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은 철도와 도로를 깔았고 러시아는 오랜 세월 정치·경제권을 공유했다. 그 사이로 한국이 들어가고 있다.
무대는 중앙아시아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자원이 풍부하지만 산업 고도화와 기술 확보가 숙제로 남아 있다. 한국에는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원전, 정보통신 분야에서 쌓아온 기술과 제조 경험이 있다. 서로 필요한 부분이 비교적 분명하다.
지난 16일 서울에서 열린 첫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는 이런 이해관계가 정상외교의 테이블에 오른 자리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은 '서울선언'을 채택하고 산업·공급망과 AI·과학기술, 기후·에너지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산업장관 협의체도 새로 만든다.
눈길을 끈 대목은 '실크로드'였다. 이 대통령은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협력 구상을 과거 동서양을 이어주던 실크로드에 빗댔다.
하지만 한국이 그리는 길은 중국의 일대일로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한국이 중앙아시아를 주목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원이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이 지역에는 우라늄과 희토류 등 한국 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이 풍부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등 주력 산업의 공급망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지역이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전략광물로 분류하는 10개 광물을 자국이 모두 보유하고 있다며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부품, 로봇 분야로 협력을 넓히자고 제안했다.
우즈베키스탄도 적극적이다.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교역 규모를 2030년까지 200억 달러로 늘리자는 목표를 내놨다.
중앙아시아가 한국에 기대하는 것도 있다. 자원을 캐서 수출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국 안에 공장과 산업을 키우려면 기술과 투자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이 가진 제조 경험과 기술력이 이들이 추진하는 산업 고도화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미 자리를 잡은 강자들이다.
러시아 매체 '엑스페르트'는 최근 한국의 중앙아시아 전략을 다루면서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규모 경쟁을 벌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앞세워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 철도와 도로, 물류망을 구축했다. 러시아 역시 옛 소련 시절부터 이어진 경제·교통망을 갖고 있다.
지도를 펼쳐보면 한국의 약점은 더 선명하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에는 육상 국경이 없다. 철도나 도로를 이용해 물자를 움직이려면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과하는 노선의 영향을 받는다. 기술과 자본을 들고 들어가더라도 물류에서는 기존 인프라에 기대야 하는 구조다.
하지만 중국이 닦아놓은 길을 한국이 똑같이 따라갈 필요는 없다.
중국이 도로와 철도, 대규모 인프라를 앞세웠다면 한국은 핵심광물의 채굴·가공부터 배터리 소재와 자동차 부품, 반도체, 원전, AI까지 산업의 다음 단계를 연결하는 쪽에서 승부를 걸 수 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대규모 토목사업보다 산업과 공급망, 기술 협력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런 차이를 보여준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계산도 단순하지 않다. 한국과 가까워진다고 중국이나 러시아와 거리를 둘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투자국과 기술 협력국을 늘려 선택지를 넓히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한국이 들어갈 공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다만 광물을 확보해 한국으로 가져오는 수준에 머문다면 다른 자원 수입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중앙아시아가 원하는 것은 광산 개발만이 아니다. 광물을 현지에서 가공하고 제품으로 만들며 일자리와 기술을 남기는 산업 구조를 원한다.
한국 기업이 자원 확보에 그치지 않고 가공과 소재 생산, 부품 제조까지 현지에서 연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에 기술 이전과 전문인력 양성이 따라붙는다면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관계도 단순한 자원 거래를 넘어설 수 있다.
첫 정상회의 한 번으로 중앙아시아의 판이 바뀌지는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 지역에 쌓아놓은 경제적 기반은 그만큼 깊다.
그렇다고 한국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중앙아시아는 자원만 내다 파는 경제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이외의 투자자와 기술 파트너도 찾고 있다.
한국이 노릴 곳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밀어낸 빈자리가 아니다. 두 나라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시장에서 자원과 기술, 제조업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 쪽에 가깝다.
중국은 길을 깔았고 러시아는 오랫동안 뿌리를 내렸다.
한국은 이제 그 길 위에서 자원과 기술을 산업으로 묶어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새 실크로드'가 구호를 넘어 실제 경제권으로 이어질지는 얼마나 많은 자원을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무엇을 함께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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