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만년에 장학량 장군은 조국대륙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타국의 황야에서 쓸쓸히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일찍 등영초가 미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친필편지를 장학량 장군한테 보내어 조국으로 돌아올 것을 건의하자 장군은 등영초한테 보낸 회신에서 만년에 자신이 귀국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럼 애국장령 장학량이 무엇때문에 만년에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의 황야에서 인생을 마치었을까? 이에 대해 지금도 토론하고 연구할 중요한 화제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분석이다.

 

등영초 편지로 장학량을 초청

 

중국내의 역사학자들, 특히는 동북의 연구학자들은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에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가 미국으로 건너간 장학량한테 친필편지를 보냈었는가에 대해 쟁론이 많았었다. 그러다가 새세기가 시작될 무렵, 등영초 여사가 보냈다는 그 편지의 복사본이 중국의 기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91년 3월 10일, 장학량 장군과 부인이 대북 도원공항을 통해 미국행을 떠났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오자 중공중앙은 이에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 특히 당시 중앙서기처는 장학량이 대북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중외기자들과 한 담화내용에 대해 더욱 주목했다. 그 때 장학량 장군은 대륙에 돌아와 친척방문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등소평이 이를 알고는 당시의 중공중앙 총서기인 강택민과 국가주석 양상곤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당신들이 전문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를 바란다”고 건의하였으며 장학량이 대륙으로 온다면 잘 맞아줄데 관해서도 부탁했다.

 

등소평의 부탁에 따라 중공중앙에서는 즉시 전문회의를 소집하였다. 인민대회당에서 소집된 회의는 강택민이 직접 주최했고 중공의 대만판공실, 중국국민당(좌파)의 대만판공실과 중공중앙 통일전선부 등 여러 부서의 책임일군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강택민은 장학량이 미국방문이 끝난 후 어떻게 편리하게 대륙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포치하였다.

 

뒤이어 중공중앙에서는 즉시 긴장한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당시 강택민이 포치한 것들로는 4가지었다. 첫째, 1991년 6월이면 장학량 장군의 91세 탄신일이기에 생일날 기념경축활동을 조직한다. 둘째, 이해인즉 9.18사변 발발 60주년이기에 기념활동을 대규모적으로 조직한다. 셋째, 일군들을 파견하여 심양에 있는 원수부와 원수릉을 수건하며 장학량 장군이 귀국 후 부친 장작림의 유해를 첨앙(瞻仰)할 수 있도록 사전의 준비를 빈틈없이 한다.  넷째, 중앙 부부장급 책임자 1명을 미국 샌프랜시스코에 파견하여 중공중앙에서 장학량 장군을 열렬히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함과 아울러 장학량이 귀국한 뒤의 일체의 슈켓쥴에 대해서는 전달한다.

 

준비사업은 비교적 순리로웠다. 장학량 장군의 91주세 탄신기념활동 준비와 9.18사변 60주년 기념활동 준비사업 그리고 심양의 원수부와 원수릉 수건준비 등을 하나하나 적시적으로 진척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를 미국에 파견하여 장학량 장군을 모셔오는가 하는 것이 걸림돌로 되었다. 당시 중앙에서 제출한 부부장급 지도일꾼은 도합 56명이었다. 그 중 축소되어 고려된 것은 이전 장학량의 동북군 시절의 부하였던 일꾼들이었다. 예하면 원 철도부 부장 곽유성, 원 국방과학사업위 부주임 만의, 원 전국정협 부주석인 여정조(吕正操)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중공당내의 노동지들이었으며 또한 장학량 장군과도 특수한 전투적 우정이 있었던 분들이었다. 최종 중앙에서는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여정조를 미국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정조는 장학량의 고향인 요녕 해성사람으로 일찍 동북군의 전포를 입었던 사람이었으며 그가 동북강무당(讲武堂)에서 공부할 때 장학량은 그의 선생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장학량을 도와 “서안사변”에 직접 참가했었기에 장학량과 아주 깊은 사적정감도 있었다.

 

한편 중공중앙에서 그를 선택한 것은 이상의 조건외에도 그가 선택된 사람들 중 원 직무가 제일 높았던 것도 있었다.

 

중앙에서 여정조를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후 주은래의 미망인인 등영처과 중남해 서화청에서 여정조를 만났다.

 

이에 앞서 등영초는 중공중앙과 등소평의 의견에 따라 사인의 명의로 장학량 장군한테 보내는 편지를 이미 써놓았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경 선생(汉卿ㅡ한경은 장학량의 별호임): 세월은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수십년간의 세월은 우리를 하늘과 바다를 사이두고 갈라놓고 서로 마주보며 기다리게 했습니다.

 

생전에 은래는 매일 선생을 외우며 늘 슬퍼하고 애탄했습니다. 현재 선생의 신체가 안태(安泰)하고 만사가 순리로워 만리행을 떠나셨으니 이는 고인에 대한 깊은 위안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선생이 고향을 떠난지가 아주 오래된지라 현재 고향의 친지들은 모두 선생을 기다리고 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최근년들어 양안 사이의 울바자가 점차 거둬지고 내왕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침 지난 겨울부터 올봄에 들어서면서 날씨가 따뜻해져 고국여행이 아주 좋을듯 싶습니다.

 

금일 이 영초가 등소평 선생의 위탁을 받고 성심성의로 선생께서 편리한 기회를 빌어 부부동행으로 한번 대륙여행을 해볼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고향땅을 돌아보면서 성묘하고, 친인척들을 만나보며 관광도 해보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리고 아주 정착하는 것도 환영합니다.

 

이 편지는 중공당 전문인사 ×××동지가 대신 갖고 감을 소개하며 그와 모든 것을 상의하기 바람니다. 저의 성의를 받아줄 것과 모든 절차를 타당하게 배치할 것을 바랍니다.

 

선생의 부인 조여사한테도 문안을 전합니다.

 

이 봄에 들어 옥체만강하기를 기원합니다.

 

등영초 드림

 

1991년 5월 20일

 

이는 등영초가 장학량 장군한테 보낸 두번째의 편지었다. 첫통의 편지는 1년전 장학량이 대북에서 90세 탄신일을 기념할 때 축전을 보낸 것이었다. 당시 등영초의 축하전문은 대북 원산호텔 곤륜청 중앙벽에 높이 걸려 많은 해내외 인사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이번의 요청편지 또한 성의가 짙은 언어로 다듬어져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난 애국장령에 대한 중공원로들의 존경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5월 23일, 중공중앙의 특명을 받은 여정조 일행 5명은 북경을 떠나 미국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한 뒤에야 자기들이 한발 늦었음을 알게 되었다. 장학량 장군은 며칠전에 미국 동부에 있는 뉴욕으로 친척방문을 갔던 것이었다. 샌프랜시스코에 남아있는 사람들로는 장학량의 부인 조일적 여사와 아들 장여림(张闾琳)뿐이었다.

 

당시 여정조 일행은 샌프랜시스코에서 조일적 여사의 생신축하파티에 참가한 후에야 뉴욕에 있는 장학량한테로 날아갔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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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연재 (1) 만년에 장학량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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