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1930년대 중국은 혼돈 그 자체였다. 북벌은 끝났지만 군벌의 잔재는 여전했고,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뒤 화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명목상 전국을 통일했지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상하이는 외국 조계지와 범죄조직, 혁명세력이 뒤엉킨 거대한 용광로였다.
그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던 이름 가운데 하나가 왕아초(王亚樵)였다.
장제스는 그의 목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100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고, 국민당 비밀정보기관 군통의 수장 대립(戴笠)은 정예 특무들을 동원해 수년 동안 그의 행방을 추적했다. 일본군 정보기관과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들 역시 왕아초 제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왕아초는 번번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는 상하이와 난징, 우한, 푸저우, 홍콩, 난닝을 오가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암살대왕’, ‘민국 제일 자객’, ‘원동 제일 자객’이라 불렀다.

난세가 만든 인물
왕아초는 1889년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태어났다. 신해혁명에 참여하며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 사회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하지만 군벌 세력이 안후이를 장악하면서 그의 삶은 급격히 바뀌었다. 정치적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안후이 출신 노동자들을 규합해 '안휘노동자동향회'를 조직했고, 이를 기반으로 무장조직 도끼방(斧头帮)을 구축했다.
도끼방은 단순한 폭력조직이 아니었다. 노동운동과 향우 조직, 무장세력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조직이었다. 왕아초는 이를 통해 상하이 노동자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고, 조직 규모는 한때 10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항일과 암살 사이
왕아초는 스스로를 애국자로 규정했다.
그는 일본군과 친일파, 그리고 부패한 정치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중국을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일본 해군 함정 이즈모호 폭파 사건과 친일 인사 암살 사건들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투쟁 방식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는 의회나 정당 활동보다 총과 폭탄을 선택했다. 일본군 장교와 친일 인사뿐 아니라 장제스와 왕징웨이, 쑹쯔원 같은 국민당 핵심 지도자들도 암살 대상으로 삼았다.
왕아초의 눈에 그들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중국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세력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동북을 일본에 넘겨준 책임을 물으며 장쉐량에게 폭탄을 보내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장쉐량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동시에 다시 항일전선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왕아초와 대립, 두 남자의 전쟁
왕아초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군통 수장 대립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한때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왕아초가 거리와 노동자 조직,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활동했다면 대립은 국민당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이후 두 사람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추격전의 주인공이 됐다.
왕아초는 암살과 폭파를 통해 정권을 압박했고, 대립은 전국적인 정보망과 특무조직으로 그를 쫓았다. 홍콩과 상하이, 광둥과 광시를 무대로 이어진 두 사람의 대결은 당시 언론과 정가의 주요 관심사였다.
왕징웨이 저격 사건 이후 장제스는 크게 분노했고, 대립에게 "산 채로든 죽여서든 반드시 왕아초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그 순간부터 왕아초는 중국에서 가장 추적당하는 인물이 됐다.
의협심이 부른 비극적 최후
그러나 수년 동안 수많은 추격을 따돌렸던 왕아초도 결국 인간적인 약점 앞에서는 무너졌다.
그는 의리를 중시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부하가 어려움에 처하면 외면하지 않았고, 동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립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군통은 왕아초의 측근 여립규를 체포한 뒤 그의 아내 여완군을 회유했다. 생활고를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도록 만든 것이다.
1936년 10월 20일, 왕아초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여완군의 거처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숨어 있던 특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석회가루가 그의 얼굴에 뿌려졌고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도 왕아초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여러 명의 특무를 쓰러뜨렸지만 결국 총탄 다섯 발을 맞고 쓰러졌다.
향년 47세.
일본군도,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도, 수많은 암살 시도도 실패했지만 결국 그의 생을 끝낸 것은 같은 중국인들의 총탄이었다.
영웅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왕아초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중국의 일부 역사서와 민간에서는 그를 항일 의사이자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반면 다른 시각에서는 암살과 폭력을 정치 수단으로 활용한 급진주의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약자를 돕고 외세에 맞서 싸운 인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폭력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애국자이면서도 암살자였고, 혁명가이면서도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왕아초의 삶은 오늘날에도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혼란의 시대에 폭력은 정의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혁명과 테러, 애국과 정치적 폭력의 경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은 왕아초가 세상을 떠난 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역사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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