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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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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