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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의 그림자 ⑥] 상하이 '76호'의 지옥…고문과 숙청, 그리고 내부 권력투쟁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8.0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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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통(軍統) 행동요원이 상하이 조계지에서 친일 특무조직 '76호' 관계자를 겨냥한 비밀 암살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을 재현한 이미지.

1939년 이후 상하이 극사비이로(極司菲爾路) 76호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됐다.


왕징웨이(汪精衛) 정권의 비밀경찰 조직인 '76호 특공총부'는 일본군의 지원 아래 항일세력 색출과 정보전, 정치공작을 담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은 단순한 정보기관을 넘어 고문과 숙청,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변했다. 상하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76호에 끌려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


조직의 중심에는 이사군(李士群)과 정묵촌(丁默邨)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군통(軍統)의 암살조직에 맞서기 위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특무조직을 확대했다. 당시 76호는 병력과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청방(靑幇) 조직까지 끌어들였다. 계운경(季雲卿)의 소개로 악명 높은 행동파 오사보(吳四寶)가 합류했고, 청방 조직원 수백 명이 특무대로 편입되면서 76호는 정보기관과 폭력조직의 성격을 동시에 띠게 됐다.


이들은 행동대를 별도로 편성해 군통과 공산당 지하조직, 항일인사 색출에 나섰다.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군통 요원을 잇달아 체포하면서 조직은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일본 헌병대 역시 점령지 통치를 위해 76호를 적극 활용했고, 정보와 무기, 자금을 지원하며 사실상 정치경찰 역할을 맡겼다.


76호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잔혹한 심문이었다.


회고록과 연구자료에는 호랑이의자, 전기고문, 물고문, 쇠바늘, 고추물 등 다양한 고문이 사용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38가지 고문법'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종류와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76호가 폭력과 강압수사를 일상적으로 사용했고, 많은 피의자가 극심한 고문 끝에 조직을 자백하거나 목숨을 잃었다는 점은 여러 사료가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 같은 심문은 단순히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연락망과 은신처, 자금 흐름을 파악해 항일조직 전체를 와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한 사람의 자백으로 수십 명이 체포되거나 비밀조직이 붕괴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공포는 외부뿐 아니라 조직 내부도 삼켰다.


명목상 최고 책임자는 정묵촌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실권은 이사군에게 집중됐다. 그는 일본 헌병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며 정보망과 행동대를 장악했고, 청향(淸鄕)위원회와 장쑤성 행정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반면 정묵촌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고, 조직 내부에서는 공을 가로채거나 정보를 숨기는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1941년 이후 청향작전이 본격화되면서 76호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명목상 치안 확보였지만 실제로는 항일세력 색출과 주민 통제, 대규모 검거가 이어졌고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전후 역사학계는 이를 일본 점령통치를 뒷받침한 대표적인 정치경찰 활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권력이 커질수록 이사군을 둘러싼 반감도 깊어졌다.


그가 군수물자와 생활필수품 유통,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증언과 연구가 이어졌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그의 독주를 부담스럽게 보기 시작했다.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도 전후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이사군의 정치적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이사군은 일본 헌병 관계자가 마련한 연회에 참석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독살을 경계해 음식을 매우 조심했지만 마지막에 권유받은 쇠고기 요리를 조금 먹은 뒤 귀가했고, 곧 심한 복통과 구토 증세를 보였다. 그는 사흘 뒤 숨졌다.


독살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지만, 제거를 지시한 주체를 둘러싸고는 지금도 논란이 이어진다. 일본군 내부 결정설, 군통과 왕징웨이 정권 내부 세력의 공조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이를 확정할 결정적 사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사군의 죽음 이후 76호는 급속히 약화됐다. 조직은 정치보위국 등으로 개편되며 권한이 축소됐고,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왕징웨이 정권이 붕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76호'라는 이름은 지금도 공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수많은 항일 인사와 학생, 언론인, 금융인, 일반 시민이 이곳에서 체포와 고문을 당했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 역사학계는 76호를 일본 점령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운영된 대표적인 친일 정치경찰 조직으로 평가한다.


76호의 역사는 단순한 정보기관의 흥망이 아니다. 전쟁과 권력이 결합할 때 국가기관이 어떻게 폭력의 도구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조직은 사라졌지만, 법과 제도의 통제를 벗어난 권력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는 지금도 중요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다음 회에서는 76호와 군통의 마지막 비밀공작, 일본 패전 직전 벌어진 암살전과 주요 인물들의 최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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