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편집자의 말: 지난 9월 9일은 중국 최대의 건국공신인 모택동이 서거한지 38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택동 주석이 사망하던 1976년, 그해 중국은 일련의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었다. 선후로 주은래 총리와 주덕 위원장이 타계했고 당산에서 특대지진이 일어났으며 9월 9일에는 “동방의 거인” 모택동 주석까지 서거하여 나라는 일대 혼란을 초래했다. 그와중 화국봉, 엽검영, 이선념 등을 일방으로 하고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을 일방으로 하는 쌍방간의 권력투쟁도 클라이막스에 다달았다.

 

아래의 글은 화국봉이 당과 국가의 모든 직무를 내놓고 은퇴한 뒤에 쓴 “4인방을 분쇄하기까지”란 회억록에서 발취한 것이다. 이전에 “4인방”을 분쇄한 여러 쟝르의 글이 많이 나왔지만 이 글에는 새로운 내용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진들도 첨가되었으며 거기에 화국봉이 직접 쓴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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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은 우리 당과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준엄하던 시기었다. 그 해 1월 8일,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고 엽검영 원수 또한 핍박에 의해 “병치료”란 명목하에 사업중지가 되었으며 이선념, 여추리 등 부분적 부총리들도 핍박에 의해 모두 북경을 떠나 외지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주은래 총리를 추모하는 군중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는 “4.5”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등소평이 재차 타도되었다. 그 뒤 수개월후  7월 6일, 주덕 원수가 병으로 타계했고 당산대지진까지 일어나 나라는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4인방”은 당과 국가의 적지 않은 부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특히 의식형태 방면에서 요문원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 시기의 신문과 방송은 기본상 “4인방”의 지휘하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시기, “4인방”한테는 나 이 화국봉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나까지 꺼꾸러뜨리고 싶었지만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나는 모택동 주석이 지정한 당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었으며 또한 나는 모택동 주석의 지시라 하면 그대로 집행하는 인물이었던만큼 모택동 주석이 살아있는 한 나만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같은 인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모택동이란 벽만 없다면 하루 아침새에 제거할 수 있다는 그런 심산이었다.


한편 그들은 나한테 언론적으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 때 나도 그들한테 당과 국가의 영도권이 넘어가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다만 시기가 시기었던만큼 섣불리 모든 행동을 취할 수 없었을뿐이었다. 나는 일절 내색을 보이지 않고 시기를 기다렸다.

 

워낙  모택동 주석외 중앙정치국에는 모두 4명이 남았었는데 그 4명으로는 왕홍문과 장춘교 그리고 엽검영 원수와 나였다. 그러던 중 1976년 2월 7일 모택동 주석이 엽원수더러 휴양하게 하고 진석련더러 군위사업을 대신하게 했다.

 

그 당시 모택동이 왜 나를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하게 하고 엽검영 원수더러 휴식하게 하는 제의안을 정치국을 통해 결정시켰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나 역시 그랬다. 나의 판단으로는 “4인방”과 모원신 등이 모택동 주석앞에서 엽검영 원수를 크게 비해했다는 것이고 나를 올려놓게 한데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자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해 9월 9일, 모택동 주석이 서거하자 “4인방”은 오랫동안 감추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 대거 여론조성을 하는 한편 자기들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부문을 통해 무장역량을 건립, 장춘교의 동생(총정치부 선전부장)은 직접 해방군 모 탱크사에 내려가 활동을 전개했고 상해에서는 재차 민병(한국의 민방위군과 비슷함)들에게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발급하기도 했다.

 

한편 나한테도 기다리던 시기가 도래했다. 9월 10일 오후, 나는 우선 이선념 선배를 찾아 “4인방”이 현재 창궐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당과 국가의 대권을 빼앗으려는 그들의 행동개시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면서 이선배가 은신하고 있는 엽선배한테 찾아 대안을 모색해줄 것을 건의했다.

 

“4인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13일, 이선념 선배는 북경시 식물원으로 간다고 했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엽검영이 있는 서산으로 향발했다. 그날 두 선배는 시국의 정세와 “4인방”에 대한 견해를 교류를 하였고 아울러 이선념 선배는 화국봉도 지지하고 있다고 전달하면서 나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사안이었기에 나는 모험을 무릎쓰고 직접 엽검영 원수를 찾아 견해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치하게 비상수단의 방법으로 “4인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나는 또 당시 당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왕동흥을 찾아 담화했다. 왕동흥 역시 내가 찾아온 뜻을 알아차렸으며 그의 뜻도 나와 마찬가지었다. 그 날 우리는 각항 준비사업을 두고 상세하게 연구하였으며 믿음직한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그 외 나는 당시 북경시위에서 사업하고 있는 오덕과 오충을 불러 담화,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등 교정에서 학생들이 진상을 모르는채 사정선과 지군의 선동에 넘어가게 되는 망동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막아달라고 지시했으며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북경시의 안정만은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준비사업이 완료되자 10월 6일 밤, 나와 엽검영 원수가 회인당에서 직접 모든 행동을 지휘했고 왕동흥이 행동대를 책임졌다.

 

그날 우리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있다는 명의로 왕홍문과 장춘교를 불렀으며 그들이 도착하는 즉시로 나포하여 그들이 격리심사하게 되었다는 중앙의 결정을 선독하였다. 당시 요문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모택동선집” 제5권을 심열한다는 이유로 그를 청했고 같은 방법으로 요문원을 나포해 격리시켰다.

 

강청은 중남해에 있는 강청의 저택에서 나포했다. 아울러 모원신, 사정선, 지군 등도 같은 시간대에 나포하였는데 그들앞에서 선독된 격리심사에 대한 문건은 모두 내가 사인하여 발고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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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일당에 대한 나포행동을 완수하자 우리는 즉히 여거 정치국 위원들을 불러 옥천산회의를 개최, 내가 엽검영 원수더러 회의의제를 말하라고 제안했으나 그는 기어코 나더로 사회하고 모든 경과를 소개하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 자리에서 “4인방”이 격리심사를 받게 되었음을 선포한 뒤 주로 당과 나라의 대권을 찬탈하려고 시도한 “4인방”의 죄행을 나열하였다.

 

이어 엽검영 원수가 발언, 그는 “4인방”에 대한 나포행동 과정을 소개하면서 전당, 전군은 반드시 “4인방”의 반당야심을 견결히 폭로하고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특수한 상황에서 비상수단을 이용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특히 언론계가 “4인방”이 통제하고 있고 상해에서는 “4인방” 부하들이 무장까지 발급한 상황에서 유혈희생을 막고 전국국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날 회의에서 나는 엽검영 원수더러 당중앙 주석직을 맡아줄 것을 제의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덕망이 높은 분으로서 이미 두차례나 당을 만회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엽검영 원수는 결연히 일어나 손을 내저으며 내가 당중앙 주석, 군위주석 등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화국봉은 모주석이 지정한 후계자”라는 말에 특히 모를 박았다. 그 뒤 많은 위원들의 진지한 토론을 거쳐 엽검영 원수의 제의안이 통과되어 내가 당중앙 주석과 군위주석을 맡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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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ㅡ 그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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