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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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길성

(전번기 계속)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문화학교는 중등전문학교수준으로 중앙군위의 직속학교였다. 당시 해방군대오내에는 문맹이 거의 90% 정도로 급은 높으나 문화에 들어서는 까막눈인 군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부대간부내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바로 이 학교였고 우리가 바로 이 학교 제1기 학생으로 모집됐다.  

내가 이 학교 인사처에 등록하고보니 그때 모집된 학원생은 도합 1000명 가량였다. 들을라니 그 1000명중 시험에 합격되여 선발된 학생은 얼마 안되고 거개가 추천받아서 온 “로병학생”들이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중 심양군구에서 시험에 합격되여 입학한 나의 문화수준은 전 학교의 앞자리를 차지할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개학하여 한동안 지나 서로가 익숙해지자 우리는 서로 무랍없이 말을 나누었고 때로는 악의없는 롱담도 꺼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홀연중 나는 어쩐

지 학생들의 많은 시선이 나한테로 집중되는것을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1000명의 학생중 조선족은 유독 나 혼자뿐이라서 그런줄로만 생각했다. 헌데 딱히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은 나의 젊음과 나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는것이 확연하게 알렸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늘 나를 “멋진 총각(帅小子)”이라고 놀려주고 있었으며 특히 녀학생들이 더했다. 아니 녀학원생들은 나를 놀려주는것이 아니라 은근한 관심을 두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들의 눈길만 보아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반에서 6명밖에 안되는 녀학생중 “왕순자”란 이름을 발견했다. 아니 그래 한족들한테도 순자란 이름이 있단 말인가?  
 
“쑈왕, 쑈왕의 이름이 어쩐지 우리 조선족의 이름같구만.”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내가 이렇게 묻자 왕순자는 제법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전 워낙 조선인이였거든요. 아주 어릴 때 중국으로 건너왔어요. 헌데 왜 그걸 묻죠.” 
“그럼 어찌되여 성은 왕씨인거요?” 

내가 캐묻자 순자는 갑자기 정색해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입을 여는 순자의 눈은 축축히 젖어나기 시작했다.  

일찍 순자는 조선에서 태여났었다. 자신을 낳아준 자애로운 조선인부모도 있었다. 그리고 순자의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었다.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어린 시절 순자는 유치원에도 다녔고 또한 인민학교(중국의 소학교에 해당)에도 붙게 됐다.  

헌데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하던 나날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남북의 내전으로 더 이상 지속될수가 없었다.  

전쟁초기 조선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전쟁발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달여만에 한국군을 락동강 이남까지 밀어붙이면서 조선통일이 눈앞에 대두한듯 했으나 미국이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전세는 역전되였고 전쟁의 불길은 중조변경지대인 압록강변까지 다가오게 됐다. 뒤이어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했고 조선땅은 중조 군대와 인민을 일방으로 하고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16개국 군대가 참전한 이른바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는 격렬한 전쟁터로 되였고 조선반도는 세계 여러개 나라의 군대들한테 전쟁터를 제공하는 셈이 됐다.  
… 
1951년의 어느날 조선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함흥시는 미공군 B-29 비행기의 융단식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짙은 연기가 솟구치고 커다란 건물들마저 땅에 주저앉으면서 화염속에 휩싸이였다.  

미군의 대형폭격기들은 함흥시교의 작은 초가마을마저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불타는 집앞에서 6살되는 한 녀자애가 울면서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때마침 불끄러 달려온 한 지원군장군과 지원군전사들, 장군은 우선 우는 아이부터 껴안았다. 그러자 녀자애는 손을 들어 어느 한곳을 가르켰다. 지원군장군이 바라보니 거기에는 30대로 돼보이는 남녀가 피못속에 쓰러져있었다. 장군은 인차 옷을 벗어 녀자애한테 씌워주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인차 불끄기에 달라붙었다.  

불을 다 끄고 주둔지로 돌아가려던 장군은 발길을 옮기다 말고 그때까지도 울고있는 녀자애를 뒤돌아보았다. 어린애들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장군은 다시 다가가 녀자애를 둘쳐업고는 군부대로 향했다…  

그때 폭격에 부모를 잃고 울던 녀자애, 그가 바로 순자였다.  

그뒤 장군은 부대병영에서 그 조선녀자애를 키우다가 조선정전이 조인되고 전쟁이 끝나 귀국하게 되자 김씨였던 김순자의 성을 아예 왕씨로 고쳤으며 정식으로 조선정부의 동의를 거쳐 순자를 입양해 중국으로 데려오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순자의 양아버지가 된 지원군장군, 그 장군인즉 바로 1960년대초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 겸 부사령원이였던 왕륙생(王六生)이였다. 
… 
그 사연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어쩐지 순자한테 동정이 갔으며 그녀가 여느 녀학생과는 어딘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얼마 안돼 나와 왕순자는 자연스레 친한 사이로 됐다. 우리 둘중 누가 먼저 사귀자고 손을 내미는 등 이러한 거동은 없었다. 그저 둘 모두 스스로가 서로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진것 같았다. 
 
한편 20대 초반의 나한테 있어서 이성의 출현은 복잡한 모순으로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키게 했다. 나는 동북 연변의 가난한 나의 가정을 생각, 가정을 위해서도 그렇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이성과 접근하면 앞날을 망칠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꼭 열심히 공부하여 보다 출세한 뒤에야 이성과 앞날의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dspdaily_com_20140402_100742.jpg하지만 한편 순자가 너무 좋았다. 가정환경도 우월했지만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노상 실웃음이 담겨있는 그녀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순자는 비교적 개방적이였다. 언젠가 얘기를 통해 상해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내 자신이 직접 느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였다. 

나와 순자는 주로 주말(일요일)을 리용해 들놀이와 산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군 했다.  

당시 우리는 학교 학생인데다 군인이였던만큼 교정내의 련애는 학교제도상으로 금지였다. 하지만 학교지도부에서는 순자가 상해경비구의 왕륙생정위의 딸이라는것을 잘 아는지라 그저 너무 공개적으로 사귀면 기타 학생들한테 영향이 나쁘니 좀 자제라라고 일깨워주는것에 그쳤으며 우리의 관계를 두고 거의 묵인하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순자는 교정내에서만은 나와 만나는것을 극력 자제했으며 설사 만나더라도 그냥 살짝 웃어주는것에 그치였다. 하지만 일단 교정을 벗어나기만 하면 꺼리낌없이 나와 팔을 끼군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주 나의 얼굴을 건드리며 깔깔대기도 했으며 주위를 살피다가는 깜쪽같이 나의 얼굴에 뽀뽀해주기도 했다. 그렇 때마다 나는 와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군 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냥 싫은것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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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왕순자가 사귄지도 어느덧 2개월이 넘었다.  
 
그 기간 나와 순자는 시간만 있으면 학교뒤의 공원을 찾아가거나 거리쇼핑으로 이른바 청춘의 랑만을 즐겼다. 특히 거리에 나서면 거의 모든 소비는 순자의 몫이였다. 학생이다보니 순자한테는 큰돈은 없었지만 상해경비구 왕정위같은 부모를 두었기에 용돈만은 거의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쓸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일같은 먹거리나 식당에서의 간단한 식사 등은 그녀가 전담당하였으며 또한 나한테 양말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줄 때도 많았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사내대장부로 생겨 늘 녀자의 신세를 지자고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순자한테 화장품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서 선물하기에는 나의 주머니사정이 너무 여의치가 않았다. 당시 내가 받는 수당은 겨우 6원뿐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순자 사이 또한 그때까지 량가부모의 허락이 떨어진것도 아니여서 모든것이 확실해진것이 아니라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 되자 불현듯 순자는 일요일날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놀러가자고 나한테 제의했다. 아버지인 왕정위가 나를 한번 만나보자고 한다는거였다. 그러니 순자가 진작 집에 가서 나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녀의 아버지 왕륙생정위 역시 나를 사위감으로 한번 점검해 보려는것임에 분명했다.  

순자의 제의에 나는 웬간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너무나도 준비가 없었던것이다. 
“아니, 이거 너무 이른거 아니야?!” 
“뭐가 이른가요. 남들 같으면 량가부모들 만남(상견례)의 장소가 마련될수도 있을법한데요.” 
“그래도…” 

나는 뒤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각 순자네 집으로 가보고 싶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의지가지없는 고아인 순자를 친딸처럼 키워준 그녀의 부모님의 덕성에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나는 반면에 자신이 순자부모님들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은근히 두려웠다.  

그때까지 나 역시 혼사가 이뤄지자면 두 가정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 등이 엇비슷해야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터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립장에처하고 말았다.  

그날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담?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자의 제의를 들어주자니 그녀 부모님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두려웠고 가지 않자고 하니 너무나도 적극적인 순자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아쉬웠다. 특히 순자의 부모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아팠다.  

결국 나는 지금 그녀의 집으로 가는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간, 나는 이러한 경우엔 일을 뒤로 미루는것이 가장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생각을 고안해냈다.  

그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바로 이튿날 거리에 나가 맛있는걸 사준다며 순자를 구슬려서는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방문을 후일로 미루는것이였다. 나는 오직 그 방법만이 순자를 설득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왕순자가 숙소에 들어섰다. 지난밤 내가 이리저리 고민하며 생각을 굴리다보니 새벽녁에야 잠에 들었고 아침에는 종전처럼 기상할수가 없었다. 하긴 일요일이였으니까 늦잠을 자도 별문제였다.  

숙소에 들어선 순자는 야단을 쳤다. 
“아직도 기상하지 않았어요. 빨리빨리 일어나 출발차비를 해요.” 

순자의 뒤로는 웬 젊은 군인이 뒤따랐다. 순자의 말에 따르면 그 군인은 왕륙생정위의 운전사였으며 왕정위가 우리를 데려오라고 찦차까지 보내왔다는것이였다.  

아니, 이럴수가?! 왕정위가 찦차까지 보내오다니. 나는 차마 행사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입밖에 내번지지 못하고 순자에 뜻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미구하여 우리가 차에 오르자 군용찦차는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운전수오빠, 이 총각 어때요. 잘 생겼나요? 이 총각은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래요.” 

차안에서 순자는 쉴새없이 종알댔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예 아가씨”하며 순자한테 깎듯이 례의를 갖췄다.  

오전 10쯤 되자 나와 순자를 앉힌 찦차는 상해경비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왕륙생정위네 집에 도착했다.  

왕정위네 집은 중국고대풍격이 독특한 단독주택이였다. 여러개의 방이 딸려있었고 그때 세월에는 흔치 않은 수세식 단독위생실도 있었다.  

나를 보자 순자의 어머니 왕부인은 유난히 수다를 떨면서 이것저것 묻는것도 많았다. 왕부인은 귀족마느님같은 틀이 전혀 없었고 전형적인 현모량처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네가정은 내가 오기전에 그토록 우려했던것과는 거의 180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왕부인의 모습에서 순자를 입양딸로 대하는 티가 전혀 없었고 순자 또한 어머니의 목에 매달리며 키스세례를 퍼붓는 등으로 천진란만한것으로 보아 그들 모녀사이는 끔찍하기도 했다.  

한참뒤 왕정위가 헛기침을 해서야 왕부인의 수다가 멈췄다.  

왕정위 역시 굵직한 려송연을 몇모금 빨더니 천천히 나한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왕사령원은 나한테 부모는 뭘하는 사람들이고 형제는 몇명 있으며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 등등으로 묻는것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가정생활형편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도 않았다.  

나는 공손히 사실 그대로 대답을 올렸다. 일찍 세살때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정착하던것부터 농민가정출신이며 가정이 가난하다는것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일일이 말씀올렸다.  

나중에 왕정위는 “가정이 가난하다는건 그닥 중요하지 않는거지”하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미구하여 점심식사가 마련됐다. 료리는 왕정위의 전화 한통으로 몇그릇 인차 배달됐고 거기의 왕부인이 손수 몇가지 더 보충했다. 그러자 식탁은 제법 근사한 연회상처럼 푸짐했다.  

왕정위는 집무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같은것을 열고는 술 한병을 들고나왔다.  

“나는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네. 주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수할가봐여서이네. 그러니 자네도 군인생활을 하면서 술을 입데 대지 않는것이 좋을듯 싶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구. 마시자구. 그리고 오늘만은 취해도 괜찮아…” 

내가 술병을 들고 왕정위한테 술을 따르려고 하자 왕정위는 손을 내젓더니 순자더로 술병을 쥐게 하고는 먼저 자기와 부인한테 그리고 나한테까지 차례로 따르게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왕정위는 순자의 래력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순자한테서 이미 들어서 알고있는 사연이였지만 왕정위한테서 직접 들으니 어딘가 감수가 달랐다. 그리고 낯모를 조선의 고아를 친딸처럼 키우고있는 왕정위 내외의 인격에 재차 탄복이 가면서 머리가 숙여졌다. 

왕정위는 주량이 큰 모양이였다. 거의 10잔을 굽내고도 끄떡없었다. 아마 조선의 고아를 키워 이젠 사위감까지 만나게 되니 몹시 흥분된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 왕정위는 사위감으로 진작 조선족청년을 선택할 생각을 했고 순자의 친부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취중진담이라고 왕정위의 말은 진담인것 같았다. 

점심식사를 마치자 왕부인의 제의하에 모두가 시내쇼핑을 떠났다.  

집을 나서면서 왕부인은 “평소 령감은 거의 마누라와 함께 쇼핑을 다니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 함께 나선걸 보면 몹시 기쁜 모양”이라고 또 수다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 
상해거리는 번화했다. 거리마다 량측엔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길에는 궤도전차가 달렸으며 알록달록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마치 꽃물결이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다. 실로 국내최대의 도시였고 “동방의 빠리”란 칭호를 가지기에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  
 
백화점을 돌면서 왕부인은 특별히 내가 입을만한 양복 한세트와 흰와이셔츠, 양말 등을 사는것이였다. 내가 사절하려고 하자 순자가 툭 치면서 눈을 깜빡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마음이 내켜서 사는것이니 사절하는것도 례의가 아니라는 뜻이였다.  

왕부인은 양복을 내밀며 나더로 입어보라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입어보는 양복이였다. 내가 양복을 입고 거울앞에 서자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거울안에는 아주 훤칠한 총각이 름름한 차림으로 서있는게 아닌가?!  

그날밤 왕정위네 내외 그리고 나와 순자는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으로 갔다.  

당시 나는 무관인 왕륙삼정위가 군사통솔력같은것은 출중해도 음악이나 댄스같은 예술방면에는 문외한인줄 알았었다. 헌데 나의 이런 생각은 편견이고 착각이였다. 낮에 집에 있을 때도 왕정위는 흥이 날 때마다 고전경극의 곡조 한마디씩 흥얼거리기도 했고 저녁에 무도장에 가서 나의 춤실력을 보자고 제의한것도 왕륙삼정위였다.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오색령롱한 네온싸인이 반짝이는가운데 무대우에서 미모의 녀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청춘원무곡” 등 가요를 불렀고 무대아래에서는 양복을 받쳐입은 신사들과 치포나 원피스를 착복한 녀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은채 빙빙 돌아갔으며 그런 남녀의 얼굴들은 모두 랑만에 찬 모습들이였다.  

처음에 나는 춤판에 끼여들지 않고 한쪽켠에 조용히 앉아있었고 순자도 나의 곁에 붙어앉아 다른 남녀들의 춤을 구경만 했다.  
“너희들도 추며 한바퀴 돌지그래?” 
왕부인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순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일어나서는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기실 나는 무도를 모르는것이 아니였다. 당시 국내의 많은 대학교와 중등전문학교에서도 무도를 보급하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문화학교도 례외가 아니였다. 또한 나는 학교에서 무도같은 경연이 있을 때마다 춤을 가장 잘 추는 학생에 속하군 했다.  

헌데 그렇듯 화려하고 눈부신 무도장에는 처음 들어와보는지라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도 했거니와 그런 장소에서 잘난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자의 청에 나는 마지 못해 일어나는척 하며 상대방(순자)한테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하고는 그녀와 마주섰다. 정작 춤판에 끼여들고 보니 흥겨운 음악에 어느 정도 신났다. 학교에서 출 때에 비해서는 곱절 흥이 났다.  

우리가 춤판에 나서자 갑자기 많은 춤군들의 시선이 삽시에 나와 순자한테 쏠리였다. 그도그럴것이 춤군들은 대부분이 중로년들이고 젊은 남녀는 유독 순자와 나뿐이였으니말이다.  

나와 순자가 홀안을 빙빙 돌려 함께 탱고를 추는것을 보고 기타 춤군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무도장에는 처음 온 총각같은데 멀쑥하게 잘 생겼군그래.” 
“저 상해경비사령부 왕정위의 사위감으로 보이는데 아마 대학생인 모양이지?” 

남들이 부러운 눈길로 나와 순자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신분을 추측하자 왕부인은 “내딸이 사귀고있는 군인이래요. 그리고 동북에서 온 조선인이예요” 라고 하며 자랑했다.  

그 시기, 상해를 비롯한 내지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을 조선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를 계기로 나와 순자는 상해를 갈 때마다 그녀의 부모와 함께 가끔씩 그곳의 무도장을 찾군 했다. 그리고 시간의 지속됨에 따라 왕륙삼정위네 내외간과 가깝게 보내는 몇몇 무도장동료들과도 비교적 익숙한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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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순자네 집에 다녀온 뒤부터 우리의 관계는 급진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내가 상해에 있는 왕륙삼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수도 무척 잦아졌다. 내가 갈적마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또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료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항상 나의 입에 넣어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비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의 없는 롱작을 걸기도 했다.  

순자의 아버지 왕륙삼정위는 나한테 대단히 흡족한 모습이였고 가끔씩 나를 “남자애들이 외지에서 생활하자면 필요한것이 많을것”이라며 부인한테 나를 많이 관심해줄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도 왕정위네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당시 내가 학교에서 받는 수당은 인민페로 고작 6원이였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나와 롱작을 걸 때마다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나의 대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류콰이챈”인 내가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수 있었다. 

한편 왕륙삼정위는 나와 순자가 졸업하면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할 타산까지 하고있었다. 그때 당시 왕정위가 나서면 나와 순자를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하는건 그야말로 식은죽먹기나 다름없었다. 관건은 내가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 돼야 하는것, 나로 놓고 보면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것이야말로 인생성공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였다. 아니, 왕륙삼정위란 사회배경보다도 나한테는 천진하고 거짓이 없는 순자가 더욱 좋은것도 사실이였다.  

나와 순자의 관계가 이 정도로 진척되자 나는 부모님한테 모든것을 털어놓을 때가 되였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봉건관념이 비교적 농후한 부모님께서 순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줄수 있을가?  

순간, 나의 뇌리속에는 불현듯 당시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길룡형님이 떠올랐다.  

길룡형님을 놓고말하면 지난 세기 50년대초 룡정고중을 졸업하자 지원군에 탄원했었다. 1951년말 길룡형님은 지원군 모부의 비서 겸 통영으로 선발되여 조선으로 나가던중안동(지금의 단동)까지 갔다가 갑자기 중국에 있는 유일한 조선문신문사인 연변일보사에서 길룡형님같은 인재를 더욱 수요한다기에 조직의 수요에 의해 다시 귀로에 올라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근무하게 됐던것이다.  

길룡형님은 그때만 해도 우리 형제중 공부를 가장 많이 한사람으로서 현대사물을 가장 잘 접수할수 있는 지식인이였다. 하여 나는 우선 길룡형님한테 편지로 알려 내가 한족(기실은 조선족이였음에도)인 왕순자와 사귀는것에 대해 부모님께 해석하게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생각되자 나는 지체없이 필을 들어 길룡형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형님: 안녕하십니까? 막내동생 길성입니다. 

룡정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별고없이 무사하겠지요? 그리고 형님네 가정과 기타 형제들 가정도 별일 없을줄로 믿습니다. 

저는 현재 건강한 몸으로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정서상에서도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고향에 비해 이곳의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매우 무덥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금일 제가 펜을 든것은 다름이 아니라 최근들어 저의 생활에 변화가 생겨서입니다. 변화란 별것이 아니라 저한테녀자친구 한명이 생겨서입니다. 녀자친구가 생겼다는건 아주 정상적인 얘기지만 그 녀자친구가 한족이라는것입니다. 그러니 현대문명을 가장 잘 접수하는 형님께서 부모님을 잘 설복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녀자친구 또한 진짜 한족은 아니랍니다. 원래 조선에서 태여났는데 전쟁때 폭격에 조선인부모님을 잃은 고아였으며 당시 한 지원군장군이 그녀를 데려다 키우다가 귀국시 그를 중국으로 입양했던거랍니다. 그 녀자친구의 이름은 원래 김순자였는데 지금은 왕순자로 고친것뿐입니다. 그러니 그 녀자친구의 진짜 혈통은 우리와 같은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형님, 부모님께서 제발 오해하지 말도록 부모님을 잘 설복해 주길만을 부탁하는바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오해하지 않고 허락만 한다면 오는 겨울방학기간에 그 녀자친구와 함께 고향나들이를 할가 하기도 합니다. 그때가면 부모님 그리고 형님을 포함한 형제들도 그 녀자친구에 대해 보다 료해할것이고 또한 맘에 들어도 하실겁니다. 

그럼 오늘 간단히 이만큼 적어보내면서 아무튼 고향에 계시는 늙으신 부모님과 여러 형제들의 건강할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무석에서 동생 길성 올림 
1961년 8월 ×일 
 
내가 편지를 부친 뒤 약 20일이 지나 과연 둘째형님한테서 답장이 왔다. 형님은 편지에서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일은 일절 시름을 놓을수 있다고 말씀하셨을뿐만 아니라 아주 기뻐들 하고 있으며 또한 몹시 궁금해하시면서 녀자친구의 사진을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근심하고 우려했던 일들은 모두 순조롭게 잘 풀린 셈이였다. 우선 왕순자의 부모님께서 나를 못마땅해할가봐 우려했던것이 상상외로 그분들은 아주 대공무사한 분들이였고 순자가 한족집에서 자란 녀자애라고 꺼릴가봐 우려했었는데 생각밖으로 나의 부모 역시 나를 믿어주어 량가어른들한테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나는 인차 순자를 찾아가 집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고는 부모님한테 부쳐줄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이에 순자 역시 기뻐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느 일요일을 택하여 사진 여러장을 찍었다. 시내의 사진관에서 찍기도 하고 우리가 늘 찾아가군 하던 학교뒤 공원의 아름드리 홰나무밑에서도 찍었다. 그러고는 이 아름드리 홰나무가 우리의 사랑을 견증하는 나무로 돼달라고 몇번이고 기원했다. (연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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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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