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12월 18일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4년 전 황금빛 찬란했던 그 우승 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3회 우승을 노렸지만, 한 발짝 모자랐다.
비록 프랑스인들이 월드컵 3회 우승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지만 유럽의 이웃들에 비해 충분히 먼 길을 걸어왔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 시점에서 무엇이 프랑스 축구를 “세계의 정상”을 노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했는지 짚어보기로 하자.
셰프들은 프랑스 축구의 흥망성쇠는 그들의 음식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프랑스 음식의 탄생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요리는 서양 요리의 선두 주자이자 '세계 3대 요리' 중 하나이다. 정교한 가공과 정교한 조리, 고급스러움으로 전 세계 수많은 식객들의 입맛과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한 프랑스 요리가 이전에는 음식과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매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지리적으로 프랑스의 위치는 천혜의 천혜라 할 수 있다. 서유럽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 프랑스의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경작에 매우 적합하다. 게다가 라인강, 센강, 론강 등 몇몇 서구 주요 하천이 프랑스에서 흘러 농업 관개에도 유리하다.
또한 프랑스 중부와 북부 지역은 오랜 기간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온대 해양 기후대에 속하며 일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균일하다. 프랑스 남부 지역은 위도로 인해 매년 편서풍과 아열대성 고기압대가 번갈아 제어되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 겨울에는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이 두 기후 유형에서 프랑스 작물 재배는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양성도 매우 높으며 축산업과 양식업도 식은죽 먹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금밥통'을 받들고, 갈리아인은 '금밥통'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원주민들은 문명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 방식이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많은 사냥 습관을 유지하면서도 농산물 생산에 대한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갈리아인의 주요 식단은 빵과 맥주를 곁들인 단순한 고기류였다.
이치대로라면 프랑스 요리의 최종 형태는 영국 요리와 비슷해야 하며, 화려함은커녕 판타지도 아니다. 그러나 유럽이 중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세기에 이르러 귀족 연회가 음식 발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프랑스 파티에서는 메뉴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요리를 한데 섞어 한 번에 제공하는 것을 좋아한다. 귀족들은 식사의 문명을 살리기 위해 큰 고기를 잘게 썰어 손으로 직접 집어먹기도 했다.
또한 중세 말에 이르러 식후 디저트의 개념도 초기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먹었던 건 아이스크림이나 젤리 이런 게 아니라 파이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신기한 것은 종교 이론의 영향으로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백조구이, 공작구이 등 가금류를 즐겨 먹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먹는 방법은 공작이나 백조를 통째로 껍질을 벗기고 구운 다음 원래의 깃털이 달린 껍질에 다시 넣어 봉합한 후 그 발과 부리를 금색으로 칠하는 것이다. 백조나 공작의 식감이 좋지 않아 털 안에 있는 고기를 거위나 닭고기로 대체하기도 한다.
프랑스 음식을 크게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탈리아 영토에서 일련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는데, 이를 합스부르크-발루아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낭만적인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인과 더 많은 교류를 하게 되고, 프랑스 왕은 이탈리아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헨리 2세는 메디치 가문의 카트리나 공주와 결혼했고, 헨리 4세는 메디치 가문의 마리 공주와 결혼했다
이탈리아의 세련된 삶의 영향으로 프랑스 궁정의 식탁 예절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진정한 식탁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러 농업의 부상과 프랑스의 국력의 상승으로 프랑스 궁중 만찬은 점점 더 호화로워졌다. 프랑스 요리의 또 다른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새로운 식재료가 도입되고 조리 기구와 식기류가 혁명적으로 발전했으며 프랑스 요리는 점점 더 독특해지기 시작했다.
특색이 형성된 후에는 대중화, 즉 서민들이 참여하여 프랑스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 봉건 왕조 시대에 프랑스 음식점은 호흡기 질환 치료를 돕기 위해 고기요리보다 육수와 진한 야채 수프를 많이 제공했다. 음식점에 가는 것은 약국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기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부엌이 없는 파리의 많은 가정에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권리는 특정 요식업자와 여관주인에게만 주어졌다.
1789,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올랐다.미식은 더 이상 궁정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 후 파리에는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이후로 프랑스 음식은 서민들 사이에서 대중화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궁궐을 떠난 뒤에도 그 영향력은 국제적으로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유럽 각국과 식민지로부터 계속 숭배를 받았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프랑스 요리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프랑스 음식 개량에 대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유명 셰프 안토닌은 멀리 떨어진 러시아식 요리법을 프랑스에 도입하여 테이블에 올려져 모두가 나눠먹던 고기를 주방에서 처리하여 웨이터가 나눠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 조리법은 주방장의 압력을 완화하고 모든 요리가 적절한 온도에서 서빙되도록 했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영국과 미국도 러시아식 요리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 거의 모든 서방 세계가 이를 표준 요리법으로 사용했다. 이로써 프랑스 요리는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었으며 심지어 서양 요리의 최고 표준이 되었다.
이 역사를 돌이켜보면 프랑스 음식이 판타지 음식에서 오늘날의 진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린 독특한 지리적 이점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속적인 국제 교류와 융합, 끊임없는 혁신, 끊임없는 개방과 포용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특산물이든 외국 작물이든 프랑스인들은 맛있으면 먹는다는 원칙에 따라 그것을 발전시켰고, 로마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러시아인들의 미식 이념이든, 식사제도든 프랑스인들은 마다하지 않고 소화하고 흡수했으며, 평등, 자유, 박애의 구호가 파리 거리에 울려 퍼졌을 때 프랑스 요리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프랑스 축구의 불굴의 비결이 아닐까? 축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베테랑 스포츠 언론인들은 최근 몇 년간 프랑스가 강해진 것은 흑인 선수가 많아진 덕분이라고 말한다.
흑인 선수들은 대부분 이민자였고 어린 시절 생활 여건이 좋지 않아 축구로 운명을 바꾸려 했다. 또한 프랑스에는 거의 모든 시골 마을에 축구 계몽 클럽이 있다. 이런 '분모'가 많아지고 과학적 훈련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프랑스 축구 환경이 좋아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재능 있는 사람들이 출세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와 함께 프랑스는 국제적 시야를 견지해 왔고 우수 선수들은 유럽 리그에 자리 잡고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기량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전술적 마인드가 향상되었다. 그리고 많은 국제 대회들이 프랑스인들의 축구 관람을 유도해 축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축구 진출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이번에 아쉽게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의 이웃인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도 일찌감치 경기장을 떠났다. 5대 리그가 사라지고 자금과 e스포츠에 밀려 이탈리아 축구가 몰락했다는 한탄도 나온다. 하지만 축구 이념의 실패는 아니다. 프랑스가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잊지 말자. 일본, 모로코 등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그리고 미국과 같은 전통적 약체들이 모두 이번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규칙을 따르고 조금만 더 인내하면 반드시 성적을 낼 수 있다고 본다.(피닉스 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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