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민국의 그림자 ⑧] 총성 멎자 재판정으로…왕징웨이 정권과 ‘한간’들의 최후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8.23 12:55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인터내셔널퍼커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다.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은 끝났지만 중국에서는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일본 점령기에 침략자와 협력했던 이른바 ‘한간(漢奸)’의 책임을 묻는 작업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난징과 상하이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왕징웨이 정권의 고위 관료와 군인, 특무들이 하나둘 피고인석에 앉았다.


총성과 암살이 지배했던 비밀전쟁의 무대가 이제 법정으로 옮겨간 것이다.


13231.jpg
▲ 일본 패망 이후 중국 국민정부가 왕징웨이 정권과 친일 협력자들에 대한 ‘한간(漢奸)’ 청산에 나선 가운데, 사형 선고를 받은 핵심 인사들의 처형 장면을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승전과 함께 시작된 ‘한간’ 청산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는 이미 살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일부 인사는 충칭 국민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했고, 일본 항복 뒤에는 치안 유지와 도시 접수에 협조하며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침략자와 협력했던 과거를 지우고 전후 정치질서에서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한간을 엄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다.


국민정부는 1945년 11월 ‘한간 사건 처리조례’를 공포하고 이어 ‘한간 징치조례’를 마련했다. 정치·경제·문화 분야의 협력자들은 법원의 심판 대상으로 넘어갔고, 군사 분야 관련자는 별도로 처리됐다. 본격적인 재판은 이듬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시선이 쏠린 것은 왕징웨이 정권의 최고위층이었다.


왕징웨이 사후 정권을 이끌었던 진공박(陳公博)은 일본 패망 뒤 일본으로 달아났지만 결국 중국으로 송환됐다. 그는 법정에서 왕징웨이의 ‘화평운동’을 옹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4월 사형을 선고받은 진공박은 같은 해 6월 처형됐다. 왕징웨이가 1944년 일본에서 사망해 법정에 세울 수 없었던 만큼 그의 재판은 왕징웨이 정권 지도부에 대한 상징적인 심판이기도 했다. 


왕징웨이의 부인 진벽군(陳璧君)도 같은 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외교와 당무의 핵심을 맡았던 저민이(褚民誼)와 왕징웨이의 대일 협상에 깊숙이 관여했던 메이쓰핑(梅思平)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왕징웨이와 함께 친일 정권을 구축했던 핵심 세력이 차례로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사형에서 살아남은 주불해


그러나 전후 청산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 복잡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주불해(周佛海)였다.


왕징웨이 정권의 재정·경제 분야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전쟁 후반 대립(戴笠)의 군통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일본 항복 뒤에는 국민정부의 상하이·항저우 지역 접수와 치안 유지에 협력하면서 한때 국민정부 측 직책까지 맡았다. 


주불해는 이러한 행적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다른 왕징웨이 정권 인사들이 잇따라 재판을 받자 그만 처벌을 피하는 데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결국 그 역시 법정에 섰고 1946년 11월 7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운명은 여기서 다시 갈렸다.


1947년 3월 국민정부는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전쟁 후반 충칭과 접촉하고 일본 항복 뒤 국민정부에 협력한 행적 등이 감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주불해는 결국 처형을 면했지만 1948년 난징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어제의 적이 전쟁 말기에는 정보원이 되고, 그 협력이 다시 재판에서 생사를 가르는 변수가 된 셈이다.


민국 시대 비밀전쟁의 회색지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76호’ 정묵촌도 피하지 못했다


상하이 ‘76호’를 이사군(李士群)과 함께 만든 정묵촌(丁默邨)도 살아서 패전을 맞았다.


이사군은 1943년 독살돼 법정에 서지 못했지만 정묵촌에게는 76호 창설과 친일 특무활동에 가담한 책임이 남아 있었다.


정묵촌 역시 전쟁 후반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지만 법원은 그의 책임을 무겁게 판단했다.


1947년 2월 8일 사형이 선고됐고 그해 7월 5일 형이 집행됐다. 


한때 76호에서 다른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던 인물이 이제 자신이 피고인이 돼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권력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순간이었다.


3만828명 기소…그러나 청산은 완전하지 않았다


전후 심판은 몇몇 거물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1948년 1월 국민정부 사법행정부장이 공개한 집계에 따르면 1947년 말까지 한간 혐의로 3만828명이 기소됐고, 이 가운데 1만5391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도 6152명에 달했다. 


그러나 숫자가 청산의 완결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점령지에서 생존을 위해 행정기관에 몸담은 사람과 적극적으로 침략에 협력한 사람을 어디까지 구분할 것인지부터 쉽지 않았다. 전쟁 말기 국민정부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협력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논란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은 곧바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경쟁에 들어갔다. 국민정부는 점령지역을 신속하게 접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왕징웨이 정권의 군·경 조직과 인력을 일시적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같은 친일 정권에 몸담았어도 누구는 사형을 받고 누구는 감형됐으며, 일부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법과 정치, 전쟁의 현실이 뒤엉킨 전후 청산의 한계였다.


그렇다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왕징웨이 정권과 76호의 핵심 인사들은 일본의 군사적 점령을 기반으로 권력을 얻었고, 그 체제 아래에서 항일세력에 대한 탄압과 정치적 억압이 이뤄졌다. 개인마다 동기와 행적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침략전쟁에 협력한 책임은 전후 재판의 핵심이었다.


왕징웨이는 그 법정에 서지 않았다. 1944년 일본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정권의 주요 인물들은 차례로 피고인석에 섰다. 진공박과 정묵촌은 처형됐고, 진벽군과 주불해는 감옥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총과 고문, 정보와 배신으로 얼룩졌던 민국의 비밀전쟁은 그렇게 판결문과 재판 기록 속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한간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중국에는 다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억눌려 있던 갈등이 폭발했고, 항일전쟁에서 만들어진 정보망과 특무조직도 새로운 전쟁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시대의 ‘한간’을 심판하는 법정 뒤편에서, 또 다른 비밀전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항일전쟁 이후 다시 격돌한 국민당 정보기관과 중국공산당의 지하 정보망,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펼쳐진 첩보전의 실체를 살펴본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 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추천뉴스

  • 中 9월 출입국 규정 강화…외국 국적 취득 뒤 ‘중국 호적 유지’ 괜찮나
  • [광복 81주년]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무엇을 되찾았나
  • 하루 22개 초등학교가 사라진다…중국 교육, 저출산이 바꾸는 미래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민국의 그림자 ⑧] 총성 멎자 재판정으로…왕징웨이 정권과 ‘한간’들의 최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