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자기의 탈선행위 즉 왕인미와의 사통관계에 대해 김염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진의의 말이다. 그리고 진의가 김염한테 이혼하자고 제의하자 김염의 대답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나의 마음속에는 임자밖에 없어. 내가 사고를 친 건 일시적으로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였어. 그리고 임자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의 곁을 떠날 수도 있어. 하지만 이혼만은 안 돼!”
김염의 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것이었으며 웬간한 여인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남자는 김염 말고는 천하에 있을 수가 없다고 진의는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의는 김염의 부탁대로 해주었다. 당시 진의가 생각한 것은 그래도 김염의 사회상의 형상이었고 또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한 것도 있었다. 결국 진의는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별거란 부부로서의 허울뿐이지 이혼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별거로 있던 상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등 경우에는 부부란 그것이 아주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의와의 별거 후 김염은 과음으로 위출혈이 생겨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다행히도 구급결과 생명은 건지었지만 신체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숨이 차 헐떡거리군 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그제 날 김염의 술친구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김염의 신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도 귀와 살쩜을 감빨며 친밀하던 정인들 역시 한명도 찾아와 문방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 김염은 우정과 애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능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별거한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가슴이 아파하며 다가온 건 선량하고도 정을 중히 여기는 진의였다. 이미 폐인이 된 김염의 앞에서 진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람하지도, 귀찮아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내의 역을 맡아하면서 김염의 수발을 들었다.
어찌 보면 진의의 개인 인생은 기구하면서도 첩첩애로였다. 1962년 남편 김염이 병석에 누운 지 2년 만에 아들인 김제(金捷)마저 정신적 충격에 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러자 진의의 어깨위에 있는 부담은 더욱 중해지기만 했다. 집에 있을 때면 두 환자를 돌봐야 했고 또한 수입내원이 끊어지면 안 되겠기에 시간만 있으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출연무대로 찾아나서군 했다.
1983년 김염은 병고 끝에 사망하였다. 당년 상해탄의 <영화황제>로 름름하던 모습은 찾을 곳 없고 몰골만 앙상히 남은 김염은 임종 전 진의한테 “아직도 날 미워하고 저주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나 진작 당신을 용서했어요. 기나긴 인생이라 혼인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정상이죠.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 보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진의는 김염이 사망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염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김염의 생전에 내가 그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더군요. 그래요. 김염한테는 여인이 많았어요. 또한 여인들의 호감을 살만한 매력을 가진 사내다운 남자였고 잘 생겼지요. 나 역시 그의 탈선행위를 알면서도 그를 돌봐준 건 그젯 날 그를 따르던 애모감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우리의 딸이 현재 한국에 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참 이쁘게 잘 생겼어요…”
김염이 사망한 후 진의는 모든 정력을 아들 김제한테 쏟아 부었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었으나 모성애 때문에 자신이 직접 아들의 잠자리를 봐주고 밥을 먹여주고, 화장실로 데려가 머리를 감겨주는 등 일들을 맡아하군 했다.
그렇게 고되고도 힘든 나날 속에서도 진의가 사회적으로 이룩한 업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제1 회 중국 TV 금응상(金鹰奖) 우수 여배우상 획득
제 11 회 상해국제영화제 종신 성과 상 획득
제 27 회 중국 영화 금계 상 종신 성과 상 획득
2009년 2월 중국 부녀연합회와 인민일보 등 11개 중국 매체가 수여하는 <중국 10대 여걸 칭호> 획득
…
어찌 보면 진의의 인생은 2개의 인생이 서로 교차되는, 극히 모순되는 인생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명암(明暗)으로 평가할 때 사회와 연예 권에서의 그녀 인생은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명랑과 기백의 인생이었고 가정에 들어가서의 그녀 인생은 사회 최하층 생활을 하는 간병인, 가정주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진의 여사는 아들이 눈 감기 전에 한 말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되 외우며 눈물을 짓는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이런 말을 못하겠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 김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서 울고 또 울고 한다.
휘황한 인생 그리고 고달프고도 기막힌 인생, 이는 영화배우인 진의의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자체가 기나긴 대하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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