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정평여는 중국 절강성 난계의 사람으로 1918년에 태어났다.


4.PNG그의 부친 정월(郑钺)은 정치이념이 강한 사람으로 일찍 일본의 한 정법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일본시절 정월은 손문(孙中山) 선생을 따라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서 동맹회에 가입하하였다.


정평여의 어머니는 정월이 동경유학시 알게된 일본 명문가정의 규수로 일본이름은 키무라와 나코(木村花子)였다.
 

당시 키무라 나코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중국을 동정하였으며 이에 반항하여 혁명에 나선 정월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에로 치달아올랐고 결혼에 올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혼 후 키무라 나코는 남편을 따라 중국에 정착, 이름을 중국식 이름인 정화군 (郑华君) 으로 고치었다.


그들은 선후로 자녀 2남 3녀를 보았는데 정평여는 둘째딸이었다. 정평여는 어릴적부터 총명하고도 착했으며 또한 일본인 어머니한테서 일본어를 배운데서 놀라운 일본어구사 능력도 갖고 있었다.


2.PNG


중국의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 이후 정평여는 단연히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상해가 일본에 의해 함락된 후 정평여는 그녀 자신의 우월한 조건(양호한 사회관계 및 탁월한 일본어 구사능력)에 의해 상해에서 국민당 군통의 항일지하정보원으로 되었다. 당시 그녀는 갓 19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뻤고 품위가 높았으며 상해의 유명한 미녀이기도 했다. 당시 상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화보는 “양우(良友)”였는데 1937년 7월, “양우” 130기의 표지에는 정평여의 사진이 실리었다. 그 때 그녀는 특수신분이었던만큼 그냥 “정여사”로 소개되었을뿐 그의 진짜 이름이나 기타 내막은 언급되지 않았다.


1937년 8월 13일, “송호항전(淞沪抗战ㅡ상해보위전)”이 폭발하고 그해 11월 11일 중국군이 상해에서 철거하면서 상해가 함락된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색계(色·戒)”는 많은 역사적 화폭으로 당시 상해의 모습을 반영, 영화의 여주인공 왕가지의 원형이 바로 정평여었고 남주인공 역선생의 원형은 곧바로 왕정위의 특공본부 주임었던 정묵촌었다.


당시 정평여는 매우 우수한 정보원이었다. 그녀는 모친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군 고위급 관원들 주위를 배회, 드디어 고노에 후미마로(このえ ふみまろㅡ近卫文磨)가 상해에 파견한 회담대표 하야미즈(早水リサㅡ早水亲重)와 접근하는데 성공,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또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두 아들 및 화중파견군 부총참모장 이마이 다케오(いまいぶふ)의 부인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 군통국에서 그녀한테 맡긴 임무는 일본 수상 후미마로의 아들 고노에 후미타카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후미다카를 납치한다고 해서 일본 수상이 중국침략을 포기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노에 후미타카는 정평여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내걸고 얼마든지 후미타카를 제거할 수 있었다. 헌데 얼마 뒤 군통에서는 그 위험한 “유희”를 그만둘 것을 재차 명령, 후미타카는 자신도 모르게 중일정치의 희생품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정평요는 왕정위(汪精卫)가 곧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중요한 정보를 장악, 무전기로 중경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민정부는 이에 대해 근본 중시하지 않았었다. 후에 왕정위가 진짜로 중경과 이탈하고 일본에 투항해서야 국민정부는 정평여의 활약을 인정하면서 그녀를 적극 기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군통에서는 한간 정묵촌을 처단할데 대한 임무를 정평여한테 맡겼다. 일제통치시기 왕정위 정권은 당시의 상해 치스펠로(极司菲尔路-지금의 만항도로) 76번지에 특공본부를 설치, 주임은 원 군통국 제3처 처장이었던 정묵촌이었다. 당시 정묵촌과 리사군 등 일당들이 왕정위와 함께 일본에 투항했던 것이다.


군통에서는 항전을 포기하고 일제에 투항한 정묵촌을 처단하기로 결정, 행동계획은  상해에 잠입해있는 진립부(陈立夫)의 결의형제 진보화에게 명령하여 정묵촌이 호색한이란 점에 비추어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정묵촌은 소문 그대로 “색중아귀(色中饿鬼)”였다. 그는 어느 한 공공장소에서 정평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시 양장차림의 정평여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정묵촌한테 달라붙어 수시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졌으며 정묵촌으로 하여금 그녀한테 푹 빠져들게 하였다.


그러자 군통에서는 시기가 성숙됐다고 판단, 행동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제1차 행동은 정평여가 정묵촌을 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행동대원들이 정평여의 집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묵촌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헌데 그날 교활한 정묵촌은 차를 몰고 정평여의 집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무슨 낌새를 챘던지 방향을 되돌린데서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군통에서는 상해의 책임자를 장서경(张瑞京)으로 바꾸어 제2차 “정묵촌저격계획”을 짰다. 그 계획은 정평여가 쇼핑을 이유로 시베리아피혁상점에서 정묵촌을 만나게 하고는 그 기회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이 때 장서경이 왕정위 특공본부의 리사군한테 체포되어 “정묵촌저격계획”까지 불어버리었다.


이에 리사군은 비밀보장을 위해 우선 장서경을 보호했고 군통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자 원 계획대로 행동하다가 오히려 정묵촌 특무들한테 걸려들어 계획은 또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정평여는 신분이 탄로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해의 최대의 뉴스로 되었다.


1940년 정평여는 왕정위의 특공대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상해 호중산로의 어느 한 공지에서 처형되었는데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3세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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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계” 실패로 죽음을 맞은 여간첩- 정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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