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 김철균


여기는 대서양바다의 명주로 불리우는 스페인땅 ㅡ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 지금 이 시각, 밤하늘에 휘여청 걸려있는 저 달은 젖빛안개속에 잠겨있는 이 항구도시를 밝게 비워주고 있다. 이 시각 저 밝은 달은 머나먼 내 고향의 산천도 비춰주고 있겠지? 아니 아닐거야 지금쯤 고향은 한창 바야흐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맞고 있을거야. 세계의 동방, 제일 먼저 아침해를 맞는다는 내 고향, 오, 고향이 그립구나.


나는 지금 뎃기란간에 기대선채 그 옛날 어느 한 실향민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불렀다는 그 노래, “고향하늘”을 조용히 부르면서 그 구절마다를 음미해본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그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

지도에서는 점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내고향, 그 곳은 머나먼 차이나 연변의 훈춘이라는 곳이다.


너무나도 철없던 그 시절, 나의 고향에는 때아닌 문화혁명이란 폭풍이 불어와 나의 부모의 목숨을 앗아갔다. “외국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매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가 “내가 어쩌면 이렇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며 넋두리하시다가 숨을 거두던 모습, 매를 못이겨 서슬푸른 훈춘강물에 몸을 날린 어머니의 처철한 그 모습, 이한 모든 것들은 어린 나의 동심에도 문학이라는 불씨를 심어주었다.


나는 이악스레 달라붙었다. 나는 쉑스피어, 발자크, 푸쉬킨, 루쉰(魯迅)을 알게 되었고 그네들과 함께 울고 웃고 하였다.


행복도 잠시나마 다가왔었다. 나는 한 이쁘장한 아가씨와 사귀다가 결혼을 했고 미구하여 건실한 아들애까지 보게 되었다. 또한 관계부문에서는 나의 재능을 봐주어 모 라지디방송의 임시 편집원자리까지 알선해주었다. 나는 무등 기뻤다. 비록 국가봉급을 타지 못하고 순 원고료로 살아야만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노라면 꼭 언젠가는 하느님을 감동시켜 편제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밝은 앞날도 도래하리라 굳게 믿는터였다. 아내 역시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나의 뒤바라지를 잘해주었다. 헌데 그런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대졸생 한명이 편집부로 배치받아오자 나는 부득불 그 자리를 양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갖은 노력과 희생을 다해가면서 쌓았던 탑이 순간새에 무너지자 나의 실망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한편 그토록 하늘처럼 받들어 믿어마지 않던 내가 생활의 평형을 잃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자 아내의 마음도 뒤따라 평형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재간없는 골방샌님, 돈 못버는 남자, 아내와 가정도 이끌지 못하는 바보, 아니 당신같은 남정을 믿고 섬기는 내가 더욱 바보야…”


이렇게 매일 바가지를 긁어대던 아내의 짜증섞인 잔소리도 종국에는 멎었다. 아내는 갔다. 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나와 어린 것을 버리고 외간사내한테 가서 붙었다.


그날 저녁, 그날도 오늘 이 밤처럼 달은 밝았다. 바로 그 밝은 달빛아래에서 웬 사내한테 거의 매달리다싶이 붙어가는 아내를 보는 순간, 나의 두눈에서는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너 이년, 게 섰거라. 너 어쩜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


이지를 잃고 완전히 미쳐버린 나는 아내한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 보응으로 그 이튿날 저녁, 불의의 습격을 들이댄 아내의 친척들한테 나는 또한 죽도록 얻어터졌다.


직업과 아내마저 빼앗긴 버림받은 사나이- 그런 상황에 그렇게도 건실하던 아들애는 어쩔라고 그토록 앓던지. 어린 것이 있는 것마저 귀찮았다. 하기에 애타고 분통할 때마다 나는 야성이 발작하여 자주 죄없는 어린것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다가도 이성을 되찾게 되면 그 어린 것이 하도나 불쌍하여 그것을 붙안고 통곡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오기도 생겼다. 그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어린 것을 잘 키우고 싶었고 나도 살고 싶었다. 아니 이를 깨물고라도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내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탄광으로 갔다. 이전에는 사람이 무슨 할 것이 없어 하늘 두층을 쓰고 사는 탄광일을 하느냐고 하찮게 보아오던 탄광ㅡ 그런 곳으로 이번에는 내가 찾아갔다. 일을 좀 시켜달라고, 살길도 마련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체가 약골인 나를 보더니 그 어느 탄부도 나와 함게 같은 막장에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 다행이도 탄광주인이 나를 봐주어 석탄운송차가 오면 석탄을 실어주는 일을 나한테 맡겼다. 허나 며칠 안가서 운전사들이 자주 주인한테 불평을 토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하긴 남들이 한시간 정도면 다 싣는 석탄을 나의 힘으로서는 두시간도 모자랐으니 말이다. 남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냥 주인을 욕보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일도 며칠 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온갖 버림을 받으면서도 살겠다고 발버둥질을 친 내가 한심할 정도로 가증스러웠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두가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세상이 넓어도 이 내몸 하나를 건사할 곳이 없던 그 세월, 만신창이 된 나를 용납해준 이는 그래도 연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철준형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철준형 역시 애매하게 오쟁이를 지고 이혼한 몸이였다. 그 뒤로 두 홀애비가 같지 않은 두 어린 것을 거느리고 사는 특이한 가정이 산생하였다. 철준형은 부엌에서 손풍구를 돌리고 내가 부뚜막에 쭈크리고 앉아 쌀을 이는 그 장면, 우리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마주보며 허구프게 웃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헌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난이었다. 철준형 혼자의 봉급으로 세방값도 물고 사람 넷의 호구도 해야 했으니 철준형이 자주 여기저기로부터 돈을 꿔 들이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리 철면피한 인간인들 이런 형국에 어찌 계속 눌러앉아 있으랴.


“형, 난 가오. 예서 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하오. 나 때문에 형까지 망하게는 할 수가 없소. 부디 안녕.”


이런 메모를 남긴 나는 어린 것을 이끌고 그 집을 나왔다. 버스터미널로 온 뒤 버스표를 사고 나자 나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1위안 45푼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훈춘행버스에 오르려고 줄을 서던 찰나, 갑자기 철준형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나의 뺨을 두번이나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이 못난 놈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렴 입에 풀칠이야 하겠는냐. 가자, 어서 말들어!”

그날 밤, 나와 철준형은 둘 다 배갈 한병씩 굽냈다. 그러고는 울었다. 철준형은 나를 때린 것이 가슴 아프다고 울었고 나 또한 그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다.

그러던 내가 철준형을 포함한 몇몇 형씨들의 도움으로 해외노무송출일군이 되어 고향을 떠난 것은 1991년 3월 18일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는 4-5미터씩 되는 선인장을 쉽게 볼 수 있다


달빛밝은 라스팔마스의 이 밤, 이 세상이 작다하게 주름잡고 다니는 대형선박의 마도로스가 된 오늘 나는 세계에서 유명한 네델란드의 로테르담항구에도 입항해보았고 지난 세기 80연대 초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가렬한 해상전을 벌이던 남미주의 포클랜드군도에도 가보았으며 “연탄동네”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의 원시부락에도 다녀보았다. 특히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다는 한국의 울산에도 입항해서는 옛 조상의 산천에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저 세상에 간 고인한테 얼마만한 위안이라도 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영영 귀국하지 않고 이곳 라스팔마스에 아주 정착해버릴 생각도 자주 해보았다. 이는 실현될 수 없는 호언장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얼마전 입항시에도 라스팔마스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은 나한테 이렇게 귀띔해줬다.


“김군, 김군같은 문화인은 사회에 대한 적응이 빠르니까 고향에 대한 미련같은 건 아예 싹 버리고 이 곳에 발을 붙이소. 이곳에서는 능력과 재간이 있는대로 써주니까 중국처럼 국가공무원이요. 농민이요 하고 영원한 탈을 씌우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이소.”


또한 이횡권 사장님의 부인이며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전도사인 유혁선 여사는 “아저씨, 하느님을 믿으세요.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이들한테 복음을 준대요. 지는 죄는 용서해주고 불쌍한 사람은 구해준대요. 믿음을 가지세요, 아저씨”라고 하며 나까지 자기와 같은 열광적인 기독교신자로 키우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호텔강촌”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는 콜롬비아 아가씨 수산나의 화끈한 사랑도 받았다. 사랑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다는데 이혼까지 한 내가 수산나의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그녀를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빠, 난 무서워. 오빠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기 마련이 아니야? 너무 정들가봐 무섭고 와이프가 있는 오빠를 붙잡고 있기도 무서워…”


만날적마다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떨구는 수산나, 여자의 눈물앞에선 모든것이 약해지기 마련이랄가. 나 역시 그 낯선땅에 정착해보려고 여러번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더욱 큰 이유가 있었다. 떠나올 때 8살밖에 되지 않은 나의 아들애, 항상 4촌형이 입던 헐렁한 옷을 물려입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 아빠를 쳐다보며 뭔가 바라는듯하던 아들애, 그 애의 모습이 하냥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면서 서양의 아무리 황홀한 세계도 나의 몸을 오랫동안 끄당지는 못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이횡권 사장님의 진정과, 울며 매달리는 수산나를 떼여놓고 돌아설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나는 기어코 돌아가야만 한다.


한편 고향도 그제날의 고향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신동아” 등 간행물에 소개되는 나의 고향은 지금 한창 두만강하류의 개발로 북적인다고 한다. 그러면 고향도 가난의 묵은 때를 벗겨버리고 새로운 동북아의  “금삼각지대”로 거듭날 날도 멀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돌아가야 한다. 내 아들과 함께라면 두번 다시 가난이 들이닥치고 두번 다시 버림받아도 달갑겠다.


푸른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다정한 동무들과 시내가에서

버들피리 불며불며 놀았습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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