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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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언론 “서방의 우크라 군사원조, 핵전쟁 초래할 것”
    [동포투데이] 더글러스 맥키넌 전 미 국방부 정책·커뮤니케이션 특별보좌관은 12일(현지시간) 더힐에 기고한 글에서 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서방의 행동이 세계를 핵전쟁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맥키넌은 미국과 동맹국들이 국방 수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직 국방부 직원은 서방 국가들이 이 갈등을 계속하는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맥키넌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핵 공격 개시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장기적인 지원을 구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억만장자 데이비드 삭스의 말을 인용해 미국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약 10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앞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자국에 대한 서방의 군사 공급 지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서방이 군사 원조를 발표한다고 해서 자국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에 정말 유용한 지원 패키지는 단지 이러한 계획 발표보다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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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5-12
  • 미 언론 “어설픈 대러 제재, 미국 이익만 해쳐”
    [동포투데이] 미국 우파 잡지 '내셔널리뷰' 토마스 듀스터버그 칼럼니스트는 최근 발표한 기사에서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는 국내 유가 안정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반러 제재는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을 줄이되 원유 공급은 유지해 유가가 크게 변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듀스터버그는 이 전략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도 해를 끼쳤고 중국과 인도의 대규모 산업 경쟁자들에게만 이익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충돌 이후 대(對) 유럽 수출이 줄었지만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에 대한 수출을 대폭 늘려 그 공백을 빠르게 메웠다. 듀스터버그는 러시아로부터 원유를 수입한 이들 두 나라는 새로운 처리 능력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환경에 해롭고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과 인도는 저가의 러시아산 원유 공급으로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원유 가공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디젤, 제트 연료, 휘발유를 포함한 원유 가공 제품의 대규모 수출국이 되었다. 실제로 인도와 중국 정유사들은 러시아산 원유를 가공해 제3 국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이는 양국 모두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현재 인도의 EU로의 원유 제품 평균 수출량은 하루 360,000배럴 이상에 달다. 낮은 원료 가격과 운송비로 인해 인도 가격은 미국 수출업체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 2024년 초, 미국의 대유럽 가공 원유 제품 수출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쟁의 결과로 약 절반으로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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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아메리카
    2024-05-12
  • 외신 “중국, 미국에 대항하는 뜻밖의 파트너 발견”
    [동포투데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24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헝가리를 국빈 방문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 이후 헝가리가 미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전략적 파트너 국가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헝가리가 이제 미국의 압력에 대항하는 중국의 노력을 지지하는 중국의 파트 중 하나가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양국 관계 강화로 인해 헝가리가 중국에 외교 및 투자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헝가리와 중국의 관계 심화는 지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한편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현지 시간 2024년 5월 9일 오후 부다페스트 총리실에서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은 새로운 시대의 전천후 포괄적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격상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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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2024-05-12
  • 러시아 '승리의 날' 열병식... 푸틴, 서방에 핵전쟁 경고
    [동포투데이] 러시아는 5월 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위국전쟁승리 79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서방에서 발발할 수 있는 세계 분쟁의 위험을 언급하며 러시아의 핵무기는 전쟁에 대비 중이며 누구도 세계 최대 핵무장 국가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은 승전기념일 기념식에서 오만한 서방 엘리트들이 나치 독일을 물리친 소련의 결정적인 역할을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푸틴이 "우리는 그러한 과도한 야망의 결과를 알고 있다. 러시아는 세계 분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이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누구도 러시아를 위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의 전략군은 항상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서방이 모스크바의 영양권을 침범해 러시아를 모욕했다고 주장하며 이 전쟁을 서방과의 싸움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백만 명을 포함하여 2700만 명의 인구를 잃었다. 결국 소련홍군은 나치군을 베를린으로 몰아냈고, 히틀러는 그곳에서 자살했다. 1945년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건물에 소련의 깃발이 게양되었다. 나치 독일은 1945년 5월 8일 밤 11시 1분 조건 없이 항복했고,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이날을 유럽 승리의 날로 정했다. 당시 모스크바는 이미 5월 9일이었고, 이 날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치른 소련의 위국전쟁 승전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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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5-10
  • 중국 고대 건축의 보물 ‘일안천년(一眼千年)’ 조주교
    [동포투데이] 최근 중국 고대 건축의 보물 조주교가 각광을 받으면서 이 다리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중국 허베이(河北省)성 스자장(石家庄)시 자오(赵县)현 샤이허(洨河) 위에 위치하고 있는 조주교는 수나라 때 건설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초이자 가장 넓은 단일공 원호 오픈 숄더 아치교로, 1961년 첫 번째 국가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선정되었다. 조주교 전체 길이가 64.4m로 건설된 날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 자오저우교 공원이 조성되면서 폐쇄되었다. 합리적인 설계가 조주교가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중요한 이유이다. 자오현 박물관 리쿤홍 관장은 “교량으로서 가장 큰 위험은 여전히 홍수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63년과 1996년에 조주교근처의 많은 하천에서 심각한 홍수가 발생했다. 조주교는 홍수 피해를 입은 후에도 무사했다. '오픈 숄더 아치' 설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인 아치의 양쪽 끝에는 4개의 작은 아치가 있다. 이 작은 아치는 자재를 절약하고 교량의 무게를 줄일 뿐만 아니라 홍수가 교량 본체에 미치는 영향도 줄여준다. 조주교에는 28개의 아치가 있는데, 설계자 리춘(李春)에 따르면 세로로 병렬로 쌓는 방법을 사용하여 먼저 하나의 아치로 쌓고, 쌓은 후 이 아치를 독립적으로 세워 차례로 다음 것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아케이드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가 파손되면 다른 아케이드와 브릿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고 별도의 보수가 용이하다. 조주교가 수천 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대 중국인의 독창성과 혁신 정신을 반영하는 이 석조 공법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조주교는 고도의 과학적 가치와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형예술과 석조예술도 뛰어나다. 조주교는 유구한 역사와 독특한 디자인으로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1991년 미국 토목공학회로부터 ‘국제 토목 역사 유적지’ 로 선정되기도 했다. 2023년 11월, 조주교 관광지가 무료로 개방됐다. 지금은 다리 아래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다리 위에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조주교는 오늘의 번영을 견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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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24-05-10

실시간 뉴스홈 기사

  • 인연을 소중히 여긴 홍성남의 차별화된 출판기념회
    지난 12일(수) 오후 서울 강북구 미아동 서울컨벤션웨딩홀에서는 여타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특이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4권을 동시에 출간한 강북경제연구소 홍성남 대표이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시인이면서 정치인인 홍 대표는 이날 <장무상망(長毋相忘)>, <택시운전과 정치>, <삼국지 영웅들의 인연>, <인생과 관상>을 처음으로 동시에 선보였다. 이날 사회를 맡은 한남대학교 손용우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선진화재단과 통일학교에서 한반도 선진통일전략을 홍성남 대표와 함께 공부했다. 또한, 홍 대표와 같이 매월 1회 남산 길을 달리면서 강북구 현안을 놓고 많은 논쟁도 했다. 그때마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홍 대표의 모습을 보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서 출판기념회의 말문을 열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축하 떡을 자른 후 각계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먼저 선약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던 세 분이 영상으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손병두(전, 서강대학교 총장) 삼성꿈나무장학재단 및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우리가 살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안다면 갈등과 다툼은 줄어들고 이해와 용서는 늘어날 것이다. 나와 홍 대표의 인연은 벌써 15년이 넘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홍 대표와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의 마음으로 함께했다.”라고 홍 대표를 소개했다. 그리고 실물 경제 전문가로서의 손 이사장은 홍 대표가 강북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우택(전, 충청북도지사) 새누리당 최고위원(국회의원)은 “사회문제에 깊은 식견을 가진 정치인 홍성남은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나도 지난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당시 민생 속에서 시민들과 동행하며 참된 정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라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희망의 도시 강북구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 홍성남 대표와 함께 의미 있는 열정을 느껴보길 권했다.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내가 홍성남 대표를 알고 지낸 지 5년 이상 됐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면서 홍 대표는 우선 마음이 굉장히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라 사랑, 지역 사랑, 국민 사랑의 마음이 각별하다. 본인이 시인이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이웃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웃이 어려울 때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할 때 같이 행복해 했다. 또한, 홍성남 대표는 몸으로 움직인다. 민생현장, 정치현장을 부지런히 누빈다. 택시운전을 하며 민생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네 곳곳을 살피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라고 홍 대표의 따뜻한 인간미를 높이 샀다. 이에 덧붙여 참석자들에게 홍 대표가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임덕기 (사)대한민국건국회 건국유공자유족회 회장은 “나도 시인으로 오래전 등단했지만, 아직 한 권의 시집도 출간하지 못했다. 그런데 홍 대표가 4권 을 동시에 출판하다니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마포에서만 51년을 살았다. 눈 오는 날 자기 집 앞 눈도 안 치우는 공무원·정치인들이 많다. 그런 기본도 안된 정신을 갖고 제대로 정치를 하겠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며 홍 대표는 그런 사람들과 달리 직접 발로 뛰는 정치인이 될 것임을 믿는다고 역설했다. 서종환 선진통일연합 고문은 “홍 대표와 관계를 맺은 지 5년 이상이 지났다. 그동안 홍 대표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우리가 하는 일에 늘 앞장섰다. 몸으로 말했다. 심부름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홍 대표의 인간 됨됨이를 언급했다. 더불어 시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의 손과 발이 돼 열정적으로 뛸 것을 주문했다. 긴급 현안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장인 이주영 국회의원은 “홍성남 대표님, 출판기념회를 축하하오며 앞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축하 전문을 기념식장으로 보내왔다. 책을 소개하는 시간에 미아사거리 방천시장 상인 2명과 택시기사 1명이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날 출간한 4권의 책이 인연으로 연결돼 있듯이 이 세 분과 홍 대표도 아름다운 인연으로 묶여져 있었다. 이들의 인연이 곧 시로 탄생한 것이었다. 호남식당 주인아주머니는 “홍성남 대표는 강북구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항상 겸손하고 서민적이어서 좋다. 처음 가게에 밥 먹으러 왔을 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결같은 홍 대표가 방천시장 상인들의 시를 30여 편이나 쓴 것을 보면서 방천시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하면서 시집 <장무상망>에 실린 ‘호남식당 백반’이란 시를 낭송했다. 홍 대표가 이 시에서 ‘누부’라고 칭했던 당사자는 홍 대표의 서민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빵가게 젊은 주인 박수호 씨는 “홍성남 대표와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인사를 나누며 형님과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이다. 4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한 것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장무상망>이란 시집에 실린 ‘빵이 좋은 사람들’의 시에서 ‘잊힌 사람들 불러내는 추억의 단팥빵’이란 구절이 좋다.”라고도 언급했다. 더불어 박 씨는 홍성남 대표에게 항상 공부하고 발로 현장을 뛰면서 서민이 행복해하는 정치를 구현해 주길 당부했다. 창일택시 운전사는 “언론인 출신의 시인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홍성남 대표가 처음 택시운전을 하러 왔을 때 며칠 하다 말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계획했던 100일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보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홍 대표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시간이 행복했다.”면서 앞으로 정치가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를 기원했다. 이어서 이번에 출간한 책 4권을 모두 열독한 김광석 ‘착한교육실현학부모협동조합’ 설립추진위원장(한우리 독서·논술지도사)이 서평을 낭독했다. 김 씨는 그동안 여러 미디어에 올렸던 4권의 서평을 하나로 축약해서 발표했다. ‘시인이 정치인이 돼 광야에 던져졌다’는 내용이었다. 끝으로 홍성남 대표가 무대에 등장했다. 홍 대표는 “지난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방했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05일 동안 택시운전을 하며 민생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낙후된 강북구를 위해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싶었다.”라고 인사말을 하면서 북받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홍 대표의 울부짖음이 우리 정치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가난이란 장애도 젊고 유능한 정치인의 깨끗한 정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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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5
  • [탐방기] 역사유적지 탐방 4박 5일
    ■ 연변 리포터 김철균 필자가 가족사를 써 달라는 김성범씨의 청에 의해 흑룡강성의 해림시 신합진 삼부락촌을 비롯한 목단강지구에 대한 현지 역사탐방을 떠난 것은 지난해 11월 2일 오후였다. 연길 동북아 중심버스부에서 차에 앉아 4시 40분 버스가 떠나자 마자 날씨는 급작스레 어두워졌다. (이번에 가보는 해림시와 삼부락이란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솔직히 말해 필자는 이전에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목단강시에 잠깐씩 들린 적은 있었으나 목단강 시가지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나 다름이 없었고 해림시나 삼부락이란 곳에 대해서는 더군다는 깜깜부지었다. …… 버스는 길림성의 왕청을 거쳐 천교령을 지나 어느 덧 흑룡강성 땅에 들어섰다. 흑룡강성 땅에 들어서서 한참 달리니 녕안으로부터는 고속도로가 뻗어 있었다. 흑룡강성의 경제발전 상황에 대해 한눈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목단강에서 김성범씨의 동생을 만나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택시에 앉아 곧추 해림으로 향발, 10 여 분 뒤 해림에 도착하자 벌써 밤 11시 40분이 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잡고 간단한 샤와를 마치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삼부락의 형성 이튿날 아침 8시 30 분 경, 김성범씨가 부탁 한대로 해림시 설원 주업유한회사의 류상(刘翔) 이사장으로부터 우리한테 승용차 한대를 보내왔다. 운전석에 앉은 김성범씨가 시동을 걸자 차는 인차 떠났다. 역사탐방이 실제로 시작된 셈이었다. 첫 코스는 해림시 평화촌이었다. 그 곳에는 김성범씨의 고모 김옥분 할머니(77세)가 살고 있었는데 김성범씨네 가족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것이었다. 김옥분 할머니네 집은 해림으로부터 평화촌에 들어서는 길어구에 있었는데 아주 수수한 한족식 온돌방으로 된 구조었다. “살아가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알고 보니 해림 시가지에 80여 평방미터가 되는 아파트가 있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촌에서 보내고 겨울에는 시가지의 아파트에서 산다고 했다. 우리 일행이 도목나무를 지펴 뜨근뜨근한 온돌방에 앉자 김옥분 할머니는 미리 김성범씨의 연락을 받았던 터라 평화촌의 연장자이며 지난해 당시 82세에 나는 윤천오 노인을 모셔 왔다. 김옥분 할머니와 윤천오 노인은 말그대로 평화촌과 삼부락 일대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산증인이었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삼부락이 형성된 것은 1930 연대 말이라 한다. 삼부락이 형성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삼부락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고장은 흑룡강성 동녕현 노흑산란 곳이었는데 지난 세기 30연대 말 일제는 노흑산에 철도를 부설한다는 이유로 그 고장 사람들을 몽땅 강제 이주시켜 해림에서 30여리 되는 산골에 정착하게 했던 것이다. 말이 철도를 부설하기에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것이었지 기실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노흑산 주민들이 소련과 접촉하면서 밀정이 되는 것을 막아 보기 위한 것이 그 실정이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노흑산지구의 주민 대부분은 원래 중국에서 살다가 일제가 중국 동북을 점령하자 소련으로 이주했다가 1930연대 중기 소련에서 연해지구에 있는 조선인들을 중앙 아시아에로 집단이주시킨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피해 하루 밤 새에 변경을 넘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노흑산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만주땅으로 이주한 뒤에도 늘 소련땅을 넘나들며 소금장사 혹은 소장사 등을 하였고 또 항일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례로 김옥분 할머니의 조상 분들도 전형적인 반일 가정이었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20세기 30연대 김성범의 증조할아버지 김여백씨는 늘 항일유격대한테 양식(석마로 찧어 껍질까지 섞인 보리쌀)이나 소금, 군복(나무껍질과 함께 천을 삶아 물을 들인 후 손으로 돌리는 재봉침으로 지은 옷) 등을 보내주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운수도구란 당나귀를 메운 달구지로 밤마다 유격대 숙영지에 몰래 날라다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번은 유격대 몇명이 김여백씨의 집에 와서 잠을 자던 중 특무의 밀고를 받고 일본군들이 이 집을 불시에 기습,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습격에 당황해 난 집문앞 보초는 급기야 총을 쏘는 것으로 잠자는 유격대들한테 알리는 수밖에 없었고 잠을 자던 유격대들이 사처로 도망을 치자 붙잡힌 사람은 결국 김성범씨의 할아버지 김춘익씨 뿐이었다. 일제놈들은 김성범씨의 할아버지인 김춘익씨를 붙잡아서는 달아 매놓고 때리기도 하고 입안에 코구멍안에 고추물을 부어 넣기도 하면서 모진 고문을 들이 댔다고 한다. 나중에 놈들은 김여백씨의 가족으로부터 많은 예물을 받았고 거기에 김춘익씨가 인사불성이 되여 살아날 가망이 없자 집에 알려 데려 내가게 했는데 다 죽어가게 된 것을 김옥분 할머니의 조부모가 양귀비꽃(아편)을 태워서 매맞은 곳에 붙여 주었으며 결국 그 양귀비꽃 덕분이었던지 아니면 다른 약의 효과를 봤던지 김춘익씨가 사경에서 기적같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일제에 의해 해림부근의 산골로 강제이주 된 사람들은 대충 집터를 닦고 화전농사를 지으면서 그 곳에 정착, 호수가 늘어 남에 따라 200여호로 되는 제법 큰 마을이 되었고 마을 이름을 삼부락으로 지었던 것이다. 김춘익씨의 일가는 삼부락에 이주한 후 자식 9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김옥분 할머니에 따르면 김옥분 자신은 삼부락에서 태어 났고 아래로 남동생 셋이 있었는데 선후로 곰보병, 홍역 등으로 죽었으며 결국 자신은 형제중 막내로 남게 되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형성되었던 삼부락에서 조선인들이 몽땅 자리를 뜨게 된 것은 일제가 망한 뒤 해림지구에 마적떼들이 득실거리면서 조선인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희산을 두목으로 하는 마적떼들은 주로 조선인부락들을 습격하군 했는데 바로 삼부락이 중점습격 대상이었다. 마적들은 주로 밤중에 마을로 쓸어 들어서는 식량이고 가축이며를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간데서 그 놈들의 등살에 도무지 살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부락에서 살던 조선인들은 그 거개가 약 40여리 상거한 안가툰(지금의 평화촌)으로 다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전후의 안가툰 안가툰이란 성이 안씨인 형제가 정착해 살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지만 해방 전후에 들어서는 제법 큰 조선인 마을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윤천오 노인에 따르면 그의 나이 9살 때인 1930년 조선 경상도로부터 만주로 온 이주민들이 이 마을에 정착할 때만 해도 이미 조선인 7-8개호로 이미 조선인부락을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뒤 먼저 정착한 이들이 형제와 친지들을 소개해 들어오면서 해방전야에는 거의 250 여 호의 조선인 부락으로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조선인 지주도 생겨났다. 당시 조선인 지주로는 장도원과 김광열이 큰 지주에 속했는데 장도원은 밭 10여헥타르가 있었고 김광렬한테는 무려 수십헥타르나 있었으며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이 두 지주의 밭을 소작맡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이주해온 조선인들과 당지의 토착민이었던 한족들 사이의 민족 모순도 비교적 첨예했었다고 한다. 이는 주로 일제놈들의 민족이간책에 의해서었다. 그 사례로 일제 놈들은 한족들의 밭을 빼앗아 조선인들을 고용하여 논으로 개간하게 하는 것이었다. 해림지구의 대부분의 논은 이렇게 조선인들에 의해 개간되었으며 그 틈 사이에 큰 이득을 챙긴 조선인이 바로 일본군 국경수비대에서 근무하던 장도원이었으며 큰 피해를 본건 조선인과 한족 농민들이었다. 이렇게 일본놈들에 의해 생겨난 민족모순은 해방 직후에도 줄곧 이어졌는바 우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마적들도 주로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살인방화 등 고약한 짓이란 고약한 짓은 골라가며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방 직후 삼부락의 대부분 조선인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정든 땅을 떠나 사처로 이주, 그중 안가툰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원 안가툰사람들과 함께 이 마을 이름을 평화촌으로 고치고 자체로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곳의 조선인들은 우선 일본놈들이 남겨놓은 해림비행장에 가서 숱한 총과 탄약, 수류탄 등을 날라와서는 무장했고 부락 둘레에 토성을 쌓고 보초막을 지었으며 젊은이들이 밤낮으로 마을을 지켜나섰다. 그리고 마을 밖에서 가끔씩 비행장에서 날라온 폭탄을 터치우고 실탄연습도 하면서 마적들한테 자위대의 위력을 시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해림지구의 마적들도 평화촌만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었다. 1946년의 겨울인가 한 번은 마적무리 150 여 명이 이 부락근처를 지나가면서 “이 마을만은 건드리지 않을테니 밥 한끼만 해달라”고 해서 밥을 해준적은 있었는데 2일 후 그 마적들이 신안진 쪽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그 뒤 민주연군이 건립되면서 그 마적떼들도 몽땅 소멸되어 해림지구의 조선인 농민들도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공산당의 민족정책이 낙실되면서 조 한 족간의 민족모순도 점차 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필자의 청에 의해 우리 일행은 곡파의 유명한 소설 “임해설원”에서 나오는 마적소굴 위호산으로 향했다. 위호산으로 가는 길은 평화촌에서 일부락, 이부락, 삼부락, 쟈피거우 등 마을을 거쳐서 가는데 쟈피거우를 지나자 마을 이름이 “35마을(35公里)”, “22마을”, “7리지(7里地)” 등으로 지은 곳들이 나타났다. 괴상한 마을 이름이라고 필자가 의아해하자 김성범씨는 이는 옛날 위호산 웃쪽에 있는 횡도하자로부터 35킬로메터가 되는 곳의 마을에 적당히 지을 이름이 없어 그저 “35마을”라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쟈피거우란 소설에서는 익숙히 보아 왔지만 실제로 가본 적이 없는 지라 쟈피거우에 도착하자 필자는 김성범씨더러 차를 세우게 했다. 쟈피거우란 산골마을 치고는 꽤나 큰 편으로 수백호의 인가는 있음즉 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난의 때를 채 벗지 못하었는지 벽돌 기와집은 별로 보이지 않고 토벽집이 대부분이었으며 가끔씩 소설 “임해설원”의 한 모퉁이를 연상케 하듯 통나무로 지은 귀틀집도 보이군 했다. 쟈피거우에서 우리는 기념사진 한 장 씩 남겼다. 쟈피거우에서 약 100리 정도 달리자 그제야 눈앞에는 “위호산 홍색관광구”라는 현수막이 보이었다. 거기에는 위호산에서 양자영과 소검파가 상봉하는 동상, 양자영이 말을 타고 달리는 동상 등이 세워져 있었다. “위호산 홍색관광구” 어구에 들어 섰으나 산벼랑 바위에 “위호산”이라고 씌여진 것이 나타나기는 약 30리쯤 달린 후였다. 위호산의 풍경을 대충 소개하면 주봉으로 오르는 길어구에 우에서 언급한 “위호산”이라고 글발이 새겨진 바위산이 있었고 그 사이로 벽계수가 돌돌 구을며 흘렀는데 그 샘물을 마시니 도시의 광천수는 뺨을 칠 정도로 시원하였다. 우리는 돌층계로 만들어진 산길을 따라 위호산 주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면서 들을라니 가끔씩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낮이라지만 인적기라고는 없는 산 중에서 나는 저도 몰래 몸이 오싹해 나기도 했다. 산을 어느 정도 오르자 쉼터가 생겼고 쉼터옆에는 그제날 손달득이 바로 여기서 양자영의 비밀 쪽지를 찾게 되었다고 씌여져있었다. 소설을 볼 때에는 손달득과 양자영의 연락지점이 위호산 주봉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겼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위호산 주봉의 코밑이었다. 쉼터에서 숨을 돌린 우리는 계속 주봉으로 올랐는데 이제부터는 산세가 가파로왔고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필자보다 산골에서 나서 자랐다는 김성범씨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이전에 자기도 아버지를 따라 이 곳으로 사냥하러 다니군 했는데 당시에는 이 곳이 위호산 주봉인지조차 모르고 다녔다는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인 김두만씨기 이 일대에서 표범 한마리를 잡았었고 자기 또한 수달피 한마리 잡았는데 20여 년 전이라 그 때의 시세로 수달피가죽 한장에 1000원을 받고 팔았단다. 한동안 오르자 이번에는 소검파의 소분대가 위호산 첫 보초선을 통과 했다는 곳이 나타났다. 거기에 역시 양자영이 보초들을 불러들여 술을 먹인데서 소분대가 첫 보초선을 쉽게 통과했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거기에서 자리를 뜨자 이번에는 바위틈 사이에 있는 동굴이 나타났고 동굴 왼쪽에 “위호산 주봉”이라고 쓴 패쪽이 보이었다. 우리는 안깐힘을 써가며 주봉에 올랐다. 위호산 주봉은 들쑥 날쑥한 바위산과는 달리 사방 50-60메터씩 되는 넓은 공지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설 “임해설원”에서 부각한 것처럼 5 개의 토치카 자리도 있었고 중간이 아마 위호청인 모양이었으며 한 쪽 옆은 깎아 지를듯한 벼랑이었는데 거기에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고려해서인지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었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적는 이 순간까지도 소검파의 소분대가 그 지세가 험준한 위호산을 탈취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의 전쟁이라면 비행기로 폭격하고 포로 조준사격을 들이 대는 것으로 탈취하기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당시 극상해서 기관총 한 두 정이 있는 상황에서 그 것도 36명 밖에 안되는 소분대의 힘으로 극히 적은 손실로 그 토비소굴을 탈취했다는 것이 어찌보면 믿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한편 그 마적소굴에서 독수리라는 그 마적두목의 신임까지 얻은 양자영의 지혜에 진짜 탄복이 갔다. 위호산 주봉에서 약 20 분 간 지체한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렸다. 산에서 내려오니 짧은 겨울해는 이미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해림시 산시(山市)에 있다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살던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헌데 돌아오던 중 길을 잘못 들어서다 보니 오랫동안 생뚱 같은 곳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길을 찾은 뒤 이부락 근처에서 산시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약 50여리 달려 김좌진 장군이 살던 옛집을 찾아보니 이미 밤 9시가 되었다. 한 밤 중이라 김좌진 장군이 살던 옛집은 안팍의 등불도 모두 꺼져있고 대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별수 없이 우리는 김좌진 장군 옛집의 대문밖 광장을 한동안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광장어구에 “중 한 양국 친선 만세!”라고 쓴 글발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나 후에 볼라니 사진효과가 엉망이었다. ▲동녕요새앞 광장에 이덕생 장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장”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바위돌 ▲요새앞 광장에 세워진 소련홍군열사 기념비 ▲요새입구 ▲요새로 내려가는 층계 ▲ 영화 “갱도전”을 방불케 하는 굽이굽이의 갱도 ▲이곳은 요새내 군인들이 식사를 하던 홀이다 ▲요새는 철근과 콩크리트 등으로 몹시 견고했다 아시아서 가장 큰 군사요새 찾아서 그 이튿 날 우리는 해림시 남라고촌의 옛 당지부서기인 이수학, 임진동 등 당지의 노인 두 분을 모시고 동녕현 쪽으로 향했다. 목적은 김성범씨 조상들이 동녕현 노즈거우(闹子沟)라는 곳에서 살면서 반일활동에 참여하던 때의 역사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서었다. 또한 동녕현의 삼차구진에는 필자의 모사촌형인 채수근씨가 살고 있기에 그를 통해 동네의 노인들을 모셔놓고 옛날의 역사에 대해 탐문해 보노라면 어느 정도 파악이 있기도 했다. 그날 우리가 동녕현 삼차구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 다 되었다. 모사촌형 채수근씨를 만났으나 사전에 연락을 하지 못한 터라 동네의 연세가 많은 노인들을 수소문하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채수근씨가 동네 노인들을 수소문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우선 삼차구에 있는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위만주국시기 일본군 군사요새를 돌아 보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훈산요새(勋山要塞)는 삼차구진에서 약 5킬로메터 상거한 거리에 있었다. 우리가 요새에 도착하자 요새어구의 돌로 깐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큰 군사요새”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고 넓은 광장에 들어서자 소련홍군 동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제일 마지막 전장”이라고 쓴 이덕생 장군의 제사가 있었다. 그리고 소련홍군이 동북으로 진격할 때의 역사를 반영한 전람관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요새의 동굴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요새의 동굴어구는 산 중턱에 있었는데 층계를 따라 내려 가는데만 20메터는 잘되는듯 싶었다. 요새의 동굴은 흡사 영화 “갱도전”에서 나오는 갱도를 방불케 했는데 다르다면 굴을 판 후 콩크리트로 동굴천정과 양측 벽을 때려 넣어서 무너질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동굴안은 사처로 뻗어 있었는데 가끔씩 가다가 지휘실, 사관실, 사병실, 식당, 목욕실, 작전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삼차구진 지역의 옛 일본군 군사요새는 “승홍산요새”, “훈산요새”, “삼각산요새”, “마달산요새”, “조일산요새”, “출환산요새”, “북천산요새” 등으로 그 것을 합치면 길이가 110 킬로미터에 달하고 너비가 50킬로미터에 달하는바 그 모두가 중소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었고 내부구조가 사통 발달했으며 그날 우리가 들어가 본 “훈산요새”는 전반 요새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한편 일본군들은 1933년 8월 동녕을 강점한 후 즉시 이 곳을 소련으로 진공하는 데에서의 기지로 삼고 이 요새군을 구축하기 시작, 도합 17 만 명에 달하는 인부들을 이 요새구축공사에 투입하였는데 살아서 돌아간 인부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한다. 1945년 8월, 소련홍군은 이 요새군을 점령하느라고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한다. 그 해의 8월 15일, 일본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 선언을 낭독했지만 통신연락이 두절되어 이를 알 수 없었던 이 요새군의 일본군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었다. 전쟁은 8월 30일에 이르러서야 결속되였는데 소련홍군은 1500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은 100 여명이 죽고 900 여명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고 한다. 이 요새는 그 규모가 방대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군사요새인데다 이 요새에서의 전투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제일 마지막 전투란데서 그 의미가 더 짙을것 같다. × × × 그날 오후 사촌형 채수근씨가 동녕의 노흑산지구에서 살았다는 올해 80세에 나는 여송학로인을 모시고 왔다. 헌데 삼차구진의 토배기라는 그 노인은 그 옛날 김여백이라는 사람의 력사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는가고 물었으나 도리질을 할뿐이었다. 그래서 그제 날의 항일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혹시 김여백과 김춘익의 항일사연이 나올가 하고 청을 들었으나 그제 날 안중근이요, 홍범도요 하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기타 항일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은 것들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동녕현에서 허탕을 치자 우리는 이번 행차의 마지막 코스인 계서지구의 이수진(梨树镇)으로 향했다. 이수진에는 그제 날 목단강의 고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단강 북망당서점의 점원, 일본인 회사의 통역 및 해방 후에는 목단강 독립퇀의 비서로 있었던 임활동(林活东) 노인이 있었던 것이다. 임활동 로인은 바로 우리 일행 중 임로인의 4촌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밤길을 헤가르며 계서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중도에서 또 길을 잘못 들어서서 생뚱같은 곳으로 한동안 달리다가 겨우 계서로 가는 길에 들어서다 보니 이수진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리 전화연락을 했기에 임활동 로인네 일가에서는 물만두를 빚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범씨의 증조할아버지 김여백과 할아버지 김춘익의 역사에 대해서는 임활동 노인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김여백 노인이 아편을 피웠고 사격술이 능하다는 등만 대충 알고있을 뿐이었다. 하긴 해방전 오랫동안 일본인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항일유격대거나 기타 반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유일하게 김성범씨의 조상역사에 잘 알고있을 분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살고있다는 김성범씨의 큰 고모할머니라고 할 수 있었다. 헌데 그 분을 만나자면 러시아로 건너 갈 여권을 내야 하고 시간을 짜내야 하기에 다음 행차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탐방길에서 예정된 목적은 다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얻은 수확은 매우 컸다. 특히 평화촌의 윤천오 노인과 김옥분 할머니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반일가요를 들어보게 되었고 안중근의사, 김좌진장군 등 항일투사들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한 부분을 적지 않게 들어보게 되었다. 한편 우리 세대들이 어깨에 짊어진 중책에 대해서도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탐방길에서의 아쉬웠던 점이 많은 노세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보다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면 노세대 분들이 살아계실 때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한 건이라도 더 파헤쳐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노세대분들마저 다 돌아간다면 우리 민족의 어떤 역사는 영원히 세월의 흐름속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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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5
  • 평양 호화 수상낙원 개방,시민들 수영복 입고 물놀이
    현지 시간으로 2014년 2월 12일 북한 평양 주민들이 한창 새로 건설된 수상낙원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알려진데 의하면 이 수영장은 2013년 10월 15일에 완공되였다.[사진=신화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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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4-02-14
  • 中,여행사 북한 거지 생활 참관활동 조직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절부터 주민생활 빈곤도가 상상을 초월해 수백만 인구가 아사했으며 거지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이 생활 곤경을 이용해 북한 거지 생활 관광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편집자주 [사진=북한 거지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부터 북한 주민생활 빈곤도가 상상을 초월해 수백만 인구가 아사했으며 거지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이 생활 곤경을 이용해 북한 거지 생활 관광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지린성 옌볜의 옌지시(延吉市), 훈춘시(珲春市)와 투먼(图们) 일대가 북한 아동 거지 거주지로서 중북 변경지대의 일부 중국 여행사들이 북한 난민 아동들에게 토굴을 제공해 거주하게 하고 참관활동을 조직하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토굴 참관 활동을 안내하고 있다. 한 중국 여행사 직원은 “우리는 북한 거지들에게 거주소를 제공하며 먹을거리를 준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들도 이러한 보도를 하고 있다. 한 한국신문사 보도에 따르면 랴오닝성 단둥(辽宁省丹东)의 한 여행사도 기회를 포착하고 먼 곳에서 북한측을 내다 보는 관광활동을 조직했는데 관광객들이 단둥에서 쾌속보트를 타고 야루강(鸭绿江)을 따라 동쪽으로 25km 달리면서 북한측 강변을 구경하게 한다. 관광객들은 북한 풍경을 구경하는 동시에 빵과 과자를 북한 주민들에게 던져 먹게 한다. 이러한 관광상품 비용은 인당 100위안이다. 중국의 쾌속선 운전기사들은 “북한 거지들이 관광객들이 던져준 과자, 빵, 담배를 주어 암시장에 가지고가 옥수수 가루와 바꿔 먹는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전문 쾌속선 부두에서 과자와 빵 등 식품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1990년대 중북 양측이 북한 무역 우대를 중지한후 북한에는 기름, 원자재, 공농업 생산능력 위축현상이 출현하고 1990년대 중반 기근이 폭발했으며 300여 만명이 아사했다고 한다. 한국정부에 따르면 북한 고아원의 수용자들과 인구 비율로 추산할때 북한 국내에는 현재 거지가 7만-10만에 달하는 듯하며 중북 변경지구에도 1만-2만명 아동거지들이 있는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최근들어 북한이 탈북자 타격강도를 강화하면서 양국 변계지구 아동 거지수가 5천명으로 감소했다.중북 변경지구에서 북한 아동을 돌보는 한국 인사들은 “이렇게 계속되면 남북 통일후 이러한 아동 거지문제가 ‘손을 데우는 뜨거운 감자’로 될 것이다”고 일치하게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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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중국 한 농촌 결혼식장 붕괴로 8명 사망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13일 저녁 5시 30분경, 중국 절강성 반안현 만창향 아장촌에서 낡은 회당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해 8명이 숨지고 90여명이 상했으며 그중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당시, 반안현 만창향 아장촌의 한 촌민이 낡은 회당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있었는데 산간지역에 지속적으로 내린 눈이 많이 쌓여 지붕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발생 후 금화 각 시, 현, 향, 촌에서는 즉시 인력을 조직하여 전력 구조, 모든 부상자들을 병원에 옮겨 치료받게 했다. 반안현에서도 즉시 의료위생, 소방, 무장경찰, 공안 등 8개 구조팀을 조직하여 아장촌에 파견, 구조 및 사후처리 등 작업과 조사작업을 전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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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발렌타이데이 사랑의 선물... 장미꽃과 쵸콜렛
    오늘은 전통명절인 정월대보름일뿐만아니라 요즘 새로 흥기하고있는 젊은이들의 명절인 발렌타인데이 기도 합니다. 쵸콜렛과 장미꽃은 줄곧 발렌타인데이에 없어서는 안될 사랑의 선물로 여겨지고있는데요, 기자가 올해 시세를 알아봤습니다. 기자가 연길시(중국 진린성) 삼꽃거리 꽃도매시장에서 알아본데 따르면 우리 주에서 판매하는 장미꽃은 대부분 운남에서 들여오는데 최근 운남화훼기지가 자연재해의 영향을 받아 생화도매가격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인터뷰> 손봉하 (연길시 모 꽃가게 경리) : "올해 발렌타인데이 생화는 왕년보다 조금 비쌉니다. 원가가 많이 올라 왕년보다 수입이 적습니다. 너무 비싸게 팔면 고객들이 사려하지 않기때문에 가격을 많이 높이지 못합니다." 업계인사의 소개에 따르면 발렌타인데이 당일 장미꽃 등 화훼소매가격은 대폭 오른다고 합니다. 급별에 따라 1등급 장미꽃 한송이 가격은 15원에서 20원이고 일반 장미꽃은 10원좌우이며 등급이 낮아도 5원좌우에 판매될것으로 예측하고있습니다. 장미꽃가격이 오르면서 꽃시장이 썰렁해진데 비해 각 슈퍼의 쵸콜렛매장은 호황을 맞고있습니다. <인터뷰> 왕춘양 (연길시 모 슈퍼 판매원) :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판매량은 어마어마합니다. 지난해와 비슷합니다." <기 자> : "시장의 변화를 막론하고 발렌타인데이 사랑의 마음을 담은 장미꽃이나 쵸콜렛을 받는다는것은 행복한 일이겠죠. 곧 다가올 발렌타인데이에 자신에게만 속한 달콤한 사랑과 행복을 갖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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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CNR, 꿈의 아리랑전설 …애환의 민족이민사TV에 담다
    연변일보에 따르면 2014년 중앙인민방송(CNR) 조선어방송이 TV다큐멘터리 “중국 조선족 이민사(잠정)”와 라지오방송 시리즈 “새삶터의 개척자들 - 연해지역 조선족사회 탐방”이란 두개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 시청취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소리와 영상으로 조선족 개척이민사 재현 19세기 중엽부터 련년 닥쳐오는 자연재해와 일제의 수탈을 피해 조선민족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지역에 정착해 생활하게 되였는데 “중국 조선족이민사”는 바로 고향을 등지고 이민해온 조선족들이 고된 로동으로 “꿈의 아리랑”을 실현하는 모습과 아울러 이민자로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해가는 과정을 재현하게 된다. “중국 조선족이민사”는 “월강”, “개척”, “환생”, “항쟁” 등 네개 부분으로 구성을 이루어 12부작(매회 40분) TV다큐멘터리와 100회 라지오방송 시리즈로 제작된다. “중국 조선족이민사”의 총기획과 구성, 제작을 담당한 중앙인민방송 조선어부 박일선 원 주임은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4월부터 준비를 시작했고 이미 3회를 완성했다며 진실한 영상자료와 상황재현을 통해 조선족 이민사를 환원시킬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당사자들이 대부분 작고했거나 여든을 넘긴 로인이다보니 “중국 조선족이민사”는 조선족의 력사에 대한 발굴과 정리뿐만아니라 구급성 의미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들어 조선족의 개척, 이민사를 다룬 학술저작들이 많이 출간되면서 비교적 구전한 체계를 갖추고있지만 다큐멘터리로 제작된것은 드물기에 “중국 조선족이민사”는 우리 민족의 력사를 보여주는 력사가치를 갖춘 문헌다큐로 제작할뿐만아니라 “불멸의 발자취 – 중국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유적지 답사”, “영원한 기념비 - 해방전쟁시기 중국 조선족군민의 업적”에 이은 대형TV다큐로 내놓을것이라고 피력했다. 새삶터를 개척하는 조선족사회를 찾아서 2014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또다른 야심작으로 대형 라지오방송시리즈 “새삶터의 개척자들 - 연해지역 조선족사회 탐방” 이 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동북에서 산해관 이남의 경제발달지역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천지를 개척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전국 인구보편조사(2010)를 보면 183만 조선족중 4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대도시와 연해도시로 진출했다. 현재 북경에는 조선족인구가 3.7만명에 달해 북경의 소수민족중에서 4위를 차지했고 상해에는 조선족이 2.2만명으로 5위를 차지, 산동성에는 산동호적이 없는 조선족까지 포함시켜 20여만명이 생활하고있어 산동성에서 두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으로 되고있다. 2012년 상해의 조선족기업이 창출한 생산총액은 200억 위안에 달했는데 당시 연변의 생산총액이 765억위안이였다. 본 프로그램을 기획한 중앙인민방송 조선어부 김영훈 부주임은 “새 삶터의 개척자들”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구, 청도를 중심으로 한 산동반도, 상해를 중심으로 한 장강삼각주, 심수를 중심으로 한 주강삼각주 등 4개 지역을 중점으로 산해관이남에서 억척스럽게 분투하여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 조선족들을 만나 그들의 스토리를 엮어보게 될것이라고 소개했다. “중국 조선족이민사”와 “새삶터의 개척자들-연해지역 조선족사회 탐방”은 올해 10월전후 시청취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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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中 신쟝(新疆) 지진 이재민 6천명…시진핑 국가주석 구조작업 지시
    2월 12일 17시 19분 50초에 신쟝(新疆) 허톈(和田)지구 위톈(于田) 현(북위 36.1도, 동경 82.5도)에서 리히터 규모 7.3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지 심도가 12킬로미터에 달해 허톈과 카스(喀什) 지역에도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고 인민넷이 전했다. 신장 허톈 정부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2월 12일 23시까지 지진으로 인해 위톈, 처레이(策勒), 민펑(民豐), 뤄푸(洛浦), 모위(墨玉) 5개 현의 6334명이 피해를 입었고 925명이 대피한 상황이며, 무너진 가옥이 122채, 심하게 부서진 가옥이 160채, 일반적으로 부서진 가옥이 2446채로 집계되었고 따라서 이번 재난으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손실이 3364만 위안(약 59억 원)에 달한다. 현재까지 인명 피해 보고는 없었으며, 각지 구호물자가 재난 지역으로 운반되고 있는 중이다.지진 발생 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즉각 현지의 관련 부문에 재난상황 파악과 긴급구조에 나설 것을 지시하고, 지진상황 모니터링을 더욱 강화해 현지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당부했다.리커챵(李克强) 국무원 총리는 신속하게 긴급대처에 나서 2차 재난발생을 철저히 봉쇄하며, 지진 복구와 현지 주민생활 보장 업무를 잘 수행해 사회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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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한글·아리랑·태권도 3대 브랜드 한류 확산
    정부는 한글과 아리랑, 태권도를 3대 브랜드로 선정해 한류확산을 적극 추진하는 등 문화가치를 본격 확산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국립한글박물관’ 개관 ‘아리랑대축제’, ‘태권도원’ 개원 등을 통해 3대 문화브랜드에 대한 특별 홍보를 추진한다. 우선 정부는 한글, 아리랑, 태권도를 3대 브랜드로 삼아 한류 확산의 첨병으로 내세울 계획이다. 뉴욕코리아센터(2015년), 파리코리아센터(2016년) 설립과 아울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도 코리아센터 설립을 추진한다. 본격적인 K컬쳐 확산을 위해 해외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 수를 지난해 120개에서 올해 130개로 늘릴 계획이다. 외국 관광객에게 한글을 알리기 위한 국립한글박물관도 한글날에 개관한다. 세종학당 교원도 적극 늘리고 한국문화 프로그램 개발·보급을 통해 해외진출 기업과의 협력 등 교육환경을 지속 개선하기로 했다. 정상외교를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 한류 신흥 지역에는 융·복합 문화콘텐츠를 소개하고 한류 심화 지역에는 우리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등 전략적 기획을 수립한다. 중앙부처 및 지자체가 정책 수립 시 문화적 관점에서 국민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미리 분석·평가하는 ‘문화영향평가제’ 도입 등 문화가치를 확산해 나갈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해 말 제정된 ‘문화기본법’의 시행과 관련 ‘문화영향평가제’를 도입해서 공공정책에 문화적 관점을 반영하고 문화융성위원회를 활용해 부처 간 협업의 실효성을 제고하기로 했다. 또 외교부, 교육부 등과 창의 인재·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협업을 적극 추진한다. 국민들의 실생활 속에서 유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한 눈에 모아서 알기 쉽게 ‘생활 밀착형 국민 공감 정책’을 지속 홍보하기로 했다. [정책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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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4
  • 中 광서 인민경찰 임신부 살해사건 법정심사
    사진: 피의자 호평(경찰관)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중국 방송넷에 따르면 2월 13일오전 9시, 귀항시 중급인민법원이 고의 살인죄 용의로 검찰기관에 기소된 경찰관 호평의 사건에 대한 법정심사를 진행하였다. 지난해 10월 28일, 광서 평남현 대붕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평남현 공안국 경찰 호평이 음주후 대붕진 모 분식점에서 물건을 사려다가 이 분식점에서 우유차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임신중인 녀주인을 쏘아 죽였다. 다행히 녀주인의 남편은 목숨을 건졌다. 사건발생후 평남현 공안국 국장 등 6명이 정직처분을 받았다. 범죄용의자 호평은 이미 당적을 취소당하고 공직에서 면직되였으며 법에 따라 사법기관에 넘겨졌다. 평남현 원 부현장이며 공안국 국장인 주현, 공안국 원 정치위원인 리견도 각기 당내직무 해임, 행정철직처분을 받았고 기타 관련 책임자도 각기 당규률과 행정규률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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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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