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에서 인터넷 동영상이 새로운 영상문화로 떠오르던 2010년대 초, 짧은 러닝타임 안에 영화적 실험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주목받은 조선족 감독이 있다.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허룽 출신의 김혁(金赫) 감독이다.
1983년 4월 7일 허룽에서 태어난 김혁은 처음부터 영화를 전공한 영화인은 아니었다. 교사인 아버지와 사업을 하던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시절 음악과 미술을 배웠다. 한류가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하던 시기에는 친구들과 ‘UFOT’라는 댄스팀을 만들어 여러 도시에서 현대무용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이력은 영화감독의 전형적인 길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문대학에서 회계를 공부한 뒤 광고기획을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배터리를 판매하고 광고 관련 일을 하는 등 여러 직업을 경험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인도 영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不可不信缘)’을 본 뒤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 영화사에 보냈지만 별다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후 2006년 한 회사에서 영상 연출을 맡게 되면서 홍보영상과 광고, 온라인 영상 등을 제작했고 현장에서 카메라와 연출을 익혀갔다.
김혁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중국에서 ‘웨이뎬잉(微电影·미니영화)’이 새로운 영상 장르로 부상하던 2011년 전후였다.
‘괄호들(括号们)’, ‘먼 곳은 어디에(远方在哪里)’, 애니메이션 ‘조랑말 여행기(小马旅行记)’, ‘사신(私信)’, ‘미세한 납치(微绑架)’ 등 작품을 잇달아 내놓으며 젊은 영상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김혁 작품의 특징은 하나의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괄호들’에서는 블랙코미디와 액션을 결합했고, ‘조랑말 여행기’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실험했다. ‘사신’과 ‘미세한 납치’에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관계의 이면을 스릴러와 실험적인 영상으로 풀어냈다.
반면 ‘먼 곳은 어디에’와 ‘건강수(健康树)’에서는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드러진다. ‘먼 곳은 어디에’는 꿈을 가진 남매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희생과 가족애를 그렸고, ‘건강수’는 고향을 떠난 젊은이가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화려한 영상기법을 추구하면서도 결국 카메라가 향한 곳은 사람이었던 셈이다.
2013년 선보인 ‘WHO ARE YOU’에서도 이러한 관심은 이어졌다. 베이징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관계와 방황을 따라가면서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청년세대의 사랑과 상처, 자기 인식과 성장을 이야기하면서 김혁이 꾸준히 탐색해온 인간에 대한 관심을 한층 확장한 작품이었다.
그의 영상에는 미술을 배웠던 경험도 녹아 있다. 인물뿐 아니라 공간과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때로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애니메이션에서 스릴러, 액션, 가족극까지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든 것도 새로운 표현방식을 끊임없이 찾으려 했던 그의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김혁이 활동을 본격화한 시기는 중국 영상산업의 변화와도 겹친다. 스마트폰 보급과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의 성장으로 짧은 영상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미니영화는 기존 영화 제작 시스템 밖에 있던 젊은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무대가 됐다.
김혁 역시 이 흐름 속에서 짧은 영상에 영화적인 화면 구성과 실험적인 편집,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했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미니영화제와 영상제에서 수상하거나 후보에 오르면서 이름을 알렸고, 김혁은 중국 미니영화가 성장하던 시기를 대표하는 젊은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허룽에서 태어나 회계와 광고를 공부하고 여러 직업을 거쳐 카메라를 잡은 김혁의 길은 정통 영화 엘리트의 궤적과는 달랐다. 하지만 다양한 삶의 경험은 오히려 그의 작품이 가족과 청년, 인터넷 문화와 사회 현실을 폭넓게 바라보게 만든 자산이 됐다.
중국의 미니영화가 새로운 영상문화로 자리 잡던 시기, 김혁은 짧은 영상도 충분히 영화적인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질문을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조선족 감독 가운데 한 명이다. 장르와 표현방식은 끊임없이 변했지만 그의 카메라가 향한 곳에는 언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BEST 뉴스
-
건보 땐 ‘먹튀’, 연금 땐 ‘꼼수’…또 조선족 때리기인가
국내에서 불과 한 달가량 국민연금에 가입한 뒤 추후납부 제도를 이용해 가입기간 10년을 채우고 노령연금을 받는 중국인 사례가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보도는 최근 외국인의 추납 신청과 연금 수급 사례가 늘고 있다며 “특히 한국계 중국인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 -
하영에게 증조부의 죄까지 물을 것인가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의혹과 관련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논란 이후 관련 자료를 직접 ...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①] 선아오, 연변에서 중국 영화의 중심으로
중국영화 금계장 시상식에서 트로피와 수상증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선아오(申奥) 감독. [사진=1905영화망]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계에서 최근 주목받는 젊은 감독 가운데 한 명인 선아오(申奥). ‘수익인’(受益人)과 ‘고주일척’(孤注一掷)에 이어 ‘난징사진관’(南京照相馆...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②] 장률, 국경을 넘어 세계영화의 ‘지음’을 찾다
중국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张律)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을 이야기할 때 장률(张律)은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그는 마흔을 전후해 뒤늦게 카메라를 잡았지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해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
장동혁의 ‘중국 편이냐’ 질문…안보는 편 가르기가 아니다
▲ 외국 세력의 간첩 활동과 정보 유출, 대공수사를 둘러싼 논란을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이재명 정부를 향해 “중국 편인지 대한민국 국민 편인지 확실하게 밝혀라”고 말했다. 중국의 선거 개입과 간첩 활동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대... -
야스쿠니 향해 고개 숙인 일본 총리…패전 81년, 무엇을 말하나
▲ 일본 총리가 패전 81주년인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방향을 향해 요배하고 자민당 총재 명의로 다마구시료를 봉납하면서 일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사진은 야스쿠니 신사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일본이 패전을 맞은 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