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8)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에 이주한 뒤 얼마 안되어 세상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950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나루배에 대포와 기타 중무기들을 싣고 국민당해군의 함포속을 뚫으며 11마일(33.5킬로미터)이 되는 경주해협을 강행도하하여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 해남도를 해방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25일에는 반도에서 남북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초기 북측인민군대는 3일만인 6월 28일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다. 그 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했다. 그 진격의 선두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장병 6만 5000명이 있었다. 헌데 조선의 전황은 잠시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7만여명의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을 지휘하여 반도 서해안의 인천에 상육했다. 그 때로부터 전황은 역전되었다. 9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서쪽 인천쪽으로 밀려드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연희고지에서 결사적으로 막으며 결사전을 벌였으나 역량대비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기에 부득불 3개월간 장악하고 있던 서울을 어쩔 수 없이 내주게 되었다. 한편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도의 중간을 뭉텅 잘라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부대들이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전쟁형세는 인민군에 몹시 불리하게 전이되었으며 드디어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서 10월 19일 북측의 수도 평양이 함락됐고 얼마 안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변까지 다달았다. 바로 이 관두에 중국의 모택동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의 중국군을 반도전선에 파견했다. 그해 10월 25일, 출국후 중국군의 첫 작전이 개시, 미기병사단에 대한 지원군의 장진호 포위섬멸전을 계기로 전황은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중국군의 기동성이 강한 운동전과 포위섬멸전에 말려들어 38선 이남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후퇴중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이 차사고로 죽었고 유엔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 이렇듯 반도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긴장한 나날에도 중앙정부는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자치권리를 부여하는 민족정책을 실행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당시에는 자치구로 명명했음) 창립대회가 연길 서광장에서 성황리에 열리었다. 그날 조선족을 포함한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산뜻한 명절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떨쳐나섰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장백산도 노래하고 해란강도 춤을 추네// 에루와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주) 세웠네… 춤군들 속에는 순자도 있었다. 그날 순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공산당에 대한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아, 얼마나 위대하고 영명한 공산당인가? 일제는 조선 전체를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침략하였으며 또 중국에 쳐들어와서까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억압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은 재중조선인들한테 나라의 주인으로 중국조선족으로 만들어주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고 있을뿐더러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지방자치권리까지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해방전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았고 근로봉사대에 끌려가 전염병에 시달리며 곤욕을 치르던 순자한테도 그렇고 그제날 의지가지 없는 고아를 공부시켜 나라의 인재로 중등전문학교의 교단에 서게 한 용환이한테 있어서도 더욱 크나큰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순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했다. “연변조선족자치구(주)라고 해서 조선족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족 등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다. 우리의 자치구(주)가 화목하고도 무궁하게 발전장대해지자면 여러 민족과의 단결을 잘 도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한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하고 한족 또한 조선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한다. 즉 연변이란 지역사회에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도록 똘똘 뭉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들자면 조선족인 우리가 먼저 한족들한테 손을 내밀면서 그들을 돕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연변의 민족단결사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 발전할 수 있다.” 자치구(주)가 창립되던 날 저녁이 되어 순자가 남편한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자 남편도 참 좋은 생각을 하였다면서 칭찬해 주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8
  • “남의 흉 적게 보기”, “남의 장점 배우기”(1)
    ■ 동포투데이 김철균 필자한테는 10여년간 친하면서 여러 가지 거래를 해오던 한국인 친구 A씨가 있다. 그와 거래하면서 필자는 여러번 무안을 당한 적도 있고 “짠돌이, 서울놈”이라고 듣지 못할 욕을 속으로 한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면서 자주 “다시는 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벼른적도 여러번 잘 됐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 이 때까지 여전히 그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제 더는 “다시는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A씨는 한국 성균관대 출신으로 서울의 어느 한 중류급 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10여년 전부터 중국으로 진출해서는 어느 한 조선족단체를 돕는 일을 하던 중 필자를 알게 되었다. 필자는 A와의 첫 대면에서 그와의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사람을 만나면 90도 경례를 하면서 지나친 예의와 친절을 보이는듯 싶었고 그런 친절과는 달리 씀씀이는 밥알을 톱으로 켤만큼 “찬돌”인 것 같아보였다. 손님을 청하면 단둘이어서도 요리 4-5가지씩 차례놓고, 맥주도 박스채로 갖다놓고 대접하는 우리와는 달리 어쩌다 필자를 비롯해 손님 여러 명을 청해놓고도 자기의 나름대로 요리 4개만을 상에 올렸고 맥주도 인당 한병씩만 차례지게 했다. 한번뿐이 아니었다 번마다 그랬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는A씨와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업무상 어쩔 수 없이 그와 거래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짠돌이”라던 그한테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일어났다. 그가 연변의 어느 한 조선족노년협회에 인민폐로 10만위안을 기부했던 것이다. A씨의 말대로라면 “필요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는A씨한테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즉 평소에는 극도로 아끼다가도 진정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통”이 큰 그였다. 이는 또한 평소에는 먹고 놀고 하는 일에 통이 크게 놀다가도 정작 사회적으로 도움이 절실한 일에는 단 한푼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와는 큰 비교가 되었다. 우리와 한국인 사이, 우리는 필경 동족이며 언어를 비롯해 많은 습관상 근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분명 잘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바로 손님접대를 비롯한 소비문화와 여러 가지 예의문화에서 자주 표현된다. 최근 몇년간 중국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중국인들한테는 한국을 어딘가 무시할까 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인과 동족인 조선족이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짠돌이”이고 중국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더 살기 좋으며 이젠 한국인한테서 더 이상 뭘 볼 것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국과 한국인 ㅡ 우리가 이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바로 20여년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란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했고 한국인 또한 대단히 월등하고도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 이전에 생각했던 “썩고 병든 남조선”이 아니었고 “깡통 차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제식민지 당시 노화교육으로 신음했고 “6.25”의 전쟁포화로 국토의 전체가 페허로, 쑥대밭으로 됐던 한국- 하지만 30여년이 지나 우리가 다시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은 “아시아 작은 네마리 용”의 하나로 한강의 기적을 일떠세웠고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까지 개최한 “세계속의 코리아”로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친절한 말씨 또한 우리 중국조선족보다는 훨씬 개화된 나라와 국민으로 다가왔다. 특히 남성들의 매너와 자상함 등으로 한시기 한국남성들은 중국조선족 여성들이 선망하는 신랑감으로 되기도 했었다. 한편 1992년의 중한수교와 더불어 중국은 한국을 향해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한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경제발전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도시와 연해지구에 한국기업들이 쓸어들어오게 하였고 일련의 우월한 정책을 제공하였으며 한국기업을 선두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국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경제총액이 독일을 추월했고 2010년에는 일본을 따돌리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였다. 고속철도가 거미줄마냥 중국의 곳곳에 뻗어 나갔고 우주인을 실은 위성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심해탐사에서도 세계의 기록을 수립했다. 중국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중국인들은 부유해졌다. 몇년전부터 일반 국민들의 자가용시대에 들어섰고 머나먼 남극에도 중국인관광객들의 발자국이 찍히게 됐다. 그렇게 되자 언제부터인가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도 마찬가지었다. 그제날 그토록 갈망하던 “코리안드림”은 무색해지기 시작했고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남성도 이젠 “짠돌이”로 취급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20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중국조선족들이다. 그럼 이젠 한국과 한국인한테서 배울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인가? 물론 중국의 경제와 문명이 많이 발전했고 반면에 한국에 여러 가지 악성사건이 터져 한국이미지가 흐리게 하고 또한 일부 한국인들한테도 사기치고, 성폭행을 일삼으며 다른 여러 가지 추태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놓고 전반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하고 부정한다면 이는 진짜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분명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중국 대도시의 경제생활은 한국과 한국인의 생활과 대등하거나 거의 따라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기타의 여러 방면에서 우리와 한국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바이다. 우선 우리들한테는 한국인 거개가 갖고 있는 정신력이 없다. 페허로 된 땅에 하나 또 하나의 건물을 일떠세우며 분발하던 그런 정신력이 없다. 또한 독일의 노천탄광과 중동의 사막에 가서 품팔이를 하면서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던 정신력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A씨처럼 자신은 극력 아끼다가도 남을 즐겨돕는 기부문화가 우리 모두의 몸에 배이자면 아직 상당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외 자각적인 위생도덕, 공중도덕, 상업도덕과 윤리도덕 등 면에서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따라잡자면 9만 8000리라는 생각이다. 부분적인 것을 갖고 전반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협애한 정서를 갖고 남의 흠집을 찾기에도 열중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 따라배우기”란 때가 지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는 일가견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7-18
  • 오묘한 세계대백과(17) 성미가 괴벽한 바람
    바람의 성격은 말 그대로 괴벽하여 어떤 때는 미풍처럼 살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다가도 어떤 때는 조폭하게 광풍을 몰아치며 멈추지도 않는다. 바람은 공기의 유동으로 형성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종 우리가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강대한 살상력을 갖고 있는 바람이 있는데 그것인즉 용권풍(휘오리바람? 선풍?)이다. 용권풍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흡진기처럼 그것이 육지를 지날 때면 흔히 도시를 석권하면서 가옥을 훼멸시키고 전주대를 잘라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사람까지 공중으로 휘말아올리기도 한다. 이 바람은 또한 사람을 공중으로 휘말아올렸다가 안전하게 지면에 돌려보내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가정의 찬장을 이 곳에서 저 곳으로 하나의 손상도 없이 갖다놓기도 한다……용권풍은 이렇게 괴벽한 강선풍을 일으키는 바람의 일종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7)
    웨스트민스터궁전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서구의 중앙지역 함의: 세계상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임 웨스트민스터궁전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템즈강변에 우뚝 솟아있으며 영국의 최고의 입법기구인 국회의 상의원과 하의원의 소재지로서 국회청사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로서 영국의 가장 저명한 궁전 중 하나이며 독특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바 영국의 가장 대표성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은 부지면적이 아주 큰 바 대청만 해도 14개가 있고 400여개의 방이 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상의원과 하의원으로 갈라져 있다. 상의원과 하의원 웨스트민스터궁전은 중앙대청을 중심으로 남북 두개 부분으로 나누는데 남쪽 부분이 상의원의 귀족원으로 붉은색을 위주로 색상포치가 되였다. 다음 북쪽 부문은 하의원 즉 중의원으로 록색을 색상표지로 하고있다. 그 중 하의원 정문의 량측에는 각각 2명의 영국수상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는데 한쪽의 조각상은 제 1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劳合·乔治)고 다른 한쪽의 조각상은 제 2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윈스턴(温斯顿)처칠이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다기능대청1834년의 한차례 큰 화재로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대부분 건물이 재더미가 되고 유독 웨스트민스터대청만이 보존돼 남게 되었다. 이 대청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영국의 진정한 역사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청은 길이가 60여미터이고 높이가 27.5미터로 당시 국왕이 성대한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쓰인 외 일찍 정치범 거두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쓰이기도 했다. 20세기 이래 이 대청은 또 국장(国葬)을 치르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2) 한반도, 한반도의 고대역사
    ■ 김철균 아버지는 반문맹이었다. 지난 세기 30연대초(?)엔가 조선에서 건너온 독립활동가들이 세운 야학에서 한글 정도를 좀 익혔을 따름이지 거의 문맹이나 다름이 없었다. 헌데 아버지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엮었다. 아마 머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제날 아버지가 하는 얘기들을 듣노라니 참 재밋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와서 곰곰히 분석해보면 어떤 얘기들은 진짜로 일리가 있었고 역사적으로도 맞아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 그랬다. 아버지가 보는 한반도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에서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는 곳이 한반도라 했다.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이란 것은 이른바 산좋고 물맑으며 사계절이 분명하고도 3면이 바다여서 어업자원과 지하자원이 아주 풍부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상 약소민족으로서 대국의 변두리에서 붙어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눈치를 봐가며 처신할 때가 자주 있고 본의 아니게 자존심을 꺾을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도를 봐도 알다 싶이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동북쪽의 한쪽 변두리에 붙어 있으며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왜구(현재의 일본)가 늘 조선을 건드릴까 했고 그럴 때마다 조선은 중국의 도움을 크게 적게 받군 했다. 왜구의 욕심은 단지 작은 반도에 불과한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중국 또한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도 조선을 지원했고 또한 여러모로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은 알게 모르게 중국의 “속국”처럼 되기 마련이었다. 속국이란 뭔가? 대국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곡물과 여인 등을 갖다바쳐야 하는 것이 속국으로서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들이었다. 하긴 중국의 수나라가 조선을 침략한적이 있고 조선의 고구려 역시 중국 동북지방을 차지한적도 있었으나 양국간의 수천년 역사상 이런 일은 아주 적었으며 전반을 보면 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고 보호해준 한편 조선은 중국의 아부하며 굽신거린 역사가 더 길었다 할 수 있었다. “사람도 약하면 강하거나 큰 사람한테 빌붙어갖고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약하면 자존심이란게 생길 수가 없다. 이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이다.” 이렇게 얘기한 아버지의 이론처럼 조선의 반만년 역사에서 조선은 고구려, 신라, 백제 등 반도내 동족간의 군사충돌은 비교적 심했으나 아주 오랫동안 외래침략자에 의해 점령당한적은 없었다. 중국한테 아부했으니 중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러한 중국의 보호벽이 있으니 왜구의 크고 작은 침략에도 버티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근대사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천년동안 보호벽이 돼주던 청국(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서기 18세기에 있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방의 8국연합군이 바다 건너 중국으로 쳐들어와 서로 뜯어먹기를 했는가 하면 청일전쟁에서도 청국은 패전국이 됐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그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렇게 청국이란 이 보호벽이 허물어지면서 조선은 더는 자체의 힘으로 자기의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으며 결국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이러한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왜 이러한 얘기들을 어린 나한테 들려주는지에 대해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아는 것이 많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많을뿐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현실을 정시하노라니 아버지가 한 얘기들은 그 구절구절마다 심오한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은 것이 분명했다. 우선 우리 한민족은 자아정체를 감추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의 상황을 놓고만 봐도 옛날에는 중국문화의 전파로 마치 한문을 많이 알면 가장 박식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으나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강압정치로 자기의 글과 말마저 빼앗기었으며 지금은 또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남측 한국사회는 미국식 영어가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과 재미동포 및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제각각이다. 점점 한민족이라는 정체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그 어디에 가서 살아도 중화의 전통을 잃지 않는 화교나 소화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일본인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3
  • 해외견문 시리즈(13) 그해 설날은 춥지 않았다
    ■ 김철균 그해 설날은 춥지 않았다. 지구촌 서반구에 위치해 있는 스페인땅,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 그 땅은 세밑이 다가 옴에도 대서양 난류의 영향을 받아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또한 12월 25일 크르스마스 명절의 뒤를 이어 인차 새해를 맞는 라스팔마스는 짙은 명절의 분위기속에 휩싸여 있었다. 길가의 화단에는 이름모를 갖가지 화초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명절옷차림을 현란하게 한 신사숙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가득 어리어 있었으며 싼타까타리나 해변가의 해수욕장도 각양각색의 피부를 가진 남녀들로 붐비였었다. 마침 아프리카의 앙골라 해상에서 냉동물고기를 싣고온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도 라스팔마스 빤따랑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4명 선원외 다른 사람은 단 한명도 구경할 수 바다에서 설명절을 쇤다면 우리 모두의 심정이 과연 어떻겠가 하는 것은 누구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여자가 없는 한바다에서 설명절을 쇤다고 할 때, 이러한 단조롭고 적적함은 한국선원들을 놓고 말하면 일종 재수 없는 일이요. 곤혹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입항해서 육지에 올라 설명절을 쇤다는 것, 그것은 당시 본선의 주방장이었던 나한테 있어서도 해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모든 여건이 허락치 않는 해상에서 설을 쇤다면 선원 24명이 먹고 마실 음식은 주방장인 내가 손수 도맡아 장만해야 했으니 말이다. 또한 평소에도 곁에 여자가 없으면 선원들은 그 쌓였던 스트레스를 몽땅 나한테 음식투정을 하는 것으로 풀군 했는데 더군다나 설명절 때 집생각과 여자생각에 그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보나마나 실컷 일하고도 나중에 욕보는건 나뿐이라는 것이 뻔했다. 한편 본선 선원들의 편리를 위하여 라스팔마스 주재 한국 선일해운의 이탈만 대리점에서는 우리한테 “호텔강촌” 식당과 호텔방을 미리 예약해주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선박에서 고독하고 짜증난 생활을 하였으니 하루밤이나마 편하게 즐기라는 특별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선박의 경비를 부두당직일군들한테 맡긴 우리는 봉고차에 나누어 앉아 “호텔강촌”으로 향했다. “호텔강촌”에 도착하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그곳의 이횡권 사장님과 유혁선 여사 그리고 접대원아가씨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헌데 선박근무시 집행되어 오던 그 분명한 계급차이, 그것이 육지의 식당에서까지 계속될줄이야. 아니, 같은 계급장인 조기장과 갑판장 그리고 주방장도 한국선원과 중국선원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는바 중국선원이며 중방장인 나도 한국선원인 조기장, 갑판장과 동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당연히 계급차이를 논하지 않고 함께 앉게 됐다. 식당안의 한구석만 차지한 우리 4명은 설날이란 즐거움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 인간보다 금전과 계급과 인종 및 국적을 더 봐주는 한국인세상, 우리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애꿎은 술만을 들이켰다. 한잔, 두잔, 또 한잔… 나중에 우리 4명은 제각각 “진로”표 소주를 한병씩 거꾸로 추켜들고 입안에 쏟아넣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내리는 부두가에 이슬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 밤도… 어느새 한국선원들은 가라오케반주기를 이용하여 오락판을 벌였다. 허리를 비꼬며 희스테리처럼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선원들, 순간 나는 있는체하고 우쭐거리지만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내심세계를 얼마든지 엿볼 수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기껏 흔들어대고 나니 지쳤는지 그제야 그중 누군가 우리 쪽을 보더니 무작정 나의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나는 워낙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닥 노래를 잘 부르는 축도 못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꼭 노래를 불러야 하겠고 또한 부를바엔 그들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차원이 높는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음악반주도, 음향시설도 이용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부른 그 노래, 한국선원들은 물론 중국조선족선원들까지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방장, 이는 아주 유명한 가곡으로 웬간한 가수들도 부르기 힘들어 하는데 주방장 노래실력이 진짜 넘버원인거얘요.” 어느새 다가와서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통신장 이덕수씨, 이에 나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는듯 손을 홱 내젓고는 벽에 걸려있는 동관악기 트럼벳을 갖다가는 세계명곡 “拉德斯基进行曲”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선원들은 물론 주방인원들까지 나와 선율에 맞춰 박수로 호응하는 것이었다… 나의 연주가 끝나자 역시 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와 박수를 치면서 한곡 더 연주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셔 더는 트럼벳을 불기 힘들다는 이유로 깍듯이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식당홀을 나와버렸다. 이렇게 한국인 선원들한테 본때를 보이고 밖으로 나왔으나 어딘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설날이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기타 중국 조선족선원 3명도 따라 나왔다. 그들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기 멋적었던 모양이었다. 이때 누군가 마침 “호텔강촌”에서 멀지 않은 싼타까타리나 공원 노천무대에서 설맞이공연이 한창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리로 욱 ㅡ 하고 몰려갔다. 진작 시작한 공연은 독특한 스페인민족의 노래와 춤으로 클라이막스에 치달아올랐다. 남성독창 “베사메무쵸”, 민속춤 “스페인세뇨리따(아가씨)” 등 종목들은 그 예술적 감화력과 설명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황홀경으로 이끌어갔으며 식당에서 있었던 언짢았던 감정도 일시적이나마 잊을 수 있게 하였다. 이때 불현듯 그렇게 도 익숙했던 중국말이 이내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다시 귀를 기울렸으나 그것은 중국말이 분명했다. 이에 돌아서서 그 말소리 주인공들과 마주선 나. “아, 닌호우? 워예쓰 쭝궈런, 쭝궈더 초센주(啊, 您好?. 我也是中国人. 中国的朝鲜族).” 뒤이어 우리는 대뚬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알고 보니 그들 역시 중국선박 “안월강 2호”의 선원들이었는데 본부의 지시에 의해 라스팔마스에서 설명절을 쇤다는 것이었다. 미구하여 그들은 우리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자기네 선박으로 돌아가 설날 밤을 함께 보내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그저 스쳐지날 수도 있는 사람들, 하지만 머나먼 해외에서 그것도 설날에 만나고 보니 우리들 서로가 고향의 친지를 만난 것처럼 그토록 반가웠다. 순간 우리는 “호텔강촌”으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어졌다. 호화로운 호텔방도, 요염한 아가씨들도 역겨워났다. 해외에서의 또 하나의 중국의 세계 ㅡ 우리는 그 세계로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다. 중국선박 “안월강 2호”에 도착하자 우리는 곧바로 선내음식청에 안내되었다. 벽에 드리워져 있는 오성홍기 그리고 그 양옆에 걸려있는 만리장성 그림과 계림의 산수화, 아 그것은 정녕 우리가 오매에도 그리던 중국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뒤이어 음식들이 나왔고 “안월강 2호”의 당서기와 선장이 직접 세계명주인 모태주병을 들고 나와 우리한테 한잔씩 부어주는 것이었다. 한없이 도량이 넓은 중국인들의 관심, 그 순간 우리의 눈앞은 이로하여 또다시 흐려졌다. 해외에서의 나날, 인간으로선느 최하층 대우를 받던 우리, 조금만 잘못해도 독방이나 냉장창고같은 곳에 갇히어 기합을 당해야만 했던 우리 중국 조선족로무자들, 중국사회가 좋다는것은 바로 우리처럼 중국땅을 떠나봤던 사람들만이 가장 잘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 누군가 흥분에 젖어 선창을 뗐다. 오성홍기 휘날리고 승리노래 우렁차다/ 노래하자 사랑하는 조국 부강에로 달리는 조국 그러자 그것은 그 누구의 제의와 지휘도 없이 합창으로 번져졌다. 그 속에는 “안월강 2호”의 당서기와 선장도 함께 끼어 있었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 황하장강을 뛰어 넘어/ 우리 인민은 근로용감하고 새 일대 씩씩하게 자라난다… 설날 저녁의 그 노래, 그 노래소리는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되어 산설고 물선 대서양바다의 군도인 라스팔마스항 상공에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그렇다. 1992년의 첫 날, 그 해의 설날은 춥지 않았다. 스페인 라스팔마스 무에그랑데 해변가에서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2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7 )
    제4회 결 혼 1948년 12월 ×일, 20살을 앞두고 순자는 낭자를 틀고 김용환 총각과 성례를 치루었다. 워낙 아버지가 부모가 없는 용환이의 딱한 처지를 염려하여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하였었는데 평소에 용환이를 가끔씩 돌봐주던 어느 한 가정에서 “용환이가 아무리 고아라고 해도 어떻게 처가집에서 성례를 치르게 하겠는가”면서 자기네가 용환이의 결혼식을 도맡아 치르겠다고 주장하기에 결국 그 집에서 치르기로 아퀴를 지었다. 성례는 아주 간소하게 치뤄졌다. 주인 내외가 용환이의 일가친척을 대신하였고 하객들이래야 용환이의 동창생과 몇몇 친구들뿐이었다. 그날 순자는 속으로 “정말 일가친척이 없는 가련한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아침, 시가편 가까운 친척들에게 예단을 놓자고 보니 진짜 친척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아무리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딸을 위해 그래도 간단한 예단감들을 정성껏 마련했는데 그 예단감을 받을 시가편 친척이 한명도 없다니?! 순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단을 받을 시가편의 친척 한명도 없다는 것도 신부인 순자한테는 퍼그나 서러운 일이었다. 이제 친정에 가면 부모한테 뭐라고 말씀 올린단 말인가?!순자가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삼일이 되여 친정으로 인사하러 간 뒤 예단감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내놓았더니 어머니가 낙루했고 아버지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자 신랑 용환이는 송구스러운 나머지 머리를 숙이고 몸둘 바를 몰라했다.“아버지, 어머니! 몹시 섭섭하겠지만 일가친척이 없는 것이 이 분의 죄가 아니잖아요?! 전 이 사람이 착하고 정직한 품성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시름을 놓을 수 있도록 꼭 잘살게요.” “그래그래 네말마따나 없는 것이 뭐 저 사람의 죄겠냐?! 앞으로 입을 악물고서라도 꼭 잘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그른게 없느니라. 둘 다 가난한 사람끼리 만났으니 부디 싸우지랑 말고 잘살아야 한다.”순자가 신랑을 두둔해 나서자 부모님도 한마디씩 동조했다.…결혼 뒤 순자네는 남의 집 사랑채 한칸을 빌어 살림을 차렸다. 말이 사랑채였지 들어가면 이곳 저곳 벽이 떨어지고 천정에도 여러 곳에 구멍이 나있었다. 밤이면 하늘의 별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집수리를 하던 날, 어머니는 사위 용환이를 데리고 언 땅을 파헤친 다음 진흙에 벼짚을 섞어 짓이겨서는 떨어진 벽과 구멍난 천정에 매질을 하였으며 집이영도 고쳐 얹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언 땅을 파헤치던 곳에서 기다란 뱀 한마리가 기여나왔다. 바로 그 언땅을 파헤치던 곳에 뱀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온종일 말씀이 없던 어머니었건만 더는 침묵하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저런 사람한테 시집보내니 이런 일이 다 생기는구려…” “어머니, 그만하세요. 예?”순자가 손으로 어머니의 입을 막으며 또 신랑을 두둔했고 용환이는 이들 모녀의 얘기는 못들은 척 수걱수걱 일만 했다. 그날 밤 신랑은 잠자리에서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속삭이었다. “참, 임자가 나같은 인간한테 시집와 너무 고생이 많구만…나의 사람이 돼주어 진심으로 고맙소. 나 임자에 대한 고마움을 눈을 감을 때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갈거요. 그리고 꼭 출세하여 임자가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해 줄거요.” “여보, 고마워요. 전 당신만 잘 되면 더 원이 없겠어요.” “아무렴, 나 꼭 출세하여 임자를 잘해주리다.” …용환이는 고마움을 억제할 수 없어 순자를 꼭 껴안아주었고 순자 또한 미더운 남편을 만난 것으로 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순자의 눈물은 용환의 앞가슴이 촉촉히 젖어들게 하였다. 20세기 중반년대는 우리 중국에 있어서 대 재난의 시대이자 대 변혁의 시대었으며 번영창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도 중국의 국내는 몹시 혼란했으며 특히 1946년부터 국민당의 일으킨 내전으로 백성들은 도탄속에서 허덕이었다. 이렇듯 대동란속에서 공산당은 광범한 민중의 힘을 뒤에 업고 요심전역으로 전반 동북광야를 해방한 뒤 계속 산해관을 넘어 회해전역과 평진전역을 발동하여 국민당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전 세계에 선고하였다. 공화국의 창립과 더불어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혁명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한 조선인들은 그날부터 나라의 주인으로 됐고 신분도 재중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재중조선인은 원래 공산당을 더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 공산당의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 중에는 조선족이 많았다. 또한 관내의 팔로군에도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이 있어 공산당대오에 힘을 더 보태였다. 특히 조선인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원래 “팔로군행진곡”이였음)은 그 장엄하고도 씩씩한 선율로 하여 늘 국민당군의 감담이 서늘케 했다. 그래서 국민당은 조선인을 미워하면서 배척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례로 1947년 길림시에 쳐들어온 국민당군은 “조선사람들은 빨갱이와 내통하는 적색인종”이라면서 무작정 진압하기도 했다. 국민당군이 조선인들을 죽이고 배척하자 재중조선인들이 더욱 “우리를 구해줄 이는 공산당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 공산당을 더 좋아하게 되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연변의 토지개혁과 전선원호사업이 더 잘 진행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화국창건 전야에 벌써 연변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공산당의 민족정책이 연변에도 시행되었던 것이다. 선후로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일보사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등이 섰고 공화국창건과 더불어 연변가무단과 연변대학이 일떠섰다. 미구하여 연변위생학교가 연길에서 창립, 동북군정대학 연변분교 의과반을 졸업한 순자의 남편 김용환도 초빙되어 이 학교의 교단에 서게 되었으며 1950년 순자는 남편을 따라 연길로 이주(당시 동북군정대학 가족이 단체로 이주)하게 되었다. 순자네 부부는 연길시 하남가(주정부 서쪽 ㅡ 지금의 연길시정부자리)에 정착하였는데 바로 연변의학원의 정규창 교수네 댁과 한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창립 1주년밖에 되지 않은 나젊은 공화국은 비록 가난의 때를 가셔버리지 못했지만 순자가 바라던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인 사회는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8.15”해방을 맞던 날이 어제같았는데 그사이 토지개혁, 전선원호, 국공양당간의 내전끝에 공화국창건과 더불어 지난날 헐벗고 굶주리던 노농대중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다. 순자네 가정만 보더라도 한낱 의지가지 없던 남편 용환이도 공화국이 령도하는 나라의 지식인으로 인재로 되었으니 말이다. 하긴 한시기 많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나갈 때 김용환도 흔들리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한창 내전으로 동난이 심했지만 조선은 해방이 되어 건설고조가 일어났으며 많은 분야에서 인재가 수요되는지라 동북군정대학 연변분교의 수재인 용환이가 나가면 한자리 하며 크게 써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시 조선으로 나간 군정대학시절 용환의 부분적 동창생들은 모두 중앙당기관과 중앙내무기관 혹은 도당기관과 같은 중요한 일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네같은 수재는 조선에 오면 꼭 크게 한자리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혹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때 방송을 통해 새로 창작된 조선국가를 들으면서 용환이가 몹시 흥분된 것도 사실이었다.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3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실로 장엄하고도 박력이 넘치는 조선의 국가였다. 그 애국가를 통해 용환이는 사회주의 새 나라를 건설하는 조선인민들의 긍지와 영광 그리고 그 결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시기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아주 혼란했고 민심도 크게 흔들렸지만 중국보다 사회주의 단계에 먼저 들어선 조선은 많은 분야에서 중국보다 앞선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당시 많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을 자기의 조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기라 용환이가 흥분에 젖은 것도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미련보다 용환이는 나서자란 고향인 연변을 떠나기 싫었다. 아름다운 이곳의 산천과 인정이 많은 이곳의 사람들과 떨어지기 싫었으며 더군다나 자기 자신을 나라의 인재로 키워준 이 땅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과 나라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겨졌다.거기에 순자도 자주 남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보, 우린 조선보다는 이곳에 더 정이 들었어요. 사업이란 조선에서 하나 이 곳에서 하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 당신의 말이 맞소. 사업을 하자면 어디에선들 못하겠소?! 그럼 태줄을 묻은 이 땅에서 사업에 충직하며 한번 잘살아 봅시다.” ……아니나 다를가 조선보다 몇년간 늦게 공화국이 창립된 중국이었지만 아주 빠른 시일내에 중국대지는 평화와 안정이 찾아들었으며 사람마다 평등하고도 화목하게 살아가는 사회주의 제도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갔다. 중국의 변화를 보는 용환이와 순자는 조선으로 나가지 않고 이 곳에 아주 정착한 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9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1)
    ■ 김철균 아버지가 감추고 있었던 비밀 “이 애비는 너 엄마한테 잘해주지 못했다. 미안한 일도 많이 했다. 그러니 후에 엄마한테 잘해드려라. 이 애비의 부탁이란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다. 그냥 술주정을 부리고 밥상을 뒤엎고 하여 미안하게 생각하는줄로만 알았었다. 헌데 크면서 타인들한테서 듣고 또한 지난 세기 80연대에 조선으로부터 누나라는 분까지 찾아오면서 다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노라니 어디 뭔가 짚이는데가 있었다. 일찍 1950년 가을, 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 제2야전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버지의 상처는 너무 중한 건 아니었으나 얼마든지 퇴역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역은커녕 상처가 낫자마자 재차 탄원해 전선으로 나갔다 한다. 지어 교하에 입원해있는 동안 처자가 있는 집으로 와보지도 않았고 편지 한통 쓰지도 않았었다. 그러니 맘에 없는 엄마와 사는 것이 전선으로 나가기보다도 싫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전선으로 다시 나간 아버지었건만 그 뒤 많은 전투도 겪었으련만 용케도 아버지의 몸은 번마다 적탄을 피해갔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될 때까지 크게 부상도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헌데 전쟁이 끝났건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정전 이듬해엔가 나의 넷째할아버지와 다섯째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 아버지를 붙잡아 끌고 왔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조선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고 또한 노인네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알 바가 없다. 노인네들이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함구무언하니 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투거나 싸울적마다 어머니는 “왜 조선에서 계속 살거지 돌아왔는가”, “당신은 몸만 집에 있지 속은 조선에 가있다”고 하면서 하소연하군 했었다. 하다면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아버지의 생각도 그렇게 되리라는 짐작이다. 당시 조선상황을 놓고 보면 많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은지라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터라 다리 한쪽이 없는 잔페군인도 새파란 처녀한테 장가를 갈 수 있었다고 하니 가뜩이나 집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아버지로 놓고 보면 이른바 “봉건식 혼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자유혼인”을 지킬 수는 없었다. “봉건통”이라고 할 수 있는 넷째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어머니곁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항상 조선의 그 여자분한테 있었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자꾸 술마시면 주정하고 또 어머니한테 트집을 잡군 했는가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며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저주하기 앞서 아버지가 봉건혼인의 희생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아 생기게 된다. 또한 아버지 역시 나이가 썩 많아진 뒤에는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했고 나한테 어머니에 대해 많이 말해주기도 했다. 어느 정도 양심적 가책도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두고온 그 여자분한테도 양심적 가책을 느끼긴 마찬가지었을게 아닐까? 같은 남자로서, 또한 아들로서 나 역시 당시 아버지의 심정에 대해 헤아려 보게 되기도 한다. 말그대로 아버지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가 하면 어머니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에 있었다는 그 여자분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특수한 시대에 생겨난 특수한 혼인비극이라고 해야 가장 정확할 것 같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5
  • 해외견문시리즈(12)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이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항구란 항상 마도로스들한테 로맨틱한 꿈을 안겨주는 곳이다. 그 수많은 “배놈”과 항구의 아가씨들한테 사랑을 주고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눈물도 주었던 코리아의 제일항 - 부산항구. 여기까지 쓰고보니 여태껏 나는 본선의 아무개가 어느 아가씨와 어떻게 여차여차 했소. 어떻게 징글스러웠소 하며 남들의 로맨스만을 언급했지 나 자신의 사생활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말해서 나 역시 칠정육욕이 있는 인간이며 2년여간 “배놈”으로 있으면서 여자를 점해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하다면 30살 푼한 한창 나이에 그 황홀한 세계에서 나 역시 무슨 용빼는 수가 있단 말인가?! 부산항에 입항한 뒤 나는 오랜간만에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것은 본선의 대부분 선원들이 부산출신이기에 부산입항 후 집으로부터 통근하여 밥먹는 선원이 몇 명 안되는데다 또한 회사에서도 3명의 아줌마를 본선에 배치하여 전문 주방일과 청소, 세탁 등을 도맡아주었기에 나는 모든 것에 일절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창의 화물을 하역한 뒤 도크장(선박정비장, 태풍을 만났을 때 부분적으로 크게 파손됐음)에 오른다기에 나는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진 셈이었다. 나는 낮이고 밤이고 그 동안 미처 쓰지 못한 일기를 정리하는 한편 “여명의 눈동자”, “장군의 아들” 등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생활이 허전해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는 달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필경은 사내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때 이미 감정파열로 아내와 이혼한 몸, 고향도 아닌 타관향에서 여자를 찾는 것이 딱히 양심에 걸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라도 고향땅으로 휴가를 맡고 갔던 3타수가 불현듯 귀선했다. 덜먹총각인 그가 집에 가봤자 부모외에는 별로 반가와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부모 역시 하루밤 자고나자 “사내란 녀석이 배만 타고 장가는 안 들려느냐”하며 책망을 하기 시작, 참 누구든 장가들기 싫어 배타러가는가보지.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어봤자 먹을 알이 별반 없고 또한 아가씨들이라고는 쌀독의 뉘만큼도 없는 고향에서 장가는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래서 배타고 돈벌어 부산이나 여수 같은 큰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장가를 들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아 오늘까지 끌어왔던 터였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장가만 들라는 부모님, 그래서 3타수 김종래씨는 만류하는 부모님을 뿌리치고 귀선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와 그는 술상을 차려놓고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김형, 나 한국서 살지만 장가들어 자식까지 본 형이 한참 부럽능기라. 이 시팔 불알차고 장가도 못가는 이눔의 한국, 선진국은 무슨눔의 선진국인고?” “그런 말 말어. 우리 연변도 마찬가진거야. 인젠 그 곳도 얼굴이 반반한 계집애들은 다 도시로 몰켜들고 머슴애들은 장가들지 못해 지랄염병할 때가 된거라구.” “김형, 나한테 연변아가씨 한명 잡아서 붙여줘, 나 그럼 오늘밤 완월동 가서 술 한잔 사고 형을 즐겁게 해주는기라.” 그날 밤 나와 3타수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약속이나 한듯 택시를 잡아타고 부산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이름난 완월동으로 향했다. 얼마 후 우리가 택시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는듯 요염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아저씨, 잠간 들려 놀다가세요. 즐겁게 해줄게요.” “아저씬 아마 이런 곳에 처음인가 보죠? 어서 오세요. 화끈하게 해드릴께요.” 이렇게 아가씨들이 어깨에 매여달렸건만 김종래씨는 홱홱 뿌리치며 나의 손목을 이끌고 갈 길만을 재촉했다. 아마 단골로 다니던 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구하여 우리가 들어선곳은 “대마도”란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어느 스탠드바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홀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음악이 흘렀는데 그것인즉 마도로스 - “배놈”의 노래였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술취한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터라 닻줄을 올리며는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며는 사랑이 운다 아~아~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 … 아니나 다를가 홀안을 둘러보니 저마다 아가씨 한명씩 끼고서 술처먹는이들로는 필리핀, 파키스탄, 구소련 등 나라에서 온듯한 사내들로서 그들 역시 “배놈”들임에 틀림없었다. 이윽하여 김종래씨를 알아보고 히프를 내휘두르며 다가오는 40대 초반으로 돼보이는 마담. “아이유, 총각 왔네그려, 그래 언제왔어? 집에는 가보구? 총각이 이런 곳 다니면 망친당께. 왜 자꾸 오능고?” “누님, 무슨 말이 이리 많은고? 빨랑빨랑 술상 차리고 이쁜애들 둬명 붙혀달라잉께. 이 형씨는 중국서 왔는데 우리 동포잉기라 오늘 즐겁게 해주라잉께!” “뭐?! 중국서 온 아저씨. 그렁께 이리두 순지해보이는기라. 참 이런데 물젖으면 안된다잉께.” 그러면서도 “미쓰리! 미쓰신!”하고 부르며 어딘가 사라지는 마담. 보아하니 김종래씨와 마담사이는 한 고향사람 아니면 아주 잘 아는 사이인듯 싶었다. 뒤이어 마담이 아가씨 2명 데려오자 둘은 각각 나와 김종래씨옆에 나누어 앉았다. 미쓰리는 내옆에 앉고 미쓰신은 김종래씨옆에 앉고 헌데 종래씨한테서 들을라니 더 이쁘게 생긴 미쓰신이 나의 파트너라나? 서로 마주앉으면 구애없이 얼굴을 쳐다보기도 좋고 또한 서로 술잔을 마주치는데도 쉽가는데 일리는 있는 것 같았다. 큰 홀에서 술상을 파하자 우리는 서로 남녀 한쌍씩 짝을 지어 3층에 있는 아가씨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미쓰신의 방은 전기온돌방이었는데 이불궤, 옷궤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살림집 방안을 방불케 했다. 미쓰신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와락와락 벗고는 이불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거동은 몸을 파는 남미나 동남아의 창여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저씨, 옷 벗지 않고 뭘해요? 자, 어서요! 나 억수로 피곤한데요.” 하긴 서로 돈으로 여자몸을 팔고 사는 이런 교역장소에서 무슨 말과 가동작이 필요하랴. 그저 덮치고 받아주면 되는 판인데. 하지만 남미나 동남아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이 곳 한국에서는 왜 서로 얘기라도 나눌 수 없겠는가. 나는 미쓰신과 그렇게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미쓰신, 급해말고 우리 술 한잔 더 나누고 볼까?” “뭐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아저씬 여길 왜 왔어요? 너무 착한체 하지 마세요. 뱃놈들은 다 그 따위들인걸요.” “아니 미쓰신 날 뱃놈들과 동일시하면 안되는거야 하긴 뱃놈무리에 가담했다만 나 금방 배에 승선한 중국조선족이라구.” “뭐 중국교포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앉는 미쓰신.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는 아래층 카운터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그녀가 중국조선족이라고 나를 내쫓아달라는 영을 내릴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술상주문이었다. 미구하여 뽀이가 간단한 술상을 차려오자 우리는 또 술상에 마주앉았다. 술을 마시는 한편 내가 본인이 신분과 살아온 경력 그리고 “뱃놈”으로 된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 역시 “그러게 아까 남보다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군요”라고는 자기의 약력에 대해 소개했는데 그것을 간추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녀 미쓰신은 경남 마산 부근의 어느 한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고래잡는 배와 이 업종에 출중한 재간을 갖고 있는 아버지의 신근한 노동으로 미쓰신의 동년은 매우 행복하고 세상에 부러움이 없었다. 헌데 후에 정부에서 고래잡이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데서 아버지는 고래잡이배를 아주 헐값으로 처리하고는 조기를 잡는 어선의 말단선원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간 아버지는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를 아니했다. 태풍에 배가 뒤집어져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뒤 살림은 점점 쪼들려갔다. 가정의 생계를 위해 엄마는 매일 부두에 나가 물고기를 되넘겨 해물시장에서 팔았지만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차 동생이 부산 영도에 있는 해양대학에 붙게 됐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출세시켜야 하는 법. 그러다가 미쓰신이 생각해낸 것은 여자가 힘들지 않고도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비결은 이쁜 얼굴과 싱싱한 몸뚱아리가 밑천이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돈벌어 동생의 뒤를 대주기 위해 엄마를 속이고 나선 것이 바로 이 직업창녀로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몸팔아 동생한테 뒤바라지를 해주었는데 어느 날 동생이 글쎄 누나가 준 돈으로 이 완월동거리에 나타날 줄이야. 미쓰신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그날로 엄마한테 달려가 모든 비밀을 고해바쳤다. 그러자 엄마는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더니”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제야 엄마는 딸한테 아버지의 비밀까지 털어놓았는데 이전에 그토록 존경이 가던 아버지마저 돈을 벌면 하루 건너 여자를 찾아가는 늑대었을줄이야. 아, 세상의 사내란 몽땅 이런 따위들이었구나. 그때로부터 미쓰신은 결혼같은건 아예 포기해버리고 어떻게 하면 사내들한테서 돈을 빨리 그리고 많이 우려내겠는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써왔다… “아저씨가 중국교포이고 또한 이런 곳에 처음 왔다고 하니 말해주네만 이런 곳에 다닐바가 못돼요. 제가 사내들을 곱게 보지 않을듯이 이곳의 아가씨들 모두가 그래요. 여긴 사랑이란 있을 수 없어요.” 나중에 미쓰신은 나한테만은 화대를 받지 않을테니 맘껏 즐기라고 했다. 참 나한테 무슨 매력이 있는지? 또한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끝내 그녀를 점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와 너무나도 일찍 운명에 순종하여 생소한 남자한테 시집가던 누나의 얼굴이 서로 교체되면서 끝내 마지막 양심의 방선을 허물수가 없었다. 그러자 자기를 묵묵히 보며 고민하고 있는 나의 무릎위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미쓰신. “세상에 자기같은 아저씨도 있군요. 사랑해 아저씨. 우리 결혼할 수 없을가요?” 이에 내가 억지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흔들자 그녀는 “그래 그래 집에 사모님 있을테죠? 참 그 사모님 부러워요.” 그러는 사이 7월의 새벽하늘은 일찍이도 밝아왔다. 아침식사로 해장국으로 요기를 끝내자 미쓰신은 기어코 나를 부두까지 바래다주겠다면서 택시를 세내는 것이었다. 헌테 택시는 부두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해운대쪽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시원한 바다공기를 마시며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택시에 앉아 남포동을 걸쳐 부두로 향했다. 그 사이 핸들을 잡은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앞만을 주시하면 차를 몰았다. 허나 나는 그녀가 눈물을 떨군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두에서 나를 내려놓은 미쓰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르릉 하며 차를 몰고 앞으로 대달렸다. 그 사이 갑자기 내가 미워졌을까? 아니 그것은 분명 내앞에서 연약한 여자의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였을 것이었다. 그후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 사이 세월도 흘렀다. 허나 나는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성만 알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미쓰신, 그건 단지 내가 그녀를 점하지 못해서 오는 아쉬움뿐만은 결코 아니었다. ※ ※ ※ 사나이와 바다와 그리고 인생 마도로스로 일하던 2년 남짓한 사이, 나는 선박과 더불어 세계의 30여개 나라의 50여개 항구를 드나들어 보았다. 그러노라니 힘들고 짜증나는 일들도 많았지만 재미있고 신기한 현상도 많이 보았다. 풍차로 바다물을 밀어준다는 네덜란드의 로톨담과 암스테르담의 풍경, 도시복판의 다리가 한쪽으로 쭉 밀리면서 그 사이로 만톤급윤선도 지나가는 중남미 알루바도섬의 기이한 현상, 그리고 도마뱀들이 길가나 집주위 지어는 호텔의 천정에까지 붙어서 기여다니는 희한한 일, 이러한 것들은 우리 중국에도 과연 있을가? 또한 한국에서 출항하여 싸이판과 오스트랄리아를 거쳐 남미에 갔다가 다시 대서양과 인도양을 에돌아오노라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이론만이 아닌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그외 이전에 TV로만 보아오던 많은 것들을 직접 지척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예하면 포클랜드군도의 펭긴과 물범, 아프리카해상의 돌고래의 집체무용 같은 헤염동작 이러한 것을 목격할 때면 확실히 배를 헛타지 앟았구나 하는 자부감이 생기군 했다. 한편 선원생활이란 필요시에는 목숨도 내걸어야 하는 모험을 해야 하는 법이다. 작업선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남극주 가까이에서 조업하는 오징어채낚이선은 늘 바다에서 떠다니는 얼음산을 피하면서 조업해야 하는데 그것들과 부딪칠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있으며 일단 부딪치기만 하면 십중팔구는 고기밥으로 되기가 일쑤라 한다. 그럼 다른 해역에도 오징어가 많을텐데 왜 하필 남극주근처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지? 그것은 단지 그곳의 바다가 오염이 없어 고기가 더 맛있고 그 값이 높다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남이 개척하지 못한 어장을 자기네들이 재척한다는 뜻과 죽음과 박투하면서 잡은 물고기를 육지에 보내준다는 마도로스의 용감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기무리를 따라 조업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남의 나라 영해에 들어갈 수도 있는바 그러다가 일단 해상경비정한테 발각되어 총포소리를 들으며 쫓기울 때면 바지에 똥오줌을 내싸기가 일쑤라 한다. 그만큼 넋이 떨어졌으면 다시 배를 탈 기분고 나지 않으련만 바다생활에 이골이 튼 “배놈”들은 또 다시 그 일이 언제였더냐 싶게 배를 탄다고 한다. 그만큼 배를 타면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애를 맛볼 수 있고 또한 바다와 같은 성미를 키울 수도 있는 법이며 바다는 그만큼 사나이들의 육신을 단련시키는 드넓은 무대였던 것이다. 그렇다. 젊은이들여, 배를 타보자. 배를 타고 세계를 돌면서 바다밑세계도 개발하고 바다수수께끼도 풀어헤치자. 그러면 그대는 육지의 그 어느 젊은이보다 도량이 넓어질 것이고 용맹해질 것이며 더욱 사나이다운 사나이로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4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7)
    ■ 김철균 어려운 자취생활이었으나 세월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순자도 3년간의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다. 그 3년 사이 순자가 다니던 명신여자중학교를 비롯하여 용정 6개소의 중학교가 합병되어 육도중학교가 고고성을 울리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용정고중의 전신이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돌아오자 동네사람들이 정주칸이 넘쳐나게 모여들었다.“여보슈, 명기어른, 개천에 용 난다구 우리 동네에 여수재가 났수다. 얼마나 기쁘겠수?! 우리가 이렇게 자랑스럽구 기쁜데 민기어른이야 여부가 있겠수? 참 축하하우다.” “중학교에서도 항상 우등생이 됐다면서요?” “졸업장에는 박규찬 교장님의 큼직한 도장이 찍혀 있다우.” “글쎄 박규찬 교장님의 추천으로 연길현교육국에서 희숙이를 선생님으로 배치했는데 서성구 소학교로 가게 되었다오.”김명기어른은 연길현교육국의 도장이 찍힌 교원초빙통지서를 내보이며 동네사람들한테 자랑했다.……교원초빙통지서를 받고 떠나던 날이 되었다. 어머니 윤씨가 씻어 말리워 다리미질까지 한 옷을 갈아입고 이불짐을 등에 진 순자의 가슴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일찍 동년시절부터 선생님이 되리라던 꿈을 가졌었고 봉천의 방직공장에 끌려가 근로봉사를 하면서 모진 학대와 기시를 받으면서도 버리지 않았었으며 배움의 길이 막혀 산에서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괭이질을 하며 약재를 캐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교원의 꿈이었다. 그날 그것이 현실로 됐다. 그날따라 하늘도 유난히 높고 푸르렀고 얼굴을 스치는 미풍도 무척 살갑기만 했다. 뒷동산기슭의 붉은 꽃송이/ 네 먼저 내 먼저 다투어 피고// 시냇가 버들이 늘어지는/ 건설의 봄날이 찾아왔다네// 농촌의 사시는 풍년의 노래/ 자유와 행복의 꽃이 핀다네…순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이 때었다. 함께 동구밖까지 동행하던 어머니가 순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라고 했다. “어머니 왜요?”순자는 어머니가 궤춤에서 용돈을 꺼내 자기한테 주려고 그러는줄 알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저만큼 뛰어가 앞장서서 걸었다. “얘, 희숙아! 잠간만 서서 내 말 좀 듣거라.” “왜 또 웬 말씀을 하시려구요?” “얘야, 저길 좀 보거라! 가더라도 저 총각의 속을 좀 풀어주고 가려므나!”어머니는 손을 들어 마을의 제일 마지막 집 굴뚝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김용환이가 외롭게 서서 순자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는 매일 운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저렇게 서있구나! 참 불쌍한 청년인데…”어머니는 뒷말을 흐렸다. 어머니의 그 말에 순자는 길에 못박힌듯 멈춰섰다. 순간, 순자는 된 방망이에 뒤머리를 얻어맞은듯 큰 충격에 휩싸이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듯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9세부터 고아로 되었다는 김용환 총각,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눈물만은 모른다던 그가 순자가 떠난다고 하니 지금 울고 있다. 순자가 가 버리면 다시는 그녀처럼 순박하고 재덕도 겸비한 처녀를 만날 수 없다고 실망한 나머지 굵은 사나이의 눈물을 휘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용환 총각이 정식으로 순자한테 청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순자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적은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할진대 용환 총각이 아무리 실망하며 절규한다고 해도 순자가 양심적 가책을 받을 일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떠나버리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시각 순자가 생각한 것은 달랐다. 순자는 분명 용환총각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것을 알았고 자기 또한 그것이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정식으로 된 언약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천성적으로 맘씨가 곱고 자기보다 남의 심정을 더 잘 헤아리는 순자는 용환 총각이 자기를 맘속에 담고 있는 것이 마치도 자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졌고 순박한 총각의 가슴에 찬물을 껴얹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로 간주됐다. 교원이 아니라 더 큰 벼슬자리가 기다린다고 해도 절대 용환 총각을 실망시킬 수 없다고 여긴 순자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용환 총각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윤씨도 딸이 옳게 생각한다고 여겼던지 아니면 용환 총각이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졌던지 순자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용환총각한테로 다가간 순자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저를 용서하세요.” “그것이 어찌 순자 너를 탓할 일이냐?! 기실 내가 주제넘지. 나같은 신세에‘장원급제’하는 너를 넘보다니 참 어리석은 노릇이지…” “아니예요. 저도 이젠 마음을 정했어요. 뭐 선생이 되나 가정주부가 되나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겠어요?!” “아니다. 너 나를 섬기노라면 한평생 고생을 밥먹듯 해야 될거다. 널 넘보는 건 다만 나의 욕심때문뿐이니 너 이제라도 너의 이상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너의 머리속을 혼란하게 만든 나를 많이 욕해달라…” “그만, 그만하세요. 저도 이젠 교원의 꿈을 접었어요. 저는 우리 둘의 인연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어요.”순자는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용환총각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렇게도 동경하던 교원의 꿈을 접었다. 그러고 보면 순자도 천성적으로 다혈기질이 다분히 타고난 모양이었다.……어느 사이에 모였는지 아버지, 오빠들과 올케들도 순자네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저 맘이 여리고 착해빠진 것, 아무렴 착하지 않으면 우리 집 희숙이 아니지…여보, 우리 아들 하나 더 두었다고 칩시다.”어머니 윤씨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었다. 용환 총각과 약혼한 뒤 순자의 이름은 희숙이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재차 고쳐졌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