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일본에서 바나나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단순한 과일 수급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정세 불안과 에너지 공급망 리스크, 그리고 일본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적 변화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지 유통업계에 따르면 일본은 최근 수십 년 사이 가장 심각한 수준의 바나나 공급 압박에 직면했다. 일본 수입 바나나 유통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업체들마저 공급 차질 장기화를 우려하고 있으며, 일부 관계자는 "바나나가 일본 식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내놓고 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바나나 소비가 많은 국가다. 연간 수입량은 약 100만 톤에 이르며 사과와 감귤을 제치고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과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통되는 바나나 대부분은 해외에서 생산돼 수입되는 제품이다.
특히 일본 소비자들이 마트에서 접하는 노란 바나나는 자연 상태에서 익은 과일이 아니다. 필리핀과 에콰도르 등에서 수확된 바나나는 녹색 상태로 일본에 들어온 뒤 별도의 숙성 시설에서 에틸렌 가스를 이용해 익혀진다. 이 과정이 중단되면 바나나는 정상적인 상품으로 유통되기 어렵다.
문제는 최근 일본 내 에틸렌 공급이 크게 줄고 있다는 점이다. 에틸렌은 석유화학 산업의 대표적인 기초 원료로, 생산 과정에서 나프타(납사)가 필요하다. 일본은 필요한 나프타의 상당 부분을 중동 지역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과 중동 지역의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지면서 일본 기업들은 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급 부족에 물류비 상승까지 겹치면서 나프타 가격은 큰 폭으로 올랐고, 이는 곧바로 에틸렌 생산 감소로 이어졌다.
업계는 현재 국내외 대체 공급망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상황이 쉽게 개선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기존 재고를 활용해 당장 공급은 유지하고 있으나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바나나 유통 물량 감소와 가격 상승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사태는 일본 산업구조 변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일본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석유화학 생산국 가운데 하나였다. 에틸렌 생산량은 세계 상위권을 유지했고, 일본 화학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기업들은 수익성이 낮은 범용 석유화학 사업을 축소하고 반도체 소재와 탄소섬유, 첨단 화학소재 등 고부가가치 분야로 사업 중심을 옮겼다.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기초 화학산업 기반은 점차 약화됐다.
현재 일본의 상당수 에틸렌 생산시설은 1970~1980년대에 건설돼 노후화가 진행된 상태다. 평상시에는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국제 에너지 시장이 흔들리자 공급망의 약점이 한꺼번에 노출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바나나 공급난을 단순한 과일 품귀 현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기술과 제조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기초 원료 분야에서는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가 일본 소비자들의 식탁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글로벌 공급망 시대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바나나 공급난 자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수 있지만, 이번 사태는 일본이 에너지 안보와 원료 자급 능력,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바나나 한 개를 둘러싼 위기가 결국 일본 경제의 구조적 과제를 드러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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