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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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균 기자 프로필
1957년 8월 26일 생
연변대학 통신학부(현재의 성인학원) 졸업
선후로 훈춘시방송국, 연변라디오방송국, 연변일보사에서 사업
현재 연변일보 종합신문 편집국장, 길림신문 축구논평원,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등 겸임
단편소설 “잃은 것과 얻은 것”, “수산나”,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실화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조선족”, 수필 “사향심” 등 200여편
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합작저서 “야망의 축구스타”, 번역작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오묘한 세계대백과”, “연변레저지남” 등이 있음
청년생활 “화연문화상”, 연변라디오방송국 “라디오문학상”, 길림신문 “신춘문예상” 등 여러편 수상 
       
연변팀 고훈 감독편

길은 개척하기에 달렸다
길림오동팀 고훈 감독이 보는 갑A 제1단계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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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렬처절하던 1999년 중국축구 갑A 시즌 제1단계 경기가 지난 9일에 끝났다.

9일까지 우리 길림오동팀은 3승, 4무, 2패로 잠시 갑A의 제6위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감독으로서 나는 오늘과 같은 좋은 성적을 위해 하나처럼 똘똘 뭉쳐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과 팀에 열정적인 성원을 보내준 광범한 연변의 축구팬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지난 9라운드의 경험과 교훈을 잘 총화해보는 것도 팀의 앞길에 이롭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시즌이 끝난 그 당시 전반 팀이 탈진상태에 처해 있었고 그 때의 그 상태로 새해시즌에 뛰어든다는 것은 억지다짐이고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연변축구구락부 지도층에서는 거듭되는 연구끝에 몇가지 방침을 제정하고 그것을 즉시 실천해 나갔다.  

첫째, 일찍 손쓰고 빈틈없이 준비했다. 우선 팀의 지도부력량을 강화했다. 원 감독진의 기초상에서 코치직을 구락부의 전명호 주임이 맡기로 하고 원 2팀에 있던 김광수지도를 보충했다. 목적은 감독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각자가 맡은 바의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지도진영이 결정되자 즉시 외적 선수 및 국내 선수 물색에 달라붙었다. 아시안게임과 조선선수 고찰 및 조경과 해경 훈련기지에서 수많은 외적 선수들을 반복적으로 고찰하다가 최후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테니 선수를 선택했고 국내선수 영입에서는 수십명을 고찰하던 끝에 왕해파, 학위동, 우용 이 3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둘째, 동계전지훈련을 일찍 시작하고 훈련량을 늘이었다. 지난해 시즌에서 거의 탈진상태에 처한 팀을 보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지만 우리 팀한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서 지난해 시즌이 끝난 20여일만에 강훈련에 들어갔다. 그 목적은 체능시험에 무난히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그 강도를 보면 신체가 좋다는 왕해파 선수마저도 “이건 훈련이 아니라 사람잡이”라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극한의 훈련을 통해 고종훈을 비록한 모든 선수들이 1차적으로 체능시험에 통과되어 올해의 경기에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한 한편 남호, 정동칠 등 싹수가 보이는 선수들을 새로 발견하여 공격선과 수비선에 큰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셋째, 외적선수 영입과 국내선수 영입이 비교적 적중했다. 조선의 조인철, 리창하, 강춘일 등 선수들을 받지 않은데 대한 축구팬들과 매스컴에서도 의론이 많았지만 그들을 받지 않은 이유라면 그들이 우리가 수요하는 위치(그 위치의 선수는 우리 팀에도 많음)의 선수가 아니었고 또한 그들이 갑B리그에서는 출중했지만 갑A리그에서도 작용이 클까 하는 것이 미타했으며 그들이 또한 한국행 훈련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블라이마와 졸라 등을 계속 유임시키는 전제하에서 테니를 새로 받았다. 그 목적은 졸라는 기술형이고 테니는 충격형이어서 각 자의 특점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내선수 영입에서는 미드필더진과 수비진에 주로 모를 박았는데 왕해파와 학위동이 비교적 이상적이었다.

이쯤되니 우리 팀의 실력이 지난해에 비해 많이 강화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팀들을 경시할 수 없었으며 금년도 목표를 정할 때 여전히 갑A 보존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남들도 실력이 많이 제고됐기 때문이었다.

갑A시즌이 개시되자 우리 팀은 제1라운드에서 원정경기로 광주송일팀과 맞붙게 됐다. 원정경기인데다 송일팀의 내막을 잘 알지 못했기에 우리는 맹목적인 공격에만 병력을 투입한 것이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몇차례의 역습을 들이댔다. 결과 송일팀은 공격차수가 훨씬 많았지만 견고한 우리의 방선을 뚫지 못했고 반대로 우리 팀은 몇번 안되는 공격이었지만 챤스가 좋았기에 1골을 성사해 3점을 따게 됐다.

송일팀과 이긴 뒤 우리는 계속하여 상해신화팀과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에서도 역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역습을 시도하는 전술로 강팀인 이 두팀과도 무승부로 손을 잡게 됐다. 이렇게 송일팀과 이기고 상해와 대련팀 및 천진팀과도 빅자 우리들한테는 알게 모르게 자만정서가 나타나게 됐다. 그 원인은 갑A의 제1집단군이라 할 수 없는 산동노능과 중경융흠팀이란데서 기인된듯 싶다. 모두가 알다싶이 산동과 중경과의 두번의 경기에서 연속 졸전을 치렀고 나도 “샤커(下课)”이란 소리를 듣게 됐다. 그것을 검토해 보면 아마도 감독으로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냉정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또한 대 천진팀전에서 팀의 약점이 드러났음에도 계속 그 약점을 시정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 두 졸전을 치른 후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냉정한 자세로 진영체계 및 기전술응용을 재삼 검토하면서 경기마다 신경을 쓴 결과 과연 사천전흥팀과 요녕팀과는 이기고 북경국안과는 비기는 결과를 낳게 됐다.

전 9라운드에서 제일 잘 치른 경기라면 물론 사람마다 보는 견해가 다르겠지만 감독인 내가 보건대 결과는 요녕팀과의 경기가 제일 좋았고 경기풍격을 보면 아마도 대 상해신화팀전,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북경국안팀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다.

그리고 두번의 졸전에 대해서는 우선 감독인 내가 잘 검토하고 다음에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으며 축구팬들한테 죄송함을 재삼 밝히는 바이다. 또한 나의 감독직에 대해 이전에도 언급한적이 있지만 팀이 계속 부진을 겪는다면, 다음 더욱 훌륭한 감독이 나타난다면 나는 언제든지 자리를 내줄 용기가 있다.

허나 경기에서 실패란 피면하기 어려우며 상승장군이란 있을 수 없듯이 갑A 의 중간집단군에 속하는 오동팀이 계속 이기는 경기를 치른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또한 계속 이긴다면 대련만달팀이지 오동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될수록 적게 패하고 많이 이기는 경기를 치르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신진들을 많이 단련시킬 것이지만 축구협회컵 경기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치러 나갈 것이다.
총적으로 보아 우리는 제1단계의 경기에서 기본상 예정된 목표에 도달했으며 경기결과에도 만족하게 된다. 한편 경기에서 영원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갑A보존을 완수하면 갑A우승을 노리게 되고 거기서 성공하면 또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을 노리는것이 모든 축구인들의 욕망이다. 그렇다. 축구에서는 영원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김철균 대필 《연변일보》  1999년 5월 17일

싸리나무 한가지 꺽기 쉬워도 아름드리나무는 꺽지 못하리
고훈 감독과 오동군단 A B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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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호 선수가 한명도 없는 건 물론 고종훈 선수만 빼면 다른 갑A팀에 가서 주력으로 뛸만한 선수도 별반 없는 상황이지만 선수들이 하나의 군단만 형성하면 그 어떤 강팀도 타승할 수 있는 것이 오동팀의 현주소라 할 때, 국가팀마저도 평가전을 꺼려하는 오동팀의 실력요소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들어있을까?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추적과 분석을 해봤다.

단결은 힘, 단결은 승전의 담보

팀의 단결은 최은택 교수가 사령탑을 잡고 있을 때부터 지금 고훈 감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강조하고 있는 팀의 좌우명었다. 오동팀의 감독진영을 놓고 보면 각자가 자기의 맡은 부서에 따라 일을 하지만 팀의 단결에 한해서만은 감독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서로 감독하고 책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오동팀은 조선족, 한족과 외적 선수까지 뒤섞여 있다 보니 단결문제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팀에서는 단결에 불리한 그 어떤 언행도 엄금되고 있으며 일단 일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부터 잘못을 검토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지난해 시즌초기 팀에서 데려온 싸싸와 발렌티가 표현이 그닥지 않자 사회상에서는 의론이 있었고 팀 내부에서도 “숱한 돈을 받는다는 여석들이 왜 그 모양인가?” 하는 등 말썽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당시 사령탑을 잡은 최은택 교수는 “이는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지 선수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후 누가 단결을 파괴하면 작게는 벌금, 크게는 경기참전권 취소 등 일련의 제도를 내왔다.

그 후부터 선수들은 경기에서 지는 등 일에 봉착하면 먼저 자기의 잘못과 실수부터 검토하군 했다. 특히 지난번 대 중경융흠팀과의 경기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도 참답게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단결제일을 강조한데서 그것이 사천전흥팀과 요녕팀을 타승할 수 있는 중요한 활력소가 될 수 있었다.

뜨거운 혈형 “오동형”

사람의 혈형은 A, B, O, AB 등 네가지형으로 나뉜다. 하다면 각종 혈형으로 군단을 이룬 오동군단의 총체적 혈형은 과연 어떤 형일까? 그것은 아마도 “오동형”이라고 명명함이 지당할 것이다.

사람들의 인상속에 훈련장과 경기장에서의 고훈은 엄한 감독으로 통하지만 생활속의 고훈 감독은 인정이 그렇게도 많은 자애로운 사나이었다.

그한테는 한권의 특수한 수첩이 있었다.

김청 : 1977년 11월 29일생
이광호 : 1971년 9월 16일생
왕광위 : 1978년 1월 6일생

이렇게 오동군단 모든 선수들의 출생 연월일이 기록돼 있다. 감독진에서 선수들한테 보내주는 생일선물은 근근히 생일축하 케이크에 불과하지만 감독과 선수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다. 외적선수에 한해서는 워낙 블라이마가 팀에 대한 기여도 크고 집에 자식이 많은 등 상황에 근거하여 크고 좋은 집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선수들의 정서에 영향이 생긴다는 점을 감안해 졸라와 테니한테도 똑같은 집을 주고 아내와 자식까지 데려오게 했다. 아니나 다를가 올해초 얼마간의 불만이 있던 졸라 선수도 인차 안착하고는 상한 팔에 붕대를 감고서도 열심히 경기에 뛰어들고 있다.

선수들의 생활을 돌볼줄 모르는 감독은 감독자격이 없다는 것이 현임 고훈감독이 신조이다. 팀이 일단 봉페식 훈련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집으로 다녀올 수 없게 됐지만 고훈 감독은 특수상황은 특수하게 처리한다.

얼마전 졸라의 안해가 출산했다. 그녀를 놓고 말하면 만리타향에 와있는 몸이라 친인도 없고 언어소통도 안되기에 남편의 도움이 몹시 필요했다. 고훈 감독은 인차 졸라선수의 고충을 헤아리고는 그더러 가끔씩 집에 다녀오게 했다. 과연 그가 훈련과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독의 관심에 대해서도 몹시 감격해하군 했다.

오동군단의 애향심

고향을 사랑하지 않을 선수가 그 어디에 있겠소만 소수민족 주축으로 이뤄진 군단 – 오동팀 건아들의 애향심은 특별하다. 조사에 따르면 팀의 주력선수 거의 모두가 아무리 높은 보수를 준다고 해도 다른 그 어떤 팀으로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음식습관, 언어소통 등 원인으로 다른 팀에 가서 적응하기 힘들거나 다른 팀에서도 잘 써주지 않는 점도 원인으로 될 수 있지만 그것보다 고향축구를 위해 힘다하려는 것이 오동팀 선수들의 최대 소망이다. 하기에 고향을 떠나면 마치 축구생애가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선수들마다가 최선을 다하는 기적을 낳군 한다.

이는 또한 선수들한테 무한한 애향심을 불러 일으키는바 부모와 선수들 사이 그리고 선수와 축구팬들 사이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하기에 30만명을 좀 웃도는 작은 연길시건만 오동팀이 경기가 있다 하면 수만명씩 경기장에 모여들 수 있고 선수들 또한 고향의 부모형제 앞이라 그들의 응원에서 자신심과 용기를 얻고 열심히 경기와 훈련에 투신하기에 국내이적 선수들도 일단 오동군단에 오면 명선수가 되고 스타가 되는 것이다. 오동팀 선수들의 정신에 감화되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력진영에 들수 없는 망신도 하니까 100%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실례로 이전의 황경량이 그랬는가 하면 오늘의 왕해파가 그렇게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제실력이 보잘 것 없고 인구가 적은 지구에서 무어진 오동팀이 6년간아니 갑A에서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원인에 대하여 고훈 감독의 기발한 기전술응용 등 여러 가지 실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책략과 조치도 모두 팀 전체를 하나로 묶어세우는데 귀결되는바 그 어느 환절도 단결, 박투, 헌신과 응집력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싸리나무 한가지는 꺾기 쉬워도 아름드리나무는 꺾을수 없는 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5월 24일

낙낙장송 큰 나무도 다듬어야 동량된다
길림오동팀 고훈감독의 신진양성 관리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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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이란 무엇인가? “우리 말사전”에 따르면 그건 건축에 쓰이는 대들보를 일컫는 말이다. 하다면 매 하나의 애목이 동량으로 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이런 가설로 오동팀의 신진 양성 및 그 관리에 대해 진맥해본다.

팀의 운명과 신진양성

주지하다싶이 길림오동팀은 그 지리적 위치와 경제상황 및 등 여건으로 외적 선수와 국내 선수 영입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는 구단으로 이는 축구를 혹애하는 연변인들의 심리와는 크게 모순된다. 가령 연변에 오동팀마저 없다면 이 곳의 정신문화생활도 크게 공허하기 마련이다. 이를 감안해 연변 축구구락부 및 오동구단의 주요 과제가 바로 신진발견과 그에 따르는 양성관리었다.

올해 길림오동팀에서는 잠시적인 구단이익에 손상이 가더라도 대담히 신진양성에 모를 박았다. 이는 소장파 감독인 고훈의 굳은 결심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연변태생인 고훈 감독은 장기간 연변팀에서 일해왔기에 연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신진양성의 긴박감도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늘 “나도 언젠가는 감독직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 때의 팀이 크게 병든 팀이라면 나는 연변축구사의 큰 죄인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군 했다. 이로 보아 그는 눈앞의 이익과 명예만을 위해 일하는 일부 다른 감독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올시즌 중반부터 고훈 감독은 팀의 중견인 황동춘 대신 오영군을 자추 출전시키군 했다. 그러자 당시 축구팬들은 “오영군한테 무슨 싹수가 보이는가?”, “고훈 감독이 오영군을 각별히 고와하는 모양이다” 라며 그의 인격과 전술사상까지 의심했다. 허나 후일 오영군의 출전차수가 잦아짐에 따라 축구팬들은 이 신진의 유망정도와 고훈 감독의 뜻을 보아내게 됐다. 그외 블라이마를 대체한 고수춘의 기용, 졸라와 학위동을 대체한 유봉과 남호의 기용 등은 모두 “샤커”소리까지 들으면서 떠올린 고훈 감독이 대담한 시도였다.

과학적인 신진기용법

신진양성이 중요한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루 아침 사이에 신로교체를 완수할 수 없는 것이 또한 길림오동팀의 난제였다.

신진기용 방법상 길림오동팀은 매 훈련 및 경기 단계를 거쳐 신진을 고찰한 후 선수 차이를 두고 신진기용 시간을 정하군 했다.

고훈 감독이 작성한 선수서류를 펼쳐보면 거기엔 선수마다의 슈팅능력, 헤딩술, 공통제력과 경기의식 등이 점수제로 기록돼있는가 하면 그 선수들의 특점 예하면 정동칠은 득점챤스 잡기에 능하고 왕광위는 순발력과 원거리슈팅 능력이 강하며 오영군은 수비와 공격에서의 종합적 재질이 보이고 유봉은 이악스럽고 발과 몸돌림이 빠른 등으로 나열돼 있다. 고훈 감독은 이에 기초하여 상대방 실력과 결부하면서 매 한차례의 경기방안을 짰고 경기흐름에 따라 부단한 전술변화도 일으키군 했다.

그 사례로 올 4월 1일, 대 천진태달전시 경기종료를 앞두고 교체해 들어간 정동칠이 넣은 동점골, 그 후에 있은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요녕팀전에서 넣은 왕광위의 원거리슈팅과 프리킥의 성공도 다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고훈감독은 팀과 선수 매개인의 전도를 한고리로 삼고 틀어쥐였다.  곡식을 키우자면 제때에 북을 돋구고물과 비료를 주면서 김도 매고 해야 하듯이 그는 매 선수한테 모두 기회를 주고 싹수가 보이면 제때에 기용해야 한다고 인정, 특히 한 선수가 부진을 겪거나 그에 대등한 선수가 나타났을 때 이에 따르는 예비발굴과 위치바꿈이 필요했는데 올들어 왕광위의 위치를 앞으로 옮기고 문광혁을 수비선에 배치한건 모두 그런 범주에 속했다.

엄한 관리와 솔선수범

길림오동팀에 있어서 생활관리 또한 훈련이나 경기보다 못하지 않은 중요한 고리이다. 목하 축구선수의 사회적 위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그들의 주위에는 이성팬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모이기 마련, 이는 일종 좋은 현상인 반면에 선수 자신과 전반 팀을 해치는 역작용을 할 가능성도 큰 법이다.

이에 대비해 팀에서는 엄한 규장제도를 세움과 동시에 사업, 이상, 도덕에 관한 인생관교양을 강화하였다. 예하면 공중장소에서의 언행, 몸관리에서의 삼가할 점, 훌륭한 애정관 수립 등으로 말이다.

동시에 규장제도 집행상황은 추호의 여지도 없었다. 한번은 진강 선수가 몰래 맥주를 마시다가 고훈 감독한테 들통나 호된 비판을 받고도 2주일간 매일 모아산까지 왕복으로 뛰는 처벌까지 당했다. 또한 선수들이 말미를 얻지 않아도, 식사 및 취침 시간을 어겨도, 특히 정한 양의 음식을 낭비해도 그에 해당한 처벌을 면치 못했는바 모든 스케쥴이 일절 군사화되었다.

한편 이 모든 것은 감독의 솔선수범이 필요했다. 고훈 감독은 워낙 친구가 많은데다 주량도 큰 사나이었다. 하지만 감독직을 맡은 후 술좌석 친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술을 절제했고 될 수 있는한 자기의 숙소에서 선수들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외출과 외박은 극력 삼가했다. 또한 취재접수시나 공중장소에 나설 때면 항상 옷차림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자기의 모든 소행이 전반 팀의 형상과 연관된다는 것을 시시각각 념두에 두었다.

따라서 그외의 감독진 성원과 선수들도 자연히 자기의 직업도덕을 두고 항상 유의, 오동팀 상하의 이런 행동은 팀의 형상수립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놀게 했다.

그리고 최근 몇년래 오동팀 선수들한테는 마약투여나, 이성과의 스캔들은 물론 흐지부지 술에 취하는 선수도 없었으며 모두가 내지의 다른 팀 선수들에 비하면 아주 순결하다는 평가를 받군 했다. 이는 그닥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선수들로 구성된 집단이라 할 때 생활도덕 규범상의 일대 변혁이며 프로축구팀 관리에서의 귀중한 경험축적이 아닐 수 없다. 《연변일보》   1999년 11월 29일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인간 고훈과 그의 정감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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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시즌에 고훈 감독이 이끄는 길림오동팀은 “거물사냥군”으로, 중국축구의 갑A무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킴과 아울러 사상 처음으로 축구협회컵 4강에 진출했으며 소장파 감독인 고훈 역시 두번이나 국내 권위성이 있는 스포츠 전문지에서 선정한 최우수 감독으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듯 일련의 자랑찬 성과앞에서 고훈 감독은 오히려 더욱 차분한 모습이다. 그는 오동팀과 자기의 모든 것이 성공과 실패가 동반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한쪽에만 매달리다 보니 다른 한쪽은 늘 부끄럽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이었다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인간의 삶이란 사업과 가정이 항상 병존되기 마련, 하지만 일절 가정의 모든 것을 포기한채 축구에만 신경써온 인간 고훈의 삶 – 다른건 다 제쳐 놓고라도 그는 적어도 아들 학파한테만은 합격된 아빠가 되지 못했다고 자탄했다.

일찍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고훈은 가정에서의 자기의 의무에 충실히 잘해 보려고도 했다. 헌데 그 해에 겨우 강등을 면한 오동팀, 그는 어깨위의 중임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동팀을 갑 A 에서 떨어지지 않고 굳건히 생존하게 이끌자면 당분간 계속 가정이나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8년 시즌이 끝나자 미처 피로도 채 풀기도 전인 20여일만에 팀을 거느리고 동계훈련에 들어갔고 동분서주하며 외적선수 고찰도 했으며 남먼저 조경훈련기지로 진주하여 팀 전체가 1차적으로 체능시험에 통과되게 했다. 결과 길림오동팀은 1999년 시즌이 시작되자 첫 스타트를 멋지게 떼여 연속 무패행진을 할 수가 있었다.

팀이란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시즌 제5라운드와 제6라운드에서 길림오동팀은 남한테 허점을 잡혀 산동노능과 중경융흠과의 대결에서 참패를 당했다. 헌데 그 때인즉 상해의 여동생한테 가있던 아들 학파가 사연에 의해 거기에 더는 있을 수 없게 됐다. 이는 아버지인 고훈으로 하여금 무척 골치가 아프게 했다. 이런 일은 워낙 아빠인 고훈이 직접 나서서 처사해야 했다. 하지만 2연패의 후유증으로 전반 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판에 개인의 일 때문에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 고성희한테 재차 부탁할 수밖(후에 녀동생이 학파를 책임지고 북경에 전탁시켰음)에 없었다. 후에 길림오동팀은 과연 존엄과 사기를 되찾고 대 사천전흥팀전과 대 북경국안팀전 그리고 대 요녕팀전에서 2승 1무로 “거물사냥군”의 본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가령 감독인 고훈이 개인정감에만 빠졌더라면 오동팀의 경기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한편 고훈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었던만큼 불안과 동요가 생길 때도 가끔씩 있었다. 지난해 시즌의 제10라운드 대 심수평안팀전이 있은 후 고훈은 처음으로 사직의 뜻을 내비쳤다. 그 때 그는 확실히 지쳐 있었으며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딘가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훌륭한 감독이 되지 못할 바엔 훌륭한 아빠라도 돼보자는 것이 그 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고훈은 팀이 역경에 처할수록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가장 비겁한 행위라고 인정했다. 물론 고훈도 자기보다 더 훌륭한 감독적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하학”할 담력과 준비가 돼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적으로 제기되고 논의돼야 하며 적어도 팀의 사기나 안정을 되찾아준 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수차 있었다. 특히 축구협회컵 대 산동노능과의 준결승, 제2회합 경기는 길림오동팀한테 있어서 1965년 이래 재차 전국급 경기에서 우승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헌데 애써 준비했던 경기에서 최후 연장전에서의 경기종료 2분을 앞두고 상대방한테 동점골을 허락해 홈장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면 원정팀이 이긴걸로 한다는 축구협회의 규정에 의해 결승권을 상대방한테 넘겨줄 때 고훈은 형언할수 없는 아픔이 온몸으로 하여금 전률케 했다. (주: 그해에 산동노능팀은 과연 중국축구협회컵의 우승보좌에 올랐음)

축구인 생애에 전국우승을 할 기회가 과연 몇번이나 있단 말인가!

이날 밤 고훈은 수년간 입에 대지도 않던 술병을 꺼내들었다. 안주도 없이 위스키의 병뚜껑을 연 그는 그대로 입에 대고는 꿀꺽꿀꺽 굽까지 바닥이 나게 깡그리 마셔버렸다. 그러나 선수들을 원망하거나 질책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실력차이가 엄연한 경기에서 선수들도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산동노능팀이란 우승후보도 별 것이 아니라는데서 얼마간의 희열도 맛봤고 자신심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25일 새천년을 일주일 앞두고 광동성 조경의 훈련기지로 향하는 고훈은 또다시 시간의 긴박감을 느꼈다. 외국인감독이 쓸어 들어오는 중국축구계의 현실, 고훈은 또다시 신들메를 조이고 여느 감독보다도 더 생각하고 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아들 학파한테 관심을 보다 더 돌리고…

하지만 고훈의 이러한 가정사업계획은 또 한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변일보》   2000년 1월 24일

축구인의 재도약 꿈꾸며
오동팀 전임감독 고훈 축구왕국 브라질로 향발

10일, 길림오동팀의 전임감독 고훈씨가 드디어 축구인생에서의 재충전을 목적으로 연길을 떠나 축구왕국 브라질로 향발했다.

일찍 “이 내 남아의 한생을 축구에 바치리라”고 굳은 결심을 다져왔던 고훈씨, 다년간 오동팀과 함께 중국 축구무대에서 남정북전하면서 축구에 혼신을 쏟았고 최은택 교수의 뒤를 이어 재차 오동선풍의 “계렬브랜드”인 “거물사냥군” – 오동팀을 지휘했던 고훈씨이다.

하지만 세상의 풍운조화란 예측키 어려운 것, 새천년 시즌초기 오동팀이 겪은 부진은 끝내 억대우같은 사나이었던 고훈씨로 하여금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병상에서 몸부림치게 했다. 인생의 갈림길 – 축구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 하는 선택 중에서 고훈씨가 골라잡은 것은 그래도 축구였다. 그만큰 그의 인생은 축구와 끈끈한 인연을 맺았고 더는 떨어질 수가 없었다.

“한국의 352전법이 중국에서 큰 소리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는 한국이나 중국을 포함한 전반 아시아 축구가 기술축구 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축구인으로서의 나는 아직 젊고 더 배워야 하며 연변축구계에 새로운 축구사상을 주입시킬 사명감이 있다. 이는 어려운줄 알면서도 끝까지 브라질고찰연수를 선택하고 고집한 이유이다.”

이번에 고훈씨를 초청한 브라질측은 상파울루 이로만축구클럽이다. 고훈씨에 따르면 이 축구클럽은 브라질내에서 실력있는 축구팀이 있는 외 감독대오와 모든 훈련 및 경기 시설이 비교적 완벽한바 고찰과 연수에 대단히 유리할 것이라 한다.

또한 브라질의 기후상황으로 보아 축구운동을 펼침에 있어서 지금부터가 가장 좋은 계절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브라질행을 위해 고훈씨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지난 8월부터 출국신청을 했지만 번번히 여건이 풀리지 않아 북경에만도 8차 다녀왔다.

“순 자비로 출국연수를 떠나는 이는 중국축구계에서 아마 내가 첫 사람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조금도 후회같은 건 하지 않는다. 축구감독한테 있어서 성공과 실패만이 있다고 할 때 성공하는 비결이란 오직 부단히 배우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훈씨의 브라질연수기간은 약 1년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연수를 계기로 고훈씨가 재차 중국축구계에 새로운 돌풍을 말아올릴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연변일보》  2000년 11월 13일

70일 - 축구왕국 브라질에서
원 오동팀 감독 고훈씨의 해외축구견문기

조선족축구인 고훈씨가 해외축구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 약 1년간을 목적으로 브라질연수행을 떠난 고훈씨였으나 브라질내에서의 프로 1부 경기의 결속, 국내에서의 처리해야 할 몇몇 사항 등으로 하여 원 계획보다 크게 앞당겨 귀국했다.
비록 70여일이란 짧디 짧은 해외연수였건만 그 70여일 사이 그가 보고 느낀 세계축구조류와 브라질의 축구분위기 – 고훈이 받은 감수는 실로 대단히 컸다

장시간의 비행끝에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하여 숙소에 여장을 푼 이튿날부터 고훈씨는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개최한 축구고급감독 강습반에 참가, 강사들로는 국제축구연맹에서 파견한 고급강사와 브라질 본토의 유명한 축구감독 10여명이 됐다. 강습내용은 경기에서의 기전술구사, 후비력 양성에서의 인재발견 및 기둥선수양성 등이었다.

강습반에서 고훈은 기전술구사에 대한 강의도 의미심장하게 들었지만 후비력양성에 대한 주요 환절과 세계축구의 흐름세에 대해 그 마디 마디를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으면서 그 전부를 상세하게 필기를 하기도 했다.

강습심도가 깊어짐에 따라 고훈씨는 연변의 후비력양성수단과 그 방법 및 그 환경에 대해 재반성해보게 됐다. 남들이 다 한다는 후비력양성절차, 연변축구는 왜 청소년시기에 우쭐하다가 성년기에 와서는 남한테 뒤지는가? 외국의 선진축구가 연변에서는 어느 정도 실행되고 있으며 아직 존재하는 치명적인 허점은 무엇인가 하는것 등등이었다.

강습반이 끝나자 고훈씨는 브라질에서 유명한 축구클럽들인 싼토스클럽, 상파울루클럽, 포르투갈클럽, 고린챠스클럽 등을 돌면서 브라질의 축구환경, 클럽경영 및 프로선수들의 직업자질 등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축구클럽은 1선팀 외 2선팀과 3선팀까지 보통 있었는데 그런 팀들에서 1선팀에 정품선수를 수송하는 것은 중국과 대체로 비슷했다. 그리고 비교적 큰 축구클럽들은 일반적으로 홈경기장 1개, 5 - 6개의 훈련장과 80-90명의 선수대오를 갖고 있는 상황, 1선팀 즉 프로 1부(중국의 갑급팀에 해당)의 선수로 되자면 만명당 1명꼴로 겨우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경쟁이 치열하기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었다. 특히 펠레, 리와우도 등 세계급 정상스타를 산출해낸 싼토스클럽은 그 경제력이나 감독진영 및 선수대오가 아주 막강하여 브라질 내의 프로선수 거의 모두가 이 클럽에서 선수로 뛰어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선수자질은 우리 중국과는 천양지차를 보였다. 사회치안이 비교적 어지러운 브라질 환경에 비해 프로선수들의 문명의식과 직업도덕수준 대단히 높았다. 훈련시간만 되면 모두 절로 옷을 바꿔입고 훈련하는 모습, 감독이 지켜보건 말건 마찬가지었고 강요나 책벌을 당하는 선수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고훈은 진짜 차원이 높은 구단일수록 감독의 선수관리가 쉽다는 것을 절감, 그도 그럴 것이 고훈이 본 브라질 축구클럽의 감독들 거개가 선수들한테 훈련내용이거나 전술포치에 대해 한번 말해주면 감독으로서는 그 것으로 끝이었고 그 다음은 선수들 자신이 열심히 훈련하는 것이었다.

다음 프로축구경기의 열광 정도는 우리 중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화끈한 분위기었다. 축구라 하면 우선 정부차원의 중시부터가 컸다. 매번 국제경기나 프로 1부의 8강전같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정부에서 이 날을 휴일로 정하고 모두가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농후한 축구분위기는 경기장뿐이 아니었다. 도시의 건물과 길옆의 공터만 있어도 거기에서 공차기를 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고 휴일이면 직장끼리, 가족끼리 야외에서 축구유희를 했으며 동료 5-6명만 모여도 축구게임이 조직되군 했다.

한편 열광적인 축구분위기와는 달리 브라질의 사회치안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비교적 어지러웠다. 한번은 고훈씨가 당지 축구인들과 함께 상파울루 해변가에서 산책을 하는데 불현듯 흑인장정 3명이 나타나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라고 협박,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고훈씨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돈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내놓았었다. 액수가 꽤나 되는 금액이었다. 

후에 숙소에 돌아와서 동료들한테 물어보니 그들의 말인즉 외출할 때면 남한테 줄 돈을 얼마간은 쉽게 꺼낼 수 있는 호주머니에 넣으며 다른 돈 역시 몸의 여러 곳에 감추고 다녀야 한다면서 강도를 만나면 적은 돈이나마 꼭 줘야 안전하다는 것을 들려주더라는 것이었다.

고훈씨의 브라질연수는 생각밖으로 빨리 끝났다. 약 70일간이 지나니 브라질 내의 1부리그가 끝나고 축구경기가 별로 없는데다 그냥 관광이나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고훈씨는 아마죤강 등 유명관광지나 돌아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고훈씨가 북경 수도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연길행 비행기에 오르자 마침 음력설을 쇠려고 고향 연변으로 향하는 절강녹성팀의 현춘호, 김청, 천학봉 등 10명의 조선족선수들이 비행기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순간 고훈씨의 감정은 희와 비의 회포가 주마등마냥 흘러지나갔다. 타관땅으로 팔려간 뒤 그래도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어 연변으로 향하는 선수들, 고훈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슬그머니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연변일보》   2001년 2월 12일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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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FC 특집보도]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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