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내셔널포커스] 미국 정부가 해저 통신 케이블 분야에 대한 규제를 한층 강화하며 글로벌 디지털 인프라 시장의 주도권 경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미국은 국가안보 강화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중국은 자국 기업을 겨냥한 경제적 견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단순한 통신 규제를 넘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해저 인프라 영역으로 확대되는 신호라고 보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해저 통신 케이블 규제 개편안을 공개했다. 개편안은 해저선로종단장비(SLTE) 사업자에게 별도의 허가 취득을 의무화하고, 장비 공급망에 대한 국가안보 심사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SLTE는 해저 케이블과 육상 통신망을 연결하는 핵심 장비다. 국가 간 데이터가 실제로 이동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만큼 통신망의 안정성과 보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FCC는 해당 장비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고 판단해 사업자 심사를 강화하고 공급망의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개편안에는 미국과 동맹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신속 심사 절차도 포함됐다. FCC는 일정한 보안 기준을 충족한 사업자에 대해 허가 절차를 간소화해 사업 추진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이 제도가 사실상 미국과 우방국 기업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지원하는 장치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조치가 시행되면 중국 기업의 장비 공급과 유지·보수 참여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특히 미국 접속점을 포함한 국제 해저 케이블 사업에서는 중국 기업의 시장 진입 장벽이 한층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규제는 최근 수년간 이어진 미국의 대중국 통신장비 견제 정책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FCC는 이미 지난해 국가안보 위협 대상으로 지정한 일부 중국 기업의 장비와 서비스를 해저 케이블 시설에서 사용하는 것을 제한했다. 이번 개편안은 규제 대상을 장비와 공급망 전반으로 확대해 관리 체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은 중국산 통신장비가 국가안보에 잠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중국 측은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한 기술적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며 정치적 목적이 강한 규제라고 반발한다. 양국의 입장 차이는 반도체와 인공지능, 통신장비를 넘어 글로벌 데이터 인프라 분야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해저 케이블은 오늘날 디지털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기반 시설이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대부분이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이동하며 국제 금융 거래와 클라우드 서비스, 인공지능 데이터 처리, 영상 스트리밍 등도 이 네트워크에 의존한다. 해저 케이블이 단순한 통신 시설을 넘어 국가안보와 경제안보, 디지털 주권이 교차하는 전략 자산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번 규제가 미국 기업에도 적지 않은 부담을 안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해저 케이블 건설은 수십억 달러가 투입되는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다. 공급업체 선택 폭이 줄어들면 사업 비용이 증가하고 공사 일정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가격 경쟁력과 생산 능력을 갖춘 중국 업체가 공급망에서 제외될 경우 미국 사업자들은 일본 NEC 등 제한된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특정 국가 기업을 광범위하게 배제하면 시장 경쟁이 약화되고 투자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비용 부담은 결국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과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자, 통신사를 거쳐 소비자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미국 정부는 공급망 안정성과 국가안보 확보를 위해 일정 수준의 비용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안보와 효율성 사이에서 어느 수준의 균형을 찾을지가 향후 정책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한편 세계 해저 케이블 시장은 미국과 유럽 중심의 기존 구조에서 점차 다극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대표 사례로 꼽히는 '2Africa' 프로젝트는 총연장 약 4만5000km 규모로 아프리카와 유럽, 중동, 아시아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급 해저 케이블 사업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는 중동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도 독자적인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서면서 글로벌 시장의 경쟁 구도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해저 케이블 산업이 단순한 통신망 구축 사업을 넘어 지정학과 기술, 안보, 경제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전략 산업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의 규제 강화가 국가안보 측면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공급망 효율성과 시장 경쟁 측면에서는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글로벌 해저 케이블 시장은 안보와 경제성, 기술 경쟁력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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