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하 12도의 서울.
바람은 칼날처럼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홍대 입구에 서 있었다.
움직이는 이불 더미처럼 꽁꽁 싸매고, 온몸을 떨면서.
그때 정면에서 한국 여자 셋이 걸어왔다.
모직 코트는 활짝 열려 있고, 안에는 얇은 셔츠 하나.
아래는 짧은 치마.
‘광택 스타킹?’ 그런 거 없다.
그냥 맨다리, 발목 그대로 노출.
그런데 이건 아직 미친 축에도 안 든다.
진짜 미친 건
그녀들 손에 들린 컵이었다.
얼음이 가득 찬 플라스틱 컵.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 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추위에 새빨갛게 언 손가락 관절 위로 떨어진다.
나는 보기만 해도 이가 시릴 것 같았는데,
그녀들은 웃고 떠들며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었다.
마치 영하 12도는
내 착각인 것처럼.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딱 두 가지 생각만 들었다.
쟤들이 미쳤거나,
아니면 내 체감 온도가 고장 났거나.
그 후 나는 서울에서 3년을 버텼다.
그리고 지금, 책임지고 말할 수 있다.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음료가 아니다.
그건 약이다.
그건 이 거대한, 멈추지 않는 고기 분쇄기 같은 사회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모두가 억지로 들이켜야 하는
연명용 수액이다.
드라마 속 그 부드러운 조명 필터를 믿지 마라.
오늘은 말 좀 까놓고 하겠다.
나의 한국 생활은
전부 ‘단단한 뼈’였다.
1. ‘빠름’은 폭력이다
한국 사람들이 ‘빠름’을 중시하는 게
효율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여기서 ‘빠름’은
공포에서 나온다.
입사 초반, 동료 성준이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순대국밥집이었다.
의자에 엉덩이도 채 식기 전에
성준이는 아주머니를 향해 외쳤다.
“아주머니! 국밥 두 개, 무조건 빨리요!”
그 ‘빨리’라는 말에는
거의 애원에 가까운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3분 만에 음식이 나왔다.
돌솥은 아직도 지글지글 끓고,
국물 위 기름은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숟가락을 들고
후후 불어보려는 순간,
맞은편의 성준이는
밥 한 공기를 통째로
“와르르” 국에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삼켰다.
‘먹었다’가 아니다.
삼켰다.
씹지도 않았다.
식도가 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은 풀린 채
기계처럼 입에 밀어 넣었다.
10분.
나 역시
15분 안에 전투를 끝내야 했다.
혀 한 겹이 벗겨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남은 45분을 위해서다.
우리는 커피를 사러 가야 했다.
반드시 아이스여야 했다.
뜨거운 커피는 느리다.
불어야 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두 모금이면 끝이다.
고농도 카페인이 즉각 터지며
점심 후의 몽롱함을
폭력적으로 끌어낸다.
성준이는 빌딩 아래 흡연 구역에 서서
한 손엔 담배,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이 사회에서 멈추는 건 죄다.
느려지는 건
짓밟혀 죽는 일이다.
신도림역 환승해 봐라.
그건 인파가 아니다.
홍수다.
앞에 열차가 없어도
모두가 달린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감히 가만히 서 있기라도 하면
뒤에서 들려오는 그 “쯧”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 속도감은
사람을 비인간화한다.
모두 태엽 감긴 인형처럼
지치지도 않고 돌아간다.
누가 먼저 멈추면
그 즉시 불량품이다.
배달 오토바이는 인도를 질주한다.
치킨 몇 분 빨리 배달하려고
목숨을 건다.
이게 무슨 선진국의 편리함인가?
모두가 자기 생존 공간을
끝없이 압축해서
‘시스템 유지’라는 이름의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다.
2. 숨 막히는 ‘눈치’ 게임
‘빠름’이 물리적 폭력이라면,
‘눈치(Nunchi)’는
정신적 사형 집행이다.
중국에선
기분 나쁘면 눈을 굴릴 수 있다.
여기서는?
숨 쉬는 리듬조차
상사 기분을 봐야 한다.
그 회식이
나를 완전히 가르쳐줬다.
회식이 아니라
집단 복종 테스트였다.
부장은 가운데,
우리는 둘러앉아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 무렵,
나는 옆 사람과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테이블 아래서
내 다리를 세게 찼다.
고개를 돌리니
같은 대리였다.
눈이 빠질 듯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부장의 잔이 비어 있었다.
고작
30초쯤?
그런데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맞은편의 김민지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 동작이
너무 익숙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왼손으로 오른손 받치고,
몸을 45도로 숙이고,
술병 라벨은 반드시 위로.
얼굴엔
비굴하면서도 공손한 미소.
“아이고 부장님,
제가 눈치가 없어서
잔이 비었네요.”
테이블 전체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만 빼고.
끝나고 나서
김민지는 나를 한쪽으로 불렀다.
아까 그 비굴한 얼굴은 사라지고
차갑게 말했다.
“여기선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부장 잔이 비면
그건 우리 모두의 실수야.
술 따르기 싫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지.”
정말 따갑다.
하지만 틀리지도 않았다.
한국의 서열은
얼굴에 쓰여 있지 않다.
언어 속에 녹아 있다.
첫 마디는 언제나
“몇 년생이에요?”
생일 챙겨주려는 게 아니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누가 허리를 굽혀야 하고
누가 다리를 꼬아도 되는지
정하기 위해서다.
한 살 차이,
사람을 누른다.
이 위계는
쓰레기 분리수거 아줌마에게까지
스며 있다.
나한테는 악을 쓰다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주민을 보면
허리가 땅에 닿을 듯 숙여진다.
이건
전원이 참여하는
병적인 공모다.
여기선
모두가 피해자이고,
돌아서면 가해자다.
상사에게 당하면
후배를 괴롭히고,
회사에서 쌓인 걸
서비스직에게 푼다.
모두가
자기보다 한 단계 아래를 찾아
안도감을 확인한다.
이게 질서라고?
나는
집단 질식이라고 부른다.
3. 못생김은 원죄다
오기 전엔
‘전 국민 성형’이
과장인 줄 알았다.
와 보니
사실이었다.
아니, 생각보다 더 잔인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선택이 아니다.
의무다.
예의다.
심지어 도덕이다.
새벽 2시에
편의점에서 물을 샀다.
계산대에 있던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쿠션을 두드리고,
아이라인을 정성껏 그린다.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 이 시간에 누가 봐요?”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고
거울을 보며 말했다.
“내가 봐요.
실패자처럼 보이기 싫어서.”
들었나?
화장 안 함 = 실패자.
이게 한국의 논리다.
지하철역은
전부 거울이다.
기둥, 벽, 유리문.
어디를 가든
반사가 너를 쫓아다닌다.
“네 얼굴 봐.
오늘도 충분히 단정해?”
한 번은 늦잠을 자서
쌩얼에 안경만 쓰고
2호선 출근길에 뛰어들었다.
지옥이었다.
주변은
인형처럼 정교한 여자들.
완벽한 웨이브,
빛나는 피부,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
그 사이에서 나는
진흙탕에서 기어 나온 괴물 같았다.
아무도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시선—
스치듯 보고
곧바로 피하는 그 시선이
욕보다 더 아팠다.
“네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하고 나올 수 있어?”
나중에 친구가 면접을 봤다.
사진관 보정사는
해커처럼 손이 빨랐다.
얼굴 줄이고,
눈 키우고,
피부 밀고.
사진은 예뻤다.
하지만 그건 누구지?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나 같지 않지?
근데 이렇게 안 생기면
면접관은
이력서도 안 넘겨.”
‘호감형 외모’는
여기선
핵심 경쟁력이다.
학력, 능력보다
더 직관적인.
자기 체중과 얼굴도
관리 못 하면
자기 통제력도 없는
게으른 인간으로 본다.
이게 미의식인가?
아니다.
재판이다.
성형은
허영이 아니라
입장권이다.
안 하면?
문 밖에 서 있어라.
4. 쓰레기 분리수거에 담긴 강박과 광기
앞이 다 소프트한 칼이라면,
쓰레기 분리수거는
하드 룰이다.
중국에선
쓰레기는 쓰레기다.
한국에선
실험이다.
나는 벌금 맞았다.
10만 원.
일반 쓰레기 봉투에
기름기 남은 라면 용기를
버렸다는 이유였다.
관리인은 CCTV를 돌려
나를 가리켰다.
—쓰레기장엔 고화질 CCTV가 있다.
“여기 빨간 기름 있어요.
기름 있으면 재활용 안 돼요.
새것처럼 씻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서서
쓰레기 봉투 들고
내가 바보 같았다.
쓰레기에
목욕을 시켜야 한다고?
그렇다.
우유팩은
뜯고, 씻고, 말리고, 눌러야 한다.
택배 박스 테이프는
전부 떼야 한다.
음식물 쓰레기는 더하다.
돼지가 먹으면 음식물,
못 먹으면 일반 쓰레기.
닭뼈? 일반.
귤껍질? 음식물.
양파껍질? 일반.
쓰레기 버리려다
부엌에서
30분을 설거지한다.
이 강박적인 질서가
서울을 깨끗하게 만들었지만
사람을 미치게 한다.
낮엔
모두 점잖고,
분리수거 철저하고,
말도 조심스럽다.
금요일 밤 홍대에 가 봐라.
술에 절은 인간들 천지다.
낮에 허리 굽히던 대리는
전봇대를 끌어안고 토하고,
그 우아한 OL은
길바닥에 앉아 울부짖는다.
왜일까?
낮에 너무 조였기 때문이다.
한 번 미치지 않으면
그 줄은 반드시 끊어진다.
극단적 억압은
극단적 방종을 부른다.
이게 한국의 B면이다.
모든 질서는
개인의 무한한 인내로
유지된다.
5. 맺음말
아프나?
이게
내가 본 한국이다.
롱다리 오빠의 로맨스는 없고,
지하철에서 땀 냄새에 파묻힌
지친 중년만 있다.
재벌가 복수극은 없고,
집값과 물가 앞에서
계산기 두드리는
보통 사람들만 있다.
여긴 정교하다.
쇼윈도처럼.
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너무 피곤하다.
왜 떠나지 않느냐고?
솔직히 나도 묻는다.
아플 때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뜨거운 죽을 밀어 넣던
집주인 아주머니 때문일까.
서열은 숨 막혀도
행정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시스템 때문일까.
이 나라는 모순덩어리다.
차갑고도 뜨겁고,
억눌리고도 광적이다.
비틀린 규칙으로
너를 사회 부품으로 만들고,
부서지기 직전에
조금의 온정을 던져
다시 버티게 한다.
나는 권하지 않는다.
철심 같은 심장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실 위장이 없다면.
여긴 지옥은 아니다.
하지만 천국도 아니다.
그저 인간의 욕망과 불안,
질서가
극단까지 증폭된
한 인간 세상일 뿐이다.
이 글은 특정 집단이나 국가를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며 체감한 일상 구조에 대한 개인적 기록이다.
해석과 감정은 독자의 몫이며, 누군가에게는 이미 익숙한 현실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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