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육정산 발해고분군으로 향하는 숲길은 예상보다 한적했다. 금정대불 주변에 모여 있던 관광객들의 발길은 대부분 사찰 구역에 머물렀고, 고분군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작은 봉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처럼 보였지만,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발해 왕실과 귀족들의 흔적을 간직해 온 공간이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지금의 고요함과 발해가 존재하던 시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오늘날 연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발해는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한때 발해는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강국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고대 소수민족 정권으로 기록되고, 한국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인식된다. 역사 해석에는 차이가 있지만 발해가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만큼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세운 국가다. 속말말갈 세력을 중심으로 여러 말갈 부족과 고구려 유민들이 힘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건국 초기 국호는 진국(震國)이었으며, 이후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되면서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발해의 시작이 지금의 둔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발해 건국 초기 중심지인 동모산 일대를 오늘날 둔화 지역으로 보고 있다. 지금 여행객들이 걷고 있는 이 땅이 발해 역사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이유다.
고분군 입구 안내판 앞에는 학생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인솔 교사가 발해의 건국 과정과 해동성국의 의미를 설명하자 학생들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거나 메모를 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교과서에서 접했던 발해가 이곳에서는 실제 공간으로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발해는 건국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했고 농업과 수공업, 대외무역을 발전시켰다. 전성기에는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 러시아 연해주 일부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아우르며 동북아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발해는 상경용천부와 중경현덕부, 동경용원부를 비롯한 다섯 개의 수도 체계를 운영했다. 이러한 행정체계는 당시 발해의 통치 능력과 국가 규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당나라 사신들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바다 동쪽에 자리한 번영한 나라라는 의미다. 실제로 발해는 일본에 수십 차례 사절단을 파견하며 외교와 교역을 이어갔고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육정산 발해고분군은 이러한 발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이곳에는 수백 기에 이르는 고분이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 계층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고분군 안쪽으로 들어가자 안내 표지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발해 왕실과 관련된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 가운데 정혜공주묘는 발해 연구자들이 중요하게 평가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여정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현장을 찾은 한 관광객은 "발해가 오래전 존재했던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유적을 직접 보니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며 "역사책 속 이야기가 실제 공간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발해는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국가는 사라졌어도 흔적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둔화와 화룡, 훈춘, 영안 일대에 남아 있는 성터와 고분, 각종 유적은 오늘날에도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고분군을 둘러본 뒤 다시 숲길을 따라 내려왔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조용한 산길 풍경은 여느 관광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역사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오늘날 둔화는 평범한 지방 도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발해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한때 새로운 왕국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육정산 발해고분군은 화려한 관광 명소와는 거리가 있지만, 발해의 흔적을 이해하려는 여행자라면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장소였다.
연변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발해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정산 발해고분군만큼 적절한 장소도 드물다. 조용한 숲길과 오래된 봉분은 화려한 유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발해 왕실의 숨결이 남아 있는 정혜공주묘를 찾아 발해인의 삶과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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