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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의 그림자 ②] 의형제에서 숙적으로…왕아초와 대립, 10년 추격전의 시작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6.26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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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상하이 뒷골목 갱단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상하이 도끼방(上海斧头帮) 이미지.

[인터내셔널포커스] 1936년 10월 20일. 광시성 우저우의 한 주택에서 총성이 울렸다.


수십 명의 군통(軍統) 특무들에게 포위된 왕아초(王亚樵)는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총탄에 쓰러졌다. 일본군도,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도, 수많은 추격자도 해내지 못한 일을 국민당 정보기관이 해낸 순간이었다.


그러나 왕아초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그를 죽인 남자를 먼저 알아야 한다.


국민당 비밀정보기관 군통의 수장 대립(戴笠).


그는 장제스가 가장 신뢰한 정보책임자였으며 동시에 왕아초를 가장 오랫동안 추적한 인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처음부터 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때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숙적으로 변했다.


1930년대 중국은 군벌과 혁명세력, 일본 제국주의, 국민당 정부가 뒤엉켜 충돌하던 격동의 시대였다. 총성과 폭탄, 음모와 암살이 일상이던 그 시대에 왕아초와 대립의 대결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중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의형제에서 다른 길로


왕아초와 대립은 모두 안후이성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혁명의 열기 속에서 성장했고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며 정치와 권력의 세계를 경험했다.


한때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왕아초는 거리와 노동자 조직,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한 행동가의 길을 걸었다.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안후이 출신 노동자들을 규합해 조직을 만들었고, 훗날 도끼방(斧头帮)으로 불리는 무장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일본군과 친일파, 부패한 정치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중국을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반면 대립은 국민당 체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정보 수집과 조직 관리 능력을 인정받으며 장제스의 신임을 얻었고, 점차 국민당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했다.


1930년대 들어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침략과 공산당 세력, 각지 군벌 세력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장제스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정보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결과 군통이 급성장했다.


군통은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었다. 첩보와 감시, 잠입과 체포, 암살 공작까지 담당하는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전성기에는 중국 사회 곳곳에 군통의 정보망이 뻗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왕아초가 도끼와 폭탄을 선택했다면 대립은 정보망과 비밀조직을 선택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중국의 미래를 바꾸려 했다.


암살대왕을 쫓은 남자


당시 중국 정계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장제스가 낮에 만나는 사람보다 대립이 밤에 만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과장이 섞인 표현이었지만 그만큼 대립의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립조차 쉽게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왕아초였다.


왕아초는 정해진 근거지가 없었다. 상하이에 나타났다가 홍콩으로 사라지고, 홍콩에서 흔적이 끊기면 광시나 푸젠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자 조직과 향우회, 지하조직을 활용한 그의 은신술은 군통 특무들을 번번이 허탕치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상징성이었다.


왕아초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항일을 주장했고 일본군과 친일파를 공격하면서 적지 않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국민당 입장에서는 그를 체포해도 문제가 되고, 제거해도 또 다른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었다.


1935년 11월 1일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중앙회의는 두 사람의 대결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갔다.


그날 회의장에 잠입한 저격범 쑨펑밍은 카메라 속에 숨겨온 권총을 꺼내 왕징웨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자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왕징웨이는 중상을 입었고, 현장에 없던 장제스는 암살을 피했다.


수사 과정에서 왕아초 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격노한 장제스는 대립에게 명령했다.


"왕아초를 반드시 잡아라."


그 순간부터 왕아초 체포는 군통의 최우선 임무가 됐다. 수백 명의 특무와 정보원이 동원됐고, 상하이와 홍콩, 광둥과 광시 일대에서 대대적인 추적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왕아초는 계속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추적당하는 인물이자 가장 잡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결국 의리가 덫이 되다


대립은 왕아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아초가 돈보다 의리를 중시하고, 부하가 어려움에 처하면 외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대립은 총이나 폭탄보다 인간관계를 이용하기로 했다.


군통은 왕아초의 측근 여립규를 체포한 뒤 그의 가족을 회유했다. 생활고를 이유로 왕아초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만든 것이다.


1936년 10월 20일.


왕아초는 아무런 의심 없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한 주택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군통 특무 수십 명이 매복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특무들은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도 왕아초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여러 명의 특무를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곧이어 총성이 울렸고, 왕아초는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향년 47세.


수년 동안 중국 전역을 긴장시켰던 암살대왕의 생애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승리한 듯 보였던 대립 역시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일본 패전 이후 국민당의 핵심 실세가 된 그는 1946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한 사람은 암살대왕으로, 다른 한 사람은 비밀경찰의 황제로 불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격동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왕아초와 대립의 대결은 단순한 추격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폭탄과 정보망, 혁명과 권력, 거리와 국가가 충돌한 민국 시대의 축소판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는 결국 진정한 승자가 없었다.


다음 회에서는 국민당 정보기관 군통을 장악하며 ‘장제스의 그림자’로 불렸던 대립의 삶과 권력의 실체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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