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한 권의 책이 한국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연변 출신 조선족 3세 작가 김재국이 쓴 『한국은 없다』였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지 불과 4년.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른바 ‘코리안드림’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특별한 나라였다.
중국 국적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용하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텔레비전과 노래를 통해 접했던 한국은 빠르게 성장한 나라였고, 중국에서 받는 임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도 연변 곳곳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직접 만난 한국은 기대와 달랐다.
김재국의 『한국은 없다』가 당시 주목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의 밝은 모습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목격한 사회문제와 중국동포들이 노동현장에서 겪었던 현실 등을 조선족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한국도 변했고 중국도 변했다.
무엇보다 중국동포들의 삶이 달라졌다.
1990년대 한국을 찾았던 중국동포 가운데 상당수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돈이었다. 공장과 건설현장, 식당과 각종 서비스업에서 일하며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냈다.
한국에서 몇 년 고생하면 연변에 집을 사고 가족의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도 컸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큰돈을 들였지만 약속과 다른 일자리를 소개받거나 사기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체류자격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던 사람도 있었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도 쉽게 신고하지 못했던 노동자들도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중국 조선족의 방문요건을 완화하는 한편 불법입국 알선과 불법고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대책까지 마련했던 사실은 그 시절 중국동포의 한국행이 얼마나 큰 사회현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중국동포의 30년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이 생겼다.
식당을 열고 회사를 만들었다. 자녀를 한국 학교에 보냈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늘어났다. 1990년대에는 돈을 벌어 연변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한국에서 노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 한국으로 온 다음 세대도 성장했다.
그들에게 연변은 부모의 고향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활 터전은 한국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언어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선족.’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중국에 사는 한민족을 의미하는 민족집단의 명칭이고, 누군가에게는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몇몇 강력범죄나 영화와 드라마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와 결합해 부정적인 의미로 소비되기도 했다.
여기에 이 연재가 시작되는 이유가 있다.
중국동포 사회를 미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를 비난하기 위한 연재는 더욱 아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중국동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그 안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하나의 얼굴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을 ‘조선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1996년 김재국은 『한국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직접 만난 한국에 질문을 던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질문의 방향을 한번 바꿔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중국동포를 얼마나 이해하게 됐을까.
그리고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중국동포들은 지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조선족인가.
중국동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한 사람인가.
이 연재의 제목을 「한국에서 조선족은 없다」라고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족이라는 민족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조선족’이라는 하나의 이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1990년대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와 배에 올랐던 사람들에서 출발해 산업현장과 가리봉동·대림동을 거쳐 한국에서 성장한 다음 세대까지 따라가 보려 한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난 30년 동안 중국동포가 어떻게 변했는지만 보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했는지도 함께 보일 것이다.
※ 이 연재는 정부·공공기관 자료와 당시 언론보도, 연구자료 등 공개된 기록을 토대로 한국과 중국동포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는 사회문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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