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청국시기 진행된 “양무운동(洋务运动)”으로부터 중국은 전쟁과 파괴 등으로 끊임없는 동난에 휩싸이었다. 특히 군벌혼전시기에는 각 군벌들끼리 서로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를 하면서 반면에 기타 경제에 대한 약탈, 파괴 등을 일삼아오면서 중국은 더없는 내분에 빠져 들기도 했다.
 
비록 지난 세기 30연대이후 당시의 국민정부가 일정한 정도의 회복조치를 취했지만 그 후 1937년의 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의 군수공업은 다시 청조말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항전초기 중국군의 허다한 장병들은 여전히 한양시기에 만들어낸 무기를 사용, 이런 무기들은 “페달식 소총(脚蹬式步枪)”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무기방면에서는 산서와 이미 함락된 동북외 전국 각지에서는 의연히 대포같은 무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포병화력면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최대의 차이에서 보년 일본군은 포화의 엄호가 강한 반면 중국군은 포화의 엄호는 거의 받지 못하고 근근히 지형에 의거해 저항하는 수준이었다.
 
명조시기의 화포와 일본군의 야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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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있어서 한시기 화포는 “전쟁의 신”으로서 근대 육군 전투력의 핵심부분이었다. 그리고 야전포는 적의 종심에 화력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예하면 적의 대규모 공격집결지를 훼멸시키거나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 한편 적 포병의 화력을 제압하는 등 작용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군이 돌파구를 열 수 있도록 엄호하거나 부대의 안전한 전이를 엄호하기도 한다.
 
중국의 항일전쟁 중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중화력 특히는 대포의 화력차이는 아주 현저했다. 당시 직접 중국의 항일전쟁의 구역들을 관찰한 미국의 스틸웰 장군은 미국참모부에 보내는 군사정보부의 보고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결과 중국의 방어전술은 긍정코 불필요한 실패를 가져올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중국군은 비행, 탱크와 대포가 적었기에 개활지에서 일본군과 조우할 때면 흔히 대충 저항하는체 하다가 쉽게 진지를 포기하였으며 오직 산구에서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완강히 저항할뿐이었다.
 
극히 제한적인 중국군 장비의 대포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때문에 미국의 스틸웰 장군은 늘 중국인들은 전쟁중에서 감히 본전을 투입하기 아까워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중국은 물자를 많이 저장하여 더욱 긴급한 상황에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뭐든지 결핍했다. 그들의 가장 정예한 제5군에는 탱크 9대밖에 없었으며 가장 긴급한 관두에 장위원장이 중경에서 직접 한대 한대씩 보내주어야 했다.”
 
스틸웰 장군뿐만 아니라 영국의 알렉산드르 장군 역시 중국군이 대포진지를 구축하고 알심들여 위장하자 이튿날 중국군 장군한테 그 대포진지에 대해 물었다.
 
이러자 중국군 장군은 “중국군은 이 대포들을 이미 안전한 지대로 옮겼다”고 답했다.
 
“그럼 당신들은 대포를 사용하지 않고 싸울 타산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대포들은 어디에 쓸려고 갖춘겁니까?”
 
이 질문에 중국군 장군의 대답 또한 아주 황당했다.
 
“우리 제5군은 중국에서 가장 정예한 부대입니다. 우리 군은 유일하게 야전포를 갖춘 군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 야전포를 갖고 모험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런 포들을 손실보게 되면 우리는 더는 가장 정예한 부대로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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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호남의 한 전쟁터를 목격한 미국의 한 기자는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번은 중국군 제62군을 향해 일본군이 포위권을 좁혀가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은 논밭을 거쳐 퇴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간신히 한발자국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한테는 3명당 소총 한자루씩 있었고 총이 없는 사병들은 군수품을 걸머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전반 대오는 자동차 한대, 대포 한문도 없었으며 잔등에 물건을 얹은 말들과 당나귀들이 있을뿐이었다.
 
사병들의 얼굴색은 종색을 띄었고 몹시 여위었으며 어깨에 멘 총은 아주 낡은 것이었다.
 
전투를 할 때면 이들은 2문 대포의 지원을 받군 하였는데 그 포는 제1차 세계 대전시 프랑스에서 생산된 75밀리짜리 포였으며 포탄은 근근히 200발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군 사병들은 도보로 행군하였고 몇끼씩 굶으면서 전투를 견지할 때가 많았다.
 
이해 8월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5일후 이 부대는 전멸되었다.”
 
항전중 중국군이 박격포에 의거하여 가장 멋지게 싸운 전투는 아마도 무한보위전의 어느 한 전투였을 것이다.
 
1938년 6월 26일, 일본군은 마당요새를 돌파한 뒤 인차 서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서창으로부터 무창에 이르는 도로변의 산에는 서주전역에서 철수한 중국군이 주둔, 제13군 제110사 제 656퇀이었다. 당시 그들이 식량공작을 하던 중 이외로 하나의 탄약고를 발견했으며 창고안에는 박격포탄이 꽉 들어차 있었다. 마침 이 부대는 천신만고로 12문의 박격포를 강서까지 끌고 온터였다.
 
중국군 사병들은 박격포를 S형으로 된 도로의 굽이돌이 측면에 설치하고는 일본군을 매복 습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 날 밤, 마침내 도로에서는 일본군 사병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경적을 울리며 나타났다. 이러자 중국군 12문의 박격포가 근거리에서 일본군 트럭들을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하기 시작, 일본군 트럭들에서는 화염이 솟구치고 사병들은 무리죽음을 당하였다. 이 날 밤 중국군은 도합 5000발의 박격포탄을 쏘는 것으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아군은 단 1명의 상망자도 내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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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1년 12월, 제3차 장사전역 때 중국군 제10군 예비 제10사 또한 18문의 박격포로 도합 5800발의 박격포탄으로 일본군 기병부대에 침중한 타격을 주기도 했다.
 
중국의 팔로군 또한 황토령 전역중 박격포로 일본군 중장 1명을 격살시킨 실례가 있었으며 또 한번은 일본군 제16사단 후근 참모 키 사키 히사시도 중국군 박격포탄에 의해 황천객이 될번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무서워 한 중국의 박격포
 
일본군 제27사단의 중대장을 지닌적이 있는 다나카는 자기의 회억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특히 중국군 제44군의 박격포가 일본군에 대한 위협이 가장 컸다. 그들이 고지에서 우리를 향해 사격을 할 때면 포탄이 늘 우리의 곁에서 터지어 진짜 피할 곳이 없었다.
 
1944년 8월 26일과 28일, 우리 중대가 지키고 있는 진지가 중국군대의 진공을 받게 되었다. 특히 28일에 있은 중국군의 진공은 보병과 포병이 협동작전한 대규모 진공이었다. 중국군은 박격포 사격을 먼저 하였는데 포탄이 공기속을 뚫으며 날아오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것이 몸이 오싹해 났으며 이런 포탄들은 곧바로 우리의 머리위로부터 떨어졌다. 당시 포탄이 곡선을 긋으며 떨어졌기에 우리의 전호는 박격포탄을 피할 수가 없었다. 8월 28일 중국군의 박격포 사격으로 고지를 지키고 있던 제2소대의 많은 사병들이 죽었다. 어떤 사병은 복부가 갈라터져 창자가 흘러나왔고 또 어떤 사병은 팔다리가 잘라져 나가기도 했다. 참으로 비참한 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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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는 또 “박격포의 사격이 멈추면 곧 중국군 사병들이 진격해 올라오군 했는데 특히 야간기습이 많아 그 대부분이 근거리 전투어서 그들을 대적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우리는 밥을 먹을 때도 늘 철갑모를 써야 했다”고 회고하였다.
 
16사단의 일등병이었던 아즈마 시로 역시 자기의 회억록에서 “밤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이는 가운데 중국군이 사격하는 박격포탄은 별찌처럼 밤하늘을 가르면서 우리한테로 날아왔다. 거기에 콩볶는듯한 기관총소리까지 뒤섞이면서 마치 지옥의 연주회를 연상케 했다”고 언급하였다.
 
중국군 박격포와 일본군 야전포 차이
 
하긴 중국의 산악지대 혹은 구릉지대에서는 박격포가 아주 영활하였다. 박격포는 전문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없었고 사병들이 직접 메고 다닐 수도 있었으며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수시로 타격을 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박격포는 위력이 약했고 사정거리가 짧고 정확도가 높지 못했으며 정면출돌중 일본군의 대포와는 비길 수도 없었다.
 
일본군 제16사단 30려의 여단장 사사키는 은행산을 공격할 때의 정경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 중국군의 저항은 아주 완강하였다. 그들은 기관총을 교차로 사격하면서 우리의 진격을 막았는가 하면 때로는 배후에 나타나 박격포로 우리를 골탕먹이군 했다. 이러자 일본군은 우리 여단에 2개의 105밀리 야전 카농포 중대와 1개의 150밀리 중형 카농포 중대 그리고 1개의 야전포 중대를 지원해 왔다. 그 뒤 일본군은 만미터가 되는 지점에 포진지를 구축하고는 일제히 사격하여 중국군의 화력망을 눌러버렸으며 중국군은 더 이상 결사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41년 제3차 장사전역시 중국군 제10군이 장사를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포화의 명중율은 대단했다. 당시 중국군 관측소었던 장사진열관을 포격, 연속 3발의 포탄이 들창을 명중해 실내로 날아들었다.
 
포와 포의 대응사격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아주 쉽게 중국군이 지키고 있는 상아병원으로 접근, 중국군은 병원담장에 의거하여 기관총으로 저항하였지만 일본군 포화에 의해 병원담장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대일작전에서 박격포의 공격능력은 거의 영이나 다름이 없었다.
 
1939년 중국군 제 52군의 모 퇀은 호남 임상 남쪽의 한 촌락을 기습, 당시 이 촌에는 일본군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제52군은 중국군중의 가장 정예한 부대였으며 1개 퇀으로 1개 중대를 친다는 것도 파악이 있었다. 거기에 이 퇀은 화력강화를 위해 2개 퇀의 박격포부대까지 동행했다. 하지만 200여발에 달하는 중국군의 박격포사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진지는 별다른 파괴가 없었다.
 
결속어
 
항일전쟁중 중국군은 도합 600만발 이상의 박격포탄을 소모하면서 근거리에서 일본군의 한차례, 또 한차례의 진공을 견제하고 일본군의 운동전을 교란시켰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중에서 소련군은 맹렬한 카츄사포에 의거하고 미군은 피복면이 넓은 폭격기에 의거하였다면 중국군은 외직 사병들이 메고 다니는 박격포에 의거하여 8년간의 대일작전을 견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전쟁중에서의 무기체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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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시기 중국군과 일본군의 최대 실력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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