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갑A시대 리그 4강의 신화를 먼 기억으로 남기고

중국 연변축구팀의 강등, 이 무수한 축구팬들의 마음에 풀기 어려운 매듭을 촉발했던 축구팀은 다음 경기시즌부터는 을급 리그에 섞이게 됐다. 중국 축구 “북방의 연변” 판도가 이미 붕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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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당년 연변팀의 감독 한국인 최은택, 눈빛이 부드럽고 행동거지가 겸손하고 온화하며 후방에서 전략전술을 짜는 학자기풍의 멋진 사나이. 연변축구팀의 영혼 고종훈도 마침 때를 만나 축구팀의 책사이자 국가팀의 미드필더의 “지휘관”이었다. 포워드 위치에 줘라를, 골키퍼에 브라지마를 배치했었다. 아프리카 작은 나라에서 온 이 두 선수는 중국축구직업화 초기 영입한 가장 자질 높고 값도 싼 외국선수였다. 당시 연변팀이 내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전면공격과 전면방어 축구였다. 그들은 갑A 리그에서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지어 리그 4강이라는 기적을 창조하며 중국 축구계에 미담으로, 전설로 전해졌다.

하지만 중국축구 직업화 과정이 심입됨에 따라 연변축구팀은 2000년에 갑B로 밀린 후 절강 녹성에 팔렸다. 두 팀은 을급으로부터 시작해 비록 한때는 후의 중국 갑급 리그 제3위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정상급의 리그에 돌아가지 못했고 당년의 광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한 면으로는 날로 감소되어 뒤를 이을 수 없는 현지의 축구인구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오동에서 자금을 철수한 후 축구팀은 장기간동안 기업의 협찬과 시장화 운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연변축구의 쇠락은 보기에는 마치 우연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피면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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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신강전운팀의 어린 축구선수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칸에서 몇 십 시간을 서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올해 연변축구팀은 비록 고대했던 협찬상을 만났지만 종당에는 강등의 비참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상술한 이 두 가지 일은 비록 아무 연관도 없는 것 같지만 축구운동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보급되고 발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축구의 “고향”에서 민중들이 더는 축구를 담론하지 않고 현지의 우세항목들이 점차 근본상에서 전개할 수 없는 항목으로 전락될 때 모든 중국의 축구팬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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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연길시는 이미 “중국에서 가장 행복감이 있는 도시”의 하나로 되었고 부르하통하 양안의 불빛은 이 도시의 밤을 아름답게 비춘다. 2012년 연길시의 인구당 사회소비품 소매액은 지어 상해를 초월했고 2014년, 연변축구팀은 3만여 개 좌석의 참신한 홈경기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연변축구팀 쇠락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고 지어 참신한 소학교 축구장에서 당년 팀을 무어 소리치며 뛰어다니던 조선족소년들을 보기 어렵다.

오늘, 연변축구팬들은 말한다. 강등 상관없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1년에 돌아오지 못하면 1년을 더 기다리고 몇 년에 돌아오지 못하면 또 몇 년을 더 기다릴 것이다.

“단지 마지막에 먼저 돌아오는 것이 이 연변팀일지 아니면 전반 연변축구일지 모를 뿐이다”

요즘 연변축구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신화통신 야오야오우밍 기자> 사진 : 시나, 소후 닷컴,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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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팀 버티지 못하고 을급으로 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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