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장군의 죽음
평양에서 후퇴한 후 무정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제7군단이 압록강 연안의 만포진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무정은 팔로군 시절 부하였던 부상 장교 1명을 데리고 군단 의무소를 찾았다. 무정은 군의관을 보자 일손이 바쁜 그에게 데리고 온 부상 장교부터 돌보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군의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무정에게 “부상자가 매우 많기에 지금은 안 된다. 그리고 군단장의 옛 부하도 예외가 없이 반드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내뱉었다. 사실 군의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조는 매우 오만했다. 규정을 지키더라도 겸손하게 말했으면 모를까? 처분받은 군단장이라고 군의관마저 무시한다고 느낀 무정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분이 상투밑까지 오른 무정은 권총을 꺼내들더니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군의관을 한방에 쏴죽이고 말았다. 아무리 군단장이라 해도 이는 엄중한 과오였다. 아니, 군단장의 신분으로 말하면 더욱 엄중한 규율 위반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뜩이나 무정을 못 마땅해 하는 김일성한테 그를 숙청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무정은 곧바로 군단 지휘권 해제에 이어 군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얼마 후 무정은 홍군 장정 때의 지병인 위궤양이 발작했다. 이러자 중국군을 지휘하던 팽덕회는 무정을 중국 동북의 최고로 꼽히는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하여 또 한번 무정한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정이 루마니아인이 장춘에 개원한 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 무정 역시 자기가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무정의 마지막 소원은 그의 고국 조선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1952년 10월 조선으로 다시 호송된 무정은 얼마 뒤 어느 한 평범한 군부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향년 47세였다.
무정이 운명하자 당시 조선 정부는 형식적으로나마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인물 평가
솔직함과 용기로 유명한 무정은 성격이 불같고 용감했으며 또한 끈질기게 헌신하는 혁명가이자 걸출한 지휘관이었다. 인민군의 장성 중에서 무정은 단호하고도 의욕적이었으며 또한 재능이 탁월했다. 특히 그는 포병분야에 정통했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무정은 인민군 제1진 포병부대 지휘원들을 양성했으며 인민군 창설자 중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무정의 용맹함과 우수한 포병 기술에 비해 그의 정치능력은 오히려 2류 정치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전쟁에서의 표현을 볼 때 남반부에서의 인민군 실패를 그가 떠안는 것은 매우 불공정한 일이었다.
무정은 김일성과 더불어 전기적 색채를 띤 군사영웅이었다. 인물과 인물을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혁명생애에서의 무정은 시간적으로 보나 경력 혹은 자격적으로 보나 김일성보다는 차원이 높고 경력 또한 쟁쟁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국으로 입국한 무정은 직위적으로는 김일성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당시 김일성이 소련이란 강대국을 등에 업지 않고 직접 중국 동북으로부터 귀국했고 무정 또한 중국공산당이라는 뒷심이 없이 중국 화북으로부터 귀국했더라면 김일성이 전반 북조선을 장악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고 한반도 북쪽의 현대사는 아마 다르게 씌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45년 당시 조선으로 귀국할 때 김일성의 빨치산 직계부대는 200여명인 반면 무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부대는 수천 명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부대였다. 하긴 그렇건 말건 그들 두 사람 중 김일성은 유명한 항일 빨치산의 지도자였고 무정은 중공군 소속 조선의용군의 지도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정은 군사에서는 비범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나 정치적 두뇌적으로는 김일성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한편 중국공산당 군대의 포병과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던 무정은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전설적인 군사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는 줄곧 신비로운 인물이어서 역사학자들은 무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와 그의 조선의용군은 많은 이들의 큰 기대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의 정치무대에 반짝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진 것이 마치 떨어지는 별찌와도 같았다.
무정은 1946년 북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선출됐지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빠르게 추락했다. 새로 건립된 나라에서 그는 순수한 군사적 직책만 남게 됐고 그 남은 군인생애도 1950년대에 있은 6.25전쟁으로 명예와는 인연도 없이 결속됐다.
에필로그
무정 개인에 대한 자료는 여전히 적은 상황이다. 1994년 중국 연변인민출판사가 ‘무정장군전(武亭将军传)’을 펴냈지만 발행 부수는 연변 지역에만 한정돼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은 최고지도자 외 다른 인물을 거의 선전하지 않기에 무정이란 인물이 알려질 리 만무했고 한국 또한 그가 공산주의자란 신분 때문에 유보하다가 2000년대 초에 와서야 교과서에 무정은 포병 전문가라고만 간단히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차라리 그가 직업 혁명가라고 소개하기보다는 많은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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