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 김철균

“여인은 약자이지만 어머니는 강자”라고 한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였을까? 그것은 여성들한테는 모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남성들의 부성애를 초과하며 여성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든다. 남성들한테는 있을 수 없는 모성애 – 그 모성애는 신성하고도 위대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낳은 자녀 6남매를 두고도 의지가지 없는 한족학생(고아도 포함) 6명이나 경상적으로 돌보며 그네들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학업을 원만하게 마치도록 아낌없는 정성을 쏟음과 아울러 그네들과 장기간의 모녀(모자)의 정을 쌓아가며 민족단결의 꽃을 피워온 한 조선족 머니가 있다.

일찍 어린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도 남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심이 많았고 천성적인 그 동정심과 정성으로 당시 고아였던 남편 김용환과의 만남과 결혼이 이루어졌으며 또 그 동정심과 자비심을 80여세 고령인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살아온 할머니ㅡ 그 조선족 어머니인즉 바로 본문의 주인공 김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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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식민지시대에 태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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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3월 18일(음력 2월 4일), 순자가 태여난 곳은 간도땅 룡정의 대문동(지금의 룡정시 광신향 대성촌)이란 두메산골이였다.

순자가 어렸을 때 들은바에 따르면 순자네 가정은 워낙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어느 한 읍내에서 살았었는데 순자가 태여나기 몇해전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들어와 대문동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부모님들의 본적은 조선인셈이였다.

하긴 순자의 부모님 세대들로 놓고말하면 조선에서 살다가 한일합방과 더불어 중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많은 비률을 점하고있는지라 그 정체가 결국 이주해온 재중조선인이였다.

우리 민족의 흘러간 옛노래 “눈물젖은 두만강”이 한시기 애창곡으로 불리웠듯이 정들었던 고향산천을 떠나 두만강 푸른물에 눈물을 휘뿌리며 간도로 건너온 배달민족을 치고 모두가 슬프고도 딱한 사연이 있었으며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어른이 늙으신 로모와 안해 윤씨 그리고 나어린 잔밥들을 거느리고 간도로 이주해온것도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조선 회령에 있을 때 김순자의 아버지네 일가는 그래도 부자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형석옹은 회령읍내에서는 그래도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였다. 듣는바에 따르면 김형석옹은 젊었을적에 부친을 따라 청국(중국)과 로씨야의 연해주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였는데 소금장사, 소장사에 비단장사까지 닥치는대로 하였었다. 그래서 가산을 적지 않게 일궈세웠으며 부친 즉 순자의 증조부로부터 가산을 물려받을 때는 가옥 몇채에 땅 여라문 마지기가 있었고 거기에 정미소(그 당시에는 석마칸이라고도 했음)까지 운영할 정도로 잘나가는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과 청국 그리고 로씨야로 넘나들며 얻어들은것도 많았거니와 거기에 인물이 훤하고 얘기도 잘했으며 인품이 후하고 성격까지 대바르기에 한때 회령땅에서는 인물로 받들리면서 군수가 정사(政事)를 토의하는 모임에도 가끔씩 참가하군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애써 일궈놓은 가세가 순자의 할아버지 김형석옹의 대에 와서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로일전쟁과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천하가 태평하지 못하고 세상민심이 어수선하였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조선이란 나라가 급작스레 쇠퇴일로를 걷게 되였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당시 일본과 로씨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있는 조선도 막대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나라의 쇠퇴와 더불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부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형석옹의 가정이 한쪽으로 기울게 된것은 다른 부자들의 사정과는 달리 여러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것이다.

원체 량반이고 상놈이고 하는 조선의 봉건제도에 회의를 느껴오는데다 서구권문화와 남녀평등같은 진보적인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인데서 당시 김형석옹은 여느 “량반나부랭이”들과는 눈에 뜨이게 달랐다. 그는 죽을둥살둥 돈을 벌어서는 재산만 축적하는데 큰 흥미가 없어했다. 돈이란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고 인정했던것이다.

김형석옹은 우선 교육을 크게 중시하였다.

“조선의 량반들은 봉건습관이 몸에 배일대로 배여 더는 개화되기 힘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니 자라나는 어린것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게 하여 조선의 제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아야 한다.”

그는 늘 이렇게 나라가 춰서고 문명해지자면 교육이 먼저 춰서야 한다면서 읍내에 작으마한 서당을 차리고는 몇몇 훈장들과 함께 애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한편 진보적인 계몽사상을 주입시켰다.

청산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나네

락락장송 큰나무도 다듬어야 동량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东天朝日) 비쳐온다

유신(维新)문화 벽두초에 선도자의 책임중코

사회진보 기발앞에 개량자 된 의무로다

농상공업 왕성하면 국태민안(国太民安) 여기 있네

가급인족(家给人足) 하고보면 국가부영(富荣) 이 아닌가

이 노래는 그 당시 크게 류행되였던 “학도가”였다. 그때 이런 계몽가요들은 조선의 봉건시대 주점에서 기생들이 타악기의 반주하에 가야금을 뜯으며 가락을 뽑던 “소리(전통민요)”와는 달리 당시의 시대를 반영하면서 내용상 진보적사상의 주입으로 청년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그때 그 시기의 애창곡으로 립지를 굳히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가요들로는 “봉선화”, “번지없는 주막”, “두견화사랑”, “고향의 봄”, “홍도야 울지 마라”등을 사례로 들수 있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흔히 당시 일제에 의해 몰락일로를 걷고있는 조선을 “님”이나 “고향”에 비유하면서 청년들에게 조국애를 부여하는 진보사상을 주입시켰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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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부패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전체가 송두리채 흔들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1910년(융희4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체결과 더불어 드디여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탄되였다. 반만년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조선이 리씨왕조의 부패와 갓 건립된 대한제국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순간이였다. 한편 이를 계기로 1919년 조선에서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조선내 각지와 청국(중국)의 간도지방에서는 룡정에서의 “3.13반일운동”과 더불어 각종 명목의 독립군이 조직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행위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동시에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책동이 로골화되자 진보적이고도 량심있는 조선의 유지인사들은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소금과 식량, 천 등을 지원하면서 역시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중에는 순자의 조부였던 김형석옹도 있었다.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것은 다른 그 어떤 자선행동과는 많이 달랐다. 이전에 김형석옹이 거지들에게 밥을 주고 신파극단을 불러 읍내사람들한테 연극을 구경하게 할 때는 그래도 재산이 축나는것이 별로 알리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지원활동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상황이 판판 달랐다. 처음에는 땅을 팔고 집 한채씩 팔고 하면서 군자금을 대주었는데 나중에는 달랑 집 한채와 정미소밖에 남지 않았으며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데도 자주 고간에 있는 비단 한필씩 내다 팔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해 겨울을 앞두고 어느날 몇몇 유지인사들이 읍내에서 한의원을 차리고있는 최구남백작네 집에 모여 간도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군부대의 동복을 해결할 사항을 갖고 방법을 강구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였다.

모이긴 모였으나 수천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동복을 몇몇 유지인사들의 경제력으로 해결한다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모두들 독립군을 도와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같이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씩 내놓겠다고 하자니 애로는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최구남백작은 좌우를 둘러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입을 뗐다.“

“모두들 왜 얘기들 없는거유? 모두들 그대로 우리 읍내에서는 한다하는 유지들이 아니우?! 아무쪼록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내서라도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는 독립군을 좀 도와줍시다.”

“글쎄 나의 재산 아니 집까지 몽땅 팔아 독립만 된다면 뭐가 아쉽겠소만 우리 조선이 일본을 어떻게 이기겠소? ‘3.1’운동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그 유명한 유지들중 많은이들이 일본에 투항하며 친일파로 되였는데 그들인들 조선독립을 원하지 않아서 그랬겠수?! 조선이 무능하고 일본을 이길 힘이 없으니까 그런것이 아니겠수! 지금 일본을 이길 나라는 세상에 없소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젠 줄을 똑바로 서야 한다 이 말이 올시다.”

읍내에서는 제일 많은 밭과 논을 갖고있으면서 회령군안에서는 열손가락안에 꼽힌다는 지주 정달수가 몹시 움츠러드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순자의 할아버지인 김형석옹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여보소. 정진사어른 왜 그런 김빠진 소리를 하나이까. 무능하고 약하기에 뭉쳐야 할것이 아니오리까? 그리고 힘을 버리지 말아야 하오이다. 일본이 강한건 사실이오만 우리가 뭉쳐서 싸우면 희망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그리고 우리 대에 독립이 안된다손쳐도 다음대 또 그 다음대 세세대대로 이어가면서 싸운다면 언젠가는 독립이 될 날이 있을거웨다.

난 이제 집외에 정미소밖에 없지만 그 정미소를 내놓겠나이다. 독립군들의 동복을 다는 해결할수는 없겠지만 수백명 아니면 적어도 수십명의것은 만들것이 아니겠수?!”

이에 모두들 웬간히들 놀라는 눈길로 김형석옹을 바라보았다. 김옹한테 살고있는 가옥외 재산이란 정미소뿐이란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
그날 유지인사들의 모임은 그 어떤 매듭도 짓지 못한채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다.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조선독립을 도와나서자는 강경주장을 내세우는 유지들과 강한 일본과 맞서봤자 100분의 1의 승산도 없으니 차라리 일본의 뜻에 따르자는 투항주장을 내세우는 유지들 사이의 설전만 거듭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 상을 치며 싸우는 반도인렬근성을 드러내보이다가 그대로 끝나버렸던것이다.

아니나다를가 모임에서 투항주장을 내세우던 지주 정달수 등 몇몇은 며칠뒤 읍내 경찰분주소에 가서 다시는 독립운동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협약서에 서명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날 모임에 참가했던 많은 유지들이 검거되였으며 이틀이 지나자 또 몇몇 유지들이 경찰서안에서 재차 전향협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던 유지들은 그날로 투옥되였다. 그중에는 순자의 할아버지 김형석옹도 포함돼있었다.

경찰서 지하고문실에서 김형석옹을 비롯한 몇몇 유지들은 일제경찰들한테서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모진 시달림을 받았다. 유지들을 고문한 놈들중에는 조선인경찰도 있었는데 그놈들이 일제경찰보다 한술 더 뜰 때가 많았다.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한테 매를 들이대는 놈들, 그런 놈들을 보면서 김형석옹은 매를 맞은 아픔보다 더욱 큰 정신적 아픔을 느꼈고 그런 놈들이 살판치는 조선을 두고 철저히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

김형석옹은 류치장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반죽음이 되여서야 들것에 들려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류치장에서 돌아온 김형석옹은 인사불성이였다. 혼미상태에서 자주 헛소리를 하였다.

“조선은 망했다. 민족도 망했다. 저런 민족적 망나니들이 있으니 망하지 않을수 없도다! 아, 왜놈들의 군화밑에 짓밟혀 신음하는 3천리강토여! 2천만 민중이여……”

“아니다.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민족도 망하지 않았다. 저기 보인다. 아, 우리의 안중근의사 그리고 독립군 장군들! 희망이 있도다, 우리 조선이 희망이 있도다! 조선독립이 눈앞에 보인다…”
……
이렇게 몽롱한 의식속에서 헛소리를 하다가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서면 곧바로 아들 김명기를 앉혀놓고는 “만주나 연해주로 가거라. 더이상 조선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느니라”라고 하며 순자의 아버지한테 심심당부했다.

김형석옹은 류치장에서 돌아온지 열흘도 못넘기고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가산을 탕진해가며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고 또한 어린 세대한테 계몽교육과 함께 독립운동에도 열심히 투신했건만 김옹의 최후는 몹시 비참했다.

더군다나 조상을 치르던 날 이전에는 그래도 같은 유지들이라고 하루가 멀다하게 들락거리며 막걸이도 함께 나누군 하던 부자나부랭이들은 한명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모두가 일제경찰의 눈밖에 날가봐 무서워서였다.

부친 김형석옹의 조상을 치른 뒤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생각할수록 회령땅이 싫어졌다. 아니, 조국이건만 조국답지 않은 조선이 싫어졌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생각대로라면 자기도 중국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싶었고 자신도 안중근같은 의사로 되고싶었다. 하지만 로모와 처자를 거느린 그는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그는 간도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남아있는 집 한채와 정미소를 조용히 처분한 후 역시 소리없이 행장을 차렸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 저녁,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눈은 평화와 안녕을 상징한다고 김명기는 눈내리는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께서 제발 우리 일가를 보호해주옵소서”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고는 눈안개에 그 형체조차 감춰버리고있는 고국산천을 향해 큰절을 올리였다.

“이 몸을 낳아 키워준 고국산천이여, 잘 있으라!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떠나는 몸이건만 그래도 고국의 안녕을 비나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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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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