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육정산 발해고분군을 둘러보다 보면 많은 방문객들이 한곳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발해 제3대 왕 문왕(대흠무)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이다. 규모만 놓고 보면 화려한 왕릉과는 거리가 있지만,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유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고분군 숲길은 조용했다. 금정대불과 사찰 구역에 비해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고요함이 유적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봉분 주변에는 안내판과 보호시설이 설치돼 있었고, 일부 관광객들은 설명문을 읽으며 발해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혜공주묘의 가치는 무덤 자체보다 그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있다. 1949년 여름, 둔화의 학생들이 육정산 일대에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고분을 발견했고, 이후 발굴 과정에서 묘지석과 석사자, 토기, 금속 장신구 등이 출토됐다. 당시 발굴은 발해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특히 묘지석의 발견은 학계를 놀라게 했다. 모두 725자의 한자로 새겨진 비문에는 정혜공주의 생애와 가계, 장례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는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발해 석각 문자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전까지 발해는 중국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묘지석 발견 이후 발해인 스스로 남긴 기록을 통해 역사를 살필 수 있게 됐다.
정혜공주는 737년경 태어나 777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지에는 남편을 일찍 잃은 뒤 절개를 지키며 살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개인의 삶을 넘어 당시 발해 왕실이 유교적 가치관과 예법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묘지석을 읽다 보면 발해가 단순한 변방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비문의 문체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변려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곳곳에 유교 경전과 역사 고사가 인용돼 있다. 발해 왕실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발해는 건국 이후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행정제도는 물론 교육과 의례, 복식과 장례문화에도 당의 영향이 깊게 스며들었다. 중국 사서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른 이유도 단순히 국력이 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혜공주묘의 구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무덤은 고구려 전통 석실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식 장례 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발해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한다. 고구려의 전통 위에 당 문화를 수용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출토된 암수 한 쌍의 석사자 역시 중요한 유물이다. 형태는 당나라 황릉의 석조 예술과 유사하지만 세부 표현에서는 발해만의 특징이 확인된다. 이는 발해가 외부 문화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해석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묘지석에 기록된 '진릉(珍陵)'이라는 표현이다. 비문에는 정혜공주가 진릉 서쪽 언덕에 묻혔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 무덤은 육정산에 자리하고 있다. 진릉이 문왕의 능을 의미하는지, 당시 묘지 작성 관례에 따른 표현인지를 두고 지금도 학계의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혜공주묘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는 대부분 역사 기록과 고고학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오히려 정혜공주묘의 진정한 가치는 전설보다 실증된 역사에 있다.
고분군을 둘러본 뒤 다시 봉분 앞에 섰다. 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새소리가 들려왔다. 1,200여 년 전 이곳에 묻힌 발해 공주를 떠올리자 역사책 속 인물이 아닌 한 시대를 살았던 실제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가까워지는 듯했다.
정혜공주묘는 단순히 한 왕녀의 무덤이 아니다. 이곳은 발해 왕실의 생활상과 문화 수준,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육정산 발해고분군이 발해의 시작을 보여준다면, 정혜공주묘는 발해인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들려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발해는 사라진 왕국이지만, 정혜공주묘에 남겨진 글자들은 여전히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돌에 새겨진 725자의 기록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연변의 중심 도시 연길로 이동해 조선족 문화와 일상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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