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훈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 아심 무니르와 백악관에서 비공개 오찬을 가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도 정가와 언론이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G7 정상회의에서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간 모디 총리는 트럼프와의 공식 회담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직후 파키스탄 군 수장을 백악관에 들인 장면은 인도 여론의 자존심을 깊이 건드렸다.
사실 이 오찬 하나로 국제정치의 줄서기 판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도에게는 뼈아픈 상징이었다. 최근 인도는 자신이 파키스탄과의 무력 충돌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승전 선전단’을 두 차례나 미국에 보냈다. 뉴욕에서, 워싱턴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말하려 했지만, 미국이 진정 귀를 기울인 대상은 그들이 아닌 상대방이었다. 백악관 오찬은 그 상징적 순간이다.
인도는 억울할 수도 있다. 세계 5위 경제대국이고, 자타공인 ‘민주주의 대국’이라 자처한다. 미국이 구축 중인 대중 견제 전략, 이른바 ‘쿼드(Quad)’에도 참여하고 있고, 이란과도, 이스라엘과도 손을 잡는다. 때론 서방 진영, 때론 글로벌 사우스의 얼굴을 번갈아 쓰는 ‘다자주의 유연성’도 있다. 그런데 왜 미국은 그런 인도를 두고 파키스탄 장성과 식탁을 마주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보는 건 ‘자세’가 아니라 ‘실력’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공중전에서 실질적인 전과를 올렸고, 미국은 그 전황을 알고 싶었다. 특히 F-16을 운용하는 파키스탄과, 미국산 전투기의 부품을 필요로 하는 이란 사이의 기술 흐름은 미국 입장에서 민감한 정보다. 그리고 미국은 이란과 외교 채널이 없는 상황에서, 파키스탄이라는 우회로를 확보하려 한다. 여기에 이스라엘-이란 간 전운까지 겹치며, 파키스탄 군부와의 접촉은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다.
그럼 인도는? 그들이 강조한 ‘중재 거부 선언’, ‘주권 강조’는 귀에 그다지 들어오지 않는다. 중재를 거부하든, 초청을 고사하든, 결국 누가 식탁에 앉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인도의 존재감은 ‘자신의 말’을 통해 증명되지 않는다. 남들이 먼저 불러주는 이름이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백악관 오찬은, 트럼프가 의도했든 아니든, 인도 외교의 허상을 조용히 찔렀다.
일부 인도 언론은 “트럼프가 인도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성토한다. 칼의 형상이 파키스탄 지도 모양이라며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은 차라리 절절하다. 하지만 정작 이 사건은 인도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백악관은 단지 자신의 국익을 좇았을 뿐이고, 인도는 그 무대에서 선택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 자체가 메시지다.
외교는 감정이 아니다. 설움도, 자존심도, 눈물도 무기가 되지 않는다. 오직 실력만이 목소리를 얻게 한다. 누구와 식탁을 마주하느냐는 사소한 외교 프로토콜처럼 보이지만, 국제정치에선 그것이 곧 위상이고 평가다. 실력 없이 큰소리만 치는 국가는 결국 회담장 밖에서 사진만 찍을 뿐이다.
오늘의 인도는, 20세기 초의 중국과 닮아 있다. 패배를 설계로 덮고, 구호와 선언으로 패권을 주장하지만, 정작 국력은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 반면 오늘의 중국은 과거의 교훈을 통해 힘을 축적했고, 미국은 이제 그들에게 머리를 맞댄다. 국제질서는 냉정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잔인함 속에서도 실력은 끝내 존중받는다는 사실이다.
백악관 오찬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외교적 존엄은 자의식이 아니라 실력에서 나온다. 오늘의 굴욕은, 내일의 실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외교는 계속해서 누군가의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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