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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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연변에 일찍 새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전업축구선수 생애를 시작한 축구원로 한분이 계신적이 있다. 성함은 이봉춘, 몇년전에 세상을 하직하였지만 새중국의 축구역사가 바로 이분들에 의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봉춘 원로가 태어나던 시기만 해도 “9.18”사변이 발발되기 직전이라 많은 조선의 애국자들은 간도땅을 발판으로 여러 명목의 반일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었다. 그중 축구운동은 축구라는 스포츠종목을 빌어 반일고조를 일으키던 형식이라 가장 보편적이고도 활발하게 진행된 종목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소년 이봉춘도 일찍 7살 때부터 축구와 접촉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연고로 축구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됐으며 1981년 정령퇴직할 때까지 장장 반세기 동안이나 축구공과 씨름하게 됐다.

1949년 축구동인 최증석, 김용호, 김호주 등과 함께 동북축구팀에 입선.

1951년 동북축구팀 일원으로 천진에서 진행된 전국축구경기대회에서 우승 쟁취.

1952년 최증석, 김용호, 김병구 등과 함께 중국국가올림픽팀에 입선.

1957년 국가팀에서 퇴역한 뒤 1975년까지 선후로 국가야금부, 국가공안부와 북경시청년축구팀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김지양, 왕준생 등 200여명의 국내의 축구유명인재를 양성.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연변1중의 체육교원으로 사업…
이봉춘원로의 프로필은 비교적 간단했다. 뿐만 아니라 건장칭호는 물론 그 무슨 직함도 받지 못하고 퇴직한 이봉춘 원로이다. 그도 그럴것이 1957년 국가팀에서 퇴역할 때는 중국내의 건장칭호제가 실행되기 전이었고 그뒤 1981년까지는 또한 중국국내의 축구감독의 직함평의제도가 실행되기 전이라 어찌보면 이봉춘 원로는 아주 재수없는 축구인, 어찌보면 바친 대가보다 얻은 것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인생이기도 했다.

일찍 1942년에 부인 최유송녀사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언제 한번 부인과 자식한테 잘해주지 못했던 이봉춘 원로, 그 아픔에 늘 가슴이 짜릿했으련만 한편 사망되기 몇해전까지만 해도 축구장의 격렬한 분위기에 말려들어 가군 하는 이봉춘 원로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전, 꼴 넣은후의 쾌감, 환호하는 관중석, 그래서 남자라면 한번은 축구선수로 돼봐야 한다고 늘 외우던 이봉춘 원로었다.

그리고 지난 세기 90연대말 중국축구무대의 “오동현상(용감무쌍하고 굴할줄 모르는 풍격)”에 대해 이봉춘 원로는 “오동현상”이란 말만 90연대에 나왔을 따름이지 그런 현상은 옛날부터 있었다고 고집했었다. 이봉춘 원로의 추억에 따르면 옛날에도 팀에 조선족선수 2 - 3명만 끼우면 팀풍격이 달라지는 건 물론 다른 팀들에서 모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다면 우리 조선족은 천성적으로 축구재질을 타고난 민족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봉춘 원로는 갔다. 하지만 우리한테 남겨놓은 조선족축구인들의 문화유산은 많다. 하다면 현재 살아있는 우리 세대가 이런 노일대들의 업적을 기리며 역사만은 기록해야 할 것이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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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축구원로시리즈(6) 새중국과 더부러 살아온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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