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1910년 봄,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 섭정왕 자이펑을 겨냥한 폭탄 암살 계획이 적발됐다. 주도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혁명가 왕징웨이(汪精卫·왕정위)였다.
체포된 그는 죽음을 각오한 듯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옥중에서 남긴 “칼을 끌어 한 번 통쾌하게 죽어 젊은 날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취지의 시구는 청 왕조에 맞선 혁명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석방됐고, 일약 혁명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약 30년 뒤 왕징웨이는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친일 협력정권의 수반이 됐다. 청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며 목숨을 걸었던 혁명가는 어떻게 침략국과 손잡는 길을 선택했을까.
혁명 영웅을 사로잡은 패전의 공포
1883년 태어난 왕징웨이는 일본 유학 중 쑨원을 만나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과 연설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고, 쑨원 사후에는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장제스와는 협력과 대립을 반복했지만 국민당 안에서 장제스에 버금가는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노선이 크게 흔들린 계기는 일본의 침략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됐고, 상하이와 난징, 우한 등 주요 도시가 잇달아 일본군에 넘어갔다. 막대한 인명 피해와 국토 상실을 지켜본 왕징웨이는 중국이 장기전을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항전을 계속해 국가 전체가 파괴되는 것보다 협상을 통해 남은 역량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대에 ‘곡선구국’으로 불린 이 주장은 투항을 목표가 아닌 국가 보존을 위한 우회로라고 설명했다.
왕징웨이의 판단에는 전황에 대한 비관뿐 아니라 장제스와의 권력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1938년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부총재가 됐지만 실권은 장제스에게 집중돼 있었다. 항전 방식을 둘러싼 이견은 개인적·정치적 대립과 맞물려 더 깊어졌다.
결국 왕징웨이는 1938년 12월 충칭을 떠나 쿤밍을 거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로 향했다. 같은 달 그는 이른바 ‘옌뎬(艳电)’을 발표해 일본의 조건을 토대로 한 평화협상을 주장했다. 국민당은 즉각 그를 제명했고, 중국 사회는 이를 사실상의 투항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왕징웨이가 기대한 것은 일본과의 협상을 통한 제한적 주권 회복이었다. 그러나 앞서 그의 측근들이 일본 측과 진행한 상하이 중광당 협상에는 만주국 승인, 일본군 주둔과 방공 협력, 경제적 제휴 등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일본이 구상한 ‘평화’는 대등한 국가 간의 타협이라기보다 점령 질서를 중국인 협력자를 통해 관리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보호를 약속한 일본, 통제받은 난징 정권
1939년 3월 하노이에 머물던 왕징웨이를 겨냥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국민당 군통의 행동조가 숙소에 침입했지만 방을 잘못 찾아 그의 측근 쩡중밍이 숨졌다. 왕징웨이는 살아남았으나 사건 이후 일본의 보호 아래 상하이로 이동하며 충칭 정부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는 난징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재조직했다고 선언했다. 충칭의 국민정부와 같은 국호와 상징을 사용하며 자신들이 쑨원의 국민혁명을 계승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권의 군사·외교·경제적 기반은 일본에 의존했다. 국제적으로도 일본과 추축국 및 그 영향권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폭넓은 승인을 얻지 못했다. 일본은 왕징웨이의 명성과 국민당 원로라는 지위를 활용해 점령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충칭 정부의 항전 의지를 약화하려 했다.
난징 정권은 ‘평화·반공·건국’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보조했다. 이른바 ‘청향’ 작전을 통해 항일 근거지를 봉쇄하고 주민과 항일세력을 분리하려 했으며, 상하이의 ‘76호’로 알려진 특무기관은 항일 인사와 충칭 정부 관계자, 내부 반대파를 감시하고 탄압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독립성은 제한적이었다. 일본은 점령지의 통화와 물자, 교통망을 통제했고 난징 정권은 병력과 행정조직을 동원해 이를 뒷받침했다. 왕징웨이가 주장한 ‘국가 보존’과 달리 점령지 주민들은 물자 수탈과 인플레이션, 정치적 억압을 겪었다.
이 지점에서 ‘곡선구국’의 근본적 한계가 드러난다.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일본이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고, 협력 이후 점령에서 물러날 의사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정책은 중국을 군사·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전쟁 수행에 활용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왕징웨이에게는 일본의 목표를 바꿀 군사력도, 외교적 지렛대도 없었다.
현실주의인가, 침략에 대한 협력인가
왕징웨이는 1944년 치료를 위해 일본 나고야로 옮겨진 뒤 그해 11월 사망했다. 1935년 저격 사건 때 입은 부상과 이후의 질환이 악화한 결과였다. 그의 시신은 난징에 안장됐지만 일본 패전 뒤 국민당 정부는 무덤을 철거하고 유해를 처리했다.
왕징웨이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혁명가에서 매국노로 추락한 인물’이라는 서사로 굳어졌다. 최근 연구에서는 그의 선택을 단순한 탐욕이나 변절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장기전에 대한 비관과 반공주의, 장제스와의 경쟁, 국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결합한 결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배경이 선택의 결과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난징 정권은 일본의 점령 질서를 약화하기보다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항일세력 탄압과 전쟁 자원 동원에 참여했다. 왕징웨이가 의도했다고 주장한 ‘주권 보존’도 실질적으로 달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곡선구국’의 신뢰성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와 실행 조건으로 평가해야 한다. 전쟁 피해를 줄이고 국가의 명맥을 지키겠다는 주장은 일부 현실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수 있다. 하지만 협상 상대가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구상은 실행 가능한 외교전략이 되기 어려웠다.
1910년의 왕징웨이는 나라를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1940년의 왕징웨이는 나라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침략자의 힘을 빌렸다. 그가 주장한 우회로는 중국을 구하는 길이 아니라 일본 점령정책의 일부로 귀결됐다.
왕징웨이의 생애가 지금도 논쟁적인 이유는 한 인간의 극적인 변절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 현실주의를 내세운 타협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결론은 역설적이다. 국가를 살리겠다며 선택한 길이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명성과 혁명가로서의 과거를 무너뜨렸다. 역사에 더 크게 남은 것은 청 왕조에 폭탄을 던지려 했던 청년이 아니라, 일본의 점령 질서에 참여한 난징의 권력자였다.
다음 회에서는 난징 정권의 억압을 상징한 상하이 ‘76호’ 특무본부와 군통의 비밀전쟁을 통해, 점령지의 암살과 첩보전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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