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도문을 떠나 남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자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던 국경 풍경은 어느새 깊은 산세로 바뀌기 시작했다.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울창한 숲 사이로 계곡물이 흐른다. 지금은 새소리만 들리는 평화로운 산골이지만, 100여 년 전 이곳에는 총성이 메아리쳤다. 수백 명의 독립군이 목숨을 걸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곳, 바로 화룡(和龙) 봉오동(凤梧洞)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는 조선족 이주 역사가 가장 깊게 남아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을 피해 수많은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정착했고, 학교를 세우고 마을을 일구며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화룡은 단순한 이주지가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이 독립을 준비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조직한 거대한 전진기지였다.
1920년 6월, 봉오동 계곡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바꾼 무대가 된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을 계곡 안으로 유인한 뒤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험준한 산세와 계곡을 이용한 치밀한 매복작전은 예상보다 큰 성과를 거뒀고, 일본 정규군은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뒤 패배만 거듭할 것이라 여겼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이었다. 봉오동의 승전 소식은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어 같은 해 10월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지며 한국 독립전쟁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오늘날 봉오동 계곡을 걸으면 당시 독립군이 왜 이곳을 전장으로 선택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좁은 골짜기와 가파른 능선, 사방을 둘러싼 숲은 적을 유인하기에 최적의 지형이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총성과 함성은 사라졌지만, 바람 사이로 당시 독립군의 결연한 의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묵직한 울림이 전해진다.
화룡에는 독립운동의 또 다른 상징인 일송정(日松亭)도 자리하고 있다. 연변을 대표하는 명승지인 일송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다. 이곳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오가던 길목이었으며, 항일운동의 정신적 상징으로 기억되는 장소다. 언덕 위에 서면 끝없이 펼쳐진 벌판과 산줄기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이 길을 걸었을 선열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일송정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울렸던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한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며 민족의 독립을 염원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한국과 중국의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화룡은 봉오동과 일송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시다. 조선족 전통마을에서는 지금도 우리말이 들리고, 논과 밭이 이어진 농촌 풍경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 한민족의 생활문화와 중국 동북지역의 자연이 어우러진 모습은 연변만이 가진 독특한 풍경이다. 최근에는 봉오동 전적지와 독립운동 유적을 중심으로 역사문화 탐방 코스도 꾸준히 조성되며 국내외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변을 여행하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땅에 스며 있는 역사다. 화룡은 관광지가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꿈과 희생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다. 봉오동 계곡의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계곡을 스치는 바람은 100년 전 독립군들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는 듯하다.
연변 기행은 화려한 풍경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다. 이 땅을 걸으며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 그리고 자유를 향한 의지를 다시 만나는 여정이다. 화룡은 그 여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묵묵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연변 기행 ⑨편에서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 용정으로 향한다. 명동촌과 윤동주 생가, 그리고 시인의 저항정신이 깃든 공간을 따라 연변 여행의 마지막 감동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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