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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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결혼 뒤 이재덕은 여전히 6군 피복공장에서 근부했고 남편 우보합은 소년련의 1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금(富锦), 화남(桦南), 쌍압산(双鸭山), 의란(依兰)으로 진출했다. 1938년은 동북의 항일전쟁 사상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가장 간고한 한해이기도 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이재덕은 임산기에 이르렀으나 부대를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조직에서는 이태준(李泰俊) 부부를 파견하여 이재덕을 돌보게 했다. 그 때 그들은 깊은 밀림속의 한 작은 골짜기에서 은신할 곳을 찾아 숙영했고 이재덕은 그 곳에서 남자애를 출산, 이태준 부부가 새생명을 위해 성의껏 돌봤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먹을 것마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생사의 고비에서 울부짖는 이 작은 생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으며, 어린 것의 숨이 떨어지자 이들은 비통을 참으며 어린 것을 밀림속에 매장해야만 했다.

1939년 1월, 우보합과 이재닥은 동북항일연군 제6군 4사 32퇀의 37명 전사들과 함께 우쑤리강(乌苏里江)을 건너 소련의 임마 누엘을 거쳐 다시 하바롭스크 도착, 하바롭스크에서 이들 부부는 조상지 사령과 6군 군장 및 11군 군장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40년부터 이재덕은 사업의 수요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무선전 접수 및 발신 그리고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 뒤 1941년 7-8월에는 항일연군 제2로군 2지대 왕효명(王效明)이 인솔하는 소부대를 따라 중국내로 잠입, 보청(宝清), 부금(富锦)과 의란(依兰) 등 지에서 활동하면서 소부대의 무선전 접수/발신 임무를 맡아하였다.

1942년 겨울, 이재덕은 강신태(姜信泰) 정위를 따라 재자 소련으로 건너가 88국제여단 교통영의 전사로 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50여만명의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 중국의 동북과 조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 이와 더불어 88국제여단의 많은 항일연군 장병들은 분분히 소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 및 조선 해방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해의 9월 8일, 이재덕의 남편 우보합은 주보중 장군을 따라 비행기에 탑승해 장춘으로 향발했다. 소련군과 배합해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재덕은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다. 두 자녀가 있는 여성인데다 당시 이재덕은 세 번째로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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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65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한 이재덕 여사
  
이재덕은 1945년 12월이 돼서야 부분적으로 자녀들을 거느린 기타 여 전사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떠나기 앞서 이재덕은 김정숙(김일성 부인), 왕옥환(최용건 부인) 등 함께 동고동락을 해오던 10여명의 여전사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당시 88국제여단의 조선인 장병들 중 두갈래로 나뉘어 한갈래는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고 다른 한 갈래는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김정숙, 왕옥환 등 여전사들은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재덕이 귀국해 수분하를 거쳐 장춘에 도착하자 주보중 장군이 장춘역까지 마중나와 있었으며 동북민주연군의 대부분 부대는 이미 장춘을 떠나 길림부근의 차루허(岔路河)까지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정부는 국민당 정부와 이른바<중소우호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체결, 소련군이 전반 동북을 해방시킨 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국민당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동북민주연군은 잠시 장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북민주연군은 일단 소련홍군이 철거만 하면 신속하게 장춘, 하얼빈, 치치할 등 대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장춘의 전략적 위치는 아주 중요하기도 했다.

이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주보중은 우보합을 소련군에 파견, 소련군과 접촉하는 기간 그들이 <66666>이란 신호로 장춘에서의 철수 시간을 알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되자 우보합과 이재덕은 윤번으로 잠을 자면서 주야로 소련군의 무선전 통신을 감청, 드디어 1946년 4월 14일 낮 12시, 소련군 무선통신은 과연 <66666>을 발송했고 이재덕은 즉시 참모장한테 이를 보고했다.

이 날 오후 2시, 주보중이 장춘을 향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동북민주연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도심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 18일 새벽에 장춘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 대병력을 집중하여 수차 공격해오고 또한 중공중앙의 포치에 따라 중공 동북국에서는 임시 대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는 5월 28일 재차 장춘에서 철거했다.

그 뒤 동북국과 동북군구는 하얼빈으로 철수했고 이재덕은 길동군구를 따라 길림을 거쳐 연길에 도착, 이재덕은 길동군구 무선전 부문에 배치되어 장장 3년에 거친 중국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길동군구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재덕은 3명의 자녀를 거느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중임을 맡고 있는 남편의 내조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자신이 맡은 업무도 출중하게 완수하여 늘 강신태를 비롯한 길동군구 장령들의 표창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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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리재덕과 그의 자녀들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왼쪽부터큰 딸 우화, 이재덕, 김일성 주석, 장남 우영)

1948년 3월, 이재덕은 지방으로 전근, 선후로 길림성 부녀연합회 위원, 연길 조선족간부학교 조직과 과장, 화룡현위 위원 겸 부련회 주임 직을 맡았으며 1949년 1월에는 길림성 부녀대표단 성원으로 심양에 가 동북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이재덕은 제4야전군을 따라 남하, 호북성 이창(宜昌)까지 갔다가 이창에서 시부녀연합회 주비위원회(筹委会) 주임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남편 우보합은 이창시 전신국의 군대표로 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이재덕은 중앙인민정부 비서처 당지부 조직위원 및 보위위원으로 있다가 1953년에는 국가 정무원(政务院- 국무원 전신) 당대표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사업에 까근하고 업무완수량이 많고도 실수가 없어 늘 주은래 총리의 애대를 받아왔는바 동료들로부터 늘 총리의 개인도장과 정무원 옥새를 장악하고 있는 <장새대신(掌玺大臣-)>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5년 1월부터 이재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판공청에 전근되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60년, 조선 부수상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 최용건을 환영하는 국가연회를 베풀 때 주은래 총리는 이재덕이 연회에 배석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전사로부터 중국 국가의 당당한 중견일군으로 된 이재덕을 보는 순간, 최용건 부수상은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용건이 양성한 수많은 조선인 항일 여투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는 이재덕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또한 이재덕 모친의 입당소개인이었던 최용건은 이재덕과 그 가정에 특수한 정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1964년 이재덕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문화혁명기간 각종 누명을 쓰고 직무에서 쫓겨나 <5.7> 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1979년에 누명을 벗고 전국인대 당위 도서관 주임으로 복직하게 됐고 1982년 6월에는 전국인대 당위 비서국 부국장으로 부임되었다.

 

이재덕은 1982년 9월에 이직하여 은퇴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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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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