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훈이 


금방 태여났던 아기가 열살이 되도록 긴 세월을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은 귀국해서 반년도 안돼 몽땅 날려보내고 나는 출국전과 다름없는 빈털털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남은게 없는것은 아니다.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보물이다.돈은 돌고돌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이건 평생을 쓰면 쓸수록 닳을줄 모르고 늘어만 난다.그래서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써도 다 못쓸 그런 보물을 가지고 왔음을 나는 세상 사람들께 자랑하고 싶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십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만약에 손이 발이되게 돈만을 벌었다면 돈이 다 없어진 지금 참으로 구차한 여생을 힘들게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물이 있어서 나는 돈잃은 허무함이 어떤 느낌인지 굳이 고통스레 확인하고 음미할 필요도 없이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내 삶을 푸짐하게 가꿔 나갈 수가 있다.


그토록 대단한 보물이 무엇인지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될수도 있으리라.


그렇다! 거의 십년 세월을 대한민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것들은 이미 내 머리속에,내마음속 깊이에, 내몸의 작은 세포들의 구석구석에까지 피로 살로 다 스며들었으므로  강도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도 빼앗아 낼수가 없고 도둑이 칼을 들고 내 몸을 찢는대도 절대로 가져갈 수가 없는 나에게만 속한 보물이다..


한국가기 전에 나는 여러가지로 너무너무 부족한 여자였다. 직장인으로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남보다 못지 않게 입히고 먹이고 공부까지 시키려니까 그렇게 된 모양인듯 싶다. 하루 일상,아니 한국에 오기전까지는 직장에서 집,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남새시장,집부근에 있는 슈퍼, 저축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다행히도 남편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사발이나 밥공기 같은것도 제때에 알아서 챙겨주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라 해야겠다.한심한 길치었던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 혹시 놀러간다 해도 유치원 어린이처럼 남편의 엉뎅이만 곱게 따라서 갔다가 되돌아 오면 그만이었다. 그이를 따라 다녀오는 것도 사실은 나한테 너무 버거운 일이였다 집에만 박혀있던 멍청이가 길에 나서면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한다고 내가 남편의 궁둥이 따라 다니기도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붑적이는 곳에서 한참을 걷다보면 남편이 어데론가 사라져버려 어미 잃은 아이마냥 그이를 찾아 헤맨적도 많았다. 그래서 그이가 수십년을 나하고 같이 살면서 제일 많이 했던 소리가 «당신 왜 그리 어리버리 해!»


«당신은 그냥 집에서 된장국에 밥이나 말아먹구 가만 있으면 돼»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나다. 글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적,등,록 신호등마저 잘 몰라 그냥 네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다가 신호등과 함께  움직이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길건너갈 때 따라 건느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돈을 좀 벌겠다고 남들이 다 가는 한국에도 갔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남편이 이국타향에서 급작스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거주인구 천만이 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빌딩 숲 속에서 실북나들듯 끝없이 오가는 차들의 흐름속에서 무엇이든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저절로 눈물난다. 남편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무서운 이 세상에 홀로서기를 배워야 했다.


남편 잃은 멍청한 남의 여편네를 불쌍타고 데리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한국에는 있을수가 없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는대로 친척들은 뿔뿔히 흩어져 일하러 간다.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첫째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형은 날더러 자기가 살고 있는 월셋방에 와서 잠시 지내면서 일자리를 찾아봐라고 했다.여태껏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눈물 겹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시형과 맏동서가 시조카와 맏동서의 남동생에 두 여동생까지 데리고 여섯식구가 비좁게 살고 있는 십평도 될까말까한 작은 월세방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8번 출구로 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좁은 삼각형 형태의 작은방에 밤이면 남자 여자 상관이없이 박스안에 물건을 챙겨넣듯이 꽉 끼여서 자야 했으므로 시형께서는 나한테 잠자리를 내주고 여인숙 아니면 친구 집에서 잠자리를 빌려 쉬군 했다. 내가 빨리 일자리를 찾고 떠나줘야 시형의 이같은 떠돌이 생활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슬픔에 빠져 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당장 배워서 극복해야 할 급박한 문제가 길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해뜨기전에 식당일 하러 다니시는 맏동서를 따라서 지하철 입구까지 갔었다.그렇게 나는 신당동에서 내 생의 첫 길 익히기를 시작했다.미련한 내 방식으로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을 따라서 남편이 두고간 교통카드로 지하철 역에 들어가고 전철을 타기까지는 무사했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전철에 앉아서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돌고 또 돌다가 (2호선은 그냥 돌기만하는 선이여서 돌다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진다)맥이 진할 때 쯤에 나는 신당역에서 다시 내린것이다. 그런데 입구를 찾아 나간다는게 어찌되어 자꾸만 안에서 돌고 돌아서는 또다시 전철 타는 곳으로 오군 한다 그게 무인지경 삼림속도 아니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두시간가량 헤매고 맥도 진하고 설음도 북받쳐서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더니 머리도 냉정해 졌고 정신도 어느정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지하철 역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순간 내 눈앞에 환한 색상의 방향 표시판이 나타났다. 아 바로 그거였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미련하게 맹목적으로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였구나. 그제야 이전에 남편이 서울의 지하철 역이 방향 표시가 너무 잘돼 나같은 길치들도 쉽게 전철을 이용할 수 있다며 나한테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내가 남들의 뒤통수나 바라보고 따라다녔으니 이렇게 한심한 일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날부터 나는 전철을 타고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그냥 환승역이 나오면 무작정 환승하고 종점까지 가보고 다시 되돌아오군 했다.며칠도 안돼 나는 한국에 십년 거의 일찍 온  맏동서보다도 지하철에서만은 더 쉽게 역을 찾고 방향을 가리게 되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버스노선도 익히고… 수십년간 내 발목을 잡았던 길치병은 이렇게 쉽게 극복되었다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냥 지하철노선도 한장에 교통카드만 챙기면 그만이였다.주소만 명확하면 하늘 끝까지라도 찾아갈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개로 대광 직업소개소를 통해 충남 아산시의 한 일식회집에 취직했다.그때는 돈보다도 굶지 않고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는게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조건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가 일했던 몇달간은 내가 한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아침 아홉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밤 열한시 열두시에야 끝이나는 회집 일은 지금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팠다.먹을알도 없이 그냥 설핏한 무우갱에다 얇게 저민 생선회 한꺼풀을 보기좋게 펴 발라서는 손님상에 내 보내는 회집의 그릇들은 죄다 철이 아니면 나무로 만든거라 매우 무거웠다. 특히 장사가 너무 잘 돼 하루동안 앉을 사이없이 그릇을 씼고 채소 다듬고 매운탕 끓이고 꽁치 굽고 여러가지 밑반찬들까지 챙겨야 한다. 그렇게 열다섯시간이상 일하고 나면 참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그 횟집에는 사장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여섯이나 된다.


원래 그 횟집은 지금 삼십대중반이 된 아들 내외가 십대시절에 일본 가서 번 돈으로 차린 가게인데 육십대 초반의 부모가 늘 가게 나와 걱정하고 있었고 시집간 백수 딸 내외까지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애기를 달고 와서 함께 지내고 있기때문이다.


쓰다보니까 그 횟집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어진것 같다. 한마디로 말해 그 횟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받은 육체적 고통.정신적 스트레스는 그 어떤 말로 형언할 수 없지만 뭔가 남기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고생하면서 일하다가 남편처럼 갑자기 죽을 수도 있으니 아이들에게라도 엄마가 어떻게 억울함을 당하고 고생을 했는지 꼭 알려주기 위해 매일 일기 쓰기를 견지해 왔지만 이미 쓴 일기책이 여러책이 되다보니 그걸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컴이다. 컴은 집에 있을 때 애들한테서 좀 배운적은 있는데 그냥 키보드의 문자 위치를 조금 알고 있는 정도였었다.


온하루 일하고 나면 온몸의 뼈만 아픈게 아니였다, 살마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났다.그냥 서있으면 통증이 덜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말이나 소처럼 서서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누워도 앉아도 엎드려도 그냥 아파서 죽을 것만 같을 때 PC방을 찾아 갔다.한시간에 요금 천원이 들었는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피곤하면 그냥 나와 거리를 돌면서 산책하기도 했다. 컴퓨터는 그렇게 하루 한시간좌우 한 것 같은데 한달쯤 되니 애들과 메일편지 주고받는 정도까지 됐다. 더욱 기쁜것은 메일 임시보관함에 일기도 써서 저장할 수가 있어서 힘들게 펜이나 노트를 챙겨 갖고 함께 자는 여자 눈치를 살피면서 일기 쓸 일도 없어진 것이다.


한국가서 발견한 신대륙이 또 하나 있다.그것은 어디가서나 접할 수 있는 공짜 신문이다. 중국에서 신문 한부를 주문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한국에선 신문을 공짜로 얼마든지 얻어 볼 수 있다.물론 공짜 신문은 대부분 광고물을 싣고 있지만 간혹 짤막한 수필도 있어 힘든 일 하면서 여가라곤 별로 없는 내가 읽기에는 충분했다.


힘들었던 나날에 나는 그렇게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서 배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즐거우니까 차차 아픔도 무감각해지고 매일 힘든 시간을 견뎌내면 찾아오는 나만의 소중한 즐거움을 기다리느라고 희망도 생긴 것이었다. 중국말 속담에 «고생중의 고생을 겪고나면 살람위의 사람 되리라 (吃得苦中苦,方为人上人)»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고생하는 내내 난 늘 그 속담으로 자신을 편달하고 위안하면서 고생을 낙으로 받아들였다.


힘든 그 해 여름은 거기서 보내고 가을이 돌아오는 때에 나는 경북의 한 관광구에 위치한 모텔 청소 아줌마로 갔었다.모텔일을 하게 되니까 아 나는 참으로 살 것만 같았다. 일하다가 적어도 힘들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을수도 있고 텔레비죤도 하루 스물네시간 맘대로 볼 수 있다. 또 불체자 단속기간에도 안전한 곳이 모텔이였다.


그런데 그 모텔은 약수터가 있는 깊은 산속에 위치해 PC방을 가려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한 30분간 가는데 요금은 2000원이 든다.그래서 어느 하루 사장님께 인터넷도 없는 이 산골에서 오래 일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며칠후 전화국에 가 인터넷 설치 수속을 해 내 지하실 월셋방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어디도 가지 않고 내 방에서 밤새껏 컴을 두드리며 즐길 수가 있었다. 애들과 인터넷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고…..매일마다 하는 타자 연습은 또 나를 거기에 미친듯이 빠지게 만들었다. 타자가 끝나면 창에 뜨는 점수가 더구나 그러했다. 내 열 손가락이 자판위에서 춤추듯이 타닥 탁탁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날래게 움직이고 모니터에 가쯘한 글자들이 찍혀 나올 때면 무한한 기쁨에 빠지군 했다.타자 속도가 일분에 20~30타밖에 안되던 내가 어느날부턴가 백,이백,삼백으로 막 올라가는데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스스로가 대단한 것을 배운 느낌도 들었다.


또한 나는 매달 월급을 타면 시내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그냥 내 수준에 맞는 내용으로 읽기 쉬운 소설이나 수필같은 그런 책들이다.


이밖에 텔레비죤을 보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프로들이 있다.이를테면 KBS1채널에서 월요일 저녁7시30분이면 방송되는 “우리말겨루기”라든가 “아침마당목요특강”, 월~금오전10시면 방송되는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또 일요일 저녁 7시 10분이면 방송되는 “도전골든벨”, 그 외에도 “가족노래자랑” “스타골든벨”에 “일대백”에 “퀴즈영웅” 등등…. 어쨌든 배울 것은 너무너무 많았고 나는 어떤것이든 지식성이 강한 프로라면 다 좋아했고 보면서 열심히 메모까지 해두었다. 물론 오십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자가 애들처럼 머리속에 다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나한테 필요한 어느 순간에 문뜩문뜩 저도 몰래 튀어나와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렇게 나는 중국에 있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한국가서 하나씩 익혔다. 특히는 우리 글속의 아주 세절적인 것들, 경어와 반말의 차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존대와 하대, 또 한국인들의 깍듯한 예절문화 등등… 이제 나는 출국전의 그 멍청이가 아니다. 남편한테서 어리버리하다는 말만 들어왔던 한심했던 내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돈과 재물은 쓰면 없어지고 또 도둑맞힐 수도 강도에게 뺏길 수도 있는 것이지만 쓰면 쓸수록 늘어나서 더 많아지고 영원히 뺏기고 도둑맞힐 염려도 없는것은 글과 지혜라고 했던가. 내가 한국에서 배워서 가져온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나의 지금과 앞으로의 생활을 계속해서 다듬고 보충해서 푸짐하고 넉넉하게 만들어주고 있는한 나는 영원한 부자이고 그래서 행복한 여자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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