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캡처.PNG중공의 9차 당대회 이후 중국 국내의 형세는 안정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은 결속지을 때가 되었다”고 표했고 9차대회 이후 중앙의 문화혁명소조를 취소하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당시 임표가 그루빠를 형성해갖고 공산당과 나라의 더욱 큰 권리를 갖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택동도 생각밖이었다.

 

당시 두가지 사건이 임표 그루빠의 정치적 야심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하나는 임표가 이른바 “임부주석의 1호 명령”을 발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주석 자리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1969년 10월 10일, 소주에 있던 임표는 북경에 있는 군위판사조 조장이며 총참모장인 황영생에게 즉시 “전쟁준비를 강화하여 적의 돌연적인 기습을 방지할데 관한 긴급지시”를 각 군구에 발부할 것과 “정예한 작전지휘진을 조직하여 즉시 전시지휘위치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군위판사조가 “임부주석의 명령(1호 명령)”의 명의로 그 날 저녁 각 군구에 전화로 전달되었고 각 군구는 즉시 긴급임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임표는 이미 하달한 명령을 “전화기록”의 형식으로 모택동한테 보고하였다.

 

모택동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전의 보고도 없이 임표가 제멋대로 이런 군사명령을 내려 각 대군구가 하루밤 사이에 임전상태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극히 엄중하고도 비상적인 사건이며 매우 위험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에 모택동은 임표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고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의 “1호 명령”은 일종 목적성이 있는 시탐성 행동으로 모택동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며 다가오는 한차례의 폭풍우를 예견했던 것이다.

 

1970년 3월 8일, 모택동은 당중앙에 제4기 전국인대를 개최할 것과 헌법수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면서 국가주석을 두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처음으로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에 대해 내놓은 의견이었으며 이 의견이 전달된 후 모두 일치하게 동의하였다. 그러자 소주에 있던 임표는 엽군한테 “임부주석은 국가주석을 두는데 찬성한다”는 의견을 황영승과 오법헌한테 전달하게 하였다.

 

그 뒤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를 놓고 임표는 늘 반상적인 태도를 보이었으며 완고하게 모택동과는 반대의견을 내놓군 하였다. 이는 뚜렷하게 당내 부동한 의견의 정상적인 쟁론범위를 벗어났는바 거기에는 필연코 남한테 공개하지 못할 목적이 있었다.

 

특히 엽군(임표의 부인)은 도처에서 임표의 진정한 면모를 보이며 여론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만약 국가주석을 두지 않는다면 임표는 어디에 부임시키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자리의 설치여하에 관한 쟁론은 9기 2중 전회에서도 계속 되었다. 8월 23일, 9기 2중 전회가 개막되었다. 이날 회의개시를 앞두고 임표는 갑자기 모택동과 기타 상무위원들한테 발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원래 개막식에서는 모택동이나 임표 모두 발언하지 않기로 되어있었다. 임표의 제안은 돌연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표는 서면으로 준비한 자료를 갖고 한시간도 더 넘게 발언하였는데 주요하게 헌법수개의 문제상에서 모택동의 영도지위에 대하여 논하였다. 동시에 사전에 있은 임표와 엽군의 포치에 따라 진백달과 오법헌이 국가주석 자리를 설치할데 관한 헌법수개조문을 만들어가지고 회의에서 크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모택동이 이미 예견하고 있던 것이었다. 회의에서 모택동은 임표일당의 반상적인 현상에 대해 즉시 제지시키면서 “국가주석 자리설치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가 국가주석이 되고 싶으면 그더로 되라고 하시오. 어쨌든 나는 국가주석자리가 탐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임표에게도 “권고하건대 당신도 국가주석에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일침을 놓았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에게 직격탄을 날리지 않고 진백달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임표가 반성하게 하도록 하기로 하였다. 이는 자신이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던만큼 임표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보호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71년 8월 15일,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남하하였다. 모택동은 중남, 화동 등 성시를 순회하면서 각지의 책임자들과 다각도로 담화하였다.

 

“이번에 노산회의에서 그들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돌연습격을 들이대고 계획 있고 조직이 있으며 강령까지 만들어놓고 행동하고 있다. 임부주석을 보호하긴 해야겠지만 그 역시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래도 임표가 반성하기를 기다렸다.

 

9월 5일과 6일, 북대하에 있던 임표와 엽군은 모택동의 남방순회담화의 내용을 탐지해 듣고는 드디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7일, 임표의 아들 임립과는 “연합함대”에 “1급전시령” 지령을 내렸고 8일 임표는 친필로 “임립과 동지는 즉시 주우치 동지가 전달하는 명령대로 실행하라”는 명령서에 싸인하였다.

 

그 뒤 하지만 그 음모가 탄로되자 임표는 남하하여 광주에 중앙을 따로 세우고 분열을 꾀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자 황망히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주하다가 몽고의 언더르한에 추락하여 분신쇄골이 되었다.

 

임표가 외국도주 도중 추락해 죽자 모택동은 그저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하늘은 비를 쏟으려 하고 여자는 출가하려 하니 어쩔 수 없구려.” 


(신화사 자료 발췌)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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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해보는 임표의 “9.13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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