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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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60여세가 되는 중장년 분들은 거의 모두가 알다싶이 지난 세기 60연대 초반 우리 중국과 구 소련은 그 혈맹관계가 깨여짐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긴장국세가 조성되었다. 당시 구 소련은 중국에 있는 모든 전문가들을 철거시킴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말기 붉은 군대의 동북진출과 중국의 “6.25”참전 시기에 진 구 소련의 빚을 짧은 기간내에 갚으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구 소련전문가들의 철수로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데다 거기에 3년간의 자연재해까지 들이닥쳤다.

 

구 소련의 압력앞에서 모든 중국인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난관을 이겨내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콩깍지를 매돌에 갈아먹고 풀뿌리와 산에 있는 피나무 껍질을 발라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도처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경제난은 연변도 마찬가지었으며 식구가 많고 남편 혼자의 노임에 의거해 살아가는 순자네 가정은 더욱 생활압력이 컸다. 어느 날 남편 김용환이 영양실조로 강연도중 갑자기 교단에서 쓰러졌고 순자 또한 연이은 기아와 지나친 생활압력으로 몇번이고 몸져눕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내가 쓰러지면 저 것(자식들)들은 누가 키우나”하며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다.

 

그 때 순자네가 유일하게 의거할 수 있는 식품내원은 봄에는 각종 들나물과 산나물, 여름에는 버섯 등이었고 가을에는 콩깍지, 배추잎사귀 등이었다. 그것을 장만해서는 허기진 배를 달래군 하였다. 특히 늦가을 소영진에 있는 배추걷이가 끝난 밭으로 배추잎사귀를 주으러 갈 때에는 흔히 큰 딸 영순이와 함께 다녔는데 주어온 배추잎사귀와 배추뿌리 등에 옥수수가루라도 조금 넣어 푸대죽같은 것을 끓여놓으면 그것이 소화도 잘되고 다른 음식탈도 생기지 않아 당시에는 “상등식품”에 속했다.

 

순자는 그렇게 힘들게 주어온 배추잎과 배추뿌리 등을 운신하기 힘들어하는 노인들 가정과 잔식구들이 많은 가정에 보내주군 했다. 그러자 그러는 어머니에 대해 큰 딸인 영순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우리 집 식구들도 지금 굶고 있어요. 저도 지금 배고프고 힘들어죽겠어요. 전 힘들지만 어머니가 하도 불쌍하여 따라 다닌거예요.”

 

“그래? 너한텐 참 안됐구나. 네가 학교에 다니면서 배추잎 주으러 다니자니 많이 고달프겠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우린 그래도 굶어죽을 지경은 아니란다. 저 앞집 ×× 노인네 집을 보아라. 그 집은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진짜 굶어죽을 수도 있단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이 동네 적십자회 주임이란다. 이런 신분으로 내가 어찌 굶어서 쓰러져가는 노인들을 보고도 못본체 할 수 있겠니?”

 

이 말에 영순이는 말없기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나도 이치에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연대, 거리의 행인들도 생기가 없고 밤을 자고 나면 “어느 동네의 아무개가 굶어죽었소”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려오군 하던 시대였다. 기아가 온역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을 기습하는 시대였고 도처에서 도둑이 살판치군 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렇듯 살벌한 시대에 웬간한 덕성이 없이는 이웃들을 도와줄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영순이도 어느 정도 알리는듯한 모양이었다. 하긴 교육자인 아버지와 역시 높은 교육자질을 소유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는 영순이네 형제들은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먹을 것 따위를 놓고 다툰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기의 배가 고플수록 더 배가 고프겠다고 생각되는 형제를 돌보군 하였다. 그리고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바로 순자네 집이기도 했다.

 

한번은 순자가 밭에서 한근 가량의 콩알을 주어왔다. 순자는 그것을 솥에 볶아서는 술잔에 담아 학교에 가는 영남이와 영순이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초기가 들면 한두알이라도 먹으면서 그것으로 초기를 말리라고 말이었다.

헌데 애들이 학교로 간 뒤 설겆이를 마치고 볼라니 영남이와 영순이는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던 볶은 콩을 도로 꺼내여 사발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저희들보다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 내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일찍 어른답게 처사하는 자식들, 금방 먹고도 돌아 앉으면 배고플 정도로 한창 먹을 나이었던 영남이와 영순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도리어 눈물이 나왔다.

 

한편 남편 용환이도 자신이 고아출신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을 적극 도와주고 베풀어주는 아내한테서 계발을 받아서인지 남을 돕는 일에는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위생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푸대죽이나마 한끼 배불리 먹게 했는가 하면 집에서 어쩌다 쑥떡같은 것이라도 하면 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외우군 했다. 그러면 눈치가 빠른 순자는 말없이 챙겨두었다가 남편이 출근할 때면 한보자기씩 쥐어보내군 했다.

 

이렇게 어쩌다 만드는 쑥떡같은 것도 기숙사학생들한테와 이웃집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보내고 나면 순자는 힘들게 만들고도 때를 거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3

 

3년간 지속되던 “고난의 나날”도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배고픔에 등이 휘던 사람들도 차츰 허리를 펴게 됐다.

 

3년간의 “대식품(당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을 식품으로 대용한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음)시대”에 굶어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가통계국의 해당 집계에 따르면 그 3년간 중국에서는 무려 2000여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독일한테 살해당한 구 소련의 희생자수와 맞먹는 수자였다. 대가는 침통했다. 당시 6억에 달하는 중국인구 중 2000여만명이란 아사자(饿死者)가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많은 수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웬간한 한개 나라의 인구와 맞먹는 수자였다.

 

하지만 중국인민은 악전고투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통미풍을 발양하면서 묵묵히 이 고비를 넘겼다. 경제는 점차 회복추세를 보이었고 인민들의 생활 또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한편 순자는 이렇듯 3년간의 심한 시련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다 민족국가인 중국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인민들 전체가 더욱 똘똘 뭉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중앙과 모주석 대단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다. 중국인민들이 그렇듯 심한 기아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폭동 한번 일으키지 않으면서 참고 견딜 수 있은데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제도가 극소수의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제도가 아닌 광범한 대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있는 우월한 제도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한 신문에서 “주은래 총리가 세수수건을 2년간 사용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렇듯 나라의 위대한 총리도 3년간의 고난의 세월에는 백성들과 똑같은 간고소박한 생활을 하였다는 대목을 읽고는 감동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었다. 동시에 사람은 없을수록 남과 나눠가질줄 알고 내가 한끼를 덜 먹거나 하루 적게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남겨 남을 돕는다면 타인의 생명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3년간의 “대식품시대”를 통해 또한번 체험하게 되었으며 삶의 진가란 간고할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산할 수 있다는 철리도 터득하게 되었다.

……

우리 나라가 안정적 궤도에 들어서서 융성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1963년 3월 5일, “인민일보”는 1면 톱면에 모택동이 쓴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를 실었다. 그러자 중국인민해방군 심양군구에서 나타난 뢰봉의 사적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센세이숀을 일으키면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일대 열조가 일어났다.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의 “뢰봉따라배우기활동”에서는 항상 순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순자는 거의 적십자회의 주임인데다 보도소조 소조장으로 경상적으로 신문을 읽고 방송을 들었기에 장악한 지식과 이론이 풍부하였으며 번마다 “뢰봉 따라배우기 적극분자 대오”속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순자는 실제적으로 “뢰봉 따라배우기 활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남편이 본직사업에서 성과를 올리는 일군으로 입지를 굳히도록 정성껏 섬기었는가 하면 자식들한테는 “항상 학습성적이 우수하고 모든 활동에 적극적인 학생과 비교하고 생활상에서는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양했기에 자식들 모두가 학교에 가서는 뢰봉 따라배우기 우수학생으로 되기도 했다. 또한 동네에서는 어느 집에 석탄이 떨어지면 석탄을 지원하고 어느 집 밥상의 반찬이 변변치 않으면 김치쪼각이라도 가져다주군 하면서 동네의 화목을 도모했다. 특히 조선족김치를 좋아하는 한족들 가정에 가서 손수 시범을 보이면서 김치를 담그는 요령을 배워주어 한족들은 한결같이 “순자아주머니야말로 우리 거민구역의 조선족 뢰봉”이라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본보기의 힘은 무궁무진했다.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 중에서 순자는 항상 자기의 언행을 뢰봉과 비교해보면서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요구조건을 높이었다.

그 중 1965년 5월 1일에 순자가 한 행동은 그야말로 모든이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순자인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운 초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날 연길시에서는 “5.1절”을 맞으면서 전 시 중학생마라톤경기를 진행했다. 그 때 딸 영순이도 이 경기에 참가했다.

 

순자의 딸 영순이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헌데 그들이 연길공원 남쪽의 우장거리까지 왔을 무렵, 영순의 친구 중 한명이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입에 거품을 물며 쇼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달리다 말고 쓰러진 그 애의 주위에 몰려들어 손톱으로 코밑 민감부위를 누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하면서 구급했지만 그 애는 깨여날념을 안했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그 애의 어머니가 달려왔지만 어쩔바를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애의 어머니는 키가 작은지라 딸을 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순자가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순자는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그 애를 업을 잡도리를 하였다.

 

“자, 어서 이 애를 당장 내등에 업히워주세요.”

 

“아니?!…”

 

모두들 이아해하는 눈길로 순자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 애를 업은 순자는 다짜고짜로 연변병원을 향해 달렸다. 기실 그 애를 업기전 순자 역시 이렇게 덩치가 큰 애를 과연 업을 수 있을지 파악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업고 보니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달릴수록 더욱 속도가 빨라졌고 옆에서 바꾸어 업자고 해도 막무가내었다. 아니, 힘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이 학생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생각에서 죽기 내기로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공원의 우장거리에서 연변병원 근처에 있는 그 애의 집까지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날 웬일인지 지나가는 트럭조차 한대도 보이지 않아 순자는 그 꽤나 먼거리를 그 애를 업고 줄곧 달렸다.

 

그 애의 집에 도착하여 쇼크한 구들에 눕힌 순자의 온몸은 땀벌창이 되었다. 순자는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내가 정말…저애…를 업고 여기까지 …뛰어왔단…말이지?”

 

그야말로 자신으로도 자기의 힘에 대해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구급을 거쳐 그 학생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더니 일어나 앉으며 사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애들로부터 “영순의 어머니가 널 업고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알려주자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였다. 그애는 감동을 눈물로 대체했던 것이다.

 

……

 

한편 남의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발벗고 나서는 순자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거나 그 어떤 “출세욕”에서 나온 행위라고 의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순자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혹시 신문사나 방송국 등 매스컴 기자들이 인터뷰같은 것을 할라치면 순자는 그저 “힘들고 어렵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체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인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모든 것을 함축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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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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