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한국용병 박순배 - 제비마냥 날랜 반도사나이

지난 5월 18일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골을 냈던 오동팀의 한국적 박순배 선수가 갑A리그의 휴전기간에 잠간 사라졌다가 다시 연변오동팀 선수로 중국축구갑A시즌  제2단계의 경기에 재출전했다. 날랜 제비마냥 잔디밭 전체를 주름잡으며 수시로 상대방의 문전을 위협하는 반도사나이ㅡ 축구팬들은 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환성을 올렸다.

올해 30살에 나는 박순배 선수가 축구생애를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그 때로부터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오면서 줄곧 학교축구팀 선수로 활약했고 한국에서도 인정해주는 체육최고학부였던 인천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후 부터는 할레루야, 포항스릴로스 등 실업팀과 프로팀들을 드나들면서 맹활약했었다. 그 기간 그가 넣은 골만 해도 50개가 실히 된다고 한다. 이는 중앙공격수도 아닌 미드필더 선수라고 할 때 결코 적은 골개수라 할 수 없다.

박순배 선수는 오래 전부터 중국갑A무대에 조선족 위주의 축구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참말 기쁘다면서 같은 민족이어서 언어와 음식습관이 통하고 선수들이 친 형제처럼 뜨겁게 대해 주기에 제 집에 온듯한 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연변팀에서 원하기만 하면 다른 팀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연변팀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 중국 갑A리그에 뛰어든 한국적 선수들 가운데서 자기보다 우수한 선수들이 있을테지만 경기장에서만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붙어 연변팀의 한몫을 맡기도 하고 자아가치도 실현할 잡도리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 와서 볼을 차는 기분이 어떻느냐”는 물음에 박순배 선수는 관중이 많고 축구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으며 특히 경기장 잔디가 볼차기에 제격인 반면 축구계의 부정기풍, 심판원의 “검은 호르래기”에 대해서는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팀 전체가 똘똘 뭉쳐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를 치른다면 강팀이 아니라 강팀의 할배가 와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박순배 선수는 이미 결혼하여 2살짜리 아들까지 있는 몸이다. 얼마전 연변축구구락부에서 아파트를 내주긴 했지만 여기에서 살림을 차릴 타산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8월경에 아내가 와서 맘에 든다고 해야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볼을 찰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직 체능이 별문제이기에 이제 5년은 문제없을 거라며 박순배 선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또한 그는 그 것을 위해 술담배를 절제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포츠》   1998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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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들이 보는 인기스타 – 고종훈

연변오동팀 하프진의 고종훈 선수라면 연변은 물론 전국의 축구팬들이 다 알아주는 유명한 인기스타이다. 전반 경기장의 공방절주에 따라 미드필더선을 통제하면서 수시로 오동팀 공격수한테 슈팅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팀의 노장 ㅡ 고종훈, 허나 선수를 떠나서 경기장밖의 인간 고종훈을 아는 이는 별반 없을 것이다

일전 그것을 파헤쳐 보려고 고종훈 선수의 몇몇 친구들을 만나보았다.

1965년 고씨가문 3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난 고종훈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늘 어른들의 총애를 받군 했다. 특히 축구에 장끼가 있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축구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고종훈이 축구생애를 시작한 것은 소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것을 계기로 늘 학교팀의 미드필더 선수로 활약한 그가 볼을 어떻게 찼는가 하는 것은 두말이면 잔소리었다. 하지만 그는 볼을 잘 찬다 하여 뽐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늘 친구들과 함께 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도 하고 씨름도 하군 하면서 어울리군 했다. 씨름을 할라치면 당시 고종훈의 상대가 없을만큼 그는 씨름에도 장끼가 있었다. 그만큼 고종훈은 어릴 적부터 덩치와 기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기운이 세다고 하여 약자를 업신여긴 적이 없었다. 아니 늘 약자들을 돌봐줬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한번은 서로 한동네에서 사는 한 애가 힘을 턱대고 늘 다른 애의 먹을 것이나 연필같은 것을 빼앗아내는 것을 고종훈이 발견하게 되였다. 이에 고종훈은 그 애를 찾아가서 “너  힘으면 어디 날 한번 건드려봐라. 작은 애들과 으시대는 것도 남자냐?!” 하고 꾸짖으면서 그 애더러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했다.

용정1중을 졸업한 고종훈이 길림성청년팀에 선발돼 연길에 와서 볼을 차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였다. 그 때로부터 전업선수로 된 고종훈은 그토록 고강도 훈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일요일마다 집으로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집으로 갈 적마다 부모한테 효도하지 못해 죄송스럽다면서 바깥일이고 부엌일이고 닥치는대로 했다. 그리고 달마다 얼마 안되는 노임을 잘라서는 가난한 부모님한테 섬기군 했다. 어릴 적부터 술담배와 담을 쌓은 고종훈은 워낙 식당같은 곳으로 다니기 썩 달가와하지 않는 성미었다.  또한 웬간하면 친구들이 식당놀이를 하자고 손을 잡아 끌어도 가볍게 거절하군 했다. 허나 일단 식당으로 가기만 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줄뿐만 아니라 늘 자기가 값을 치르군 했다.

고종훈은 자기를 배워준 스승한테도 등한시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1985년 그는 처음으로 국가청년팀 일원으로 출국하여 세계청년축구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국가청년팀은 8강안에 드는 훌륭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는데 고종훈이 직접 넣은 골을 없었지만 그가 패스하여 고홍파가 넣은 골이 많았음)

돌아온 후 고종훈은 담임교원들을 모셔 오고는 자기의 오늘이 있게 된데는 전적으로 선생님들의 덕분이라면서 술을 따라 올렸으며 그 후에도 선생님들의 곤란에 대해서는 될수록 해결해드리느라 무척 애를 써주군 했다.

친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었다. 1991년 한친구가 가옥사용증 수속을 할 때 돈이 없어 안달아하자 선뜻이 돈을 대주었고 1993년에도 한 친구가 상점을 차릴 때 자금이 딸려하자 선뜻이 자기의 돈을 선대해 주었다. 그것은 고종훈한테 그 무슨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 때 그의 봉급이래야 고장 수백위안일 따름이었다. 또한 고종훈은 매번 홈장경기 때마다 돈으로 수십장의 입장권을 사군 한다. 한두번도 아니고 1년에 10차씩 그러노라면 신경질도 날 일이지만 그는 항상 “나를 믿고 그러는데 고마운 일이지”하며 시무룩히 웃어보이군 했다.

1994년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고종훈은 지금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원인 아내 김향화씨와 아들 고준익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양측 부모한테 효도하는 한편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 매번 원정경기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는 아내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한편 꼭꼭 거리쇼핑이거나 가족외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그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군 했다. 이에 아내 김향화씨 역시 남편의 사랑에 무척 감격해하면서 남편이 훈련할 때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표달하군 했다.

고종훈은 축구생애가 비교적 긴 사나이다. 그 비결이 첫째, 술담배와 인연이 없는 것이고 둘째, 가리는 음식이 없으며 셋째, 몸관리를 잘한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는 몸관리에 대해 대단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여 고종훈이 경기에서 상해 치료받은 적은 있어도 병으로 아파 치료받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고종훈 강하고도 무뚝뚝한 사나이 ㅡ 허나 그 속에는 인정과 후더움이 흐르는 인간이다. 하다면 우리의 매개 선수들은 인간 고종훈한테서 무엇부터 배워야 할까?  권영동 등 구술 《스포츠》 1998년 8월 10일

2.PNG황동춘- 안해와 함께 려행을 하던 나날

지난 10월 26일, 올해의 갑A보존을 실현하고 비행기에 앉아 심양으로부터 대본영인 연길로 돌아오는 오동팀 선수들은 저마다 솟구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휴전기간에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효도하겠다는 선수, 해마다 기다림에 지친 아내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선수 … 순간 기창에 기대어 창밖을 주시하던 황동춘 선수도 무등 가슴이 설레이었다. 아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신이 아내한테 너무 등한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시절에 다정하게 유보도 산책을 한 적도 한번 없고 결혼 후에도  매달 노임이나 갔다 주면서 집을 여관처럼 여겼던 자신, 그는 점점 머리가 뜨거워났다.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아기도 못갖게 하구. 미란이 너무 너무 미안해. 이번 휴전기간에 꼭 잘해줄테야)
……
집으로 돌아온 황동춘은 널직한 집안을 혼자 지키는 아내를 정색해서 바라봤다. 이에 의아쩍어 어쩔바를 모르는 아내 안미란양.

“당신 왜 이러죠? 혹시 기분잡치는 일이라도…”

“아니,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그래. 이번 기회에 우리 한번 남방여행이나 좀 해볼까? 려행코스는 광주 ㅡ 주해 ㅡ 심천 ㅡ 대련 이렇게 정하고 말이야.”

“어머나, 당신 그게 정말인가요? 아이참, 좋아라. 해가 서쪽에 뜨겠네요.” 안미란양은 기쁜 나머지 어린애처럼 퐁퐁 뜀질까지 했다.

11월 1일, 연길에서 비행기에 오른 황동춘/안미란 부부는 다시 북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광주로 향했다.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 비행기밑으로 밀려 오고 밀려 가는 솜뭉치같은 구름떼들…

“여보, 저 구름을 좀 봐요. 마치 솜을 한벌 펴놓은 것 같군요. 뛰어내려도 상할 것 같지 않군요.”

“허허허… 그럼 한번 뛰어 내려 보시지.”

“나쁜 사람, 왜 저만 뛰어 내리겠어요. 뛰어 내리면 함께 목을 끌어안고 뛰어 내려야죠.” 광주까지의 두시간 동안 안미란양은 쉴사이 없이 재잘거렸다.

광주에 도착하자 모든 것이 이곳 북방과는 딴 모습이었다. 길가의 화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난 그대로였고 겨울을 모르는 사람들은 울긋 불긋한 여름옷 차림으로 상가와 공원으로 드나들었다. 아빠엄마의 손목에 끌리어 아장아장 걸어가는 애들을 볼 때마다 각별히 귀여워하는 안미란양은 광주에 가서도 마찬가지었다.

“여보, 저 애를 봐요. 얼마나 기특해요.”

“애가 그렇게 부러워? 우리도 아들을 낳아 나같은 축구선수로 키워볼까?”

“쳇, 또 저처럼 색시가 생과부노릇을 하라구요?!” 하지만 그녀의 말속에는 조금도 악의가 담겨 있지를 아니했다.

이렇게 그들 부부는 광주, 주애와 심천에서 수많은 행복의 발자취를 남겼다. 주강의 유람선위에서, 주해의 원명원 모형 건물앞에서 심선의 해수욕장과 민속촌휴가지에서…

11월 8일, 그들 부부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대련으로 왔다. 대련의 발해명주호텔에서 투숙등록을 할 때 황동춘의 신분증을 보던 호텔 카운터의 아가씨는 황동춘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연변오동팀이 황동춘선수가 아닌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래요? 황동춘, 얘들아, 이 분이 바로 연변에서 온 축구스타 황동춘씨란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몰려드는 호텔홀의 소남소녀들, 싸인해 달라는 이들과 기념사진을 남기자는 이들로 하여 황동춘은 한동안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한편 축구선수로 된 긍지로 하여 가슴이 뿌듯한 순간이기도 했다. 대련에서 그들 부부는 또 연변팀의 대련적 선수인 오영군과 그의 부친도 만났다.

“동춘형, 이전엔 대련에 왔어도 경기 때문에 언제 한번 시름놓고 놀아본 적이 있었소? 이번에 잘됐소. 이 아우가 가이드로 나설테니 우리 한번 통쾌하게 놀아 보기오.”

“영군동생, 그 성의가 고맙네만 이제 휴가일도 며칠 남지 않았소. 일찍 집으로 가야 하겠으니 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이 말에 안미란양도 한마도 덧붙였다.

“그래요. 동춘씬 아직 부모님도 찾아뵙지 못했어요.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이해하여 주세요.”

“그래그래, 사람이란 아무리 잘 되어도 부모를 잊어서는 안되지”

머리를 끄덕이며 하시는 오영군 부친의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오영군의 부친은 손수 차를 몰고 그들 부부를 공항까지 실어다 주었다.

황동춘/안미란양을 실은 보잉 737비행기는 대련공항에서 치솟더니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10여일간의 즐거운 여행, 허나 그 것으로 아내 안미란양에 대한 황동춘의 사랑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판부족이었다. 이제 언제면 이들 부부한테 또 이런 기회가 차례질까? 그것은 아마 황동춘의 2세가 태어난 후에나 봐야 할 일일 것 같다. 《스포츠》   1998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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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팀 신진 김청 -고향사람들의 축복에 목메여

지난 10월 28일 오후 어슬녘의 화룡시 동성진 홍성촌 제5촌민소조 마을이다. 마가을의 땅거미는 한해 농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마을에 조용히 찾아들었다.

집집의 굴뚝들에서 저녁짓는 연기가 몰몰 피어 올랐고 하룻일에 지친 남정들은 밥상에 마주 앉아 반주술을 기울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집집들을 누비며 떠들썩해댔다.

“김청형이 돌아 왔어요.” “오동팀에서 볼을 차던 김청형이 돌아 왔어요.”
……
뭐, 김청이 돌아왔다구?!

사람들은 수저를 들다말고 김청네 집으로 찾아들었다. 김청의 형이며 촌민소조장 김호를 첫 사람으로 김청의 친구들과 농민 축구팬들 그리고 동네노인들도 몇분 잘 되었다.

“얘, 김청아, 온다고 미리 알렸더면 우리가 닭이라도 잡아놓고 기다렸을게 아니야!”

“이것 봐라, 우리 촌에 영웅이 나타났는데 어찌 째째하게 닭만 잡겠어? 돼지나 소라도 잡아야지 안그래?!”

“그래그래 그렇지, 몇년 전에 보성촌의 김광주가 소문놓더니 지금은 우리 홍성촌의 김청이 또 소문을 놓다니. 우리 동성진은 축구인재가 나오는 고장인 모양이구려.”

“글쌔 오동팀에서 경기에 제일 많이 참가한 선수가 이광호이구 그 다음엔 너 김청이더구나. 장하다 장해!”

이렇게 김청을 붙안고 반갑다고 찧고 밯고하던 사람들은 술상에 마주 앉아 술이 한순배 돌아가자 이번에는 축구화제로 넘어갔다. 오동팀이 입은 피해로부터 시작하여 홈장에서 북경국안팀을 2 : 0으로 이긴 것이 제일 통쾌하더라는둥, 오동팀은 왜 강팀하고는 약하지 않고 약팀하고는 강하지 못하냐 하는 질문공세, 그리고 고훈감독, 고종훈, 블라이마, 천학봉…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점이 많기도 했다. 또한 촌민들의 축구관람수준도 이전의 정도가 아니었다. 대련만달팀에 대하여, 한국적감독 차범근과 이장수에 관하여 사람들은 자기나름대로 평가를 했다.
“참, 8.1팀은 중국에서 유일한 해방군팀인데 이번에 강급하게 되니 진짜 아쉽더라. 좀 봐주지를 않구 쯧쯧…”

“뭐 아쉬울 것 있어? 축구가 발전하자면 그렇게 돼야 해. 자꾸 양보볼, 인정볼을 차니까 ‘검은 호르래기’가 나타나구, 축구팬들은 의견이 많을게 아니야. 그리고 대련, 상해, 북경이 해마다 1, 2, 3등을 하는 것도 어딘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돼 있다구.”
……
낮에 농사일에 지쳤으련만 밤을 새워가며 축구화제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그들을 어찌 한낱 땅파는 농민으로만 보랴. 또한 김청이 짬을 타서 잠간씩 집에 다녀올 때에도 밭의 일손을 놓고 달려와 손을 잡아주던 그토록 인정많던 고향의 촌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김청은 어슬녁에 마을로 들어섰건만…

김청은 눈시울이 축축해나고 가슴이 뭉클했다. 고향사람들의 인정, 고향사람들의 기대ㅡ 그 시각 김청은 오직 연변팀을 위해 축구의 정상에 톺아오르는 길만이 고향사람들의 인정과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다지고 또 다졌다. 《스포츠》 1998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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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위는 장담한다- 오동팀미래의 장벽 될터

연변오동팀 주전선수들가운데서 가장 신체소질이 좋은 신진선수를 꼽는다면 아마 수비진의 왕광위란 한족선수를 꼽아야 할 것이다. 신장 1.79미터, 체중 74킬로그람 거기에 용수철에 튕길듯한 순발력과 질풍같이 내달리는 플레이 그래서 고훈 감독도 그렇고 수많은 축구팬들도 그렇고 다들 그를 미래 연변팀수비진의 가장 이상적인 적임자로 꼽고 있다.

1978년 왕광위 선수는 길림성 장춘시에서 출생, 어릴 때 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축구가 아니라 의사나 공정사같은 직업이었다. 그만큼 왕광위는 문화과 학습성적이 뛰어나 늘 전 교 우승으로 비범한 학습재주를 과시했다. 헌데 녀석이 이웃집 조선족 아이와 놀면서부터 축구에 재미를 붙였고 또 학교축구팀 선수로까지 선발될 줄이야.

아버지는 자식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무등 애를 썼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구나 학교 체육교원인 이종기(조선족)선생이 찾아와서 왕광위가 축구스타로서의 싹수가 보이니 부모들이 그의 뒤를 잘 밀어 달라고까지 청탁하자 아버지로서도 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종기 선생의 예측은 틀림이 없었다. 왕광위는 나이 14살이었던 초중 2학년 때 과연 파격적으로 직업팀인 북경부대 축구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북경부대 축구팀에서 그는 또 염승필(조선족) 감독의 눈에 들었다. 염승필 감독은 장춘에서 온 이 애숭이선수를 엄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어 그가 축구스타로 되는 길에서의 훌륭한 토대를 닦아 주었다.

그러던 왕광위 선수가 염승필감독의 소개로 연변축구팀으로 오게 된 것은 1995년초, 나이가 어린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동안 잔디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가 김청, 천학봉 등 선수들과 함께 1팀 주전선수로 부상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고훈 감독은 원래 공격선의 선수였던 왕광위를 자주 수비선에 배치, 그것은 황경량 선수의 컨디션이 내려간 원인도 있겠지만 수비선수로서의 왕광위의 싹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왕광위 선수의 진보는 매우 빨랐다. 그는 수비선의 황경량 선수를 더없이 부러워하고 탄복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황경량 선수의 경험과 박투정신을 자신의 속도, 신체소질과 연령의 우세에 맞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출중한 수비수로 자리를 굳힐 야심을 품고 밤에도 녹화테이프를 풀어놓고 황경량 선수의 대인마크술을 연구했다고 한다.

왕광위 선수는 아직 젊다. 잔디밭에서 올린 혁혁한 전과도 없고 경험과 의식 등 면에서도 아직은 부족점이 많다. 하지만 그는 전국에서도 대항력과 응집력이 제일 강하다는 연변팀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어젠가는 김광주처럼, 황경량처럼 전국에 이름을 날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잠담한다. 《스포츠》 1998년 9월 14일

“시련은 있어도 동요는 없다” - 연변축구팀 중추 동량 현춘호, 한송봉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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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현춘호
1975년 10월 1일 화룡시 용문 태생
키 : 1.77미터
선수번호 : 6번

이 글에서의 주인공인 현춘호와 한송봉은 모두 한시기 시련을 겪던 선수들이다. 그 중 현춘호는 절강녹성구단에 있을 때 “가짜볼”혐의를 받아 참전권리를 박탈당하는 치욕으로 한시기 잔디밭을 떠났던 선수였다. 타향땅 설음이란 바로 현춘호 자신이 잘 알고 있던 바이다.

“축구를 떠났던 나날의 생활이란 말 그대로 괴롭고 지긋지긋하던 하루하루였다. 안정하고 생활할 취미를 찾지 못했다. 장사를 해본다고 했으나 뜻대로 안됐고 술도 많이 마시었다. 아내를 괴롭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올들어 고훈 감독이 손잡아 줬기에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고향정이 뭔지 잘 아는 사람이다. 이제 선수생애가 몇해나 되겠는지 연변축구를 위해서 모든 힘을 바치고 싶다.”

올들어 현춘호는 세기팀의 미드필더 조직자로 활약했다. 그는 이전의 고종훈처럼 전반 경기의 공방절주를 조절하는 작용을 했다. 그한테 가장 인상깊은 경기라면 남북 8강전에서의 대 운남여강팀전이었다. 그 때 그는 키가 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효과적으로 공방절주를 통제, 특히 제2회합전에서는 경기초반에 상대방의 공세를 기본상 미드필더선에서 견제했으며 고훈 감독의 진공신호가 오르자 미드필더선을 중심으로 전반 공격을 조직하여 팀이 다득점을 함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새해엔 갑급팀들과 맞전을 하게 됐으니 유리한 점도 있고 불리한 점도 있다. 유리한 점이라면 내가 갑급행렬의 많은 선수들의 특점과 허점을 알고 있는 것이고 불리한 점이라면 필경 갑급권인만큼 을급팀과는 실력상 비교할 수가 없이 강하다는 점이다. 대문에 지금부터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훈련에 땀동이를 쏟으련다. 갑급리그에서 발을 잘 붙이는데는 나의 미드필더 중추역할도 중요하다고 할 때 슬며시 어깨의 짐이 무거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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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송붕
1982년 5월 28일 생
키 : 1.77미터
체중 : 65킬로그람
선수번호 : 8번

이 글의 다른 한 주인공인 한송봉 선수 역시 시련이 있기는 마찬가지었다. 우선 그는 부모가 다 정리실업을 당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렵게 축구선수로 커온터였다. 부모가 힘들게 번 돈으로 축구를 전공하던 나날, 남들은 용돈 1000위안씩 갖고 전지훈련을 떠났지만 그는 단돈 100위안을 갖고 근 두달씩 객지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를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웬간한 시련은 그한테 동요로 될 수가 없었다. 지난해 연변팀이 갑급진출에 실패했을 때 팀의 부분적 주력들은 이적을 신청했으나 그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연변축구가 언젠가는 꼭 갑급진출에 성공한다고 믿었으며 자기 자신 역시 돈보다는 우선 연변축구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고 느꼈던 터였다.

“팀의 주력이긴 했지만 나한테도 부족점이 많았다. 속도가 빠르지 못하고 몸놀림도 영활하지 못했다. 올들어 나의 특장을 발굴하여 부족점을 미봉하리라 맘먹었다. 그래서 고훈 감독의 지도하에 중거리슈팅에 품을 많이 넣었는데 그것이 이상적으로 잘됐다.”

한송봉은 머리로 볼을 차는 선수였다. 그는 자기가 중거리슈팅에 능하다고 해서 무작정 중거리슈팅을 날리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관건경기인 남북 8강전의 대 운남여강팀과의 1회전 때 그는 자기가 날리는 프리킥을 그대로 문대에 향해 슈팅한 것이 아니라 조금 뒤에 처져있는 김청한테 살짝 패스해줬다. 자기의 앞에 여강팀 선수들이 울바자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김청 역시 그의 생각과 같았고 눈치도 빨랐다. 그가 넘겨준 공을 김청이 슈팅을 날리는 순간 ㅡ 공은 상대방 문대안에 들어가 그대로 박혔다. 상대방이 거둬낼 수 없는 결정골이었고 2회전 승리를 위해서도 유리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지금 한송봉선수는 명년도 갑급전을 위한 훈련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갑급팀 경기에 들어선 우리가 너무나도 경험이 없다. 단지 실력이 한차원 위이고 외적선수까지 참전한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이런한 상황에서 현춘호 선수가 본보기이다. 그한테 갑급경기의 경험이 많으니 말이다. 그 밖에 그는 나이가 많지만 젊은 선수들에 비해 더욱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미드필더 통제를 잘하고 골도 잘 넣는다. 패스가 정확하고 실수가 적다. 연변팀에 있어서 현춘호 선수의 존재는 너무나도 행운이다. 어린 선수들한테 현춘호같은 선수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기자가 명년에도 계속 주장을 맡을 수 있는가고 물었을 때 그는 주장을 맡든 맡지 않든간에 주력으로서 최선을 다 하련다고 하면서 현춘호, 김청, 천학봉과 정림국 등 선수들은 주장이 아니지만 주장 이상으로 책임감이 높은 팀의 공신들이라고 피로했다.

가정상황을 보면 한송봉은 아버지 한창훈씨와 어머니 태경애씨의 아들로서 아래로 여동생 한명이 있으며 과외취미로는 음악감상과 독서이고 성격은 비교적 침착한 편이다. 《스포츠》 2004년 12월 13일
(다음기 계속)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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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FC 특집]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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