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연길의 조선족 문화와 서시장의 활기까지 둘러본 연변 기행은 이제 동북아의 가장 동쪽 끝을 향한다. 훈춘시 방천(防川)에 들어서면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북한 마을과 맞은편 러시아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 오르면 맑은 날에는 멀리 일본해의 푸른 수평선까지 시야가 이어진다. 한 장소에서 세 나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은 흔치 않다. 방천은 단순한 국경 관광지가 아니라 동북아의 역사와 외교, 국제교류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다.
방천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이어진 땅이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됐고, 발해국 시기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일본도(日本道)'의 핵심 거점으로 발전했다. 당시 사신과 상인들은 두만강 하구를 거쳐 일본해로 나아갔고, 방천은 해상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의 관문 가운데 하나로 번성했다. 오늘날에는 한적한 국경 마을처럼 보이지만, 천여 년 전 이곳은 동북아 각국의 사람들이 오가며 문화와 물자가 교류하던 국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방천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청나라가 러시아와 체결한 아이훈조약과 베이징조약으로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상실하면서 중국은 동북지역의 일본해 출해권을 잃었다. 바다가 불과 몇 킬로미터 앞에 있지만 직접 나갈 수 없는 '국경의 끝'이 된 것이다.
1886년 청나라 관리 오대징(吳大澂)은 러시아와 국경을 다시 측량하며 흑정자 일대와 두만강 통항권 일부를 되찾았고, 당시 세운 '토자패(土字牌)' 국경 표석은 지금도 국가급 문화재로 남아 있다. 작은 돌비 하나에는 국경선을 둘러싼 치열한 외교와 영토 수호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방천은 현대에도 한동안 '섬 아닌 섬'으로 남았다. 1957년 두만강 홍수로 양관평 제방이 무너지면서 중국 본토와 연결되는 육로가 끊겼고, 주민들은 한때 소련 영토를 거쳐 이동해야 했다. 이후 1983년 제방 복구가 시작됐고, 1992년 길이 888m, 폭 8m의 국방도로가 완공되면서 방천은 다시 중국과 안정적으로 연결됐다. 최근에는 G331 국경관광도로가 정비되면서 훈춘 시내에서 차량으로 약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대표 관광지이자 동북아 국경관광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방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용호각(龍虎閣) 전망대다. 10층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로 두만강이 굽이치고, 왼편에는 러시아의 숲과 철도, 오른편에는 북한 마을과 농경지가 펼쳐진다. 망원경으로는 국경 너머 생활 풍경까지 살펴볼 수 있으며,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두면 일본해의 푸른 수평선이 이어진다. '한눈에 3국을 본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실감하는 순간이다.
국경 표석인 토자패와 '천하제일제방'으로 불리는 양관평 제방도 꼭 둘러볼 만하다. 방천민속촌에서는 조선족 전통가옥과 민속공연, 향토음식을 체험할 수 있으며, 여름에는 연꽃호수의 붉은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징신습지에서 두루미와 흰꼬리수리 등 희귀 철새를 만날 수 있다. 계절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방천만의 매력이다.
오늘날 방천은 관광지에 머물지 않는다. 중국·러시아·북한 접경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국경 관광과 국제물류, 동북아 경제협력의 상징적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 국제교역의 관문이었던 방천이 새로운 교류의 거점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연변 기행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조선족의 삶과 시장 문화를 만났다면, 여섯 번째 여정인 방천은 연변이 왜 동북아를 잇는 관문으로 불리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세 나라가 마주한 풍경은 단순한 절경을 넘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역사와 외교, 문화가 만나는 공간임을 일깨운다. 방천은 여행지이면서 동시에 동북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창이다. 다음 여정에서는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는 또 다른 국경 도시, 도문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BEST 뉴스
-
[연변 기행 ⑥] 한눈에 3국을 품은 땅, 훈춘 방천… 국경 끝에서 만나는 동북아의 역사
중국 지린성 훈춘시 방천민속촌 입구. 전통 양식의 대형 패루를 중심으로 조선족 문화 체험과 향토음식, 민속공연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내셔널포커스] 연길의 조선족 문화와 서시장의 활기까지 둘러본 연변 기행은 이제 동북아의 가장 동쪽 끝을 향... -
[민국의 그림자 ④] ‘구국’을 내세운 투항…왕징웨이의 선택은 왜 실패했나
[인터내셔널포커스] 1910년 봄,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 섭정왕 자이펑을 겨냥한 폭탄 암살 계획이 적발됐다. 주도자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혁명가 왕징웨이(汪精卫·왕정위)였다. 체포된 그는 죽음을 각오한 듯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옥중에서 남긴 “칼을 끌어 한 번 통쾌하게 죽어 젊은 날의 뜻을 ... -
줄 하나 못 지키면서 관광대국을 말할 수 있나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이곳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첨단 시설이 아니라 '질서'다. 그런데 최근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일부 중국인 이용객 수십 명이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자 차단봉 아래를 통과해 한꺼번에 뛰어가는 장면이 공개됐다. 정상적으로 줄을 서 있던 승객들은 순... -
[연변 기행 ⑦]두만강이 들려주는 역사… 도문에서 만난 국경과 독립운동의 현장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국문(國門) 일대. 북한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국경 관문이 나란히 자리한 중국 대표 국경도시의 모습. [인터내셔널포커스] 연변 기행 여섯 번째 이야기인 훈춘 방천이 '한눈에 3국을 바라보는 동북아의 끝'이었다면, 이번에는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 -
천년의 '해동성국'…훈춘 발해고진, 역사와 야경이 빚어낸 여름 명소
[인터내셔널포커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발해 문화와 현대 관광 콘텐츠가 만난 중국 지린성 국경도시 훈춘의 발해고진이 여름 관광 성수기를 맞아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당나라 양식의 건축미와 다양한 역사문화 체험, 화려한 야간 콘텐츠가 어우러지며 중국 각지뿐 아니라 러시아 등 해외 관광객... -
[연변 기행 ⑧] 홍범도의 함성이 울려 퍼진 봉오동… 화룡에 새겨진 독립전쟁의 기억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봉오동 전투기념비.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봉오동 전투를 기리는 역사 현장이다. [인터내셔널포커스] 도문을 떠나 남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자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던 국경 풍경은 어느새 깊은 산세로 바뀌기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