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 김철균

문영이를 졸업시켜 돈화에 보냈지만 순자는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하였다. 조선족가풍으로 보아 자식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여 결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또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며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 법이었다.

워낙 문영이가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하자 순자는 그 애더러 연길에 남게 하고 싶었었다. 그 사이에 문영의 친 아버지도 사망했기에 문영이가 구태어 꼭 돈화로 가야 한다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문영이한테 연길의 직장을 찾아주고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의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순자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장차 연길에서 결혼상대자를 찾아 혼인을 이루게 하고 싶기도 했다.

헌데 그것이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문영의 직업문제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과 훈춘의 장려 등 애들한테서는 선후로 좋은 직업을 찾았다는 희소식이 날아 왔으나 유독 문영의 일만이 풀리지 않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순자는 집의 영감과 아들네 내외, 심지어 딸네 내외들까지 집안에서 좀 활동력이라도 있다는 성원들을 몽땅 동원하여 문영의 직업을 위해 힘쓰도록 달구쳤다.

하지만 문영이가 대학본과 졸업이 아니고 대학전과생이어서인지 아니면 단위들마다 여성직원은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가정부담이 많아 단위일에 영향이 많다고 그 채용을 꺼려해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봤어도 풀리지 않았다. 또한 맡은바 업무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능력자로 소문났으나 인사배치 등 “외교활동”에 들어서는 제로에 가까운 용환영감이였고 또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큰 아들 영남이와 둘째 아들 경남이도 성미가 곧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마찬가지었다.

이렇게 순자가 한창 문영의 직업 때문에 안달아할 때 마침 그가 돈화시 화교풍습전과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이 왔다. 문영이가 공영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을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은 순자였다. 알고 보니 순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문영이의 직업보다는 그 애를 자기의 곁에 두고 싶어하는 바로 그 것이었다.

한편 순자의 친자식들은 물론 친척들과 외부의 사람들마저 “문영이한테 그만큼 잘해 줬으면 이젠 시름을 놓으라”면서 “남의 자식이란 잘해줄 때뿐이지 때가 지나면 소용이 없다. 하물며 그 애는 한족이 아닌가”고들 하였다.

하지만 남의 자식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한족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문영이는 더욱 그런 애가 아니었다.
순자는 그 점만은 굳게 믿고 있는 터였다.

순자의 환갑날 술을 붓는 문영이

1989년 10월, 순자네 내외가 환갑을 쇠게 되었다.

캡처.PNG당시 순자네 내외는 보다 조용히 쇠려고 일부러 문영이와 정수금, 중경림과 장려 등 한족자녀들한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문영이가 찾아왔고 기타 한족자식들도 약속이라도 한듯 줄을 쳐 찾아왔다. 알고 본즉 문영이는 진작 이전부터 순자네 내외의 생신날자를 알고 있었고 또 여러모로 탐문 끝에 10월에 환갑을 쇤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터였으며 또 이를 정수금 등 각지에 널려 있는 한족자식들한테 알렸던 것이었다.

순자네 내외의 환갑파티날, 순자의 친 자식들 외 6명의 한족자식이 참가하였고 또 그들이 술을 붓고 순자네 내외한테 조선족식으로 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다.

순자의 환갑파티에서 문영이는 또한 조선말로 “오래오래 앉으세요”를 불렀다.

오늘은 온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 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 아,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한족딸 문영이가 부르는 노래는 재차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으로 설레이게 했다. 그만큼 문영이의 가슴속에서 우러 나오는 노래소리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과 더불어 사랑에 넘친 진실한 것이었다.

순자의 환갑잔치날은 문영이한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무리 조선족이 친절하고 문명하며 가정이 화목하다지만 순자네같은 가정은 실로 처음 보는듯 싶었다. 순자네 내외간은 물론 아들 며느리와 딸 사위들 사이 그리고 지어는 여러 사돈들과의 사이도 그러했으며 또한 타민족인 자기들마저 가족으로 대해주면서 깊은 사랑을 몰붓는 조선족의 미풍양속은 그야말로 한족인 문영이의 가슴속에 많고 많은 스토리거리를 심어주었다.

그러한 것이 계기로 되었을까? 훗날 문영이는 직업은 의료일군이었지만 작가공부를 하고 싶었다. 자기에 대한 순자와 그 가족의 사랑을 그대로 세상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문영이한테 원래 천부적인 문학재질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 할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살아온 인생발자취 즉 한명의 불우소녀 – 연변위생학교 - “북해상점”과 조선족 김순자어머니- 이렇게 엮어진 스토리가 문영이로 하여금 작가로 되는 바탕으로 되였을까? 미구하여 문영이는 길림성작가협회의 일원으로 되었으며 성급과 주급은 물론 국가급의 간해물에도 많은 시, 수필, 산문과 실화 등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당연히 그녀의 조선족어머니 순자를 언급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2

마침내 문영이는 돈화시실험중학교의 남성교원 심엽군과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날자는 1990년 5월 6일로 잡혀졌다.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대사인 결혼식 – 문영이는 결혼날자를 정하자마자 이 소식을 우선 연길에 있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한테 알리고 싶었다. 헌데 그녀는 이 소식을 결혼식을 치르기 10여일 전에야 연길에 전했다. 너무 일찍 알리면 순자한테 더 많은 부담을 줄가봐서였다.
 
그러나 문영의 생각은 필경 짧았다. 늦게 알린 것이 오히려 순자로 하여금 더욱 힘들게 할줄은 문영이 자신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순자로서는 자기를 너무 초라하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영이의 결혼식은 5월 6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뭐고 뭐고 해도 시집가는 딸한테 첫날 이부자리만은 꼭 해보내야 조선족의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때 순자의 주장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연길시의 시장경제가 발전초기에 있었는지라 지금처럼 각종 물건이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자면 적지 않은 신경을 쓰며 여러 곳을 돌아야 살 수 있던 그런 시기었다.

순자는 큰 딸 영순이와 함께 연길시의 많은 백화점들을 반나절 돌아서야 겨우 맘에 드는 이불등, 이불안과 요감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불감과 요감을 샀다고 하여 일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문영이가 순자 본인이 낳은 딸도 아니고 거기에 한족이기에 대충 이불을 해서 보내라고 권장했다. 즉 남들의 흉내나 내며 낯가림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순자를 생각해서 하는 권장이었지만 순자는 그런 사람들의 권장대로 할 수 없었다. 꼭 이불안을 적셔 풀을 하고 그것을 해볕에 바래운 후 한뜸 한뜸 정성들여 만들어 시집가는 문영이한테 주고 싶었다. 반대로 대충하거나 친 딸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차별이 되게 해준다면 조선족민속에 어긋나거니와 자기 또한 문영이의 어머니로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순자의 주견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들은 오직 동조하는 길밖에 없었다.

헌데 이불안을 물에 적셔 풀을 한 뒤 볕에 바래우자고 보니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은 연며칠 구질구질 비만 내렸다. 여느해 같으면 비가 적을 계절이건만  그 해의 4월말은 비가 너무도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적당히 내려야 모든 것이 좋기 마련이다. 특히 파종을 앞둔 농민들을 놓고 보면 너무 가물어도 걱정이고 비가 너무 내려도 파종하기 힘들게 된다.

순자도 이젠 비가 그쳐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비가 그쳐야 이불안을 볕에 바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2-3일만이라도 비가 그쳐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순자의 속은 재가 들어차는 것만 같았다. 신을 믿지 않는 순자였건만 하늘에 대고 기도를 드렸다.

유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의 딸 문영이가 이 어미가 만들어 주는 하얗고 깨끗한 이부자리를 갖고 기뻐하며 시집갈 수 있도록 요즘 며칠만은 비가 내리지 않게 해주옵소서ㅡ
순자의 정성이 하느님을 감동시켰는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가 되어서인지 마침내 그 이튿날로 비가 멎고 하늘이 맑게 개였다. 순자는 이 때라 하고 서둘렀다. 

당시 순자네 집마당에는 빨랫줄이 있었지만 이불안같은 큰 것은 널어 말릴 수가 없었다. 마당면적이 하도 작다 보니 빨래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 넘어 옆집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이용해야 했다. 헌데 낮에는 옆 집에서 앞마당 배자문을 잠그기에 순자는 부득불 사다리를 이용하여 높이 1.5미터나 되는 벽돌담장을 넘나 들어야 했다.

순자는 하루에도 그 벽돌담장을 넘나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땅에 살짝 내려 선다는 것이 그만 발을 빗디디면서 발목을 접질렀다. 순자의 발목은 삽시에 퉁퉁 부어났다. 그날 저녁 퇴근해온 남편한테서 침을 맞았으나 인차 낫지는 않았다.

순자는 이튿날도 절뚝거리며 그 담장을 넘나 들여야 했다.

이렇게 몇번씩 해볕을 받아 이불안이 새하얗게 되자 순자는 또 그것을 개여서 방치돌우에 놓고 토닥토닥 두드려 구김살 하나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를 보고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어머니가 한족딸한테 푹 빠져 버렸다”고 악의없는 농담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일을 도와나섰다.

3

문영이의 첫날 이부자리는 결혼날자 4일을 앞두고 결국 완성되었다. 그 때까지도 결혼할 때 조선족 여인들이 만들어 가는 이부자리는 그 크기가 한족들이 만드는 이부자리에 비해 거의 배가 되었다. 그 이부자리를 각이 날 정도로 잘 개어서 궤짝위에 올려 놓으니 집안이 화려해지는 것만 같았다.

순자는 친딸 셋씩이나 시집보내면서도 이번처럼 정성을 쏟은 적은 없었다. 친딸들한테는 그야말로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낼 정도에 그쳤으나 문영이한테는 모든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이부자리를 만드는 것도 마직막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많은 다른 뜻도 깃들어 있었다.

문영의 이부자리를 만드느라고 순자는 손발이 퉁퉁 부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문영이가 잔치를 한 뒤 인차 집을 잡고 살림을 해야 하겠으니 달랑 이불만을 들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딸들을 동원하여 연길시 거리를 돌기 시작했다.

이불안을 널에 해볕에 바래우려 할 때는 연며칠 비가 내리더니 이번에는 연며칠이 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5월초부터 한여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더운 날에 무거운 짐을 들고 몇차례씩 백화점과 집을 오가게 되자 둘째딸 영옥이와 셋째딸 영애까지도 “우리가 시집갈 때는 비비면 찢어질 것 같은 천으로 이불을 해주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니 한족딸이 시집간다고 하니 기둥뿌리가 빠지는 줄도 모른다”면서 악의없는 농작을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를 도와 모든 힘든 일에 발벗고 나서주는 딸들의 소행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기실 아무리 딸자식들이었지만 모두 시집을 갔기에 그들을 마구 부려 먹는다는 것도 순자의 마음에는 썩 내려가는 일이 아니었다.

결혼식날자 이틀을 앞두고 순자와 영감이 그 동안 준비한 모든 봇따리를 챙겨갖고 돈화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돈화로 가자면 열차편과 하루에 한번씩 오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처음에 갖고 갈 짐이 많았던 순자네 내외는 집으로부터 버스부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버스를 타고 떠나기로 하였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들 내외가 짐을 챙겨갖고 연길 버스부에 거의 도착할 무렵 돈화행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훌쩍 떠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어쩌나? 미리 끊어놓은 버스표값도 아깝지만 돈화에서 기다릴 문영이를 생각하니 순자는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정을 돈화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들 내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털썩 주저 앉으며 또 낙루했다.

그 이튿날 순자와 영감은 열차편을 선택했다.

순자네는 짐이 네짝이나 되다 보니 맨 나중에야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따라 웬 여객이 그다지도 많은지 바곤안에 사람이 빼곡히 들어선지라 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웬 짐이 이리도 무겁소?!”

영감이 투덜댔다.

“별거 아니우다. 그저 살림에 쓸 그릇들인데 별로 값진 것도 아닌데 무겁기만 하우다.”

“아니, 돈화에 살림도구를 파는 상점이 없을가봐 연길 한 끝에서 사서 들고 간다우?!”

“아따 영감두, 지난번 내가 시조카 잔치 때 가봤는데 거기 그릇들은 색갈이 어둡고 진하여 별로 밥맛마저 떨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그래서…”

“…?!”

영감은 어이가 없다는듯이 열차의 천정을 쳐다보며 입만 벌리고 말았다.

“아무런 그릇에나 밥을 먹으면 되는건데 여자들 마음이란 참…”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면 제법 큰소리를 치다가도 마누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만 들면 인차 주죽이 들어 투항을 선고하는 영감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여객들속에 서있자니 무척 힘들었다. 거기에 몹시 무덥기까지 했다. 힘들긴 자신도 마찬가지었으나 용환영감은 마누라가 가여워 보였다. 의지가지 없는 자기와 결혼하여 6남매나 낳아 키우느라고 고생한 것도 모자라 한족딸까지 삼아 결혼시키며 고생을 찾아하는 마누라를 보며 영감도 눈언저리가 뜨거워나는 모양이었다.

“당신이란 참 못말릴 사람이구려!”

열차가 안도역에 도착해서야 그들 내외는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것도 어떤 고마운 젊은이들이 그들 내외한테 자리를 양보해서야 앉게 되었다.

차창옆에 앉으니 제법 시원한 차바람이 들어와 잔등까지 푹 젖었던 땀을 들이기가 제격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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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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