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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②…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 허훈 기자
  • 입력 2026.09.0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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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연길역을 오가는 시민들의 모습. 한중수교 이후 연변에서는 일자리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 향하는 중국동포가 늘면서 이른바 ‘코리안드림’이 확산했다. [자료사진]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했다.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새롭게 시작된 날이었지만 중국 조선족 사회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랫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한국으로 가는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한국 이야기가 빠르게 퍼졌다.


한국에 다녀온 사람이 가져온 옷과 전자제품이 눈길을 끌었고, 한국에서 몇 년 일하면 중국에서 오랫동안 모아야 할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게 ‘코리안드림’이 시작됐다.


초기 한국행은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친척의 초청을 받거나 산업연수 등의 경로를 찾아야 했다. 한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 한국행 비자를 받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그 틈을 브로커들이 파고들었다.


한국에 보내주겠다며 큰돈을 요구하거나 취업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국행을 위해 빚을 내고 재산을 처분했지만 사기를 당하거나, 어렵게 한국에 들어온 뒤 약속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동포의 한국행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초청 사기와 불법체류 문제가 함께 나타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한국행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제조업과 건설업 등 이른바 3D 업종에서 심각한 인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되면서 중국동포들도 공장과 각종 산업현장으로 들어왔다. 이후 많은 중국동포가 한국의 단순노무 분야를 떠받치는 노동력의 한 축이 됐다. 


그러나 ‘동포’라는 말과 노동현장의 현실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말은 통했지만 제도적으로는 외국인이었다. 체류자격에 따라 일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됐고, 사업장을 마음대로 옮기기도 어려웠다. 체류기간이 끝났지만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불법체류자가 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한국에서 번 돈은 연길과 용정, 화룡을 비롯한 고향으로 보내졌다. 부모의 생활비가 됐고 자녀의 학비가 됐다. 낡은 집을 고치거나 새 아파트를 장만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한국행이 한 가족의 생활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는 결국 연변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변주 통계 등을 인용한 당시 보도에 따르면 1998년부터 10년 동안 연변 조선족이 해외노무를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62억8천만달러에 달했다. 한국 등 해외에서 들어온 돈은 지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돈이 들어온 자리에서 다른 것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한국과 중국의 대도시로 떠나면서 농촌에는 빈집이 늘었다. 부모가 한국에서 일하고 자녀가 조부모와 생활하는 가정도 생겨났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오랫동안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족관계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코리안드림에는 처음부터 두 얼굴이 있었던 셈이다.


누군가에게 한국행은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집을 샀고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 실제로 훗날 사업가나 전문직으로 자리 잡은 중국동포 가운데도 1990년대 한국행에서 삶의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빚과 불법체류, 산업재해와 가족해체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래서 1990년대 중국동포의 한국행을 단순히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말을 했다. 조상의 고향이라고 배웠던 나라에 도착했지만 입국심사대에서는 외국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그들을 ‘동포’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로 바라봤다.


어쩌면 중국동포가 한국에서 처음 마주한 가장 큰 혼란은 가난도, 힘든 노동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뿌리를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이 사회에서 누구인지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1990년대의 코리안드림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한 동네도 변하기 시작했다.


가리봉동.


한때 한국 산업화를 상징했던 노동자들의 동네가 중국동포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어갔다.


다음 회에서는 그곳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③…가리봉동, 중국동포의 첫 번째 서울


※ 이 연재는 정부·공공기관 자료와 당시 언론보도, 연구자료 등 공개된 기록을 토대로 한국과 중국동포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는 사회문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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