1회 실무한국어시험 전산추첨에 당첨되어 인민폐로 단돈 수백원의 수속비를 들이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나처럼 당첨된 친구들은 다들 오매불망 기다렸던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며 제 새끼는 남편, 친정엄마 아니면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뿔뿔이 코리안 드림에 나섰지만 나는 비자 나온 그날부터 기쁨대신에 근심만 태산같이 쌓여갔다. 거의 혼자 몸으로 키운 일곱 살 난 아들애를 맡길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애를 전탁원에 맡기고 뒤늦게 코리안 드림의 물결에 휩쓸렸다.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사촌언니를 따라 리무진을 타고 서울 금천구청역에서 내린 후 묵직한 트렁크를 끌고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올리막 오불꼬불한 골목길을 몇 번이나 에돌아 언니의 월세 방에 겨우 도착했다. 햇볕도 안 들어오는 컴컴한 단칸 지하방에 문을 떼고 들어서니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기신기신 기여 나오는 징그러운 불청객(바퀴벌레)들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벌레라면 기겁을 하는 나인지라 그넘들 때문에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불안해서 밤잠도 시름 놓고 잘 수가 없었다.내가 꿈속에서 상상해왔던 서울과 너무나 달랐다.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자고 하면서 극구 말리는 남편의 반대도 무시하고 한국에 나온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돼 나의 체중은 5키로 그램이나 줄었다. 중국에 있을 때 식당일 한 번도 못해본 왕초보인 나는 결국 남들이 다 꺼리는 숯불갈비 집에 홀서빙으로 일을 시작했다.땀을 철철 흘리면서 테블마다 돌아다니면서 고기가 타지 않도록 집게로 수시로 뒤집고 거의 익으면 가위로 잘라내는 일이었다. 때론 고기를 숯덩이로 만들어서 손님들한테 심한 말 들은 적도 있었고 왼손잡이인데다 고기 자르는 솜씨가 서툴러 손님들의 놀림도 자주 받군 했다. 5월 8일 어버이날, 오전 열시부터 손님들이 줄레줄레 들이닥치더니 저녁에는 40여개 테블도 부족해 손님들이 홀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야말로 총없는 전투장이였다.그날따라 같이 일하던 언니가 속탈을 만나 하루 종일 토하고 쏘고 하면서 병가를 내 그 많은 손님들을 사장언니와 단둘이서 맞느라니 가랭이에 비파소리가 나도록 바람을 일구며 뛰여다녀도 주방에선 음식을 제때에 안 가져간다고 소리지르고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짜증을 냈다. 일할 줄 잘 몰라 조급증이 앞서 허둥대며 달아다니다보니 모난 테블모서리에 부딪쳐 무릎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도, 불판에 손이며 팔이 데여서 아려나도 언제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한 무릎이 반복으로 테블 모서리에 부딪칠 때마다 숨넘어갈 것처럼 아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어느 한번 모서리에 금방 부딪쳐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밑반찬을 들고 왔는데 성깔이 못돼먹은 한 아줌마 손님이 “야, 너 생각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반찬을 밑굽에 발라서 들고 오면 어떡하니? 이거 뭐 고양이새끼를 먹으라는건지?” 라며 욕 보따리부터 풀어헤쳤다. 가뜩이나 상한 무릎 때문에 통증을 꾹 참고 일하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홍수마냥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했다. 사장언니는 밑반찬 담을 때마다 많이 담으면 낭비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데 고기는 2인분만 시키고 밑반찬으로 배를 불리려는 아줌마손님들이 자꾸 더 달라고 칭칭댈 때는 정말 난감했다. 나는 쟁반이고 뭐고 팽개치고 화장실에 달려 들어가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소리내여 울었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려고 바지를 끌어 내렸지만 땀으로 흠뻑 젖은 바지는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상한 무릎 때문에 다리를 굽히고 앉을려니 너무 아파서 또 눈물이 찔끔 나왔다.그것도 잠깐… 사장언니가 혼자 힘들게 뛰여다닐 걸 생각하니 화장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퉁퉁 붓긴 얼굴을 찬물로 헹군 후 다시 쟁반을 들고 달아다니면서 지루한 “전투”를 벌려야 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고 밤 12시, 새벽1시가 되는 게 례상사였다. 힘들수록 가족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아들애를 전탁원에서 데려와 메신저 화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크나큰 위안이 되였다.고된 식당일에 고기그을음 냄새와 땀에 흠뻑 전 지친 몸을 끌고 매캐한 담배냄새가 진동하는 PC방에 들려 메신저 카메라로 아들애와 잠깐씩 만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 아들애의 눈에 가랑가랑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서 카메라를 돌려놓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애가 컴으로 엄마 얼굴 보고나면 온 하루 기분이 우울해진다고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반시간이 돼도 안 나오니 웬일이냐 문을 떼고 들어가 보니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화장실에서 쭈크리고 앉아 쿨쩍거리고 있더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애가 하는 말이“아빠 나 엄마가 너무너무 보기 싶슴다.” “그랜데 왜 엄마 보구 싶냐구 물어보면 그냥 안보구싶다구 하니?” “내엄마 보구싶다구 울면 아빠도 울까봐 그랬슴다”그래서 부자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탁원에 데려다 줄 때마다 “아빠 하루만 집에 더 있다가면 안됨까?”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애원에 찬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들애가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정말 많이 울었다.그래서 한동안은 마음이 얼어붙어 컴퓨터에 오르지도 못하고 전화걸 엄두도 못냈다. 아픈 마음과 그리움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일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한국생활에 차츰차츰 적응해가면서 가식 없는 해맑은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사장님과 동료들한테서도 부지런하고 야무지다는 칭찬을 자주 받으면서 즐겁게 일할수가 있었다. 이처럼 5년만 열심히 벌면 그렇게 바라던 승용차를 사서 온 가족이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이 막 솟구쳤다.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애가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이상 한국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돈보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지만 현재 아들애를 옆에서 살뜰히 보살피며 나름의 훌륭한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인젠 아들애도 껑충 자라서 엄마가 옆에 없어도 얼마든지 자립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꿈을 위하여 다시 한 번 힘찬 날개를 펴고 싶다.이련화■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13
  •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김정룡] 인간이 이름이 있듯이 모든 ‘업체’는 간판이 있다. 간판은 하고자 하는 사업의 취지와 내용에 맞아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문제이다. 간판은 또 대중성을 띄기 때문에 더구나 상식에 맞아야 한다. 상식에 맞지 않는 간판은 그 업체 존재의 의미를 떨어뜨린다.지금 재한조선족사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언론이 많고 단체 또한 자고 깨면 생겨나듯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 대충 손을 꼽아보아도 30개 ‘업체’가 쉽게 잡힌다. 뚜렷한 취지나 목표의식이 없이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업체’를 설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내용이 없이 허세에 매달려 회장님이랍시고 폼을 잡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어찌되었든 언론이 많고 단체가 많은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많을수록 경쟁이 심할 것이고 경쟁이 심하면 적자생존법칙에 의해 자연도태를 거쳐 우수한 ‘업체’만 남게 될 것이다.문제는 남이 하니 나도 따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지난해부터 재한조선족사회에 다문화바람이 불고 있다. 조선족이 다문화에 속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논쟁에는 관심이 없고 다문화간판에만 관심이 있다. 2천8백억원(다문화) 대 1천2백만원(조선족)의 정부 지원, 다문화에 유혹이 클 만도 하다. 조선족간판은 메리트가 없다. 다문화간판을 걸어야 메리트가 크다. 그래서 경쟁하듯이 다문화란 간판에 매달린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다문화간판이 나타나고 있어 사회의 웃음거리를 지어내고 있다.며칠 전 필자가 대림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조선족행사에 마련된 화환에 ‘재한다문화’ 00협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재한다문화’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은 중국에 이미 중국인집단이 있고 조선족집단의 존재가 있고 그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다문화란 어느 나라에 실체로 존재했던 것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다문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재한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뿌리가 있는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오면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뿌리가 없는 집단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이뤄진 것은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건 그렇고 재한조선족사회가 다문화에 매달리고 있는데 다문화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다문화간판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다문화란 말은 1957년 스위스에서 먼저 생겨났고 1970년대 캐나다를 거쳐 지구촌에 퍼졌다. 다문화, 그 뜻은 한 개 나라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저마다 갖지 않는 생활양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민족이 합쳐 전체 인구 중 30%를 넘으면 다문화사회로 인정된다. 스위스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언어가 국가공용어인데 진짜 다문화사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위스, 캐나다, 미국 같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국가들만이 다문화사회이다.중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법적으로 공존해 있지만 다문화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민족국가라고 말한다.현재 한국에 외국인 수가 150만 명(조선족 포함)이며 전체인구의 3%밖에 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 진정 다문화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고 있는 외국인과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 특히 결혼이민자와 그 2세들의 한국생활정착을 돕기 위해 다문화란 개념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결혼이민가족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상응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다문화에 조선족사회가 명분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게 매달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3-08-08
  •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목 차 1. 민족정체성이란?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3. 조선족사회의 형성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5. 조선족의 미래전망 요약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활발한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민족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민족적 정체성유지와 강화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살아남려으면 정체성을 상실하여서는 않된다. 그러면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겠는지? 본 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답이라고 할수 있다. 주제어: 조선족, 조선반도, 민족정체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온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원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민 온 지역의 상황에 의하며 일정한 변의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중국적 요소가 많이 첨가된 탈조선반도적인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주민과의 “同源”이라는 전통적인 연대성은 무시할 수 없다. 1. 민족정체성이란?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으로 영어 “identity”와 중국어 “認同”과 서로 통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많으나 주요하게 신분 및 자아동일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인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으로 한마디로 귀납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민족정체성이란 무엇인가? J.Carla와 J.Reginald는 민족정체성은 개인이 자기민족에 대한 신념, 태도 및 민족신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①]J.Phinney는 민족정체성은 복잡한 구조의 하나로 민족에 대한 귀속감와 승낙,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및 민족활동에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②] 종합하면 보면 민족정체성이란 인간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에 대한 깨달음과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과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은 종족, 민족 등 여러 인간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바 민족은 여러 공동체가운데서 제일 상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은 혈통적인 연대감과 같은 언어, 같은 경제, 같은 지역 그리고 동일한 문화기초위의 같은 의식 등 여러 공동적 요소를 구비한 인간공동체이다. 그리고 민족이 형성되기까지는 오래 역사를 경과하였기때문에 민족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갖고 있다. 매개 민족은 자아민족이 소유한 특징으로 기타 민족과 구별된다. 여기서 민족정체성이 거론되는데 그 뜻인즉 주요하게 자아민족에 대한 깨달음으로 소속 성원들이 본인은 어느 민족에 귀속한다는 의식 또는 태도을 말한다. 민족정체성은 타민족과의 만남과 부딪침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민족정체성은 자아민족에 대한 신념과 귀속감이 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민족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발전과 민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함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되고 해체되어 새롭게 생성될 수도 있다.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은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고 민족정체성은 민족성원들이 자아민족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적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서방 자산계급의 힘에 의하여 처음 수립되었다. 당시 봉건사회말기에 산생하여 성장한 자산계급은 “자유”, “민주”, “박애” 등 정치적 구호로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을 뒤엎고 근대적 국가건립에 성공하였다. 이 때 출현한 국가는 근대 민족주의기치하에 세운 단일민족의 국가로 민족국가라고도 한다. 이러한 민족국가정체성은 민족정체성과 통일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이후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폭발한 민주, 민족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국가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꼭 일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으로서 그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 등은 여러 민족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으나 개별 민족으로서는 그 민족에 대한 귀속감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국가정체성은 상위이고 민족정체성은 하위이며 민족정체성은 반드시 국가정체성에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다민족국가의 분열 또는 동란 등이 생길 수도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아도 일부 민족내부의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경향하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모순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정체성을 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③] 3. 조선족사회의 형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지연적 관계로 중국과 조선반도국가와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 인적교류도 아주 활발하였으며 많은 경우는 그들이 상대방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점차 그 지역 민족공동체에 동화되어 원래 소속된 민족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족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이후 중국동북에 이동,이주와 더불어 정착한 조선인 및 그들의 후손들이다. 특히 청나라의 봉금정책해제와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진출을 부추겼다. 하여 중국재류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 200만명을 초과하였다. 1945년 8월 일본패전이후 광복의 환희속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였다. 동시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계속 남게되었다. 이 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을 겪어면서 중국정착의 경향이 날로 강해졌다. 당시 그들은 토지를 배분받았고 지방정부의 관리간부로 많이 발탁받았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설립직전에 “동북조선인민의 95%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었다.” 그리고 “전동북조선인민의 74%을 차지한 길림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④]이와같이 동북재류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법적으로 중국조선족에로의 전환을 완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은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동북변강지역을 개척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섰으며 국내해방전쟁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족이 중국 다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원의 하나인 동북조선민족은 바로 간고한 30-40년 반침략의 혁명역사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수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부지런히 생산하고 열심히 전선을 지원하여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⑤]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립은 일정한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이란 불안정한 이동, 이주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실현된 안정적인 정착까지를 말할수 있다. (1) 이동,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조선족정체성의 형성 조선족선조들이 두망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우선 생활난이었다. 당시 만주의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유혹했을 뿐 언제는 꼭 조선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체성은 원천적인 조선반도적인 성향, 즉 “나는 조선인이다”는 관념이 아주 농후하였다. 그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중국에 “귀화입적”한 경우도 있어 점차 정착성향도 뚜렷해 졌다.[⑥]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여전히 조선반도적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재류조선인들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국광복의 기쁨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조선반도로 돌아간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 체류한 조선인들의 중국적인 요소도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신문기사을 통하여 중국체류 조선인들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전의 중국정착취향을 볼 수 있었다.[⑦] 특히 일본패망이후 귀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국국내해방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정에서 토지를 부여받으면서 중국정착을 고정화시켰으며 민족정체성도 탈조선반도적인 중국적 경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조선족 국적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공중앙 東北局은 1945년 9월말에 조선족의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곳의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은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⑧] 1946년1월1일, 당시 연변전원공서 부 전원인 동곤일은 새해《신년헌사》에서 “현재 우리 연변지역의 민주정권은 이미 건립되었다. 의심할 바없이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반드시 정부의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중국국적에 가입하려는 한국인은 입적할수 있으며 중화민국 국민으로 될수 있다. 이렇게 조족(朝族)은 중화민족가운데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될수 있다. 우리정부는 민족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와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며 민족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똑같이 존중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⑨] 1948년 8월 중공 연변지역 위원회에서는 <연변민족문제>결의문을 작성하고 연변 조선민족인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연변조선민족인민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지위를 비준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옳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의 특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승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⑩] 그리고 조선족과 조선 僑民간의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민으로서 호적이 있는 사람은 공민이며 잠시 내왕하는 처지로서 호적이 없는 사람은 교민이다. 정부의 허가를 거쳐 이주해 갔다가 다시돌아 온 사람, 우리측 고급정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최근에) 이주해온 자는 교민이다.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연변에 있는자는 정부의 허가를 거쳐 공민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공민과 교민은 권리 및 의무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11] 결의문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교민의 표준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중국조선족정체성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조선족정체성의 확립 1949년 10월1일 북경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전세계를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였다. 이 직전에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가 동북조선인민대표로 1949년9월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권리대행 기구) 제1차회의에서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까지 참석하였다. 동시에 동북지역의 조선인 사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북의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연변대학, 연변조선족 고급중학교 등 조선족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더우기 1952년 “연변조선민족 자치구”설립과 더불어 기타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민족 자치향, 자치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이 이미 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법적 확립은 되었으나 관념적으로나 실지적으로는 좀 늦었다. 당시 조선과의 연계도 밀접하였고 “조선인”, “조선인민”, “조선민족” 등 칭호가 “조선족”보다 더 많이 사용하였다. 194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 중국동북조선인민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주석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는 중국동북 재류동포들의 성원과 대표단일행의 래조를 환영”한다고 하였고[12] 12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조선민주건설사진전”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조선관중들은 조국의 승리적 발전에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느끼게 되었고 중국관중들도 세계민주진영의 일환으로소 조선의 비약적 발전에 경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3] 연변대학을 창설할 때 이를 “동북조선인민대학”으로 가칭하였고 “동북경내 재주조선인 최고학부”라고 일컸다. [14] 그리고 조선을 “동북에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조국이면 세계화평민주진영의 일환”이라는 기사보도가 있었고[15]조선전쟁시기 “동북의 수많은 조선인민들 조국의 자유독립을 보위키 위해 조선전장에 자동적으로 떠났다”[16]는 기사도 우리말 신문에 보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조선족은 “조국”문제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특히 조선전쟁시기 중, 조 양국의 조선민족사이에 있은 빈번한 이동은 “고국”, “모국”과 “조국”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였고 “중국은 인민 조국이요 조선은 민족조국이다”말도 있었다. 하지만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조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통하여 조선족가운데 존재하는 “다 조국론”, “민족조국”, “법률조국” 등 모호한 이해를 기본상 해결하였고[17] 기타 조선족지역에서도 조국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비판함에 따라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였다.[18] 이러한 것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작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수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에게는 탈조선반도적인 중국국민의식과 중국다민족가정의 일원인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보다 강하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반도주민과의 “同一源流”의 전통적인 연대감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다. 20세기 90년대말 필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이상의 응답자가 조국을 “중국”이라고 적었고 “중국 조선족의 귀속”이란 물음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중국”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기타 민족과의 교류에서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점을 표명하는가”하는 물음에서 79%의 응답자가 “떳떳히 밝힌다”다고 하였고 신문매체에서 기타 민족이 조선족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응답자의 97%이상이 “자긍심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19] 이와 같이 조선족에게는 중국국민이란 의식과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이미 깊어졌다. 이러한 의식속에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가운데 중국국가급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 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감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조선족 문화관 등이 설립되 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민족정체성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정체성의 변화양상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적 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정체성 약화의 돌출한 현상은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민족교육을 받을 여건과 기회가 없어 민족언어과 민족문화를 터득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민족에 대한 애착이 날로 멀어져 가고 민족정체성도 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들에게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에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느끼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한민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중국국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생존과 이익이 더 우선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적 이익앞에서는 한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조선반도적인 특징과 중국적인 특징으로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현재 논란도 일고 있다.[20] 일부에서는 조선족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소위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서 언급한 “중국공민”과 “조선민족”의 개념은 동차원의 개념이 아니며 특히 중국에서는 상하위 개념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등하지 않은 두 개념을 합쳐서 조선족의 “이중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것이 성립되면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이중성”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않겠는가? 5. 조선족의 미래전망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도 연관된다. 조선족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민족정체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민족적 지혜가 필요하면 민족적 힘을 키워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볼 때 조선반도주민들과의 연대감도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한국정부는 명확하고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조선족입지를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조선족자신도 경제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커짐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할 수도 있고 민족학교도 세울수 있으며 문화활동장소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것 모두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과 조선의 민족정체성, 제일 조선인의 정체성 등을 떠나서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세계적인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공통적인 민족전통문화를 살려서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수십만이 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이 진출하였다. 도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아주 중요하다. 일정한 민족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은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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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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